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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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작품등록일 :
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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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따뜻하고 매정한(4)

DUMMY

궁금한 것이 있다면 물어보는 게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해결방법이었다.


혼자 추측하고 고민해봐야 알아낼 수 있는 것엔 한계가 있고 모르는 것은 결국 모르는 거였다.


가끔은 물어보기 힘든 상황이나 사이라는 것도 있기는 하지만...


웬만하면, 물어보는 것이, 현명한, 처사였다.


내가 막 입을 벌렸을 때였다.


"내가 안 그랬다니까..."


야우라는 다짜고짜 그랬다.


그 서운함 가득한 말투와 침울한 얼굴에 나는 내가 목소리를 낸 적이 있던가, 잠시 생각해보게 되었으나 역시 그런 적 없었다.


"뭘."


나는 차분하고 차근하게 물었다. 차갑게 굴지 않고 차차 알아가 차질 없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 또한 차암 용병의 덕목이리라.


"내가 안 그랬다고오!"


"그러니까 뭘!"


탓을 하든, 칭찬을 하든 뭔지를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럼에도 야우라는 자기가 한 짓을 끝끝내 숨기려고 했다.


불안한 게 있으니까 그런 거고, 켕기는 게 있으니까 그러는 거다.


뭘까.


야우라가 여기에 왔다고 해서 내가 무어라 할 이유가 있던가.

평소의 얘라면 만나서 반갑다고 깔깔대기나 했을 텐데.


"저기... 아는 사이야?"


프란크가 내 팔뚝을 두드리고선 말했다.


"예? 아 뭐... 아는데 모르는 사람이에요."


나는 적당히 선을 그었다.


"아는데 모르는 사이가 뭐야?"


"가게로 따지면, 자주 오는 건 아닌데 처음 오는 것도 아닌, 단골이 될까말까한 사이?"


이해가 되는 건지 마는 건지 프란크는 알겠다는 것처럼, 오오, 하면서도 모르겠다는 것처럼 눈썹을 구겼다.


"뭐야아. 왜 그런 식으로 말해?"


눈치껏이라는 게 없는지 야우라는 손등으로 내 팔뚝을 툭툭 쳐댔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적당히 모르는 척좀 해주면 안 될까?"


나는 적당히 팔을 휘저어 그걸 쳐냈다.


"에잉? 그래서 안다는 거야, 모른다는 거야?"


그 와중에 프란크는 또 의문의 수렁에 빠져 있었다.


"아, 뭐, 그냥 그러려니 해요."


이젠 분명히 말해주는 것도 귀찮은지라 나는 대충 넘겨버렸다.


야우라가 여기에 온 것은 그다지 신기하지 않았다.

신기하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하긴 하지만 그래도 깜짝 놀라 당황하는 것보다는 덤덤한 편이 낫다.


"이래 보여도 괜찮은 자리라고 생각해서 여기서 모시고 있습니다만."


가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새로 사람들을 데려올 때 한 명만 잡지는 않았을 테니 야우라 외에도 다른 사람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위층에서 웨벤과 함께 있던 가이드가 조급하게 내려가는 걸 보면 야우라 혼자만 왔을 것이라 여기는 게 더 이상했다.


어떤 사람일지는 몰라도 마중을 나갈 정도라면 뭔가 있는 사람이겠지.


미크로셀에서 유명한 명사라던가, 엄청난 부자라던가.


그 뻔뻔스럽던 가이드가 당혹스러워했다.

누군지 얼굴이나 한 번 볼까.


나는 등을 쭉 펴고 고개를 내밀어 가이드가 있는 곳을 보았다.

새 신도가 궁금해 모여든 사람들의 머리통을 피해 이리저리 움직여본 결과, 기대의 신인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익숙한 은발을 발견한 순간, 나는 게가 눈 감추듯 몸을 수그렸다.

