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아치 -17
17- 양아치
“이것 뿐?”
사내는 안경을 벗었다. 안경테를 빙빙 돌리다가 한쪽을 잘근 씹었다. 입술 끝이 올라가서 웃는 듯이 보인다. 껌을 씹을 때처럼 쩝쩝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나오는 그의 버릇이다. 화면 속에 나타난 사내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이 사내의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이 사내는 화면에서 그를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워낙 움직이지 않습니다.”
“학생회 쪽은?”
“특기할 만한 사항은 없습니다. 축제 준비로 바빠졌으니까요. 축제가 끝난 뒤 바로 선거가 잡혀있으니까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는 없을 겁니다.”
“’레드’ 쪽에 떡밥은 던져봤어?”
“요즘 들어서야 관심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성적 때문에?”
“예. 이번에 학년 수석을 했으니까…….”
“소심한 병신 쪼가리들. 그러니까 우파 골통새끼들이 여전히 찌질한 거야. 얼마나 훌륭한 떡밥인지도 모르고. 그저 돈과 힘이면 다 해결되는 줄 알고 있지.”
“어떻게 할까요?”
“일단 찌그러져 있어. 무리할 필요는 없어. ‘그린’ 쪽은 어때?”
“별 움직임이 없습니다.”
“서요란이 관심을 보였다는데?”
“그 이후 어떤 접촉도 없었습니다.”
사내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각지대를 싫어한다. 그는 그가 ‘그린’이라고 부른 청록회를 생각해 보았다. 이 동아리는 신흥귀족 중심으로 모인 어떤 결사와도 달랐다. 그렇다고 학생회조직과 가깝지도 않았다. 글로벌 최대 NGO이자 EU의 최대 정당으로 성장한 ‘그린피스’의 일맥이라고 했지만, 그는 그 이상의 것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특히 간사를 맡고 있는 서요란이라는 여학생은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학교에서 그녀에게 붙인 별명은 하이엘프(high elf)다. 1학년 때부터 이미 퀸의 칭호를 받은 아이. 그녀를 중심으로 뭉친 동아리가 청록회다. 그리고…… 사내의 입술 끝이 샐쭉 올라갔다.
‘아무리 털어도 나오는 게 없는 아이...... 묘한 조직.’
“박검사 의뢰 건은 어떻게 할까요?”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상대의 질문이 그의 상념을 깼다.
“자료는 아까 보냈어. 그거면 알아서 할 거야. 그리고, 토요일 저녁 수원 만상루에 중국계 간부아이들이 뜰 거라고 전해줘.”
“이제 벌리는 겁니까?”
“늦었지.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이 땅에서 약팔며 깝치는 바퀴새끼들은 모조리 처 묻어버려야 돼. 이 땅에서 살기로 했으면 이 땅의 규칙은 지켜줘야 하는 거잖아.”
“.......”
“실천이 따르지 않는 허약한 정의는 명백한 불의보다 더 큰 죄악을 생산하지. 1%의 억울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99%가 고통을 당하게 하는 것을 방관하라는 게 그 빌어먹을 현대 법철학의 근간이지. 그런데 너 그거 알아?”
“.......”
“정말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범죄는 전체의 2%도 안 돼. 안 믿기지?”
“.......”
“그래서, 범죄는 습관이라는 거야. 담배를 끊는 것보다 더 힘든 거지. 그런 범죄자가 빵에서 뉘우치고 나올 것 같아? 빵에 예수 형님보다 더 위대한 성인들이 선생으로 계시기라도 하나? 그런 환경에서 손 싹 씻고 새 사람 되어서 나올 것 같나?”
“......”
“그래서, 돈 지랄이라는 거야. 국민 세금으로 범죄자를 보호하고, 맹수를 다시 풀어놔 애꿎은 시민들만 힘들게 만드는 거지. 비용대비 효과가 꽝이야. 아니 더욱 민폐를 끼치게 되니까 엄청난 마이너스 개삽질이라고. 경제학적으로도, 효용측면에서도 아무 쓸모 없는 제도 아닌가?”
“.......”
