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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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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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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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7.30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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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17

DUMMY

"실례했습니다."


당혹스런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김석하가 사과를 하더니 결국 김체건과 함께 내려올 기미가 보이자 최석정은 백광현을 보채어 서둘러 재산루를 나섰다. 밖으로 나와보니 홍만종이 보이지 않았다. 예닐곱번을 소리쳐 부른 후에야 2층 김석하가 있던 반대편 바깥난간에서 홍만종이 얼굴을 내밀었다.


고리타분한 서책들 틈새에서 퀴퀴한 냄새를 맡아보며 가장 낡은 책들만 골라서 책을 들춰보던 홍만종은 생각보다 일찍 재산루를 나서는 것이 유감스러운지 몇번이고 서가를 두리번거리며 뒤따랐다. 손을 뻗어 책장을 툭툭 쓰다듬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책장 모서리에 패인 칼자국에 손끝이 걸려 가시에 찔리기까지 했다.


그는 바로 품안에서 침통을 꺼내어 침끝으로 가시를 빼내고는 의아한 눈길로 재산루를 돌아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붓과 칼, 책과 활이 공존하는 공간이라니.


더 이상한 건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는 김석하란 어린 녀석의 걸음걸이였다.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보폭이 일정했다. 부단히도 수련한 무인처럼. 그런데도 어느 책이 어느 책장 어느 자리에 있는지 훤히 꿰는 것처럼 척척 찾아냈다. 분석 좋아하는 서종태가 같이 있었으면 그 날카로운 눈썰미로 이런저런 분석을 했을 터였다.


왜 이렇게 늦었냐는 힐난을 받으며 홍만종은 재산루 바깥으로 나와 최석정과 백광현에게 고개를 넙죽 숙였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김석하의 동선을 두눈으로 좇았다.


사실은 홍만종 자신만 호기심을 느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최석정 역시 수레에 몸을 실으면서도 그 눈길은 쇠꼬챙이처럼 김석하에게 꽂혔다. 제법 면식이 있어보이는 체건이란 머슴을 데리고 있는 탓일까.


수레가 출발하려는 순간 김석하는 체건과 함께 문밖으로 배웅을 나오더니 성한 왼손에 축축한 삼베로 감싼 나뭇가지를 들고 나와 최석정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뭔가 이건?"

"근화槿花입니다. 재산루에 오신 기념으로 드리는 선물입니다."


근화槿花(무궁화)라니. 최석정은 힐끗 근화가지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잎은 떨어지진 않았지만 꽃은 지고 없었다. 태고적부터 조선의 숨결과 함께 면면히 명맥을 지켜온 꽃이었다. 고대의 제사장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바치던 하늘의 꽃. 그 신성한 꽃이라 하여 집집마다 담장 아래에 심어두면 희고 붉은 다섯개의 꽃잎이 길다란 노란 꽃술을 머금고 피어나지만 향기는 쉽사리 맡을 수 없는 꽃.


"고맙네."


최석정이 별 생각없이 받아들자 체건이 석하의 어깨너머로 불쑥 손가락을 뻗어 참견했다.


"그거 향기 나면 큰일 나요."

"뭐?"

"체건아!"

"그런 게 있어요."


말하지 말라고 김석하가 얼른 눈치주자 체건은 쿡 웃음을 빼어물고 얼렁뚱땅 얼버무렸다. 최석정으로선 찜찜하긴 해도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근화에 향기가 있던가?"

"없죠. 그러니까 있으면 큰일난다구요."

"별 소릴 다하는구나. 누가 들으면 독이라도 있는 줄 알겠구나."


최석정은 싱거운 소리를 하는 체건을 힐끗 노려보았다. 김석하와 체건은 서로 의미심장한 눈을 주고 받으면서 장난치듯 옆구리를 찌르고 피하는 참이었다. 향기가 없는 꽃이기도 하지만 독도 없는, 오히려 병을 치료할 때도 쓰이는 치유의 꽃을 두고 무슨 소릴 하는 건지.


"거봐라.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래도."


김석하는 민망하였는지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체건에게 눈을 흘겼다. 그런 김석하에게 체건은 혀를 낼름거리고는 살짝 방어하듯 몸을 틀었다. 마침 주먹이라도 날아가려 하였는지 김석하는 그저 힘껏 꽉 쥔 왼손을 부르르 떨었다.


상당히 친밀도가 높아보이는 모습에 최석정은 다시 한번 백광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뭐가 그리 켕기는지 백광현은 아까부터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터였다. 아마 재산루를 나서는대로 득달같이 추궁당할 것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자네 이름이..."

"김석하입니다. 식암공 대신 여기 재산루의 관리를 맡았습니다."

