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언데드로 살았을 때의 녀석들
<< 천민 학교. 레그멘타 >>
알파네스에서 절대 볼 수 없는 생물이 있다. ‘천민’에 다른 말은 ‘돈이 없는 자’. 돈이 없다는 건, 그 어떠한 이동수단도 탈 수 없다는 얘기.
“ 저 곳인가? ”
“ 예. 백작님. ”
그런 알파네스에 수십 필의 말들이 한 곳을 향해 내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이지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가장 선두를 달리고 있는 건, 듀라튼 백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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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막 잠에서 깨어났다. 하나 둘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고, 정신을 차린 아이들은 하나같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납치를 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잠에서 깨어나니 레그멘타 학교 내부일까? 의문을 가지기도 잠시, 다음 벌어진 상황에 또 한 번,
좌절했다.
“ 모두 잡아!! ”
언제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일반 용병들이 아니었다. 타고 있는 말들이나 입고 있는 갑옷들은 하나같이 기사들을 상징하는 것들이었다. 게다가 가장 선두에 있는 저 중년의 남잔 은빛의 견장을 차고 있는 걸로 봐서는 분명히 귀족이었다.
‘ 귀족이 왜..? ’
모든 아이들의 머릿속에 든 의문이었다. 귀족이 왜 우릴 납치하는 것일까.. 도망 칠 수도 없었다. 아까는 그나마 용병들이었기에 다수의 아이들이 도망을 쳤지만, 지금은 얘기가 달랐다.
“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 ”
듀라튼의 그 한 마디로 그래도 한 번 도망쳐볼까 했던 생각도 단 번에 사라져버렸다. 모든 아이들에게 공포심이 엄습했고, 그 공포심은 족쇄가 되어 아이들의 발목을 단단히 묶었다.
“ 모두 묶어!! ”
그렇게 모든 아이들이 진짜 족쇄에 묶여버릴 위기에 쳐해 있던 그 순간.
“ 뭣들 하는 겁니까!! ”
알렌이 등장했다.
“ 선생님!! ”
모든 아이들이 기다렸던 사람이었다. 유일하게 이 일을 해결 할 수 있는 사람. 유일하게 자신들을 아끼며,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
“ 소속을 밝히시오!! 어느 가문의 기사들입니까!! ”
천천히 기사들의 면면을 살피던 알렌이 이윽고 듀라튼 백작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 듀라튼 백작님..? ”
일단은 알렌보다 높은 귀족이었기에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 듀라튼 백작님을 뵙습니다. ”
“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군. ”
알렌의 인사를 받아주지도 않은 채, 혼잣말을 한 듀라튼이 얼굴을 구겼다.
“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왜 죄 없는 아이들을.. ”
주위를 둘러보자니 듀라튼이 뭐라고 변명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너무나도 명백한 짓을 하고 있었고, 그걸 알렌에 걸려버렸다.
“ 혹시 파라칸 백작님이 절 부르신 것도 이와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
애초에 듀라튼 혼자서 벌이기엔 뒷감당이 힘든 일이었다. 그렇다는 건, 뒤를 봐주는 귀족이 있다는 것. 알렌의 머릿속에 무언가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왜 생전 본 적도 없는 파라칸 제스페르가 자신을 불렀는지.. 그리고 그의 영지에서 지내고 있는 듀라튼 바라테스가 왜 이 곳에 와있는지..
