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 초인의 목을 벨 상인
제 1장, 17화 - 초인을 제거하다
{그리고 뭐, 인정할 건 인정하지. 아이벤이 지금 당장 죽어버린다면 사망 페널티 이후에 어느 정도 회복을 해서 길드연합에 복수를 할 수도 있다는 것. 지금 이 상황은 어디까지나 너희 욕심 때문이잖아. 그냥 한 번쯤 패배 인정하면 될 것을 그거 한 번 져주지 싫다고.}
샤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의 실수를 되찾고 이성을 되찾으려 하는 건지 아니면 칸이 더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리려는 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칸은 상대방이 조용하다고 가만히 닥쳐서 기다려주는 성격이 아니다.
{한 번 이런 생각도 해보자고. 내가 길드연합에 아이벤을 인질로 잡으면서 쓴 방법과 전술을 아주 자세히 넘겨준다면? 500명의 아델 성 병력도 해낸 전술이야. 수천 명의 길드연합이 과연 그 전술을 재시도하지 못할까?}
{너야말로 허풍 떨고 있는군. 우리가 바보인 줄 알아? 아이벤은 바보고? 이미 당한 잔꾀에 또 당할 것 같아?}
이제 칸의 고백 타임이 시작되었다. 때로는 진실이 거짓보다 효과가 있기 마련이다.
{옛날 옛적에 칸이라는 아이가 살았어요. 이 아이는 심심해서 초인을 잡을 작전을 만들어보았지요.}
{너, 너 뭐냐 갑자기?}
갑자기 어린애처럼 코맹맹이로 귓속말을 보내는 칸의 목소리에 샤를이 황당해하는 답장을 보냈다. 그러나 칸은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이 작전이 참 위험하고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이, 만약 실패하면 어쩌지? 정말 어쩌죠? 그래도 한 번 해봐야죠. 해봐야 성공이 되는지 안 되는지 알 수 있잖아요.}
샤를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투야 어쨌건 이야기의 내용은 무시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일단 어제 한 번 해보니 성공을 했네요? 그럼 이 작전은 더 이상 위험하거나 불안한 작전이 아니에요. 왜일까… 요. 대답을 맞출 기회는 30초 안입니다.}
이번에는 샤를은 말을 하지 않는 게 아닌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칸은 20초 정도 시간이 흐르자 다시 귓속말을 보냈다. 그의 입장에서는 1초, 2초, 10초, 30초로 간추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오래 기다려준 셈이다.
{화살, 궁수, 투석기, 독과 화염과 기병대… 이 작전은 물량전입니다. 즉 수적 열세가 드러난다면 알아도 못 막는 인해전술이라 이거죠.}
블랙 스콜피언 길드보다 병력이 뒤떨어졌던 아델 성의 병력도 해낸 전술이다. 수천 명이 모인 길드연합이 단합해 화살을 쏘고 아이벤을 포위한다면? 알아도 당할 수밖에 없다. 인해전술에 대응해 다른 전술을 구사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래, 초인 한 번 죽어도 무사하다 치지. 두 번 죽이고 세 번 죽이고 네 번 죽이고 다섯 번 죽이고 여섯 번 죽이고 일곱 번 죽이고 여덟 번 죽이…….}
{그래서 원하는 게 뭐냐.}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샤를이 이윽고 답장을 전송했다. 그러나 답은 이미 오래 전에 나와있었다.
{거 참 사람이 이해를 못하시네. 아이벤 불러오라고 짜샤.}
원래 전쟁 법도를 집어치운 전술은 개념과 매너를 집어치운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법이다.
칸이 다시 감옥으로 돌아왔을 때, 샤를과 이야기가 되었는지 로그아웃했던 아이벤이 돌아와 있었다. 아이벤은 자포자기라도 한 듯 감옥의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초인인 그로서는 로그아웃조차도 못하게 하는 사람 아마 처음 봤을 것이다.
“거 참 인질이면 곱게 갇히셔야죠. 아무리 똥이 마려우셔도 그렇지 간수한테 말도 안 하고 로그아웃 하는 그 버르장머리는 뭡니까.”
“닥치고 이번에는 또 뭘 어쩌겠다고. 또 칼질이라도 하게? 그래, 해봐라. 모기한테 물려도 너보다는 덜 아프겠다.”
이제는 로그아웃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탓인지 아이벤은 배 째라는 식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자신의 몸이 얼마나 귀한 몸인지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칸은 피식 웃으며 단도를 다시 품안에 집어넣었다. 애초에 단도는 겁 좀 주려는 의도에서였다.
애초에 진정한 목적은 찔끔찔끔 찔러서 피 몇 방울 받아내자는 정도가 아니었다.
“어디 보자.”
칸은 인벤토리를 열어 안에서 기다란 태도(太刀) 한 자루를 꺼냈다. 엠프티 스톤을 깎아 만든 단도와는 달리 날이 시퍼렇게 서있어 보기만 해도 오싹해지는 정도의 무기였다. 그 모습에 아이벤의 눈이 잠시 움찔거렸다.
하퍼 온라인에는 체력이라는 개념은 있을지언정 생명력이라는 개념은 비교적 애매한 편이다. 원체 현실성을 추구하다 보니 레벨이 높다고 아무리 맞아도 안 죽는다는 설정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레벨이 더 높아지고 실력이 더 뛰어나지면 공격을 더 잘 막고 피할 수 있다. 인내력이나 맷집이 강해질 수도 있고 정말 방법만 제대로 찾는다면 상처를 줄이고 몸이 받는 데미지를 줄일 수는 있다.
“겁먹었냐?”