목, 등, 허리, 무릎, 발목까지 한꺼번에 그리고 동시에 수그린 탓에 몸 안에 들어있는 공기가 전부 빠져나간 것 같았다.


거꾸로 들이키는 숨에서 쇳소리가 나왔다.


나는 눈이 맵도록 기침을 하면서도 옆에 서있는 야우라의 팔을 잡아끌어 당겨 옆에 앉혔다.


"너허엨 뭔 짓을 케헥... 한 거얔...!"


사람이 급하니까 기침을 하면서도 말이 나왔다.


"내가 그런 거 아니라니까...!"


저, 저, 저.

저놈의 내가 그런 거 아니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에반젤린을 데려온 것이 자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그것부터 말해야지.


"그럼 에반젤린이 여길 왜 왔는데?"


행여 들릴라, 나는 목소리까지 죽여 가며 책하듯 야우라를 더 당겼다.


"네가 요새 에반젤린을 따돌리니까 그렇지!"


야우라는 이 모든 게 내 탓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 참 입으로 방귀 뀌는 소리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언제 따돌렸다고 그래?"


따지고 보면 늘 혼자 다닌 건 나였으니 따돌림을 당했다 하더라도 내가 당한 거였다.

얼마나 괴롭힘이 심했으면 사람이 사람을 피해 다니겠느냐고 따져 묻고 싶은 건 나다.


"네가 맨날 에반젤린 보면 도망가고 이상한 사람이랑만 노니까 그렇지."


"내가 무슨 이상한 사람이랑 놀았다는 거야."


"이상한 사람이랑 놀았지. 그 우락부락, 각진 얼굴."


"너도 아는 사람이잖아!"


지 입으로 각진 얼굴이라 해놓고서 무슨 이상한 사람이라는 거야.


"그런가? 아니야. 몰라."


"봤잖아 저번에!"


"아! 몰라! 내가 한 번 본 사람 다 기억해야 돼? 그리고 그게 무슨 상관인데? 너 오늘도 에반젤린이 잠깐 기다리라고 한 사이에 가버렸다며."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은 없지만.

야우라가 모든 사람을 다 기억할 필요도 없었고 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에반젤린을 피해 우라신교의 목장에 온 것과 관계가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아니.

그러니까 일부러 피한 게 아니라...


어쩐지 의도하지도 않은 함정에 말려든 기분이었다.


"그래서, 에반젤린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아?"


"아니. 아직 모르는데?"


야우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모른다라.

그건 다행이었다. 왜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다행이었다. 지금은 에반젤린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럼 너도 나 봤다고 말하지마."


나는 우선 야우라의 입단속부터 하고 싶었다.

그러자 그 애는 알았다고 답해주는 게 아니라 비식 웃었다.


정말이지...


"하지 말라고."


한 번 더 당부하자 그 애는 그제야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말없이.


"대답은."


"알았어, 알았어. 말 안 하면 되잖아. 그치?"


세 번이나 말하고 나서야 야우라의 확답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거 하나 부탁하는 데도 벌써 힘이 빠진다.


왜 우리 편이 왔는데 난이도가 더 올라가냐고.

이건 뭔가 잘못된 거 아니냐고.

어디에 따져야 되는 거냐고.


"그래서, 여긴 대체 어떻게 온 거야?"


따질 수 없는 일일랑 집어치워 두고 나는 야우라에게 그 쪽을 물었다.


에반젤린은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이쪽 녀석들이 제대로 된 교단이 아니라는 건 방금 전에 확실히 알았으니 그 모습으로 여기 있는 건 지나치게 부자연스러웠다.

왠지 걱정될 정도로.


"그게... 실은..."


야우라는 매우 조심스럽게 그 이야기를 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내 뒤를 밟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같은 전력이 있는 나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뒤를 쫓아서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고, 내가 대체 어딜 가는 걸까 하는 호기심에 펍까지 따라온 적이 있단다.


거기서 난 알아챘다.

