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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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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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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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2.22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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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쪽

해의 그림자 222

DUMMY

"가다니? 어딜?"


고후점은 지남이 계단을 다 내려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의아한 눈길로 물었다. 수문 옆으로 가서 보초를 서야 하는데, 다짜고짜 같이 가자니.


설마하니 여기 관수옥에서 저기 수문앞까지 얼마 안되는 거리를 같이 가자고 자기를 불러세울 만큼 실없는 위인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입번인 자신을 쓸데없이 꾀어낼 만치 제멋대로인 소인도 아니었다. 지금도 손에 첩해신어를 들고 다니면서 짬짬이 왜어를 익히는 공부벌레니.


문제는 저 수중의 첩해신어였다. 저런 첩해신어를 들고 다니는 것 자체가, '나 초보요.' 하고 자수하는 꼴이었다. 왜어에 통달한 안주부도 손에 첩해신어를 들고 다니진 않았다. 그래서 김지남이 왜역倭譯(왜어역관)이 아니라 한역(한어역관)漢譯이란 사실을 저들에게 떠들고 다니게 되었다. 그래야 같이 다니는 자신이 덜 창피해서.


"어디겠습니까?"


지남이 씁쓸히 웃으며 반문만 던질 뿐 굳이 대답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고후점은 바로 다시 반문했다.


"데리러 가게?"

"그래야지요."


고후점은 떠름한 얼굴로 한숨을 짤막히 내뱉았다.


"으휴. 왜 사서 고생을 해서."

"누가 아니래요."


대꾸하면서도 지남의 눈빛이 시들했다. 남의 신세 동정하다가 자기 신세 투정하는 사람처럼, 한숨이 혀끝에 맴돌았다.


"그냥 나 최석정이요, 하고 나서면 될 걸, 뭐하러 수상하게 굴어서 끌려간 건지...어차피 여긴 서인천하라 신분 감출 필요가 없는데..."

"뭐, 암행어사 놀음 한번 하고 싶으셨나 보지요."


지남이 실소로 대꾸하자, 고후점은 눈꼬리와 입꼬리를 동시에 말아올리며 하회탈 같은 웃음으로 지남을 쳐다보았다.


"자네가 할 소린 아니지."

"제가 뭘요?"


지남이 두눈을 동그랗게 뜨고 따져 물었다. 그 순간에도 해진 갓양태는 대오리가 한두가닥씩 후줄근하게 풀어지고 갓모자는 꾸깃하게 구겨져서 무척이나 꼴사나웠다. 동냥그릇 하나 쥐여 주면 영락 없는 거렁뱅이였다.


"사실 김근행 그 영감탱이도 후줄후줄...수령들이 처음 보면 암행어산 줄 알고 온몸이 후들후들 떨린다잖아. 헌데 자넨 그 영감탱이한테 왜어는 안 배우고 외관만 배웠는지, 아주 김근행 판박이다 이 말씀. 누가 보면 자네가 암행어산 줄 알아."

"흥, 신분이 중인인 암행어사도 있답니까?"


지남은 쓴웃음으로 대꾸했다. 가슴 속에 신분에 대한 울분 같은 것이 노상 똬리를 틀고 도사리는 모양이었다. 암행어사 같다는 말이 듣기 좋기도 하고, 또 듣기 싫기도 하고, 기분이 이렇게 묘한 것을 보니.


"근행어사 있잖나. 근행어사."

"..."


고후점의 말에 지남은 두눈을 질끈 감았다. 근행어사라니. 너무 실없는 농담이었다. 도저히 못 들어줄 말장난이었다. 암행어사 여럿 찜쪄먹은 노인네를 두고 근행어사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 나 일해야 하는데. 자네 혼자 가면 되지, 왜 나까지..."


고후점의 생뚱맞은 소리에 지남은 다시 눈을 뜨고 시야에 걸리는 수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느덧 수문 앞에 다 왔다. 수문이 근무처이니 고후점으로선 다시금 입번 생각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볼 때마다 참 마음에 안 드는 수문이었다. 왜 저렇게 접다가 만 병풍처럼 생겼는지, 확 제껴서 펼쳐놓든, 접어놓든 둘 중 하나라도 해버리고 싶은 문짝들이었다.


"저도 일해야 됩니다."

"그니까...너는 네일을, 나는 내일을 하면 되잖아."


고후점은 입맛을 쓰게 다셨다. 내키지가 않았다. 근무처인 수문 부근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강군관에게 입번을 바꿔달라 부탁을 하자니, 그것도 남들 눈에 띄는 행위라 부담스러웠다. 도대체 최석정은 왜 가짜인 척하고 옥사로 잡혀간 건지...이해가 되질 않았다.


"우리 둘다 최석정이란 양반이 살아야, 그 일을 하지요."


지남이 딱 잘라서 말했다. 얼굴엔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했다. .


"뭐? 그게 무슨..."

"아까 저 안에서 들으니, 피행수를 죽이도록 방치하고, 그죄를 그분들께 덮어씌우려는 모양이더군요."

"뭐? 무슨..."

"피행수의 재산을 노리고 일부러 옥사에 잠입했다, 그래서 불을 내고 같이 탈출시키는 척...배신하고 죽였다. 뭐 이런 식."

"설마...여태 동래부에서도 피행수를 내옥에 감금하는 척 보호했는데, 왜 이제 와서..."

"단물, 다 빨았나 보지요."


고후점은 할 말을 잃었다. 소름이 끼쳤다.


저들은 최석정의 정체도 모르면서 가짜양반으로 몰아서, 또 개시를 넘본 죄로 내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왜인들이 침입해서 내옥에 불을 지르도록 방치했다. 피기문이 죽으면 그 죄를 모조리 덮어 씌울 셈으로. 처음부터 상대가 누구든 관심도 없었다. 희생양이 필요해서, 다짜고짜로 가짜양반이니, 난전이니 있는 죄, 없는 죄 다 끌어다가 씌운 것이 분명했다.


분노로 눈동자가 짙어지는 고후점의 두눈을 진지하게 마주 쳐다보며, 지남은 마지막으로 동의를 구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그래서 고후점은 지남과 함께 말을 타고 옥사로 향했다. 가다 보니 지남이 굳이 자신을 옥사로 데려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신의 칼이 필요한 게 아니라, 자신이 안내해줄 길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같이 왜관에서 여기 옥사로 삽십여리를 올라오고 보니, 지남이 심각한 길치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이놈은 이름만 지남指南이지, 지남침指南針을 손에 쥐고도 마냥 방향을 못 잡고 헤매는 길치 중의 상길치라는 것을.


옥사 어귀에 이르니, 어스름 속에서도 스무명의 사령들이 저마다 막대기와 횃불을 들고 개울 여기저기를 들쑤시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 머리 같은 형체가 불쑥불쑥 나왔다 들어갔다 하질 않나, 기다란 창대가 솟구쳤다 꺼졌다 하질 않나, 언뜻 보면 괴기스러운 장면이었다.