“난, 완전한 격리를 원해. 앞으로도 그럴 거고. 내게는 피해자 인권은 있지만, 가해자 인권 따위는 없을 거다. 알아들었나?”
“예.......”
사내는 통신을 끊었다. 손가락으로 의자 손잡이 언저리를 툭툭 건드렸다. 다리를 쭉 펴고 의자에 누웠다. 양쪽 손잡이에 달린 특수 컨트롤러를 만졌다. 천정을 꽉 채우는 대 화면이 펼쳐졌다. KSS-4. 한국이 보유한 세계 최고 성능급 3대의 수퍼컴퓨터 중 하나. 그가 이놈을 위해 설계한 거대 네트워크가 잡아내는 현란한 정보들이 스크린 섹터마다 영화처럼 펼쳐졌다. 그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만족했을 때의 습관이다. 확장된 자아, 매일마다 진화하는 자아를 보는 것은 섹스만큼이나 성스럽고도 짜릿하다.
그는 거미를 좋아한다. 그는 자신이 거미줄을 생산하는 거미라고 생각한다. 이 코쿤(Cocoon)에서 그는 새로운 거미줄을 개발한다. 끈질기고, 끈적거리며, 강하고, 먹이가 결코 감지할 수 없는.
그가 바라보는 영상은 한 사람의 행적을 다시 재생하고 있었다. 강의실에서. 식당에서. 도서관에서. 병원에서. 전화기록에서. 술자리 모임에서. 시시콜콜한 대화에서. 놈이 접속하는 모든 네트워크에서.
그는 이 사람을 정말, 진심으로 좋아한다. 자신도 더운 피가 흐르는 인간임을 깨우쳐 준 사람. 자신의 거미줄 따위로는 구속할 수 없었던 유일한 자. 그는, 그의 생각과 행동은...... 언제나 그의 창작 의욕을 자극해왔다. 그가 다시 그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음악을 틀었다.
Show must go on!
By Queen
이 학교는 그의 왕국이다. 그가 만든 요새다. 그는 어디에나 있다. 학교에. 아니 이 나라에 어디에도. 그는 오랜만에 콧노래를 불렀다.
“내 선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네. 내 오랜 친구.”
“앞으로 더 주목 받게 될 거야.”
“자네도 더 많은 걸 보여줘. 내가 모르는 게 뭔지 알려줘야 공평하잖아?”
사내, KGB는 잠이 들었다.
오돌토돌 소름이 돋은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차갑게 식은 땀.
그가 잠결에 중얼거렸다.
“어떻게 돌아 온 거냐......”
* * *
“그 정도인가요?” 건이 물었다.
“아주 심각합니다.”
의사가 차트를 한번 더 훑어보더니 건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흐릿하고 초점이 없는 듯한 눈. 무력하고 가라앉은 회색 빛 동공. 전형적인 병자의 눈이다. 건은 의사의 표정에서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을 읽었다.
“자, 보세요.”
의사가 검진 차트를 내밀었다. 스마트패드에 입력된 글자와 숫자가 건의 눈앞에서 슥슥 흘러갔다. 건은 눈을 껌뻑거렸다.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니까, 어디가 문제가 되는 거죠?”
“당뇨, 부정맥, 고지혈, 고혈압, 여기에 간염도 문제가 되고……”
“………”
“여기에 양쪽 신장도 거의 망가져서 독성물질에 대한 필터 기능이 거의 바닥입니다. 방광도 심하게 망가졌군요. 오줌발이 약하죠? 아랫배도 아프고?”
“……”
“왼쪽 폐에 커다란 기종이 보입니다. 만성 폐쇄성 폐질환이 의심됩니다.”
“……”
“심장은 협심증에, 부정맥이 있어서 언제 심장마비가 올지도 모를 상태고.”
“이건 뭐죠?”
“골다공증”
“예?”
“뼈에서 칼슘이 나 빠져나가서 약해진 거죠. 쉽게 이야기하면 뼈가 삭은 겁니다. 폐경기가 지난 갱년기 여성들이 걸리는 병이죠. 남성인 유건씨의 경우로 보면 희귀병을 앓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약한 충격에도 뼈가 부러지죠.”
