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페이드2: 해삼위발 입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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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마지로
작품등록일 :
2013.11.15 15:04
최근연재일 :
2013.12.11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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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2.08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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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Chapter. (16) - 2

DUMMY

“미스터 페이드, 들어오시오.”


카렐 대위가 어느새 창문을 열고 아이리쉬를 불렀다. 이안이 방에 들어서자 카렐과 다른 체코군들이 장신구와 금이 가득 들어 있는 상자를 앞에 두고 조성환, 이용화와 마주보고 큰 종이를 꺼내 서명하는 중이었다. 이용화의 옆 긴 의자에는 통역관 미스터 리가 몸을 비스듬히 누인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부상당한 젊은이는 창백한 안색이 무색하게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안은 그들에게 다가갔다. 이미 양국의 사내들은 모든 조약에 서명을 끝낸 듯싶었다. 이용화는 연신 눈을 깜박거리고 있었고, 여행하는 동안 표정이라고는 별반 찾아볼 수 없었던 미스터 초, 조성환의 얼굴 역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제 체코산 무기의 공식적인 인수자가 된 것이다. 이안은 미스터 리 옆에 있는 의자를 끌고 와서 그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피로가 순식간에 몰려왔다. 어깨도 찢어질 듯 아파왔다. 하지만 쉴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아직 끝낼 일들이 산더미같이 남아 있었다. 조선인들에 대한 정산은 끝났고 개인적인 청산(淸算)의 시간이 남아 있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쉰 이안은 옆의 해쓱한 통역관을 돌아보았다.


“모든 일이 잘 끝나서 다행이군. 자네는 어서 치료 받고 상하이로 돌아가게.”


통역관은 대답이 없었다. 이안은 그제서야 고개를 돌리고 젊은이를 쳐다보았다. 젊은이는 희미하게 눈을 뜬 채 미소를 지은 표정 그대로였다. 아마도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듯 했다. 이안의 둥그런 눈이 잠시 등불 앞에서 깜박거렸다. 아이리쉬의 투박한 손이 아직 희미하게 떠 있는 조선 청년의 눈을 단단히 감겨주었다. 조선인 청년은 웃으면서 깊은 잠에, 다시는 깨지 못할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구려.”

자신의 뒤에 조성환이 서 있는 것을 본 이안 페이드는 고개를 숙이고는 성호를 긋고 몸을 일으켰다. 조성환은 이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인(武人)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있었지만 성취감과 상실감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그는 오늘 밤 강철로 된 무기를 얻고 피와 살로 이루어진 동포를 둘 잃은 뒤였다.


“미스터 초, 애초에 그대에게는 통역관이 필요 없었지요?”

이안의 물음에 조성환은 말없이 고개만을 끄덕거릴 뿐이었다. 이안은 짧게 한숨을 쉬고 계약의 마무리를 짓고 있는 이용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애초에 상하이부터 가지고 있던 의심이 저기 서 있는 미스터 리를 보면서 확실해졌습니다. 영어와 러시아어를 혼용할 수 있는 연락책을 블라디보스톡에 가지고 있으면서 굳이 통역관을 데려오고, 총잡이가 있는데도 굳이 나를 원했다는 건 말이오.”


“우리 내부에 첩자가 있습니다.”

조성환이 고개를 들었다. 가뜩이나 굳은 얼굴에 힘줘서 앙다문 입술에는 조국을 떠나온 군인의 한이 서려 있었다. 조성환은 죽은 조선 청년의 얼굴을 보며 이안에게 계속 말했다.


“북로군정서는 작년부터 임시정부의 지시를 받기 시작했소. 주변의 많은 독립단체를 아울러서 체제를 갖추었지. 수많은 용사와 지식인들이 들어왔소이다. 그리고 일본 제국의 첩자도 같이 섞여 들어왔지. 누가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었소. 모두 겉으로 봐서는 일기당천의 용사였단 말이오.”


“그래서 저 아이들을 부른 거요?”


“크게 사람들을 두 갈래로 추려냈소. 그리고 두 군데서 추천하는 인물들을 받았지. 통역관이 필요하다는 명분과 내 경호원이 필요하다는 이유였소. 당신은 애초에 모든 일을 바로잡을 사람이었고.”


“내가 해결해 주기를 바랐소?”


그가 말한 ‘모든 일을 해결할 사람’이라는 것은 이 뜻이었다. 이안은 조성환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더 이상 상하이 청방이나 러시아의 적백계에게 당한 것처럼 이용당하고 싶지 않았기에 조선인들을 도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안은 이용을 당한 것 아니던가. 순간 그는 감정이라고는 없어 보이던 조성환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죽은 청년을 보던 조성환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난 둘 다 아니기를 바랐소이다.”


입을 다문 이안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창문으로 바라본 블라디보스톡의 풍경은 어느새 어둠이 걷히는 중이었다.