"웬놈이냐?"


사령들이 지남과 후점을 발견하고 저마다 막대기와 횃불을 겨누었다. 지남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동래부의 사령들이 한둘도 아니고 스물이나 떼거지로 몰려와서 옥사 주변을 수색하는 꼴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몽사몽이던 동래부사도 정신을 차리는대로 곧 군총들을 보낼 터였다.


"이 막대기는 뭔가?"


후점이 차가운 눈매로 쏘아보며, 왼손으로 눈앞의 막대기 끝을 툭 밀어내며, 오른손으론 자신의 왼쪽 옆구리 띠돈 고리에 매달린 환도를 빼들었다.


"이 정도는 되야지."


워낙 어두운데다 번개 같은 손놀림이라, 사령들의 눈엔 제대로 들어오질 않았다. 그저, 침침한 시야 속에서 상대방의 복장이 어렴풋하게나마 눈에 들어왔다.


동개筒箇?


동개가 왼쪽 어깨 쪽에 있었다. 무관들이 한개의 활을 활집(궁대弓袋)에, 여러대의 살을 화살집(시복矢箙)에 각각 담아서 기나긴 줄로 엮어 왼쪽어깨에 차고 다니는, 그 동개였다.


그들이 두눈을 깜빡이는 순간, 자신의 코끝에 상대방의 환도끝이 닿았다. 왼손목에 찬 활팔찌(습拾)에 달린 고리가 짤랑거렸다. 무관들이 활을 쏠 때 손맷부리가 거치적거리지 않게 묶어둘 때 쓴다는 그 활팔찌였다.


"어? 어?"


사령들이 순식간에 위축되었다. 애초에 말을 타고 다니는 위인들에겐 막대기를 휘두르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었다.


게다가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강군관과 함께 항상 수문 앞을 번갈아서 지키는 고군관이었다.


상대가 똑같이 천한 출신이라 해도, 그래도 군관의 몸이라, 지위는 똑같지가 않았다. 그들은 자라목이 되어 후점을 보고 겸연쩍게 웃었다.


"고...군관 나리?"

"이 막대기들 치우고서 얘기하지?"


고후점이 눈짓으로 막대기를 가리켰다.


"예? 에..."


사령들은 쭈뼛쭈뼛 막대기를 내리면서, 누구는 지팡이처럼 땅을 짚고, 또 누구는 아예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고후점의 눈치를 보았다. 고후점에게 막대기를 겨눈 사령은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하며 눈치를 보고서 자신도 엉거주춤 막대기를 내던지고 되물었다.


"헌데 여긴...어쩐 일로..."


묻다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쓰며 배를 움켜쥐더니, 사령은 느릿하게 늘어지는 말투로 물어왔다.


"혹시 여기 또 죄인이...? 내옥도 불타고, 외옥도 부서져서 수감이 좀..."


고후점의 얼굴을 알아본 사령이 지남을 흘겨보았다. 이래저래 짜증이 묻어나는 눈길이었다.


"죄인?"


지남은 그대로 오해를 받을 마음은 없었기에, 냉큼 두손을 활짝 벌려서 자신의 두손이 포승줄에 묶이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라는 것을 똑똑히 드러내 보였다.


"보시다시피..."

"아...김통사님...의 종형 분이라는..."


지남의 얼굴도 알아본 사령들이 이내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후점은 자신이 길잡이 외에도 바람잡이 구실도 했다는 자부심에 어깨를 으쓱하며 지남을 쳐다보았다. 마침 지남은 이래저래 후점과 함께 오길 잘했다는 생각에 엷은 웃음을 띠고 쳐다보는 참이었다. 후점과 눈길이 마주치자 지남은 이내 웃음을 지우고 사령들에게 말을 건넸다.


"어제 여기 끌려온 죄수들이 혹시나 내가 아는 사람일까 해서 와봤소만..."

"그 죄수들을 안다고요?"

"아니 꼭 안다기 보다는...어제 날 보고 살짝 피하기에...날 아나 싶은..."

"아, 그런 거라면 헛걸음 하셨는뎁쇼..."

"헛걸음?"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어디에도 없는데요."

"아직도...못 찾았다. 이 말입니까?"


지남은 고개를 갸웃하며 고후점을 쳐다보았다. 고후점 역시 손에 든 칼을 칼집에 넣으며 사령들을 돌아보는 참이었다. 여전히 눈빛 자체가 칼날이었다.


사령들이 움찔하는데, 지남이 고후점의 오른손을 가만히 붙잡았다. 손끝에 닿는 활팔찌의 고리를 느끼며, 지남은 차분히 말했다.


"이만 돌아가죠. 고군관 나리."

"그렇지만..."

"여기 없나 봅니다."

"하지만, 여기서 멀쩡히 벗어났을 리가 없는데..."

"갑시다. 나리."


고후점은 의아한 눈길로 지남을 쳐다보았다. 최석정이 살아야 자신들이 일을 한다던, 그 입으로 지금은 여기서 최석정을 두고 나가자니. 정말로 여기에 최석정이 없으리라 믿는 건가 싶었다.


이상했다. 여기 수풀 어딘가에 최석정이든, 김석하든, 피기문이든 있을 법 한데도. 하지만 계속해서 의문에 발이 묶이기엔, 이미 지남이 잰 걸음으로 서너발짝은 벗어나는 참이었다.


후점은 고개를 갸웃하며, 엄지로 코끝을 긁고서 걸음을 떼었다. 그런데 몇걸음 더 떼다가 말고, 지남이 열없는 얼굴로 후점을 돌아보았다.


"저어...휴산역休山驛은..."

"휴산역? 거긴 왜..."

"들러봐야 할 것 같아서."


지남의 대답에 후점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휴산역은 동래부의 턱밑에 있는 역참이었다. 하지만 여기 옥성골에서 가려면 배산背山을 반바퀴나 에돌아서 가든지, 아니면 배산 능선을 타고 넘어야 했다.


"휴산역? 저긴데..."

"가깝네요."


속도 편한 지남의 말에 후점은 살짝 눈을 흘겼다. 가깝기야 했다. 여기서 예닐곱리만 더 가면 되었다. 하지만 홀로 홀가분히 다니는 예닐곱리와 길치를 데리고 다니는 예닐곱리는 천지차이였다.


길을 모르는 주제에 혼자 앞장서서 지남침을 들고 제멋대로 말을 몰고 가다가 개울가로 잘못 길을 들어서는 월천꾼이 앉아서 쉬는데 물을 튀질 않나, 또 우로 갈 걸 좌로 가고, 좌로 갈 걸 우로 가질 않나...쫓아가서 뒷덜미를 잡는 것도 벌써 여러번이었다.


