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페이드2: 해삼위발 입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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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마지로
작품등록일 :
2013.11.15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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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1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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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2.02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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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3)

DUMMY

통킹의 불멸의 군단이여

투옌광의 명예로운 깃발이여

카메론의 영웅들과 귀감된 형제들이여

무덤 속에서 안식을 누리소서


‘Le Boudin’: 프랑스 외인부대 공식 행진곡 中-




13)


코날영감은 그대로였다. 약간 취기가 오른 얼굴도 그랬고, 이안을 보고 큰소리로 형제여 어쩌고 하면서 호들갑을 떠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안 역시 싱긋 웃음을 지으며 기관실에서 내려오는 코날과 포옹을 했다.

“왜 신음소리를 내나? 묘한 취미가 있구먼.”


“어깨를 조금 다쳤습니다.”

코날이 흐릿한 눈동자로 이안과 이안의 등 뒤에 있는 러시아 친구들을 보고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냥터에 혼자 나가는 사람은 들짐승들에게 해를 당한다네.”

취한 노인의 말은 오히려 평소보다 날카로웠고, 이안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물을 찾겠다고? 표를 보여주게. 화물칸에 가서 그대로 끌고 가면 될 걸세.”

이제 블라디보스톡 역은 눈을 감고도 돌아다닐 지경이었다. 이안은 천천히 황혼에 물들어가는 역사와 그 아래 석양에 빛나는 육중한 기관차의 반사광 위로 피어오르는 증기를 쳐다보았다. 서늘한 기운은 낮의 햇볕 때문에 줄어들어 있었지만 칼 같은 바람이 옷 사이를 난도질하며 파고들었다. 무표정한 역무원과 게슴츠레한 눈의 일본군. 그리고 말없이 화물을 향해 움직이는 러시아인들의 얼굴이 강렬한 석양 아래 빛과 그림자로 나뉘어 움직이고 있었다. 흑과 백, 선과 악. 정의와 불의. 모든 것들이 사람이 움직이는 위치에 따라 천변만화하는 중이었다. 이안은 어깨가 다시 쑤시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것이 옳은 판단인지 알 수 없었다. 조선인을 돕는 것이 먼저인지 아니면 거래를 성사시키는 것이 우선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아니, 그 이전에 블라디보스톡에 온 것이 잘 된 결정인지 의문이 들었다. 며칠 전의 이안 페이드라면 그런 질문을 아예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의 다 의심스러웠다.


“문제가 있나. 해즈로우에 산다는 청년?”


“…잠깐 생각 중이었습니다.”

코날 영감은 이안의 등뒤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철도가 왜 좋은지 알아?”


“예?”


“그대로 가면 길이 나온단 말이야. 절대로 길을 잊어버리지 않아.”

이안은 코날을 돌아보았다. 영감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짓더니 품에서 뭔가를 꺼내었다. 여러 번 접은 종이쪽지였다. 이안이 종이를 엉겁결에 받아들자 코날 영감은 걸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네의 그 중국인 친구랑 연락하는 데 꼬박 한나절을 다 썼지. 꽤 재미있는 친구 같더군. 부하들도 많고, 친구들에게 잘 대하는 사람 같았어. 하지만 어두운 술집에서나 만날 친구 같던데? 대낮에 서로 마주보고 걸을 수 있는 사람 같지는 않더라고.”


“그걸 전화로 알아낸 겁니까.”

코날은 어깨를 활짝 펴고 웃었다.


“인편이 왔어, 베이징까지. 그러니까 대충이나마 아는 것 아닌가?”

아일랜드 노인의 측량못할 지혜를 뒤로 하고, 이안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 보았다. 세 명의 이름이 써 있었다. 미스터 초- 조성환, 미스터 킴 - 김철학, 미스터 리 – 이정겸.

세 명의 이름 아래 어색한 문법의 영어가 깨알같이 쓰여 있었다. 이안은 종이를 뚫어지라 쳐다보더니 천천히 자켓의 안쪽으로 메모를 넣었다. 뜻 모를 한숨이 아이리쉬의 입에서 나왔다.


“시간이 없어.”


어깨의 상처에서 부젓가락으로 찌르는 듯한 발작적인 통증이 밀려왔다. 이안은 눈살을 찌푸렸고, 그의 옆으로 유리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뒤에 있는 열 명 남짓한 러시아 청년들이 커다란 상자를 하나 마차에 옮겨 싣는 것이 보였다. 마차 위에는 어느새 나타샤가 안주인인 양 앉아 두 사내가 올라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체코군에게 갈 시간이네. 미스터 페이드.”


이안은 왼손을 슬쩍 들어 코날에게 인사를 건넸고 늙은 기관사는 그의 인사를 받고 손을 흔들었다.

“킬케니에서 나를 찾게나.”


“한 잔 사 드리죠. 킬케니에 가게 된다면 말입니다.”


