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네 죄를 네가 알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1)
느닷없이 방으로 찾아온 하엘의 존재에 리엔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리엔이야 항상 류에게 괴롭힘 당하느라 하엘과 대화를 나눌 일이 없을뿐더러, 하엘 역시 레안에게 맨날 반항하다 맞는 리엔에게 관심이 없는 지라 그들의 관계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며칠 전에 구슬 줍지 않았나?”
딱 구슬이 들어있었던 주머니를 빤히 바라보며 하엘이 물었다.
“알아서 뭐하게?”
구슬이란 말에 움찔한 리엔이 뚱하니 답했다. 애초에 줍던 말던.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텐데.”
싸늘한 미소를 지은 하엘이 짙은 살기를 흘렸다. 그 심각한 분위기에 리엔이 움찔하며, 검을 빼들려고 했지만 그조차도 여의치 않았다. 순식간에 심각해진 상황에 카엘과 하륜 역시도 굳은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로 강한 기운이라니.
“구슬은 어떻게 했지?”
“뭐, 깨졌어.”
네가 주웠지, 란 말에서 순식간에 네가 주운 거 아니 어쨌어, 로 변한 하엘의 질문에 리엔이 반항스런 표정으로 답했다. 그에 하엘의 기운이 더욱 짙어지며, 리엔의 목을 조르다가 이내 사라졌다.
“빌어먹을.”
어쩐지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지난 밤 느낀 미묘한 기운도 그렇고, 갑자기 급하게 떠난 레안도 그렇고.
분명 레안은 구슬이 깨지자마자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터였다. 그리고 그 원인이 리엔이라는 것을 알고, 뭔가를 위해 떠났을 것이었다.
“며칠 전 레안이 와서 뭐라고 했지?”
하엘의 질문에 하륜과 카엘의 시선이 리엔을 향했다. 레안이 떠나기 전 리엔에게 왔었다는 사실은 그들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 그걸 알아서 뭐하게!”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말하는 게 좋아.”
나른한 듯 명백한 살기를 담아 하엘이 위협어린 어조로 말했다. 움찔한 리엔이 친구들의 압박 담긴 시선을 받으며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그냥 혹시 구슬 주웠냐고, 어디서 어떻게 주웠으며, 왜 깨졌냐고 물어 봤어. 그리고선 가지고 있는 조각 있으면 내놓으라기에 준 것 뿐이야.”
단지 그뿐이라면 리엔이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리엔의 친절한 설명에도 하엘의 살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당장 옷 입어. 떠날 거니까.”
깔끔한 명령에 리엔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쯤 되자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하륜이 나섰다.
“저희는 황실 기사단 소속입니다. 레안 님의 명령 없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멍청한 인간 놈들. 그 구슬은 전대 용족 수장의 기억과 힘이 담긴 것이야. 용족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물건이기도 해서, 하나라도 사라지면 균형이 일그러지지. 그것을 네가 깨뜨린 것이고.”
으엑.
저게 무슨 말이야.
순간 이해할 수 없음에 리엔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륜과 카엘 역시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듯 했다.
“그것이 어째서 리엔에게?”
“흥, 우연히 어떤 미친 흑마법사가 훔쳤는데, 그걸 저놈이 덜컥 주워 버린 거지. 보통 용족의 보물을 훔친 인간은 그대로 죽여도 무방하지만, 보아하니 쓸데없이 착한 우리 레안이 저놈 살리러 혼자 용족 수장을 보러 간 것 같으니 가서 말리는 수 밖에.”
“레안 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구슬을 깨뜨린 것은 용족의 세계에서 엄청나게 큰 죄야. 어설프게 도난당한 용족 하나도 잃어버린 죄로 모든 능력을 봉인 당하고, 지하 깊숙이에 갇혀 죽을 때 까지 잠만 자는 벌을 받았으니까. 착각이길 바라지만, 어쩌면 레안은 자신이 대신 그 책임을 지려 하는 것 같고. 그러니 저녀석을 두고 간 거겠지. 알았든 몰랐든, 네놈이 잘못한 거니, 네놈이 책임 져. 설사 네 놈이 죽는다 해도 난 상관없지만, 레안이 슬퍼하니 최소한 죽지는 않게 도와주지.”
“윽, 그, 그걸 어떻게 믿어!”
물론 그전날 자신을 찾아온 레안의 표정이 참으로 심각해서 뭔가 큰 잘못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저건 생각 이상이었다. 그리고 뭔가 저 하엘이라는 존재가 수상하기도 했고.
“그전에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 상황에 거짓말을 하겠니, 란 마음을 담에 우선 카엘이 리엔의 입을 막았고, 하륜이 정중히 물었다. 대충 정황 상 하엘이 용족인 것 같긴 했지만 정확한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고, 초초초초 귀여운 레안의 아.빠.”
아.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카엘도 잠깐 패닉에 빠졌다.
하긴, 뭔가 수상하다 했지. 유난히 레안을 좋아하면서 헤벌레 하는 것이.
“그러니 당장 짐 챙겨. 레안이 혼자 독박 쓰기 전에 가야 할 테니까.”
“이거 꿈은 아니겠지?”
그냥 단지, 눈에 보여서 슬쩍 주웠다가 실수로 깨뜨린 거 뿐인데. 상상을 초월하는 심각성에 드물게 리엔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왠만한 일이면 가볍게 넘어가며 위로를 해주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럴 수가 없었다.
리엔이 죽던, 아니면 레안이 평생을 지하에 갇혀 지내던 해야 하는 상황인지라 그저 나오는 것은 한숨 뿐이었다.
도대체 어쩌자고.
역대 최고의 사고였다. 아마 몇 년이 흐르더라도 절대 이 사건을 잊지 못하리라. 그것도 좋게 해결 됐을 경우고, 그게 아니라면. 상상하는 것도 끔찍했다.
최대한 빨리 준비를 마치고 황성 담을 넘어 몰래 나온 그들의 앞에는 레안의 아버지인 하엘, 아니 하르시안 말고도 낯익은 존재 하나가 더 있었다. 예전 레안의 정혼자라면 속이고 쳐들어온 레안의 삼촌, 세이렌이라는 용족이.
보자마자 그가 자신들에게 한 행동이 떠올라 리엔이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분위기 상 짜져 있어야 하는지라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반성하지?”
역시나 언제 들어도 참 재수 없는 말투에 리엔이 움찔했다. 그러나 세이렌이 말한 대상은 리엔이 아니라 하르시안이었다.
“뭐?”
“기껏 여기까지 와놓고 한 일이라곤 구슬이 깨지는 것도 모르고 놀고 있다 이제야 아는 꼴이라니. 형님, 부끄럽지 않습니까? 그래 뵈도 청룡족 수장이라는 존재가?”
딱 봐도 시비 거는 것이 분명한 세이렌의 말에 하엘이 빠직했지만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분명 자신의 잘못도 있었으니까.
자신이 조금만 빨리 조사해서 조금만 빨리 알아챘다면 구슬이 깨지고, 그것 때문에 레안이 나설 일은 없었을 테니까.
물론 아무리 원인이 구슬을 잃어버린 멍청한 흑룡족에게 있다고 해도.
- 작가의말
그 구슬이 그 구슬이었어.
이럴 땐 흔히 뭐 된 거죠...
그보다 총집합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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