4화 - 버러지도 밟히면 꿈틀거린다 (2)
4화 - 버러지도 밟히면 꿈틀거린다 (2)
사방이 탁 트인 작은 정자.
날은 선선했고, 불어오는 바람은 아주 상쾌했다.
문제는.
“흐음···. 으음. 음···?”
찻잔에 들어있는 푸르스름한 액체.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참으로 이상했다.
“무슨 문제라도···?”
그것만 이상한 게 아니다.
저 당문혜라는 여인의 표정도 이상했다.
마치 초조하게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얼굴이 영 아니올시다였다.
연신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는 것도 그렇고.
“혹시··· 뒷간에 가고 싶은 겁니까?”
“예? 뒷간이요?”
“아니, 뭐 그냥.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아, 아니, 생리 현상이니까.”
아이고야, 사람 죽일 기세로 노려보는 게 딱 봐도 여간내기가 아닌 여인이었다.
여인이란 자고로···. 큼큼.
그러고 보니, ‘여성’이라는 생명체를 본 게 삼 년 전이 마지막이었으니, 매우 생소했다.
심지어 저렇게 예쁜 여자라니.
영문골에서는 두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왜, 왜, 왜 그렇게 보세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니요. 그냥 신기해서. 그건 그렇고, 이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반산화차라는 차에요. 제 것과 똑같은.”
뭐, 굳이 똑같다는 걸 강조하는지 모르겠다.
그래, 푸른 색깔이 똑같은 건 알겠어.
코 막고 마시면 그게 그거일 것 같기는 한데···.
문제는, 코를 찌르는 이 비릿한 향은 결코 저 여인 앞에 놓인 차와 절대로 같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일자무식이라도 그렇지, 차향은 구분할 수 있다고.
“혹여,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다른 차로 내올까요?”
“아아, 그럴 필요는 없고.”
나는 내 잔과 당문혜의 잔을 바꿨다.
“무슨···?”
“여기 파리가 빠져 있길래.”
공교롭게도, 당문혜의 찻잔에 파리 한 마리가 빠져 있었던 것.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파리를 꺼내어 던져버렸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께서 귀가 닳도록 말씀하셨지요. 항상 여인을 배려해야 한다고. 어찌 파리가 빠진 더러운 차를 여인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
그런데 왜 그런 똥 씹은 표정을 하는 건데?
내 호의가 부담스러운가?
내가 비록 지금은 빡빡이라도 머리칼이 좀 자라면 충분히 미남 소리 정도는··· 크흠.
“··· 감사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그렇지. 감사해야지.
흔치 않은 호의에 감동했던 게 틀림없다!
역시 여인은 진심 어린 호의에 약하다니까.
나는 뿌듯함을 느끼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음···?”
맛이 왜 이래?
뭔가 쌉싸름하면서도, 비릿한 게 매우 불쾌했다.
“왜요? 입맛에 안 맞나봐요?”
조심스러운 물음.
“크흠, 그럴 리가. 매우, 매우 입맛에 맞습니다. 아~주 고급스러운 게, 딱 제 취향입니다.”
씨벌.
대체 지체 높으신 분들은 이딴 맛없는 걸 왜 즐기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교양 없이 얼굴을 찡그릴 필요는 없지.
교양하면 또, 나 화진 아니겠는가!
나는 한입에 몽땅 들이켰다.
깔끔하고 멋진 사나이라면 입천장이 다 델 것 같은 뜨거움쯤은 감내해야만 하는 법이다.
역시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진 게, 누가 봐도 내 남자다움에 매료된 모습이 아닌가.
아, 내게 취한다!
“크으으··· 쥑인다.”
속이 아주 니글니글하고 메스꺼운 게 절로 인상을 찌푸리게 했지만, 이 정도쯤이야!
“괘, 괜찮아요?”
“괜찮다니? 뭐가 말입니까?”
침이 좀 흘러나오기는 했다.
뭐, 이쯤이야.
사내답게 입가를 스윽···.
“음?”
침이··· 아니네?
웬 붉은 물이···.
조금 끈적한 느낌도 있고···.
“피?”
뭐야? 왜 피가 나?
음? 계속··· 계속 흘러나오는데?
왜 그런지 전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배가 뜨끈하고 명치 부근에 뭔가 쿡쿡 쑤시는 듯한 느낌이 들기는 했다.
목도 조금 칼칼한 것도 같고?
뭐, 이 정도야.
동굴에 갇혀 있을 때만 해도 피를 흘리는 건 일상다반사였다.
피만 나오면 다행이게? 아주 오장육부가 다 찢어지고, 망가져서 나오는 찌꺼기는 물론이고, 고름에, 신물에, 아주 가끔은 설사 똥 같은 것도 입으로 나왔다.
“뭐, 이 정도야. 사내에겐 별거 아닙니다, 하하.”
뭐, 입가로 핏물이 계속 흘러나오기는 하다만.