“ 이건 그냥 간과하고 넘어갈 수 없겠군요. 지금 당장 수도로 가서 이 일에 대해서 보고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확실히 알렌은 다른 뜨내기 준남작 선생들과는 달랐다. 단 번에 배후에 파라칸이 있는 것까지 예리하게 잡아냈다. 이렇게 된 이상 듀라튼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죽여. ”
듀라튼이 입에서 의외의 단어를 내뱉자, 그를 바라보고 있던 알렌도 그 앞으로 도열해있던 기사들도 일제히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허나.. 저 자는 귀족으로.. ”
“ 뒷감당은 제스페르 가(家)에서 할 것이다. 이미 파라칸 백작님까지 엮여있는 걸 의심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선택의 여지가 없어. ”
명예, 부, 권력, 거기에 힘까지.. 모든 걸 갖추고 있는 제스페르 가문의 넷째가 어린 천민들을 성노예로 쓴다는 게 밝혀진다면, 그 뒷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파라칸에게 어린 노예들을 잡아다 바친 게 듀라튼이라는 걸 세상에 밝혀지는 순간, 바라테스 가문의 명예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아니. 가라칸 제스페르 대공작의 손에 의해서 가문 자체가 멸문을 당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될 바에야 앞에 있는 유일한 목격자를 죽인다.
그게 듀라튼이 내린 선택이었다.
“ 뭣들 해!! 죽여!! 저 자를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제스페르에게 죽는다!! ”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내릴 수 있는 선택은 없었다. 듀라튼의 명령 때문이 아니었다.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들의 입장에선 죄 없는 귀족에게 검을 뻗는 일만큼 불명예스러운 일은 없었다. 기사들 자체가 귀족과 왕을 지키기 위해 있는 사람들. 비록 자신들이 섬기고 있는 듀라튼의 명령일지라도 따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을 뽑아 든 것은 단 하나였다.
‘제스페르’ 그 이름 하나.
그 이름이 가지고 있는
공포.
그 하나 때문에 몸을 움직였다.
- 스릉!!
수십의 기사가 동시에 달려들었기에, 알렌 또 한 지체하지 않고 검을 뽑아들었다.
‘ 적국의 기사가 아닌 우리 기사들에게 검을 뽑아들 줄이야.. ’
혼란스러웠지만, 머릿속을 비워야했다. 비워야 만이 저 많은 기사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잡념을 가지고 검을 쥐면..
제대로 힘을 발휘 할 수 없을 테니까..
- 쩡!!!
알렌이 동시에 여섯 곳에서 쏟아진 공격을 단 번에 막아냈다. 마지막 검이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간발의 차로 몸을 비틀었다. 그와 동시에 가장 앞에 있는 기사의 허벅지를 베어버렸다.
- 서걱!!
철갑옷이 잘리는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피들이 흩날렸다.
그 다음에 벌어진 것은..
난전.
확실히 알렌의 움직임은 다른 기사들과 달랐다. 괜히 병사장 출신이 준남작의 작위를 수여받은 게 아니었다. 17년 전 이노키아 공국과의 전쟁에서 그가 이룬 활약상은 모든 병사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정도였으니까..
그래서였을까?
스무 명 남짓한 기사들과 싸우고 있음에도 전혀 밀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승부의 향방은 뜬금없는 부분에서 생겨났다.
“ 동작 그만! ”
한 아이를 들어 올린 듀라튼이 소리쳤다. 그의 검은 그 아이의 목 바로 앞을 겨누고 있었다.
“ 귀족이라는 작자가 어린 아이를 인질로 삼을 생각입니까!! ”
알렌이 흥분해서 소리치자, 비열한 미소를 지어보인 듀라튼이 답했다.
“ 어린 아이라니.. 내 눈엔 그저 쓰레기로 밖에 안 보이는데? 언제부터 천민이 인간취급을 받았지? ”
듀라튼 바라테스. 예전이면 모를까 지금은 그저 제스페르 가(家)의 개라고 불리는 가문이었다. 좋게 보진 않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타락 한지는 몰랐다.
“ 17년 전, 저와 같이 전쟁을 함께 했던 바라테스 가(家)의 사람들은 그렇게 치졸한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
“ 우리 가문의 가훈이 뭔지 아나? ”
대답을 하지 않고 그를 노려보자, 다시금 입을 열었다.
“ 살아남는 자가 정상에 서있을지니. 그게 우리 가문의 가훈이다. ”
말을 끝낸 듀라튼이 자신의 검으로 아이의 목을 살짝 베어내자, 울컥하고 피가 쏟아졌다.