***


이안은 머리가 어질 거리는 것과 동시에 발이 풀려버렸다. 휘청하면서 다리가 풀리는 순간, 옆에 있던 카렐 대위가 이안을 부축해주었다. 체코인은 아이리쉬를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괜찮소?”


“걱정 마시오. 약간 피곤해서 그렇소.”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십시오. 한쪽 발은 관에 넣어 둔 사람 같소.”


안 봐도 알 법했다. 어깨에 칼을 맞고 하룻밤을 꼬박 샌 것도 모자라 총격전을 벌이고 아비규환을 뚫고 오지 않았던가. 맘 같아서는 모든 걸 던져버리고 세상 끝날까지 잠을 청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안은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지만 카렐에게 보인 것은 찌푸린 채 이를 드러낸 야수 같은 아이리쉬의 얼굴이었다.


“바깥 공기를 좀 마시면 괜찮을 성 싶군요.”

이안은 카렐대위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조선인들을 위해 그들이 귀국할 때까지 체코군의 막사에서 머물 것을 합의 본 뒤였다. 미스터 리의 관은 상하이까지 옮겨질 예정이었고, 조성환의 안전은 체코군이 보장할 것이다. 이안은 천천히 해가 떠 오르고 있는 블라디보스톡의 항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악마 같은 밤이 지나갔지만, 여전히 도시에서는 총성이 울려 퍼졌고, 여기저기 불길 대신 검은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거래가 끝나서 다행입니다. 미스터 페이드.”

카렐이 말을 걸었지만 이안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죽은 젊은이가 맘에 걸리는 겁니까? 아니면 러시아 친구들이 걸리는 겁니까?”


“조선인들과의 거래는 확실한 거겠죠?”

뜬금없는 이안의 말에 카렐은 피식 웃더니 정색을 하고 말했다.


“수많은 당근이 말머리 위를 맴돌았죠. 하지만 먹어야 할 것이 뭔지는 말이 판단합니다. 우리는 기사의 자손이며 황금과 철의 왕의 후손이오. 세상이 바뀌었지만 무엇이 고귀한 지 본능으로 압니다.”


“그렇다면……”

이안의 말에 카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동의했습니다. 우리의 총칼은 자유를 위해 여인이 자신의 치장을 아낌없이 내놓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들의 자유가 우리의 자유요. 상하이에 가면 전해주시오. 조선의 독립을 체코의 모든 이들이 원하더라고.”


“고맙소이다.”

얼토당토않게 이안의 입에서 감사의 말이 나왔다. 카렐이 어깨를 으쓱거리는 순간, 2층의 창문에서 조성환과 이용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안은 말없이 조선인들을 쳐다보았다. 이안은 천천히 팔을 들어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조성환 역시 말없이 그를 향해 손을 들었다.


“저들과 같이 가지 않습니까?”


“내 일은 여기까지였소. 저들도 알고 있겠죠.”

다시 그들과 만난다면 이안은 떠나지 못할지도 몰랐다. 이안은 마음을 되잡았다. 이젠 그의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다른 누구에게 던져줄 수 없고, 대신할 수도 없는 아이리쉬의 일이.


“더 이상의 빚은 지지 않을 거요. 내 할 일도 남아 있고.”


“그 러시아 계집을 찾으러 가는 거요?”

이안은 카렐을 슬쩍 돌아보았다. 하늘색의 눈동자에 묘한 기운이 서려 있었고 카렐은 슬며시 시선을 회피했다. 이안은 카렐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이안의 시선은 그들 뒤에 서 있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고정되어 있었다.

“몰랐소. 태양을 받으면 목재가 저렇게 윤기가 흐를 줄은 말이오.”


“무슨 말이오?”


“어디선가 들은 말이오. 체코인들은 모든 것을 만들어낸다고. 대장간부터 신문소까지 차려놓은 사람들이니 금을 다른 걸로 바꾸는 것도 문제가 없었겠지. 하물칸 하나를 아예 금으로 만들 정도의 실력이라면 말이오.”


“그렇다면 아무도 못 알아내고 찾아 가지도 못할 테지요.”

카렐의 말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부스러기 몇 개를 꺼내 카렐의 눈 앞에 보여주었다. 나타샤와 함께 조차장에서 습격당한 밤 나왔던 열차의 파편이었다. 페인트 칠이 벗겨진 뒤쪽은 감출 수 없는 황금빛이 드러나고 있었다.


“나도 이걸 줍기 전까지는 몰랐으니 말이오.”

카렐은 히죽 웃음을 지어보였다. 나타샤의 첩보는 틀린 게 아니었다. 단지, 마지막 접근이 실패했을 뿐. 이안은 미소짓는 카렐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이건 러시아의 소유 아니오?”


“아니요. 이 금은 정당한 보수요.”