별로 개의치는 않았다.
그런데.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겁니까?”
당문혜의 얼굴은 그게 아니었다.
마치, 못 볼 꼴을 본 듯한 저 눈은 뭐란 말인가.
“아, 아니에요. 그보단, 생활에 불편함은 없으신가요?”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서둘러 말을 돌리는 느낌이었다.
기분 탓인가?
어쨌든.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이렇게 정자에 앉아 차향도 맡을 수 있고, 침상에 누워 천장도 바라볼 수 있고. 진수성찬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지금껏 인생사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호사를 누리고 있는데, 이보다 좋을 수 있을까?
크으··· 저 붉은 석양과 타오르는 듯한 저녁노을을 보라.
아주 온 세상이 붉게··· 잠깐.
“지금이··· 저녁 시간이었던 가요?”
“그럴 리가요. 아직 정오도 되지 않았는걸요.”
그렇다면 이 붉게 물든 세상은 뭐란 말인가.
뭐, 그럴 수도 있지.
적무(赤霧)라도 낀 건가.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다. 호의에 대한 괜한 의심은 접어 두는 게 좋다.
“그건 그렇고··· 이제 신세도 질 만큼 졌으니, 떠나려고 합니다만.”
“예? 벌써요?”
뭘 그렇게 화들짝 놀라.
입혀주고, 먹여주고, 재워준 건 정말로 고마운데 이게 생각보다 꽤 부담스럽다.
“벌써라니요. 제가 이곳에 머무른 지 사흘이나 지났습니다. 제가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보답은 나중에 꼭 하겠습니다.”
“······.”
뭔가 일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당문혜의 낯빛이 어두웠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지···?”
“아아, 그게 아니라···.”
미간까지 찌푸리는 게···.
아이고, 역시나.
푹 빠졌구나, 빠졌어.
역시, 대머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내다운 거친 야성미가 중요한 거다.
오래전, 복숭아나무 윗집 대머리 아저씨가 했던 말대로다.
그때는 그저 대머리의 자격지심이라 여겼지만, 역시나 아저씨는 틀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 아저씨도 과거에 무림인이었다던데···.
“크흠, 일단 날씨도 좋은데 잠시 걸을까요?”
나는 용기를 내 물었고, 당문혜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제가 어렸을 땐 말이죠. 그러니까 그게 언제쯤이었더라···.”
나는 주저리주저리 어렸을 때의 일화들을 꺼내놨고, 당문혜는 그저 내 말을 경청했다.
크으··· 역시.
그렇게 나는 당문혜와의 좋은 시간을 보냈고, 그녀는 내게 제안했다.
“내일도 이 시간에 정자에서 저와 함께 차 한 잔 하시겠어요?”
오우, 야. 이런 적극적인 여인이라니.
내 머릿속에서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은··· 크흠, 그래. 예쁜 색시 하나 데리고 가면 어머니가 얼마나 좋아하시겠어.
“너무 좋지요.”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당문혜는 그렇게 돌아섰다.
***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칠 주야가 지났다.
“크흠, 이번에는··· 보라색이네요?”
“호호, 저희 당문에는 진귀한 차가 매우 많아요.”
매일 다른 색깔의 차를 마시는 게 참으로 신기했다.
원래 있는 집 자제들은 이렇게 다양한 다도를 매일 즐기는 건가?
부럽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그런데 그보단, 이 알 수 없는 차들을 마시는 게 무척이나 곤욕이다.
‘끄응, 오늘의 차는 무슨 맛이려나?’
어제는 정상적인 녹차가 나온 줄 알고 기쁘게 마셨다가 뿜어낼 뻔했다.
마치 개구리 진액을 그대로 삼킨 듯한 엿같은 맛이···.
심지어 온몸에 웬 수포가 올라와 간지러워 죽는 줄 알았네.
나는 이번에도 가볍게 입에 찻잔을 가져다 댔다.
“뭘··· 그렇게 보시는 거요?”
매번 차를 마실 때마다 뭔가 기대에 가득 찬 저 눈망울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내가 차를 마시는 모습에 반한 건가?’
그렇다면 이번에도.
꿀꺽- 꿀꺽-!
또다시 차를 한입에 몽땅 털어 넣자, 기대했던 대로 당문혜가 입술을 깨물었다.
“크으···! 맛 좋다!”
···좋기는 개뿔.
역시나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몸에서 반응이 왔다.
역시, 난 차 체질이 아니다.
이번에는 두드러기처럼 온몸에 붉은 반점이 돋는 게 참으로 보기 흉했다.
그러나, 당문혜의 취향은 매우 독특했다.
신기한 듯 내 팔에 난 두드러기를 세심히 관찰하는 게 아닌가.
나는 호탕하게 웃어 재끼며 보란 듯이 팔을 그녀에게 들이 밀었다.
“이야··· 특이 체질인 건가? 아니면, 실험의 결과인가···.”
“예?”