얘네가 오늘 갑자기 충동적으로 날 쫓아온 게 아니구나. 하고 말이다.


"원래 에반젤린이 거기까지만 가자고 했는데. 오늘 너한테 바람 맞고는 나한테 부탁까지 해서..."


그즈음 난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언제 무슨 약속을 했다고 바람을 맞혀."


"기다리겠다고 했다며."


야우라는, 너 참 뻔뻔하구나, 하는 눈으로 날 깔보았다.


"아니... 아..."


더 말해봐야 소용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다음. 다음다음.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자 더 가관이었다.


내가 수상한 펍에 몇 번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아두었던 에반젤린은 오늘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안에 진입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제의 의복은 펍 같은 곳에선 너무 눈에 띄고 또 사람들이 불편해 할 수 있으니 야우라 녀석을 써먹었다가 정체불명의 사람들에게 좋은 말씀 나누자는 권유를 받고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가이드의 부하인 파니아는 에반젤린을 데리고 오려던 것이 아니라 야우라를 데리고 오려 했다가 뜻하지 않게 실수하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펍과 사제라니 누가 예상이나 했을라고.


운도 지지리 없지.


이건 양쪽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었다.

플라나 교단에서 손대기 전에 이 사이비들이 어떤 마법사와 관련이 있는지 알아내야하는 나랑, 진짜 교인에게 가방 뒤집듯 모조리 보여주게 생긴 성녀의 측근들 모두에게.


아니, 가만 보면 내 입장에선 더 쉬워진 것일 수도 있었다.

비록 에반젤린에게 들키면 안 되는 건 마찬가지라고 해도 난 내 몸 하나만 간수 잘 하면 되는데 반해, 이쪽 녀석들은 뭐라도 들춰질까 조마조마 해가며 에반젤린을 쫓아다니는 형국이었다.


지금만 해도 무슨 보좌관처럼 따라다니고 있지 않는가.

에반젤린이 맹렬하게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시선이 바쁜 것은 큰 불안요소이나 그 애도 마음대로 행동하진 못 할 터였다.


나는 프란크의 뒤편에 숨어 찬 숨을 뱉었다.


이젠 야우라도 가야할 때였다. 이 교단에 오고나면 항상 하는 일, 성녀를 만나러 가야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야우라도 그 성녀라는 사람 이야기가 궁금해서 듣다가, 얘가 왜 안 나오나 궁금해져 찾아온 에반젤린과 한 묶음으로 오게 된 거였으니 성녀를 보는 것은 야우라의 성원을 푸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야우라에게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고 가능한한 빨리 돌아가라 다시 당부한 뒤 그 애를 에반젤린 쪽에 돌려보냈다.


그러고 나서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엿들은 대화로 짐작해보자면 우라신교는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우라신교의 돈벌이 방법과 성녀의 진위, 그리고 마법사의 개입여부였다.

우라신교가 거짓이라는 건 처음부터 다들 알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돈을 어떻게 버는지는 대충 알았다. 이제 남은 건 성녀뿐인데 그 사람이 가짜여도 상관없다는 게 참 우스웠다.


상관없다고?

아니 그건 아니겠지.

그럼 상관있나?

그것도 아닌데.


왜 세상일은 항상 이렇게 복잡하게만 흘러가는 걸까.

크면 알게 된다더니 얼마나 더 커야한다는 거야.


"프란크."


쓰잘데기 없는 생각은 잠시 치워두고 프란크를 불렀다.

그 사람은 뭔가의 잔향을 느끼듯 멍한 얼굴로 바보 같이 서있었다.


"어? 왜?"


저 놀라는 꼴을 봐라.

나는 다른 말 하지 않고 원래 하려던 이야기부터 꺼냈다.


"하루 종일 따뜻하게 지내려면 목탄석이 얼마나 들어가요?"


"어... 그건 방의 크기가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한 칸짜리 방이라 해도 아마..."