칸이 씨익 웃자 아이벤이 자존심이 당한 듯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칸은 확신했다. 아이벤은 겁을 먹었다고. 현실성을 추구하는 하퍼 온라인에서는 강한 인간이든 약한 인간이든 다 똑같은 몸이다. 머리 자르면 죽고 심장 뚫리면 죽고 피 쪽쪽 빨아주면 죽는다.
초인도 인간이다.
“날 죽이면 샤를이 가만있을 것 같아? 길드 전체는 가만히 있고? 다들 혈안이 되어서 너를 찾을 거다. 찾을 때마다 죽이고 또 죽여서 게임을 접게 만들어줄 거라고! 길드연합한테는 당하더라도 아델 성은 반드시 개 한 마리 안 남기고 없애버릴 거다!”
“할 말 있으니까 사내방송은 끕시다. 거 참 매너도 없게.”
칸의 말은 엄밀히 따지면 협박이 아니지만, 위협을 느낀 아이벤은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블랙 스콜피언 길드의 초인, 유저들의 추앙을 받는 절대자가 남의 눈치를 보고 있는 셈이다.
“초인 제압 전술이 성공하느냐. 이건 내 첫 목적이야. 초인을 연구할 수 있는가. 이건 내 두 번째 목적이지. 내 세 번째 목적은 이거야. 초인을 죽인다면 과연 어떤 혜택이 돌아올까?”
아이벤의 이마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칸의 발언은 아이벤의 운명을 시사하고 있다. 애초에 무엇을 어떻게 하든 결국 죽을 운명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확인사살. 그러나 아이벤은 로그아웃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경험해본 대로라면 칸은 어떻게든 그를 다시 로그인시키려 들 테다.
“초인은 깨달은 존재지. 초인을 죽인다면 깨달은 존재를 넘어서는 깨달음을 지닌 자가 되는 걸까? 아니면 단순한 명성과 혜택? 초인을 죽인 자라는 칭호? 아니면 능력치 증가 같은 실질적이고 신체적인 이득이 있을까?”
칸의 질문은 아이벤도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 역시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지금껏 초인을 죽인 자는 아무도 없었고, 그런 만큼 그에 대한 혜택은 밝혀진 바가 없다. 그러고 보면 초인이 된 이후로는 사고로든 사냥 도중이든 죽어본 적이 없다.
하퍼 온라인은 현실성을 추구하는 세계, 죽을 일이 없다 보니 아이벤도 지니고 있던 그 호기심을 어느 새부터인가 파묻히고 말았다.
“흠. 확실히 궁금하긴 하군. 하지만 대단한 이득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지금껏 아이벤을 무시하던 칸이 처음으로 의견을 물어보았다. 그에 고무된 아이벤은 자신의 추리를 이야기해보았다. 물론 죽음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희망도 어느 정도는 섞였다.
“네 말대로 초인은 깨달은 존재다. 하지만 넌 초인을 정당한 대결이 아닌 다수를 이용한 전술로서 인질로 잡았어. 초인이라는 바위 앞에 서서 누가 더 단단한지 부딪쳐보지 않고 아예 보자기를 덮었단 말이다. 바위가 바위를 이겨야 진정 강한 건지 보가 바위를 이기는 건 당연한 거야.”
나름 논리와 신빙성이 깃든 아이벤의 답변이었다. 그러나 잘 들어보면 어차피 얻는 바가 없으니 굳이 죽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호소하는 아이벤의 마지막 설득이기도 하다.
그리고 논리는 더 나은 논리에 깨지는 법이다.
“껄껄. 대검만 휘두르는 줄 알았던 초인이 머리 깨나 쓰셨습니다 그려.”
늙은이처럼 웃음을 터뜨리는 칸의 변화에 아이벤의 표정이 불안해졌다.
“만약 초인이 아닌 사람이 초인을 죽이려고 했다면 분명 정당한 대결이 필요했을 거야. 하지만 만약 초인이 다른 초인을 죽인다면? 그렇다면 정당한 대결이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이 초인이 저 초인보다는 나은 깨달음을 지니고 있다… 라는 결론이 나오지 않을까?”
예상하지 못한 칸의 논리에 아이벤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네가 초인이라는 가정 하에서나 가능한 말이야.”
“누가 그러든? 내가 초인 아니라고.”
입가에 미소를 그리고 있던 아이벤의 얼굴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그는 독에 중독되어 거동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몸을 이끌고 칸으로부터 가능한 멀리 떨어졌다. 지금껏 칸을 겪어보았기에, 아이벤은 그가 하는 말을 하나라도 허투루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9명의 초인들 중 1명의 공식을 제외한, 아직까지 신분과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초인 유저가 있지 않은가.
“로그아웃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더 이상 여긴 로그아웃 불가 지대거든.”
“뭐, 뭐야?”
아이벤은 죽지 않기 위해 로그아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블랙 스콜피언 길드와 아델 성이 서로 전투 중일 때에는 로그아웃을 할 수 없다. 전쟁 도중의 페널티로 사망 효과가 날 뿐만 아니라 최소한 안전지대에서 3분은 대기하고 있어야 로그아웃이 가능해진다.
“아, 내가 이야기 안 해줬던가? 지금 밖에 전투 중인 거.”
칸은 피식 웃으며 크게 태도를 휘둘렀다.
다시 말하자면, 하퍼 온라인에는 머리, 심장 등과 같이 즉사를 당하는 공격 위치가 있다.
[초인을 제거하였습니다!]
[아델 성 전쟁 도중 초인인 아이벤을 인질로 잡음과 동시에 처단한 전술을 인정받았습니다. 명성이 2,200 증가했습니다.]
[전술가 칭호를 획득했습니다.]
[초인 도전가 칭호를 획득했습니다.]
[스킬 목록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레벨이 51이 되었습니다.]
[레벨이 52가 되었습니다.]
[레벨이 53이 되었습니다.]
- 작가의말
이야 이제야 죽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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