"김석하."

"예, 아까는 워낙 편찮아 보이시기에 미처 인사를 못드렸습니다."


김석하는 편찮아 보인다는 단어에 은근히 씁쓸한 눈빛을 띠었다. 불편해 보인다는 말을 하려다가 중의적인 어감의 편찮아보인다는 말로 에둘러 말한 것이었다. 젊은 나이에도 경천동지할 학식을 쌓은 덕에 왕의 신임이 두텁다고 들었기에 흠모의 정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재산루와 자신을 기피하는 모습을 보니, 어쩌면 적이 될 것도 같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허면 이만..."

"예. 안녕히 가십시오."

"나으리.."


최석정은 김석하의 배웅을 받는 것도 불편했다. 김석하의 등뒤에서 체건이 아쉬운 얼굴로 인사하는 모습에 발길이 채 떨어지진 않았지만, 김석주와는 같은 공간에서 있는 것도 껄끄러웠다. 그가 들이마시고 내쉬는 공기마저도 검어보일 지경이었다. 재산루에서 미적거리다간 김석주의 눈에 띌지도 몰랐다. 자신이 다녀간 일이 귀에 들어갈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그런 김석주를 대신해서 재산루를 관리한다? 일개 마름이 아니라 청풍김가의 혈통이란 사실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힐끗 고개를 뒤로 돌려 김석하와 체건의 모습이 멀어지고서야 그는 바로 홍만종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잠시만 비켜주겠나?"


홍만종은 최석정이 자신을 잠시 따돌리고 백광현과 긴한 얘기를 하려는 것을 눈치챘다. 무슨 일일까. 아까부터 김석하와 그 머슴을 대면하고 최석정이 부쩍 당황하는 느낌이었다. 특히 김석하의 머슴과 안면이 있나 싶더니, 그 머슴을 데리고 있는 김석하를 향한 경계심에 발톱을 세운다 싶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무슨 사정이 있을 지도 몰랐다. 이렇게 자신을 멀찍이 치우고 은밀한 얘기를 하려는 것을 보면. 홍만종은 호기심에 콧등을 찡긋거리고는 애써 마른침을 삼키고 걸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예."


홍만종이 수복과 함께 잠시 자리를 피해주자, 최석정은 백광현에게 차분한 음성으로 자초지종을 캐어물었다.


"이제 말씀해 주시죠."


백광현은 난감한 얼굴로 안면근육을 한참을 움찔거렸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소리를 치는 것도 아닌데, 바닥 깊은 우물에서 길어올린 시린 우물물 같은 음성이라 귀로 듣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처졌다.


"지금 남인세상이잖나."


백광현의 첫마디였다. 최석정은 미간을 찡그렸다. 지금 남인 세상인 것이, 체건이 김석주의 재산루에 있는 것과 무슨 상관이라는 걸까.


"종부법으로 바뀌면서 체건이놈이 사노비가 되어, 바로 김석주의 수중에 들어간 게지. 김석주는 체건이놈을 말 한마리 값을 주고 사서 김석하의 노비로 증여한 거고."

"..."


최석정은 기가 차서 입이 떡 벌어졌다. 말 한마리 값. 준마 한마리면 노비 여럿을 살 수 있다. 김석주는 일부러 말 한필씩이나 주고 체건을 사들여서, 김석하에게 노비로 줘버렸다. 이게 무슨 뜻인가. 체건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심보가 아닌가. 왜 왕의 사람을 자신이 데리고 있는 건지.



"하지만 영감님의 친척이 데리고 있..."

"그놈도 한패고."

"..."


하긴 김석주가 거느리고 다니는 것만 봐도, 백광현의 친척이라는 백광보란 자는 김석주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손아귀에 체건이 넘어간 사실이 최석정은 안타까웠다. 깊게 인연을 맺은 것은 아니지만, 묘하게도 송동에서 뿌리깊은 유대감을 나눈 느낌이었기에 더욱. 그는 조바심이 나서 백광현을 다시 한번 힐난하듯 물었다.


"전하께서도 아시고 계십니까?"

"아시지. 헌데 내버려 두라고 하셨으이."


최석정은 귀를 의심했다. 내버려 두라고 하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왕실에서 몸값을 내어주지 못할 만큼 형편이 열악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방치한다는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예에? 말한마리 값이면 그냥 내구마 한마리라도 바꿔주시면 될 일을..."

"김석주가 왜 체건이 놈을 눈독들였겠나. 전하의 측근이라서지. 전하께선 혹시 모르니 그냥 체건이 놈을 김석주 밑에 두고 보자는 거고."

"..."

"봐서 체건이 놈이 어느 편에 설 지는 아무도 모르이."