이래저래 애물단지였다. 아들이 애먹일 때마다 아내는 도로 뱃속에 넣고 싶다고도 말하고, 또 자신도 아들 데리고 밖에 나돌아다니는 일을 질색하는데, 차라리 지남을 딱 아들 나이로만 줄여서 등뒤에 같이 태우고 다니고 싶을 정도였다.


지남을 따라서, 아니 나중엔 후점 자신이 앞장서서 겨우겨우 도착한 휴산역엔 역졸이 둘이서 문설주에 머리를 박고서 조는 참이었다. 물론 그들을 보는 후점 역시 눈꺼풀이 감길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남은 졸리지도 않는지 두눈을 빛내면서 역참 앞의 역졸을 붙잡고 말을 건넸다.


"여기, 물건을 찾으러 왔소만."

"엥? 물건요? 웬..."


역졸은 졸린 눈을 비비며 지남을 쳐다보았다. 공손히 경어를 쓰자니, 상대방은 갓이 너덜너덜하니, 꼭 걸뱅이처럼 생겼다. 오밤중에 찾아와서 다짜고짜로 물건을 내놓으라니. 암행어사가 온다는 소문도 없었으니, 조심할 것도 없었다. 더는 대꾸하기도 싫은데, 그래도 명색이 갓을 쓴 행색을 보니 최소한 중인 이상은 될 것 같아서 자기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김지남이라고 합니다."


지남은 바로 허리춤의 호패를 풀어서 내밀었다. 역참객사의 솟을삼문 추녀 아래에 매달린 등불이 어슴푸레 자작목 호패에 새겨진 이름과 생년, 출신을 비추었다. 역졸은 호패를 받아드는 대신, 고개를 푹 숙이고 호패에 새겨진 신원을 확인했다.


김지남金指南

갑오년甲午年

신해역과辛亥譯科


무지렁이 역졸로선 한자를 다 알아볼 순 없었지만, 최소한 김金자와 갑甲자, 역과譯科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물론 직업職業에 특화된 안목이었다. 그 쉬운 낮오午자와 소우牛자도 똑바로 분간해서 쓰진 못하지만, 벼슬아치가 내미는 호패에 주로 나오는 글자는 거침없이 읽어냈다.


하지만, 불과 2년 전까지 여기 동래에 왜관이 있었고, 동래바닥에서 방귀깨나 뀌는 역관들이었다. 그런 역관들의 호패를 보고도 못 알아볼 리는 없었다.


"역관이쇼? 못 뵈던 얼굴인데..."

"얼마 전에도 왔었는데..."

"그땐 내가 번이 아니었나 본데...들어가쇼."


역졸이 떠름한 얼굴로 문을 열어주었다. 문을 열어주기 싫어도 열어줘야 했다.


지남이 호패를 건네받고 문간으로 들어서니, 역참 밖 역촌은 자정이 넘어서도 온갖 술익는 냄새로 진동을 하고, 형형색색 등불로 환히 반짝이고, 웃고 떠드는 목소리로 시끌벅적한데, 이곳 역참 객사는 오히려 한갓지고 고요했다. 행랑채처럼 기나길게 늘어선 마구간에서 점고를 하던 젊은 역리가 하품하는 소리가 사립문너머로 천둥소리처럼 들릴 정도로.


담장 안에 갇힌 역참의 좌우 마구간엔 얼핏 말머리도 비치질 않았다. 고개를 내밀고 빤히 쳐다보니, 튼실한 중마는 없고 삐쩍 마른 짐말 다섯필만 겨우 보였다.


"마, 말 타시게요?"


역승驛丞은 퇴청하고 없는지, 머리가 희끗희끗한 늙은 역리驛吏 한명이 겨드랑이에 두툼한 치부책置簿冊을 끼고서 두 눈꺼풀이 잠긴 채로 창고문을 나서다가 화들짝 놀랐다. 말이 역리지, 온갖 허드렛일만 도맡느라, 역졸보다 못한 신세라서, 그는 얼결에도 경어로 공손히 물어왔다.


역리가 신분은 자신보다 한참 아래인데도, 연배는 한참 위인 탓에, 지남은 어색하게 대꾸하며 다시금 호패를 내밀었다.


"아니...제 앞으로 온 서간과 짐을 찾으러 왔...습니다."

"아...잠시만요."


역리는 지남에게서 호패를 받아들고 등불 아래로 서너발짝 옮기더니, 가만히 겨드랑이의 치부책을 펼쳐서 호패의 이름을 대조해 보았다. 김지남이란 이름 앞으로 온 목함 하나가 있기는 하였다.


"여기 있네요. 따라오시지요."


역리는 구부정한 등허리로 오른손을 둘러서 벅벅 긁어대며 창고로 향하였다. 열쇠로 자물쇠를 열고 창고 안으로 들어서서, 역리는 물목단자가 적힌 붙은 짐짝들을 살펴보고, 김지남이란 이름을 찾아보았다.


김지남이라...


그는 두눈을 깜빡였다. 분명히 치부책에는 김지남이란 이름이 적혔는데, 창고 안 짐짝에는 김지남이란 이름의 짐짝이 어디에도 없었다.


"어?"


역리는 김지남 앞으로 온 물목이 짐이 아니라 편지인가 싶어서 다시금 두눈을 비비고 치부책을 살폈다. 하지만 치부책에 적힌 물목엔 분명히 호패 둘, 마패 하나, 책 한권, 심지어는 목침 등의 기록이 있었다.


"뭐야..."


군데군데 배껍질처럼 검버섯이 핀 얼굴이 누렇게 떴다. 그는 다시금 창고의 짐짝들을 살폈다. 짐짝들을 묶은 밧줄이나 띠지 틈새로 혹시라도 물목단자가 끼였나, 빠졌나, 유심히도 살폈다. 하지만 물목단자가 없는 짐짝은 하나도 없었다.


"왜...안 보이지?"


순식간에 등줄기가 후끈해지는 것을 느끼고 역리는 다시금 물목단자를 살폈다. 여기 역참 안에서 잠든 몇명의 역리나, 심지어 출번하여 역참 밖 역촌에서 잠든 역리들까지, 모조리 깨워다가 찾아봐야 할 판이었다.


안 그래도 황산역참에서 찰방이 웬 비루먹은 말들을 강매로 떠넘긴 탓에, 역리들이 답답한 속을 달래려 주막으로 몰려간 터라, 화물이 사라지고 없으니, 혼자서는 감당이 되질 않았다.


"없...습니까?"

"바뀐..."