“ 말을 듣지 않으면 다음엔 아예 목을 베어버리지. ”
움직일 수 없다. 자신 때문에 한 어린 아이를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알렌이 쥐고 있던 검을 놓았다.
그와 동시에..
명치가 꿰뚫렸다.
알렌의 입에서 한웅큼 피가 쏟아졌다.
“ 쯧쯧쯧.. 그러니 네가 아직 준남작 자리에 머물러 있는 거야.. 고작 이딴 천민 쓰레기 목숨 하나 구하겠다고 지 목숨을 버리다니.. ”
쓰러지진 않는다. 뚫린 명치 사이로 끝없이 피가 쏟아져 내렸지만, 남아있는 힘을 다해 버티며,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듀라튼을 응시했다.
“ 어린 아이들은 살려줘. ”
듀라튼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다 죽어가고 있으면서 대체 저 눈빛은 뭐란 말인가.. 마치 아르고스(북방의 몬스터)를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 뭣들 해!! 죽여!! ”
저 눈빛을 피하려면 방법은 하나 뿐.
완전히 무너뜨린다.
그렇게 알렌의 온 몸을 향해 수십 개의 검이 동시에 날아들었다.
- 번쩍
아주 잠깐 사이, 모든 검들이 알렌을 꿰뚫기 그 바로 직전.
일순간 그의 신형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다음 그가 나타난 곳은 몇 걸음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기에, 모두가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괜찮으세요? ”
결국 쓰러져 버린 알렌을 부축한 시드가 물었다.
“ 시.. 시드..? 방금 그 움직임은..? ”
“ 나중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선생님. ”
혹시나 했다. 설마.. 설마 곧바로 기사들을 몰고 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 했다. 계산 착오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빨리 왔었더라면..
알렌을 부축하고 있던 손에 피가 흥건했다.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 뭐야 저 녀석은? ”
워낙에 빠른 움직임이었기에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내가 알렌을 옮겼다고 생각지 못 하고 있었다. 물론 당사자인 알렌은 알고 있겠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 후우.. ”
한 명을 남기고 모두 죽인다.
그게 내가 내린 결론.
방법은..
인간에게 행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방법.
사지를..
찢는다.
“ 망자들이여..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허락한다. ”
단 한 마디. 그 한 마디로 너무나도 말도 안 되는 것들이 벌어졌다.
어둠이 드리웠다.
분명 시간은 대낮. 게다가 구름 한 점 없었음에도, 내 주위를 시작으로 칠흑 같은 어둠이 들이닥쳤다.
“ 뭐.. 뭐야? ”
“ 왜 갑자기.. ”
그 다음 벌어진 일은 아무 것도 없었던 지면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솟아오른 지면 위로..
수백 마리의 스켈레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이.. 이게 무슨.. ”
내 22번 째 삶.
언데드 왕인 ‘리치’로 살았던 그 삶.
죽은 자들의 성지인 데스로드의 왕으로 살았던 그 때의 삶.
그 때 깨우친 흑마법.
아니. 흑마법이 아닌..
그 자체.
인간 흑마법사들이 언데드의 힘을 빌려 사용한다면..
난 나 자신이 언데드 그 자체였다.
“ 으아아악!! ”
“ 살려줘!! ”
그야 말로 아수라장. 기사라고 다 같은 기사가 아니었다. 그저 이름뿐인 기사들이 태반이었고, 인원 차이도 스무 명대 수백 마리였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전투였다.
“ 끄아아악!! ”
스켈레톤의 날카로운 이빨에 모든 기사들의 사지가 찢겨나가는 데까지 단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 키에에엑!!
“ 으어...어... ”
마지막 남은 인간. 듀라튼의 주위로 수백 마리의 스켈레톤이 위협적으로 입을 쩍- 하고 벌렸다.
듀라튼. 저 자가 내가 살려두려고 했던 단 한 명의 인간이었다.