“걱정 말게, 자넨 여인의 품에서 죽을 사람이니까.”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이안은 유리와 함께 넓은 짐마차에 올라탔다. 나머지 러시아인들도 같이 마차에 옮겨 탔다. 석양이 멀리 보이는 첨탑 아래로 가라앉으며 짙은 그림자가 커튼처럼 몰려왔다. 밤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안은 급작스러운 피로를 느꼈다. 몸의 상처를 돌볼 시간을 갖는 게 사치였다. 앞으로 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사람은 이안밖에 없었다. 조선인들은 거의 스스로 연금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반역자가 있다. 차라리 이 자금을 체코인들에게 먼저 갖다 주는 것이 안전했다. 그리고 난 뒤 그는 조선인들을 데리고 체코군에게 올 것이다. 계약을 체결하고 나면 끝이었다. 자신의 빚을 청산하고 나면 남은 것은……


“뭘 생각해요, 이안?”

나타샤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안의 주의를 끌었다. 그녀는 계속 뒷자리에 걸터앉은 이안을 쳐다보던 중이었다. 어둠 아래 서서히 짙어지는 붉은 머리 아래로 깜박이는 눈동자가 보였다. 그를 바라보는 여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몸이 많이 안 좋은가요?”


“버틸 수 있소.”

이안은 일부러 말을 짧게 했고, 나타샤는 아이리쉬 사내의 투박한 말에 입술을 슬쩍 오므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과한 욕심을 부려서 당신을 피곤하게 하는군요.”


“이미 결정된 일이오. 미스 레베데바, 미안하다고 하지 마시오.”

이안은 피곤하다는 듯 눈을 감았다가 잠시 뒤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모스크바로 가는 건 개인적으로 반대요.”


나타샤는 이안의 말을 듣고 슬쩍 고개를 움츠렸다가 아무 말 없이 다시 앞을 향해 돌아앉았다. 유리는 빤히 이런 모습을 보며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러시아 사내의 눈은 밤에 더 잘 보이는지 체코군의 막사가 가까워질수록 눈동자의 파란 빛이 진해졌다. 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체코군의 막사에 도달했을 때 이미 해는 떨어진 뒤였다. 많은 러시아인이 갑자기 밀려오자 체코군들은 여기저기에서 몸을 드러냈고, 연락을 받은 카렐 대위가 모습을 나타낸 것은 러시아인들이 마차에서 상자를 들어 관(棺)처럼 어깨에 멘 다음이었다. 체코군 장교는 러시아인들과 아이리쉬를 번갈아 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게 뭡니까? 미스터 페이드?”


“조선인들이 이야기한 계약금 선급이오.”

러시아인 패거리를 마뜩잖은 눈으로 한참 노려보던 카렐은 내키지 않는다는 몸짓으로 상자를 나르는 러시아인들을 건물 안으로 들여보냈다. 철문이 열리고 상자를 든 러시아인들이 마치 배를 나르는 바이킹처럼 움직였다. 그들의 뒤를 이안과 유리, 나타샤가 뒤따랐다.

가로등불이 희미하게 밝아지기 시작했고, 체코군 주둔지는 마치 무덤처럼 조용했다. 주둔지뿐 아니라 블라디보스톡 전역이 쥐죽은 듯 조용했다. 어두운 동토의 도시는 밤과 침묵이 같이 내려왔고, 그 침묵은 어두움 사이에서 체코군의 집무실과 사람들 사이를 한껏 누비고 다녔다. 모르는 사람이 멀리서 본다면 종교의식을 거행하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의 광경이었다.


“좋습니다. 열어보시죠. 열쇠는 있습니까? 조선인들을 기다릴까요?”


“내가 대행이오.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카렐이 흘끗 이안과 그 뒤에 서 있는 유리와 나타샤를 쳐다보았다. 체코군 장교 얼굴엔 경계심이 가득했다. 이안이 카렐과 나타샤의 시선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들은 이와 별도의 거래를 원하고 있소. 당신들에게 무기를 사고 싶다는 구려.”


“볼셰비키요?”


“황제파요.”


“백군이라고?”

유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


“그대들과의 과거는 접어둡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당신이 가지고 있으니.”

카렐은 나타샤와 유리를 묘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윽고 그는 짧게 체코어로 병사들에게 뭔가 지시를 내리고 다시 이안을 쳐다보았다. 일전에 보았던 심상한 눈빛, 직업군인의 눈으로 다시 되돌아간 눈이었다.


“일단 다른 계약은 다음의 이야기고 먼저 계약금부터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라돌라 가이다 장군이 제게 위임하신 일입니다. 미스터 페이드, 당신이 조선인들에게 일을 위임받은 것처럼 말이오.”

나에게 일을 위임한 자들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난 모른다오. 이안은 자기 생각을 들킬세라 재빨리 주머니에서 번호표와 같이 받은 열쇠를 두꺼운 나무궤짝의 자물쇠에 넣고 돌렸다. 꽤 험한 고생을 한 물건인 듯, 자물쇠는 삐걱거리며 녹을 털어내고 천천히 닫힌 빗장을 풀어내었다. 이안은 상자를 들어 올리고 카렐 대위와 함께 내용물을 확인하였다.