역리는 이제 안색이 누르죽죽하다 못해서 푸르죽죽했다. 치부책엔 버젓이 마패까지 적혀 있었다. 웬 관료가 자기 마패까지 딸려 보내나 싶어서, 다른 역리들과 함께 바짝 긴장했었건만. 찰방한테 고해야만 하나 생각도 해보다가, 한번 당해보란 심사로 일부러 고하지 않았는데, 하필이면 자기 아니면 또 다른 동료 역리가 이 짐짝을 다른 짐짝과 헷갈려서 들려보낸 모양이었다. 그것도 불과 반시진 전에 다녀갔던 어느 무관의 손에.


"이를 어째..."


역리는 발을 동동 굴렀다. 당황해서 다시금 치부책을 살펴보는데, 머리로는 출出과 입入이 적힌 책장에서 먹물이 덜 마른 이름을 찾으려는 건데도, 눈으로는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저 시야가 온통 침침했다.


"먹물자국이...먹물자국이..."


역리가 자꾸 치부책만 보고 또 보는데, 그 어깨너머로 손이 쑥 뻗어나오더니, 주름도 없이 탱탱한 집게손가락 하나가 이름 하나를 콕 짚었다.


"백...흥령?"


손가락이 가리키는 이름은 백흥령白興齡이었다. 그러고 보니 찾아간 시각도 오늘 삼경오점三更五點이었다. 이사람이 맞았다. 헌데 어떻게 알아챈 걸까. 역리는 놀란 눈빛으로 등뒤를 돌아보았다. 역관신분을 증명하는 호패를 내보였던 자였다. 이름이 김지남이라 했던가.


"아시는...분입니까?"


한눈에 백흥령이란 이름을 짚어낸 것이 신기하여, 역리는 혹시나 싶은 기대를 품고 물었다. 둘이 서로 친분이 있다면, 그래서 짐이 바뀐 것도 무탈히 넘길 수만 있다면, 그러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글쎄요...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데..."


지남은 애매모호하게 대꾸하며, 미간을 찡그리며 미소를 지었다.


백흥령?


그 이름 정도는 알았다. 물론 얼굴도 알았다. 어의 백광현이 계속 장남에게 침술을 가르치려 드는데도, 정작 그 장남은 검술을 배우려고 든다던가.


헌데 그 백흥령이 여기 동래에 온 사실이 뜻밖이었다. 더군다나 짐이 바뀌어 자신 앞으로 온 최석정의 물건들을 가져간 사실도 당혹스러웠다. 하필이면 지금 최석정과 김석하가 사라진 마당에...


"어찌할까요. 역졸들에게 일러 찾아올까요?"

"아니...그 백흥령이란 자의 물건을 저에게 넘겨주시지요."


뜻밖의 말에 역리는 두눈을 휘둥그레 떴다. 물건 좀 바뀌었다고, 자기가 상대방 물건을 가져가겠다니. 중간에 서로 만나서 물건을 교환하려는 건지, 아니면 그 안의 물건이 없어질 때를 대비해서 담보처럼 맡아두겠다는 건지, 의중을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찜찜할 뿐이었다.


"주시지요. 제가 이 아저씨를 만나서 서로 교환할테니."


피차 아는 사이인지, '아저씨'란 말을 입에 담는 지남의 모습에 역리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설마하니 이 바닥에 부임하는 김근행, 변승업 같은 역관들처럼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자일 것 같지는 않았다. 내 물건 남이 가져갔다고, 자기도 남의 물건 가져가서 일부러 엿먹이는, 그런 심성의 소유자는 아니길 바라며, 역리는 반대편에 놓여 있던 백흥령이란 이름으로 물목단자가 붙은 짐짝을 지남의 품에 안겨주었다.


"옛다, 가져가쇼."


뭔가 좀 찜찜하긴 했다. 위아래, 혹은 옆에 놓인 짐짝도 아니고, 바뀔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백흥령이란 무관의 손에 김지남이란 역관의 물품이 딸려간 이유를 짐작도 할 수가 없어서 더 찝찝했다.


"혹시라도 그자가 돌아오면, 내 물건 좀 초량촌으로 가져다 달라고 말해주십시오."

"예? 초량촌요? 예예..."


역리는 일단 조용히 일이 무마될 것 같아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대꾸했다. 당사자들끼리 해결한다면야, 자신은 좋았다. 백흥령이란 자의 짐짝을 들고서 문간을 나서는 지남과 후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역리는 한시름을 덜었다.


헌데, 그들이 물러가고, 또 일각쯤 지나서 이번에는 또 훈도 박유년이 웬 해괴한 돌붙이를 들고 왔다.


"혹시 이렇게 생긴 물건을 본 적 있나?"

"예? 처음 보는 물건인뎁쇼."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역리는 이제 눈꺼풀이 까슬까슬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지경이었다. 졸려서가 아니라 눈이 메말라서였다. 도대체 웬 납작한 돌붙이를 갖고 와서 자신에게 보여주는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허면, 혹시 무슨 호패나 마패 같은 걸 누가 보내온 게 없었나?"


이대로 소득도 없이 돌아서고 싶진 않아선지, 훈도는 체념하지 않고 집요하게 역리에게 재우쳐 물었다. 여기 역촌 안에 역리만 수십이고, 교대로 번을 서고, 나가고 하다 보면 이 늙은 역리가 모를 법도 한데도, 그래도 끝까지 물어봐야 했다.


"호패나...마패라뇨?"


역리는 움찔하여 오른손 끝을 떨면서도, 짐짓 영문도 모르는 척을 했다. 괜히 일이 커질까 두려웠다. 하지만 이 집요한 불청객은 치부책을 내놓으라며 들들 볶아냈다. 함부로 치부책을 내보일 수 없다고 버텨 보았더니, 두눈을 희번덕거리며 윽박지르기까지 했다.


"자네! 내가 황산찰방한테 서찰을 보내도 좋은가? 자네가 협조를 안한다고 내가 하소연을 해도 좋은 가 말이다!"

"아니...봐도 별거 없으실텐데..."


늙은 역리는 자라목이 되어 훈도의 눈치를 보며 치부책을 내밀었다. 훈도는 역리를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곤, 그 손끝에서 홱 낚아채었다..


"진작 내놓을 것이지..."


딱 한마디로만 투덜거리고서, 훈도는 치부책을 한장한장 넘기다가 그자리에서 손끝이 굳어졌다. 김지남金指南이란 이름 석자가 눈에 익었다. 그 이름 옆에 적힌 물목에는 호패 둘, 마패 하나라는 글귀까지 있었다.


"호패에...마패?"


훈도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역리를 쳐다보았다.


"이자가 물건을 찾아갔던가?"

"예? 예..."

"본인 호패였나?"

"예?"

"그러니까 본인 호패를 찾아간 게 맞냐, 그 말일세."

"본인호패겠지요 뭐..."

"겠지요? 확실하지 않단 말인가?"

"그냥 짐짝째로 내어드린 거라..."