‘ 배후를 찾는다. ’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백작의 신분으로 행하기엔 무리다. 분명 배후가 있다. 그 자를 찾아내야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 거였다.
“ 모습을 거두어라. ”
또 한 번 속삭이자 언제 그 자리에 있었냐는 듯, 모든 스켈레톤들이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 으아아아!! ”
이미 공포심에 이성을 잃은 듀라튼은 주위에 있던 스켈레톤들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카라나트 홀을 향해 미친 듯이 내달렸다.
‘ 의식을 잃었군. ’
이미 알렌의 몸 전체가 피로 흥건했다. 너무 많은 양의 피를 흘렸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한다면, 진짜 목숨을 잃을 지도 몰랐다.
“ 내 부름에 응하라. ”
망설임 없이 정령을 소환했다. 내가 선택한 건..
땅의 정령왕. 노에아넨.
『 야.. 』
“ 미안. 급해서. ”
『 몇 시간 됐냐..? 다른 정령왕을 부른다고 약속까지 해놓고.. 』
“ 미안. 급해서. ”
『 아니. 그래도 그렇지.. 하루에 2번은.. 』
“ 미안. 급해서. ”
『 하.. 뭔데? 』
“ 저 사람 좀 옮겨줘. 내가 원하는 곳으로.. ”
『 고.작.그.거? 』
“ 응. 아무리 봐도 무언가를 옮기는 데에는 너만 한 게 없는 것 같아. 편안하고, 빠르고.. 다른 정령들과 달리 말귀도 잘 알아듣고.. ”
『 난 정.령.왕이지. 이동수단이 아니거든? 』
“ 알지. 미안. 급해서.. 보다시피 조금 더 지체했다간 이 인간.. 죽을지도 몰라. ”
『 하.. 』
얼굴을 구긴 노에아넨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말로해서 들을 인간이 아니었다. 몇 백 년 간 늘 그랬다. 시드와의 첫 만남은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나질 않지만, 아무래도 첫 만남부터 그랬던 것 같았다. 이 차원의 모든 자연을 다스리는 정령왕들을 이 남자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대했다. 가끔은 화가 날 정도로 막무가내였어도 미워 할 수 없는 녀석이었다. 어쨌든..
‘제타’들로 부터 우리들의 차원을 지켜주고 있는 존재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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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스페르 대공작의 영지. 카라나트 홀. 파라칸의 대저택 >>
“ 사.. 살려주십시오!!! ”
듀라튼이 넙죽 엎드리며 소리쳤다. 그러나 절규에 가까운 듀라튼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살려달라고 말하기 전에 파라칸에게 했던 말이 더 그의 머릿속에 박혀 떠나질 않고 있었으니까..
“ 그게 참말이냐? ”
파라칸이 묻자 듀라튼이 고개를 들었다.
“ 예? ”
“ 진짜 흑마법사를 봤단 말이야? ”
“ 아.. 아뇨.. 그게.. ”
“ 무슨 대답이 그래? ”“ 흑마법사는 보지 못 했지만.. 확실히 그건 흑마법이었습니다. ”
“ 흑마법은 봤는데.. 흑마법사는 보지 못 했다? ”
“ 예.. 주위엔 어린 아이들밖에 없어서.. ”
“ 오호.. 그렇단 말이지.. ”
“ 예.. 그.. 그나저나.. ”
“ 응? ”
“ 알렌이 살아있습니다. ”
“ 그게 뭐? ”
“ 그게.. ”
“ 뜸 들이지 말고 얘기해. ”
“ 알렌이 저 뿐만 아니라 파라칸 백작님까지 의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
듀라튼의 말에 파라칸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러다 다시금 옅은 미소를 지었다.
“ 아냐. 좋아. 차라리 잘 됐군. ”
“ 예? ”
“ 제스페르의 기사들과 병력을 소집해라. ”
“ 예에!? ”
“ 내가 직접 나서지. ”
진짜다.
이건 진짜였다.
바라테스 가(家)의 기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기사들.
제스페르의 병력이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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