이런 이치와 순서를 따지는 구체적인 지식이라니, 나는 프란크가 목탄석을 다루는 상인이라는 게 새삼 와닿았다.


정말 모르겠어서 물어보는 게 아니다.


"정확히는 몰라도 엄청 많이 필요하지."


그래. 평범한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단지 그 대답이 듣고 싶어서 물은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건 갑자기 왜 물어보냐?"


다시 생각해봐도 이상한 질문이다 싶은지 프란크는 의아해했다. 하긴, 좀 어린애 같은 질문이기도 하지 않은가.


"슬슬 추워질 때잖아요."


나는 별 다른 이유는 없다는 의미로 그렇게 말했다.


"필요하면 말해. 싸게 줄게. 성녀님의 이름으로."


프란츠는 뭐가 대단한 자비라도 베푸는 양, 자기 이마에 손가락을 짚는 기묘한 손짓까지 해보였다.


하하.

나는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 맞겠지.


"많이는 못 깎아주니까 그렇게 기대하지는 말고. 나도 요즘 가계가 빠듯해."


"빠듯하면 작작좀 사요. 무슨 귀부인이야?"


나는 알게 모르게 치렁거리고들 있는 프란크의 치장품에 대고 말했다.

팔찌에, 목걸이, 브로치에. 아마 집에도 더 있을 것이다.

저만큼이나 달고 다니면 영혼이 맑아지다 못해 희미해지는 거 아닐까.


"하아. 나도 도매 대금이 좀 걱정되긴 하는데. 그래도 이게 하나라도 빼먹으면 말짱 수포로 돌아갈 거 같기도 하고. 또 사람은 결국 죽기 마련이라는데 사후를 편히 보내기 위한 반석이라고 생각하면 괜찮잖아?"


저렇게 말하는데 누가 참견할 수 있을까.


"누가 그러는데요, 사람은 맛있는 걸 먹기 위해 태어난 거래요."


나는 농담처럼 그렇게 말했다.


"어... 그럼 사람이 너무 개미핥기 같잖아."


프란크는 개미핥기처럼은 되고 싶지 않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개미핥기는 개미를 좋아해서 개미만 먹고 산단다.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사는 거니까 개미핥기 본인은 괜찮지 않겠어요?"


본'인'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 이후로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요즘 들어 정말 힘든 것인지 프란크는 세상의 이치와 삶에 대해 논했다.

보면 꼭 힘든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많이 하더라.


"그렇게 고민이 되면 성녀님한테 여쭤보지 그래요?"


프란츠가 스스로의 생각에 좀처럼 결론을 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할 때 나는 넌지시 말을 꺼냈다.


"혹시 실례가 되지는 않을까?"


우리 열혈신자님은 혹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뭐 어때요. 그렇게 성의를 많이 보였는데. 그리고 새 신도들도 지금 성녀님을 보고 있으니까 거기 끼는 것 정도야 쉬운 거잖아요. 그러지말고 갔다와요. 나는 여기서... 뭐... 뭐라도 하고 있을 테니까."


"그래. 꼭 답을 구해서 올게 레이크."


꼭 누구 닮은 소리를 하네.

어쨌거나 나는 그렇게 프란츠를 보냈다.

보내야 했다.

지금 같은 기회는 얼마 없었다.


나는 야우라를 믿는다.

야우라라면 분명히 지키라고 한 비밀을 지켜줄 것이고 눈치껏 재량껏 행동할 것이다.

그게 가끔 틀어지면 변명이 많은 거지 고의로 그러지는 않는다.


그게 중요한 것이다. 가이드든 웨벤이든 절대 야우라에게서 눈을 땔 수 없다. 그 애에겐 그런 마력이 있었다.

찻잔 선반 위를 지나는 고양이와 같은 마력.


이목이 쏠려 있을 때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전부 알아봐야 했다.