“……”
“가장 시급한 건 간 기능을 회복해야 하는 겁니다. 간이 거의 망가졌어요. 수치를 보세요. ALT, AST 허용범위에 들어와있는 항목이 하나도 없죠? 경변도 어느 정도 진행되어서 언제 암으로 갈지 모를 정도라고요. 아니, 무슨 젊은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간을 혹사했어요? 술 많이 마셔요?”
“예”
“담배는?”
“얼마 전에 끊었습니다.”
“그 나마 착하네. 여자관계는 어때요?”
“건전하게 살고 있는 편인데요.”
“그럼, 스트레스 많이 쌓일 만한 일을 하나요?”
“학생인데요?”
“끙.....암튼…… 아무튼 나이에 비해 노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있고, 외과적으로는 언제 삭아서 부러질지 모르는 상태, 내과적으로 순환계 균형이 깨진 굉장히 위험한 상태라고 할 수 있어요. 아직 구체적인 소견은 없지만 합병증도 조심해야 합니다. 전형적인 노인 질환이죠.”
“내가 늙었다고요?”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하면 유건 씨는 지금 60대 말 정도의 신체 나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돼요? 게다가 간이 워낙 망가져 있어서 좋은 약도 못써요. 영양제도 과량으로 먹으면 위험합니다. 결론적으로, 아주 집중적이고 장기적인 치료가 필요해요.”
건은 씁쓸한 표정으로 차트와 사진을 찬찬히 살폈다. 초음파, CT와 MRI 검사에 온갖 비싸다는 장비를 써서 몸 구석구석에 대한 데이터를 얻었다. 지난 3개월 동안 최고로 좋다는 대학병원을 뻔질나게 찾은 결과를 지금 보고 있다.
“뇌 쪽은 어떻죠?” 건이 물었다.
“시상하부가 매우 비대해져 있고, 뇌량도 평균보다 훨씬 부피가 큰데, 대뇌 쪽 측두엽에 약간의 출혈이 있던 흔적이 있습니다. 뇌진탕을 당했던 적이 있나요?”
“예”
“좀더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머리에 세 군데 천공 구멍이 있어요. 뇌수술을 한 적이 있었죠?”
“그렇기는 한데…… 그게 문제가 되나요?”
“시상하부는 본능을 지배하는 중추입니다. 측두엽은 언어능력과 기억을 관장하는 중추의 하나라고 할 수 있죠. 상태를 지켜봐야 알겠지만, 유건 씨는 참을성이 없고 매우 충동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기억능력도 현저하게 떨어졌을 가능성도 있고요. 실제로 그런가요?”
“그런 경우가 있긴 하죠.”
의사가 안경을 벗었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강력하게 입원을 권하고 싶습니다. 그것도 당장. 정신과 정밀진단과 치료도 병행해야 할 것이고요.”
건은 병원 밖으로 나왔다. 찬 바람이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았다. 하늘은 무척 맑았다. 빨간 단풍잎, 노란 은행잎이 햇살과 바람 사이에서 더욱 곱고도 선명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한 꺼풀 덮은 세계는 울긋불긋한 혼돈으로 채워졌다. 숨을 천천히 골랐다.
눈을 떴다. 서쪽으로 거꾸러지는 커다란 석양이 눈 속을 가득 채웠다. 눈을 크게 떴다. 까맣고 커다란 눈이 저녁 해로 물들인 것처럼 붉었다.
편의점에서 산 담배를 한대 꺼내 물었다. 불을 붙였다. 구수한 담배연기가 망가진 폐 속으로 부드럽게 들어갔다. 머리가 핑 돌았다. 몇 년 만에 피우는 담배일까? 1년, 2년? 기억이 안 난다. 건의 입 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고등학교 시절이 생각 났다. 건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어차피 100년도 못 살 인생이잖아?’
‘의사 양반, 담배를 끊기는 참 쉬워. 난 지금까지 100번도 넘게 끊어 봤다고……’
'오늘은 담배맛 정말 땡긴다. 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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