"이 치부책을 적을 때 봤을 거 아닌가?"

"역승 나리께서 적으신 거라..."

"그럼 호패에 적힌 이름이 최석만인지, 김석하인지 못봤다, 이건가?"

"아유 그만 물어보십쇼. 소인은 까막눈이라 봐도 모르옵니다. 그리고 여기 역참에 역리들만 수십인데..."

"뭐라?"

"역승 나리가 퇴청해서...날 밝으면 다시 오시지요. 소인은 참말로 아는 게 없습니다."


늙은 역리는 얼굴이 벌개져서 대답했다. 짐이 바뀐 게 알려지면 자신들은 죽은 목숨이었다. 당사자가 군말 없이 갔는데, 왜 제삼자가 나서서 호패를 찾아갔냐, 마패를 찾아갔냐, 꼬치꼬치 따져묻는 건지.


"헌데 왜 자꾸 소인을 다그치는 것이온지...무슨 일이라도..."

"일은 무슨 일."


이제는 역리에게 꼬투리를 잡힐 일만 남았다. 훈도는 짜증스레 역리에게 손을 휘저으며 돌아서다가, 문득 돌아섰다. 더는 역리에게 알아낼 것이 없다고 믿으면서도, 훈도는 괜히 뭔가 아쉬운 마음에 하나라도 더 물어보게 되었다.


"가만, 혹시 찰방나리가 부사영감께 전하는 서찰 같은 건 없는가?"

"예?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역리가 두눈을 깜빡이며 애매하게 답하자, 훈도가 두눈을 번뜩였다.


"있었다?"

"예, 예...날 밝으면 저희 역리들이 전하러 갈 것이옵니다."

"날 밝으면? 화급을 다투는 일이니, 지금 당장 갖다드리게. 부사영감께서 목빠지게 기다리시니 말일세."

"..."

"알겠나? 만약 날이 밝기 전에 전하지 않으면, 부사영감께서 역정을 내실지도 모르이."

"..."

"당장 자네부터 동래부 동헌 뜰에 불려가서 치도곤을 당할 것이야."


혹시라도 찰방이 부사영감께 긴요한 정보를 전해줄까 기대가 된 탓에, 훈도는 역리에게 으름장을 놓고서 역참을 나섰다. 왠지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어서, 그는 보초를 서는 역졸에게 물어보았다.


"아까 역관 하나가 와서 물건을 찾아갔던가?"

"예? 예. 웬 군관과 함께요."

"군관? 군관 누구?"

"예?"

"누구던가? 호패를 봤었나?"

"거기까진 잘..."

"에잉...이놈이나, 저놈이나...다 모른대!"


훈도는 짜증을 벌컥 내고 역졸을 지나쳐 계속해서 걸어갔다. 기다란 역참 담장 한켠에 훈도가 타는 초헌이 놓인 채로, 구종과 수노 다섯이서 노닥이는 참이었다. 훈도는 그들이 채 초헌을 정비하기도 전에, 그대로 올라타려 했다.


"아이구 영감마님!"


초헌의 바퀴가 돌아가며, 좌석이 뒤로 기우뚱했다. 훈도는 화들짝 놀라서 팔걸이를 힘껏 움켜쥐었다. 눈앞이 아찔하며 등골이 후끈해졌다. 뒤로 기울며 굴러가던 초헌이 한차례 흔들리더니 멈추었다. 노비들이 화들짝 놀라서 끌채를 가까스로 거머쥔 덕분이었다.


"똑바로들 하지 않고!"


훈도는 버럭 소리를 내면서도, 담장을 힐끔거렸다. 큰일날 뻔 했다는 생각도 잠시, 지남이 찾아갔다는 호패에 또 신경이 쏠렸다. 김지남 그자를 잡아 족치든지, 꾀어내어 거처를 뒤지든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같은 관료이니 함부로 할 수도 없고, 골치가 지끈거렸다. 방금 놀란 탓에 또 머리가 아팠다. 훈도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서, 가만히 손등에 고개를 기대었다.


설마...최석정 그자가?


역리에게 엄포를 놓은 덕인지, 훈도가 외삼문인 동래부 정문에 들어서기 무섭게, 젊은 역리 한명이 황산찰방 한순상이 보내는 서찰을 갖고 달려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역리는 정문을 지키는 수문장에게 연통을 넣다가, 훈도와 눈이 마주치자 황망히 허리를 굽혔다.


"찰방이 부사영감께 보내는 서찰인가?"

"예? 그걸 어떻게..."

"흥, 따라오게."


훈도는 앞장서서 외삼문과 내삼문을 빠르게 지나쳐서 동래부 동헌 앞에 이르렀다. 이상했다. 자신의 등뒤로도 의원들이 잠결에 군졸들에게 붙들려서 끌려오는 참이었다. 졸음이 가시지도 않아서, 눈도 제대로 못 뜨고 걷기까지 했다.


"뭣하는가? 뭐 볼게 있다고!"

"예? 아니 전 그냥...웬 의원들이..."

"따라오기나 하게!"

"예? 예..."


역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곁눈으로 동헌 주위를 살피다가, 자신에게 사납게 도끼눈을 뜨는 훈도의 기세에 주눅들어, 엉거주춤 뒤따랐다. 그래도 눈꼬리가 자꾸만 옆으로 흘렀다.


쥐죽은 듯 고요해야 할 동헌 뜨락이 웬일인지 북적거렸다. 저마다 침함을 두손에 들고, 혹은 겨드랑이에 끼고, 혹은 품에 안고, 의관들이 군졸들에게 끌려와서 도열하는 참이었다. 이방이 웬 인명부 하나를 들고 와서 일일이 신원을 파악하는 참이었다.


"소산약방蘇山藥房 김장필?"

"예, 접니다."

"윤산의가輪山醫家 정호임, 정억지?"

"예, 저희들입니다."


이상했다. 볼수록 이상했다. 역참의 마구간에서 자신들 역리들이 서찰과 짐 운반을 마치고 돌아와서 마구간에서 점고點考를 하는 장면과 비슷했다. 왜 의원들을 불러다가 일일이 점고를 하는 건지. 참으로 요상했다.


"어이구 영감나리!"


이방이 훈도를 알아보고 바로 목청을 가다듬어 고하였다. 명색이 부사보다 품계가 한등이 낮다고, 호칭도 낮추는 참이었다.


"부사영감! 훈도영감이 왔습니다."


마침 동래부사는 동헌의 동쪽 온돌방에 이마에 물수건을 얹은 채로 자리보전을 하고서, 이제나 저제나 훈도가 들르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던 참이었다.


"들이라!"

"휴산역에서 역리도 왔습니다!"

"그래?"