내가 여기에 온 건, 다른 게 아니라 마법사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니까.


가능하면 위층에 한 번 더 올라가보고 싶었다. 거기서 유리병을 하나 챙기긴 했지만 그걸론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나는 괜히 계단 근처에 가서 얼쩡거려보았다.

실수인 척 올라가 볼까 말까.

아니면 아까처럼 나무를 타야 했다. 나무 두 번 타는 거야 힘든 일도 아니지만 그 작은 창고는 문이 잠겨있어서 다른 곳으로 가볼 순 없다는 게 문제다.


혹시 감시하는 사람이 있을까 조바심이 들어서였다. 신도들 하나하나의 얼굴을 살피기도 했다.


저마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 기도를 하는 사람, 꾸벅꾸벅 조는 사람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 그 중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가만히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것이다.

구불구불한 갈색머리가 모자 안쪽에서 흘러내려 보이는 스무 살 가량의 여자 같았다.


눈이 마주친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건 찾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 여자는 곧장 내 쪽으로 다가왔다.


도망가야 하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빠른 걸음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정말 물러났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았다.


내가 왜 도망가.

도망가야 한다면 저 사람이 저렇게 조용히 올 리도 없었고 도망간다한들 저 쪽에서 도움을 청하면 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 번은 붙들리기 마련이었다.


정체불명의 여자는 내게 와서 아는 체를 하지는 않았다.

다만 아주 조곤조곤하고 침착하게 말했다.


"레이크 형제님이시죠?"


뭐, 그렇게 물으니 나는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네..."


"성녀님이 부르세요."


성녀가 부른다고?

그건 전혀 뜻밖의 얘기였다.

근데 왜.


"그게 그렇게 무섭게 와서 해야 할 말이에요?"


"성녀님이 당신을 부른 건 비밀이니까요."


"아, 그래요?"


그건 또 몰랐지.


"그래서요? 지금 가면 돼요?"


"아뇨. 헛간은 안 돼요. 거기 말고 다른 곳이 있어요."




대체 왜-


성녀는 날 이런 후미진 곳에 부른 걸까.

여자가 알려준 곳은 본체에서 좀 떨어진 곳, 말하자면 헛간과 비슷한 별체였다.


별체라고는 해도 지붕이 없어질 정도로 방치된지라 용도가 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물을 저장해놓는 곳이 아닐까 싶다. 여긴 썩은 통이 많았고 바닥 부근에 짧은 주둥이를 달아 놓은 커다란 들통도 두개나 있었다.


게다가 옆에 널따란 우물도 있었으니 웬만하면 맞을 것이다.

사실 그 우물도 우물이라 부르기 힘들었다. 돌 벽이 쓰러져 그냥 보면 맨땅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생겼다.

아래에는 깊고 깊은 어둠이 보인다.


이런 곳에서 기다리라니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올 줄 알았다느니 하며 자신이 가짜임을 밝혀보라고 스스로 으름장을 놓는 것부터가 이해가 안 됐다.


웨벤과 가이드의 대화가 연극 놀이가 아니었다면 성녀는 가짜일 텐데, 성녀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리고 웨벤은 어째서 그런 성녀에게 쩔쩔매는 걸까.


것보다 그 성녀.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였던가?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나는 등을 떠미는 힘을 느꼈다.


작가의말

세계관에 대해서는 필요한만큼 작중 내용에 녹여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특별히 언급되지 않는다면 이쪽 세계 사람들도 잘 모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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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40. 연꽃이 자라는 곳(6) 19.08.15 94 5 18쪽
231 40. 연꽃이 자라는 곳(5) 19.08.13 83 5 26쪽
230 40. 연꽃이 자라는 곳(4) +2 19.08.07 96 5 18쪽
229 40. 연꽃이 자라는 곳(3) 19.08.03 92 4 17쪽
228 40. 연꽃이 자라는 곳(2) +2 19.07.30 110 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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