순간, 이안은 조용히 서서 상자 안의 내용물을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성모님이시여.”


카렐 대위의 입에서 신음인지 탄성인지 모를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이안은 상자 안의 내용물에서 여전히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금반지들, 그리고 길죽한 금으로 된 핀, 보석이 장식된 노리개들, 금과 은으로 유려한 조각이 새겨진 작은 칼……모두 고유한 귀태를 내고 있었지만 분명 누군가의 손을 타고 누군가의 옷에 장식되어 있던 물건들이었다. 보물들은 고관대작과 왕족의 수집품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조악해 보였으며 서민들이 일반적으로 차기에는 너무나도 값져 보이는 것들이었다. 그야말로 가보(家寶), 혹은 누대에 걸쳐 애지중지 보관해 온, 가문의 성쇠가 기억되는 물건들일 것이었다. 그런 물건이 상자 가득히 들어 있었다.


“여인들의 물건이군요.”


“…가문의 긍지들일 거요.”


카렐의 말에 이안은 가까스로 대답하였다.

몇 명이 모았을지, 몇 명에게 얻어냈을지, 어떻게 모았는지 이안은 알 도리가 없었다. 금은 번쩍이며 빛을 내건만 세월에 의해 문드러진 노리개의 문양들이 납보다 무겁게 상자 안을 채웠고, 벽안의 아이리쉬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표식으로 뇌리에 새겨지는 중이었다. 가슴 어딘가에서 무거운 것이 내려와서 그의 발과 시선을 한 곳에 묶어 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카렐 대위가 노리개 하나를 집어 들더니 이안을 당혹스런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걸 어찌 받으란 말이오? 우린 군인이지 마적이 아니오.”


“그들이 마련할 수 있는 유일한 자금일거요.”

“하지만 이건……”


“그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겠지요.”

카렐은 장신구를 잠시 손으로 쥐더니 뭔가 북받치는 듯 눈을 꾹 감았다. 이름 모를 여인들의 정성에 감격한 것인지, 이국적인 장신구가 먼 곳에 떨어진 자신의 고향을 떠올리게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안은 애써서 그와 그 앞에 놓인 패물들에서 눈을 돌렸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나타샤의 눈이 이안을 좇았다. 나타샤 역시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나타샤는 자신의 앞에 놓인 상자가 안 믿긴다는 듯 천천히 체코군과 아이리쉬 앞으로 다가왔다.


그 때였다. 갑자기 붉은 잔광이 이안의 눈 앞을 스쳤다고 느꼈을 때, 나타샤의 몸이 카렐의 뒤에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나타샤의 권총이 카렐의 머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이안의 눈이 커졌다.


“나타샤!”

동시에 러시아인들의 손에서 모두 권총이 뽑혔다. 유리 역시 한 손으로 권총을 뽑아 든 채 그 주변에 있는 체코군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안 역시 권총을 뽑아들고 유리의 머리를 겨냥했다. 그러나 유리는 이안을 쳐다보더니 씩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이리쉬, 늦었어. 대위의 머리가 날아가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당장 무기를 내려놓게, 나머지들도 마찬가지야! 무기를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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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pilogue (完) +18 13.12.11 1,814 38 13쪽
21 Chapter. (18) +3 13.12.11 1,317 29 13쪽
20 Chapter. (17) +3 13.12.09 1,164 36 20쪽
19 Chapter. (16) - 2 +4 13.12.08 1,151 28 11쪽
18 Chapter. (16) - 1 +1 13.12.08 940 25 16쪽
17 Chapter. (15) +2 13.12.05 1,208 32 17쪽
16 Chapter. (14) +4 13.12.04 1,216 37 18쪽
» Chapter. (13) +3 13.12.02 1,373 25 12쪽
14 Chapter. (12) +3 13.12.01 1,573 30 15쪽
13 Chapter. (11) +3 13.11.29 1,139 24 18쪽
12 Chapter. (10) +1 13.11.28 1,088 33 17쪽
11 Chapter. (9) +2 13.11.27 1,320 32 14쪽
10 Chapter. (8) +1 13.11.26 1,351 27 15쪽
9 Chapter. (7) +1 13.11.24 1,709 34 16쪽
8 Chapter. (6) +2 13.11.23 1,685 26 17쪽
7 Chapter. (5) +1 13.11.23 1,323 34 13쪽
6 Chapter. (4) +2 13.11.21 1,348 36 16쪽
5 Chapter. (3) +1 13.11.20 1,498 31 19쪽
4 Chapter. (2) +3 13.11.18 1,478 32 13쪽
3 Chapter. (1) - 2 +3 13.11.16 2,441 51 14쪽
2 Chapter. (1) - 1 +2 13.11.16 2,429 39 12쪽
1 1. Prologue +9 13.11.15 4,149 5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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