동래부사는 하마터면 자신이 자리보전 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그대로 온돌방을 뛰쳐나갈 뻔 하였다. 역리보다 한발 빨리 훈도가 온돌방으로 들어서다 흠칫 놀라 두손을 내저었다.


"어이구우! 부사영감! 편찮으신 몸으로 어찌..."


그제야 동래부사는 아차 싶어서 도로 물수건을 붙잡고 병상에 누웠다. 그리고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일렀다.


"훈도영감께서 대신 서찰 좀 받아주시게."

"그러지요."


훈도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하고서 역리의 손에서 냅다 서찰을 뺏아들고, 동헌 계단을 성큼성큼 올랐다. 동헌에 딸린 다른 객사보다 유난히 높아선지, 자신도 늙어선지, 역참까지 다녀와선지, 또 무릎이 시큰거렸다.


차라리 동래부사 말고 자신이 드러누울 걸 그랬다는 생각을 하며, 훈도는 순식간에 뻣뻣해진 걸음걸이로 축대로 올라섰다. 그리고 대청으로 올라서는데 역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어...회신을 적어주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든지."


훈도는 찰방 한순상의 서찰을 어서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최석만인지 뭔지 하고, 김석하란 놈이 내심 찜찜했었는데,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찰방까지 서신을 보내올 정도면, 이 서신 안에 뭔가 중요한 정보가 있을 법도 했다.


"부사영감! 여기, 여기..."


훈도가 한달음에 대청에서 온돌방으로 뛰어들자, 동래부사는 이마 위의 물수건이 떨어지는 것도 상관 않고 얼른 상체를 일으켰다.


"이리 주게."

"예, 영감....편찮으시니 누워 계시지요. 제가 읽어드릴...."


촛농으로 밀봉된 서찰을 단숨에 뜯고서 훈도는 서찰의 내용을 먼저 한눈에 빠르게 훑었다. 서찰을 낭독하는 것도 잊은 채로 그의 입가가 굳어졌다.


"이 사람, 읽어준대놓고 자기가 먼저..."


좀이 쑤신 동래부사도 눕다 말고 도로 일어나서 훈도의 어깨너머로 서찰을 읽어내렸다. 두 사람은 서찰을 한눈에 훑어보고서는 할 말을 잊었다.


동래부사는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가, 또 고개를 갸웃했다가, 혀로 아랫입술을 핥았다가...그렇게 헷갈리는 눈빛으로 훈도를 쳐다보았다. 훈도는 오뉴월에 고뿔이라도 들었는지 말없이 코를 훌쩍거리기만 했다.


"그러니까, 병판대감의 족제가 한양에서부터 쭉 역참의 중마를 타고 남행南行 중이다? 동행인의 신분은 알 수 없지만, 병판대감의 족제가 어려워하는 것을 보니, 병판대감의 사람 같다? 병판대감이 자기 족제를 보내어 각 군영의 실태를 암암리에 조사하는 것 같으니, 황산역 속하 11역참 및 각 수령들은 유의하라?"

"그자가...진짜로 병판대감의 족제...였다구요?"


동래부사가 서찰의 내용을 곱씹듯이 묻는 와중에도, 훈도는 어느새 진땀이 손금마다 밴 손바닥으로 입가를 문지르며, 자기도 같이 반문했다.


천하디 천한 칼잡이라 여겼는데, 병조판서의 족제라니. 왜관에서 강도명이 말했던, 기와집 한채 값도 넘는 귀한 인삼뿌리를 병판대감이 구해다가 쳐먹였다는 그 귀하디 귀하신 몸이라니. 훈도는 괜히 입안이 매워서 가만히 입맛을 다시고 또 다셨다.


"설마..."


이미 병조판서의 족제라는 사실을 짐작하고도, 훈도는 믿고 싶지가 않았다. 어떻게든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아까 역참에서 보았던, 김지남이 가져갔다는 봇짐의 물목들이 다시금 눈앞에 아른거렸다. 호패 둘, 마패 하나, 책 한권 그리고 목침 하나...그리고 얼핏 보았던 팔뚝 상처 하나...


흘리고 온 건지, 두고 온 건지 몰라도, 저들이 정말로 가짜 양반도 아니고, 몰래 개시에 끼려던 잠상도 아니고, 그저 자신들이 오해한 것이라면? 그래서 내옥에 가둬놓고, 피기문 살해의 누명까지 씌워서 함께 없애려고 한 일이 밝혀진다면?


"부사영감, 족제는...사실상 남이지요?"


듣고 싶은 대답을 듣기 위해, 훈도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김석주가 인삼까지 구해 먹인 사실만 생각해 봐도, 김석주가 그 어린놈을 꼭 업어키우기라도 한 것처럼 아끼는 현실을 알아차릴 수 있는데도. 족제는 사실상 남이라는 사실을 믿고 싶었다.


"뭐...그 남한테 위해를 가했다고, 김석주가 통명전 앞에서 허적의 목을 졸랐다지."

"무슨..."

"최소한 곁붙이는 된다 이 말이야. 내 비록 여기 동래바닥에 있어도, 그 정도 소식은 수중에 틀어쥐고 있지."


동래부사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훈도는 굳은 얼굴로 동래부사를 쳐다보았다. 사실여부를 떠나서, 듣는 것 만으로도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얘기였다.


진짜로, 대궐에서 허적의 목을 졸랐다고?


찰방과 역참 몇만 구워삶아도, 암행어사가 어디를 도는 지 알 수 있었다. 암행어사도 사람인지라, 역참을 거치고, 역마를 타고, 또 역리를 통해서 가족들과 서찰을 주고 받는 통에, 암행어사에 대한 정보도 동래 귀퉁이에 쳐박혀서 얼마든지 접할 수 있었다. 그러니 마음 놓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런데...그런데...


암행어사도 아닌 놈이, 하필이면 신분을 숨기고 오는 바람에, 마치 바짓가랑이 솔기 터지듯,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흑돼지의 족제보다, 지금은 그 동행이라던 자의 정체가 더 문제야."


훈도는 당장 김석하란 놈의 존재를 신경쓰느라 골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부사는 그자의 동행인 최석만이란 자를 언급했다. 훈도는 미간을 와락 찌푸리고 동래부사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어르신께 서찰을 띄워서, 확인해야겠어."

"예? 무슨..."

"훈도영감도 봤으니 그 최석만이란 자의 얼굴을 알테지."

"예? 예..."

"자네도 알다시피 난 눈이 침침해서 제대로 얼굴을 못봤으이. 허니 자네가 그자의 용모파기 하나만 그려와주게나."

"용모...파기요?"

"조용히 회덕에 보내봐야지."


동래부사는 살짝 열린 장지문 틈새로 시선을 던지며, 아직도 마당에서 기다리는 역리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 최석만이란 자가 죽었든, 살았든, 정체를 확인해야 했다. 그는 담담히 훈도에게도 일렀다.