“뭐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 이안에게 카렐 대위는 정색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아이리쉬, 당신이라면 알 텐데. 나라 없는 백성으로 태어나 이유 없는 전쟁터에서 청춘을 보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이오.”


“그건……”


“내 부모와 내 땅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내 신념과 정의를 위해 싸운 것도 아니오. 우리는 우리를 지배했던 민족에 의해 대리전을 치른 용병이었소. 그들을 위해 쓰러져간 우리 젊은이들에 대해서 그들이 뭐라고 할 것 같소? 외교관들의 화려한 수사 하나로 마무리 지어지는 게 당연한 거요? 그게 만국평화의 정의인가?”


카렐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이안은 갑자기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이 다소곳한 체코 사나이가 이렇게 얼굴이 붉어지며 열변을 토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아니, 죄책감을 느끼며 은닉을 고해할 것이라 믿은 자신의 소견이 오히려 한심할 지경이었다.


“내 민족이 살 수 있는 내 나라가 세워졌소. 그 나라의 기초를 위해 우리는 핏값을 청구한 거요. 이것은 당연한 보수요. 값싼 보수지. 내 부하들, 이를 모를 산과 눈밭에서 죽어간 체코 젊은이들의 영혼을 위한 최소한의 청구요.”


“대위는 나라를 위해서라면 영혼도 팔겠구먼.”


“아이리쉬, 당신이 나라면 안 그럴 것 같소?”


뚫어져라 카렐을 노려보던 이안의 눈동자가 천천히 대위의 얼굴에서 벗어났다. 한참 동안 열차와 체코군의 막사를 쳐다보던 이안은 묵묵히 이안은 철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카렐은 뒤에서 아이리쉬의 등을 보며 소리쳤다.


“볼셰비키들은 개선문쪽으로 갔다고 들었소. 그쪽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하더군요. 미군들과 영국군이 거기서 토벌 중이라오.”


“고맙소 카렐.”


“잘 가오 아이리쉬. 행운을 빕니다.”


“그대의 여행에도 행운이 함께 하기를.”

카렐과 이안은 손을 흔들지 않았다. 단지 멀어져 가는 사내의 모습을 우두커니 보고 있는 체코 군인과 총성이 울리는 시가지 쪽으로 말없이 발을 옮기는 가죽코트의 사내가 있을 뿐이었다. 어느 새 아침의 태양이 서서히 올라와 사내들의 발 아래로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 어울리지 않은 맑은 하늘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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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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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48 구름속으로
    작성일
    13.12.08 23:10
    No. 1

    1부 부터 여기까지 한번에 질주했습니다. 한편의 영화를 보는 기분이네요. 특히 이번 파트는 독립군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지 더 가슴졸이며 봤습니다. 중요한 사건이 잘 해결되어 다행이네요. 부상당한 몸인데 다음 여정이 걱정입니다. 다음 편을 기다립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2 아몰랑랑
    작성일
    13.12.09 00:13
    No. 2

    하... 좋은 글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1 주인아저씨
    작성일
    13.12.09 17:08
    No. 3

    이분글을 읽다보면.. 온몸에서 소름이 쫙..... 한데 왜이리 사람이.......음..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1 탈혼백수
    작성일
    13.12.09 20:16
    No. 4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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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Chapter. (18) +3 13.12.11 1,317 29 13쪽
20 Chapter. (17) +3 13.12.09 1,164 36 20쪽
» Chapter. (16) - 2 +4 13.12.08 1,151 28 11쪽
18 Chapter. (16) - 1 +1 13.12.08 940 25 16쪽
17 Chapter. (15) +2 13.12.05 1,208 32 17쪽
16 Chapter. (14) +4 13.12.04 1,216 37 18쪽
15 Chapter. (13) +3 13.12.02 1,372 25 12쪽
14 Chapter. (12) +3 13.12.01 1,573 30 15쪽
13 Chapter. (11) +3 13.11.29 1,139 24 18쪽
12 Chapter. (10) +1 13.11.28 1,088 33 17쪽
11 Chapter. (9) +2 13.11.27 1,320 32 14쪽
10 Chapter. (8) +1 13.11.26 1,351 27 15쪽
9 Chapter. (7) +1 13.11.24 1,709 34 16쪽
8 Chapter. (6) +2 13.11.23 1,685 26 17쪽
7 Chapter. (5) +1 13.11.23 1,323 34 13쪽
6 Chapter. (4) +2 13.11.21 1,348 36 16쪽
5 Chapter. (3) +1 13.11.20 1,498 31 19쪽
4 Chapter. (2) +3 13.11.18 1,478 32 13쪽
3 Chapter. (1) - 2 +3 13.11.16 2,441 51 14쪽
2 Chapter. (1) - 1 +2 13.11.16 2,429 39 12쪽
1 1. Prologue +9 13.11.15 4,149 5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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