“아, 아니에요, 호호. 근육이 아주 멋져서 저도 모르게 그만···.”
역시, 이 여인은 내게 푹 빠져든 게 확실하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일단은.
“당 소저, 아무래도 저는 영문골에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예? 갑자기요?”
다 이해한다. 급작스럽겠지.
그러나 어쩌겠는가. 일단은 나도 부모님을 뵙기는 해야 한다.
새색시를 들일 준비도 해야 하지 않은가, 으흐흐.
“큼큼, 헤어짐의 아쉬움은 이해하나, 인연이 닿으면 어디에 있든 언젠간 만날 수 있는 법이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개떡 같은 소리··· 아니, 무슨 말씀이신지···?”
에이, 그렇게 아닌 척해도 다 알고 있다고.
저 여인은 내 사내다운 매력에 푹 빠진 게 확실했다. 벌써 칠주야나 나와 함께 차를 마시고 싶어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그래, 머리카락만 없을 뿐이지, 어깨는 아주 동정호를 감쌀 정도에 키도 훌쩍 컸고, 눈코입 다 붙어 있는데 얼마나 멋진가.
심지어 내 튼실한 물건까지 봤으니, 얼마나 달아오르겠는가.
사내의 야성미, 키야··· 정말이지, 내게 취한다, 취해.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제 순정은 오로지 한 곳을 향해 있을 테니!”
“뭔 병신같은···.”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았다.
“아, 병신년(丙申年)이 멀지 않았구나, 하면서 한탄하고 있었어요.”
“하하, 시간이 참으로 빨리 흐르는 것 같습니다. 어쩌다 보니, 저도 곧 약관이고. 크흠, 저희 마을에서는 약관쯤 되면 혼례를 치르는데, 당 소저께서는 올해 어떻게 되시는 지···?”
그래도 나이는 알아야 혼례일을 맞출 수 있지 않겠는가.
딱 봐도 비슷한 연배인 것 같긴 한데.
‘연상도 나쁘진 않지.’
요새는 그게 흠이 아니다.
구닥다리 노친네들이야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는 깨어있는 신세대이니까.
“제가 혼례를 치르든 말든··· 아, 아니. 여인에게 나이를 묻는 건 실례라는 사실을 모르시는지···?”
나는 눈알을 굴렸다.
“아아, 그렇습니까? 하하, 제가 또 실수했군요.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그건 됐고.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그래, 궁금한 게 참으로 많을 거다.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애는 몇을 낳을지, 이름은 뭘로···.
“므흣.”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데, 당문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설마, 벌레를 씹기라도 한 겁니까?”
“아아, 네. 웬 남경충을 씹은 거 같네요.”
아이고야.
안타까워서 이를 어쩌나.
“그래도 다 영양분이니, 너무 상심하지는 마십시오. 제가 다섯 살 때, 그걸 집어 먹고 아주 건강해졌거든요. 괘, 괜찮습니까, 소저? 안색이 좋지 않은데.”
막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도 그렇고. 하긴, 여인에게 이 얼마나 고역일까.
밤나무 아랫집 귀순이 누이가 말했었다. 여인은 자고로 공감해 주는 사내를 좋아한다고.
“크흡···! 남경충이라니!”
“왜··· 울어요?”
나는 어떻게든 억지로 눈물을 쥐어짰다.
여인들은 이럴 때 눈물을 보이는 법이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인이 남경충을 씹어 삼켰다는데, 어찌 눈물이 안 날 수가···!”
이 얼마나 멋진 사내의 자세란 말인가!
그렇게 슬쩍 당문혜의 얼굴을 바라봤을 때, 뭔가 이상했다. 몸도 부들부들 떠는 게 참기 어려운 모양이다.
“크흠, 연정을 느끼는 사내 앞에서 뒷간을 가는 건 흠이 아닙니다. 어서 다녀오···.”
“연정···? 지금 연정이라고···?”
“하하, 부끄러워하실 필요는···.”
그리고.
“이 미친 새끼가 적당히 좀 하라고!!!”
난 울음을 뚝 그쳤다.
사실, 눈물이 나지 않았으니, 메마른 눈가를 슥- 닦았을 뿐이다.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새끼가 진짜 또라이 중에 상 또라이네? 야 이, 새끼야. 내가 미쳤다고 너 같은 새끼랑 놀아나겠냐? 가진 건 쥐뿔도 없는, 하다못해 머리카락도 없는 대머리 새끼가 눈은 또 웬 변태같이 뜨고··· 하아, 역겨워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네.”
이제는 아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는 내 면상에 대고 욕지거리를 뱉고 있었다.
오우, 시원하다, 시원해.
“다 했어?”
“다 해? 뭘 다해? 이 거지 깽깽이 같은 새끼야.”
이로써 확실해졌다.
“후우, 그래. 지난 칠주야, 즐거웠다.”
잠깐이지만, 사랑했다.
“이 썅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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