"그리고 김지남이한테도 조용히 사람을 붙이고 말야."



옥사에 불이 나고, 피기문과 새 죄수들이 사라진 지도 어언 여섯시진이 흘렀다. 옥사를 에워싼 담장 아래의 그늘도, 그 뒤로 흐르는 개울 개울 위로 반짝이는 은빛 물비늘도, 개울 틈새의 은잿빛 바위도, 그 바위 밑의 검은 물이끼도 속속들이 정오의 햇볕이 고스란히 비추었다. 햇볕이 유독 환하고 강렬한 탓인지, 바위 밑의 그림자가 유독 짙었다.


밤새 옥사 주변의 수풀과 개울을 수색하느라 탈진한 사령들의 지친 눈결에는 그저 시꺼먼 그림자였다. 그런데 날카로운 햇살끝이 점점 더 집요하게 바위 틈을 들추었다. 그러자, 사령들의 침침하고 흐릿해진 시야에도 점점 물이끼가 그을음으로, 똑바로 정체를 드러냈다.


"이거, 뭐야. 불자국인데?"

"여기도."

"어? 저기도!"

"여기돈데?"

"뭐야, 왜 여기저기 불자국이야?"

"떼거지로 뭐 구워 먹었나?"

"바보야, 이게 뭐 구워먹은 걸로 보이냐? 이렇게 두꺼운 돌로 어떻게 구워먹냐."

"봐, 밑에만 시꺼멓잖아. 불 위에 얹은 거야."

"글쎄, 이렇게 두꺼운 돌로 뭐 구워먹는 거 봤냐고!"

"그게..."

"봐라, 봐! 내 마노라 똥배보다 더 두껍구만!"


뱃살이 두둑한 사령 하나가 궁시렁거리면서 바위 밑을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다. 비쩍 마른 몸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누라 뱃살 흉볼 처지도 못되는 자였다. 하지만 평소 마누라 뱃살에 맺힌 응어리가 많았는지, 그는 바윗돌의 두께에도 예민했다. 그의 눈엔 커다란 바윗돌 밑의 그을음이 그저 불위에 얹은 자국으론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이건 고기 구운 흔적이 아니란 말이지."


그는 손가락 끝으로 바위 밑 검댕을 쓱 만져 보았다. 그리고 이리 살피고, 저리 살폈다. 그러다 막대기 끝을 바위 밑으로 쑤셔넣었다.


"뭐해?"

"들어보게."

"야, 들어보라고."


사령이 바위를 들추니, 시꺼멓게 그을은 구덩이가 나타났다. 동시에 바위 밑에 막혀 있던 독한 탄내가 코밑을 간질였다. 내부는 토벽이 아니라, 갯돌을 여기저기 괴어놓은 돌벽이었다.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보려고 고개를 숙인 사령은 목울대를 비틀어대는 매캐한 탄내에 얼른 고개를 뒤로 젖히고 쿨럭거렸다. 밤새 고생한 탓인지, 뱃속이 출출하여 더욱 냄새가 괴로웠다. 두통까지 일었다.


"어후! 이젠 탄내만 맡아도 속이 뒤집히려고 해."


사령이 고개를 돌리고 신물을 삼키자, 옆에서 손놓고 구경하던 사령들이 달려들었다. 정작 굴을 발견한 사령은 두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한발 뒤로 빠지는 참이었다. 비위가 약해선지, 약해져서인지, 그는 바위에 얼터앉아 힘없이 이마를 짚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달래고 싶었다.


"뭐야, 이거?"

"구덩이야? 굴이야?"

"보면 몰라?"

"와...이거네. 여기로 나왔네..."


이미 내옥의 폐허에서 암굴을 발견한 터였다. 하지만 바깥 어딘가로 연결되었을 거라는 건 세살짜리 아이도 알 법 했다. 그러니 바깥에서 이 암굴을 발견하고 보니, 내옥 밑에서 뻗어나온 굴이라는 사실 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헌데 처음 암굴을 발견한 사령도 잔기침에 헛구역질을 해대며 괴로워하는 참이었다.


"어? 뭐야 이거?"

"저기 동구가 발견....왜 저래?"


다른 사령들은 사령을 쳐다보고, 또 암굴을 쳐다보고, 그렇게 갈마보다가 암굴 입구에서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괜히 불씨나 독연毒煙이 남아있을까 겁이 났다.


"저 밑에 독기가 심한 거 아니야?"

"에이. 무슨 여태...."

"봐..."

"에이, 요즘 속이 안좋다지 않았나?"

"원래 저런다고?"

"밤새 연기 맡으면서 수색하다 보니 속병이 도졌나보지 뭐."

"그런가?"

"또 있을테니 찾아봐."


원래 지병이 있다는 소리에, 그제야 다른 사령들도 마음을 조금 놓고서 하나둘씩 개울가의 젖은 바위를 들춰보기 시작했다. 바위 밑에서 자신들 발꿈치 만한 참게가 기어나오는가 하면, 다슬기가 다닥다닥 붙어서 놀래기도 했다. 그렇게 하나둘씩 허탕을 치다가, 정말로 시꺼먼 아가리를 벌린 또 다른 암굴을 발견하기도 했다.


"여기도 있는데?"


또 다른 사령 하나가 열댓보는 떨어진 지점에서 개울가의 또 다른 바위를 옆으로 힘겹게 밀치고 소리쳤다. 사령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눈알을 굴렸다. 그냥 불길이 나왔다간 불이 여기저기 번질 법 하니 물가에 젖은 바위에 뭔가 수작을 부려놓은 건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러한 암굴이 몇개나 더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하나둘씩 구덩이인지 굴인지를 찾아내자, 사령들은 자신들도 막대기로 바닥을 쑤시고, 바위를 들추며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두어개의 암굴을 또 찾아냈다.


"여기도..."

"와, 이 인간 미친 거 아냐? 이렇게 해놓으면, 홍수 나기 십상인데. "

"불타 죽는 것보다야 낫겠지."


바위를 들쑤시는 사령들의 시야로, 바다매 세마리가 창공을 나는 모습이 언뜻 비쳤다. 부리와 다리의 색깔이 노란색인지 회갈색인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옥사 주변에서 매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니 괜히 신경이 쭈뼛 곤두섰다.


게다가 머리가 울리는 듯한 진동이 일더니, 여기저기서 흙탕물을 튀며 한떼의 군마軍馬가 옥사 앞길을 덮는 장면이 보였다. 사령들은 금세 긴장한 얼굴이 되어 더욱 신경을 곤두세웠다.


별장이 이번엔 군총軍摠들을 거느리고 찾아온 참이었다. 여기저기 바위가 들춰진 것을 보고 별장이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자세히 보려다가도, 눈이 침침한 탓인지, 인상을 쓰고 한참을 지켜봐야 초점이 잡히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별장이 눈앞에 선 사령을 힐끗 쳐다보며 짜증섞인 투로 물어왔다.


"죄인들은, 찾았나?"

"아직...여기 굴을..."

"피기문은?"

"아직..."


외옥 죄수들도 탈옥했을 법도 한데도, 별장은 내옥 죄수들의 행방에만 관심을 쏟았다. 사령들은 의아한 눈길로 별장을 쳐다보았다.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분위기가 알게 모르게 바뀐 느낌이었다. 군총들도 아니고, 군총들까지 걱정되어 찾는 느낌이 아니라, 반대로 없애려고 찾는 모양이었다.


그냥 느낌이었다. 피기문의 생사가 걱정되었으면 진작 찾아와 보았을 동래부사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데다, 그 밑의 별장만이 해가 중천에 뜬 다음에야 와서, 자신들을 닦달할 뿐이었다. 속이 꼬여선지는 몰라도, 부사영감이 진심으로 피기문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걱정되어 찾는 것이라면 의원 한둘이라도 대령해 놓고서 찾게할 텐데도, 지금 여기엔 처음부터 의원은 딸려 보내지도 않았고, 지금도 달고 오지도 않았다. 그저 창칼 들고 와서 암굴을 찾아서 더 들쑤시게 하는 게 전부였다.


"알았으니 찾으면 즉각 죄인들을 외옥에 가두고 바로 고하거라."

"예, 나리."


군총들이 자신을 부서진 사금파리 같은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을 느끼고, 별장은 잇새에 파찌꺼기라도 낀 것처럼 입가를 실룩이며 고개를 들었다. 마침 사령 하나가 자신에게 머뭇머뭇 다가오는 참이었다.


"저...별장나리..."

"뭔가, 자넨?"

"저...제가 속이 안 좋아서...군총들도 왔고 하니, 이만 들어가서 의원한테..."

"의원?"


별장이 기묘한 얼굴이 되어서 두눈을 깜빡였다. 사령이 의원들을 찾아가도 코빼기도 볼 수 없을 터였다. 그렇다고 이 사령을 그들 의원들에게 데려갈 수도 없었다. 여기 오기 전에 이미 초량은 물론 동래 일대의 의원들을 모조리 약방 문을 닫게 하고, 동래부 객사에 가둬놓은 상태였다. 피기문 등을 없애기 위해서 일부러 의원들을 깡그리 불러모아 발을 묶어둔 것이었다. 그것도, 동래부사가 편찮다는 명목으로.


"어쩐다...의원은 만날 수가 없을텐데?"


별장이 힐끔 사령의 눈치를 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예?"

"부사영감이 편찮아서, 지금 이 부근 의원이란 의원들은 모조리 동래부에 가 있는데."

"예?"

"부사영감이 노환이 심해져서...오늘내일 하시거든."

"..."

"어제 개시를 밤늦게까지 단속하시느라 무리하셨거든..."

"..."


별장의 말에 사령은 할 말을 잃었다. 부사영감이 병이 나서 이 부근 모든 의원이 동래부로 몰려가 있다니. 어이가 없었다. 물론 부사영감이 평소 노환이 있긴 했다. 눈도 침침하고, 손발이 떨리고...기력이 달려서 초저녁만 되면 일찌감치 이부자리를 깔고 드러눕긴 했다. 오뉴월이 되면 개도 안 걸리는 고뿔에 걸리고 잔기침도 해대었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드러누워 의원들을 모조리 동래부에 불러들이다니.


이게 말이나 되나. 당장 내옥의 화제로 죄수 세명이 사라졌는데, 이 땅굴로 피신했더라도, 독연을 너무 많이 마셔서 목숨이 위태로울텐데도, 의원들을 모조리 동래부 동헌으로 끌어들이면 어쩌라는 건지.


"정말...입니까?"

"정말이냐니?"


별장은 움찔해서 콧잔등을 찡그리곤 이내 험악하게 사령을 노려보았다. 사실 자신도 어쩐지 찜찜하게 여기는 참이었다. 의원들을 한사람도 남김 없이 한성부 동헌으로 불러들이고, 군총들은 이리로 보냈다니. 얼핏 보면 피기문을 구하려는 안배 같긴 했다. 하지만, 구하려고 하였으면, 의원을 이리로 보냈어야 했다. 여기에, 한사람이라도 남겨둬야 했다. 한사람이라도.


작가의말

큰사건 세개가 남은 것 같은데, 고증이 넘 힘드네요. 왜관 에피는 허구입니다. 왜관을 둘러싸고 역관들이 왜인들을 부추겨 초량동으로 옮겼다는 소문과 의혹, 또 역관들이 공사비를 부풀렸다는 의혹들에 제 상상을 가미해 엮었을 뿐이구요. 역관들을 이 핑계 저 핑계로 가두고 보석금까지 요구해서 실제로 비자금을 챙긴 서인들의 행태를 짚고 넘어갈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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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해의 그림자 217 +1 14.11.25 1,623 23 43쪽
217 해의 그림자 216 +2 14.11.20 1,575 28 43쪽
216 해의 그림자 215 +3 14.11.14 1,718 30 43쪽
215 해의 그림자 214 +3 14.11.10 2,374 30 35쪽
214 해의 그림자 213 +3 14.11.06 1,321 27 42쪽
213 해의 그림자 212 +3 14.11.02 1,615 29 43쪽
212 해의 그림자 211 +3 14.10.26 1,831 33 44쪽
211 해의 그림자 210 +3 14.10.20 1,635 26 42쪽
210 해의 그림자 209 +4 14.10.13 1,957 30 44쪽
209 해의 그림자 208 +3 14.10.07 1,496 28 43쪽
208 해의 그림자 207 +3 14.10.02 1,318 22 43쪽
207 해의 그림자 206 +4 14.09.25 2,693 34 43쪽
206 해의 그림자 205 +4 14.09.19 1,627 26 43쪽
205 해의 그림자 204 +3 14.09.12 1,715 26 40쪽
204 해의 그림자 203 +6 14.09.05 1,502 30 39쪽
203 해의 그림자 202 +7 14.08.30 1,735 31 41쪽
202 해의 그림자 201 +4 14.08.21 1,849 42 41쪽
201 해의 그림자 200 +5 14.08.14 1,387 30 42쪽
200 해의 그림자 199 +4 14.08.07 2,041 34 42쪽
199 해의 그림자 198 +5 14.07.31 1,858 41 43쪽
198 해의 그림자 197 +3 14.07.21 1,789 41 41쪽
197 해의 그림자 196 +7 14.07.15 1,852 34 42쪽
196 해의 그림자 195 +3 14.07.11 2,020 32 41쪽
195 해의 그림자 194 +3 14.07.06 1,947 34 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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