"전하께선 아무도..못 믿으시는 거로군요."


최석정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왕이 직접 거리에서 데려온 아이였다. 아무리 왕실에 재정이 빈약해도 고작 말 한마리가 없어서 데려오지도 못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왕에겐 믿음이 없었다. 최석정 자신은 믿을까, 백광현 영감은 믿을까. 그나마 왕이 자신에게 보여준 신뢰의 눈빛과 말들이 한마디한마디 가슴에 박혀있었는데. 갑자기 가슴에 날아든 돌이 그 박힌 돌을 빼내려 한다.


어떻게 자기 사람을 믿지 못해서 데려오지도 못한단 말인지.


"너무 걱정 말게. 그래도 전하께선 자네는 믿고 계시니."

"..."


최석정은 가슴이 떨리는지 손으로 꾹꾹 눌렀다. 참으로 자신의 어린 주군은 불쌍한 존재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온전히 마음 붙이지도 못한다. 그나마 백광현과 자신에게 특별한 믿음을 보이지만 그 믿음은 깨끗한 백자에 담긴 물처럼 투명하고 온전할까. 오히려 물을 담은 그 백자처럼 깨어지기 쉬운 건 아닐까.


그렇다고 체건을 너무 쉽게 놓으신 건 아닐까. 아니 놓지 않은 건가. 머릿속이 순식간에 뒤엉키는 느낌이었다. 놓은 건지, 잡은 건지. 헌데 머릿속이 뒤숭숭한 최석정의 귓가에 백광현이 또 쌩뚱맞은 한마디를 툭 내뱉았다.


"석하 그놈 괜찮아."

"네?"


이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지. 최석정은 앞뒤 잘라먹고 자기 하고 싶은 얘기만 하는 백광현식 설명을 머릿속에서 이어 붙이려고 스스로 팔다리를 힘껏 뻗어야 하는 느낌이었다.


"그놈 괜찮다고. 그러니깐 전하께서 체건이를 도로 데려오려면 석하 그놈도 함께 데려오는 거고, 아니면 같이 팽하는 거고."

"..."


최석정은 미간을 찡그렸다. 의술 외엔 딱히 관심없는 듯한 백광현이 김석하란 녀석을 주목한다. 아무래도 체건이 그 밑으로 머슴으로 들어갔을 때부터 친분을 맺고 지내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왕도 백광현과 체건을 통해 김석하란 녀석을 관찰하는 중일지도 모르겠고.


"영감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면, 평범하진 않겠군요."

"뭐, 아직은 애지. 그냥 애야."

"네에?"


최석정은 되묻듯이 답하고는 이내 머릿속으로 자신이 보았던 김석하의 용모를 떠올렸다. 까무잡잡한 살갗, 콧잔등에 귀엽게 어린 점, 하지만 자신은 잘못보지 않았다. 홍단딱정벌레의 등껍질 같은 눈동자. 그 심지 단단해보이고, 조금은 잔인해 보일 수도 있던 그 눈동자는 이상하게도 께름칙했다.


"말 좀 섞어보지 그랬나. 자네가 아주 이뻐할 만한 녀석인데."

"퍽도."

"정말일세. 자네가 이뻐할 만한 놈이래도."

"..."


최석정은 더는 대꾸하지 않고 입맛을 쓰게 다시며, 재산루쪽을 뒤돌아보았다. 이제는 먼빛으로 조금 푸르게 느껴질 만큼 거리가 있었다. 헌데 왜들 저 재산루에서 시꺼먼 먹물 냄새만 맡으면 하나같이 속도 시꺼멓게 되는 건지. 자세히 말은 하지 않고 얼렁뚱땅 눙치기만 한다. 그런데 그럴수록 왠지 괜히 놀림받는 기분으로 자존심이 뭉개지며 오기가 난다. 명색이 이립而立을 넘어선 나이에.


최석정은 재산루를 보고 나니 변변한 장서각도 없는 자신의 집이 문득 그리워졌다. 며칠동안 성균관 약방에서 신세를 졌더니 더욱 집 생각이 간절했다. 하필이면 다모들 외엔 여인들의 출입이 금해진 성균관에서 와병생활을 하려니 갑갑했다.


"백영감님, 그냥 이대로 집에 가면 안될까요? 어차피 성균관 약방에선 자리만 차지하지, 치료는 어의영감께 받으니 말이지요."

"자네가 집에 가면 수발은 누가 하고? 임신한 자네 처가 하고?"

"하긴, 오히려 처를 힘들게 할 수도.."

"전하께 말씀드려서 의녀 하나 붙여주면 되겠나?"

"네?"

"뭐, 자네도 집이 그립긴 할테지."

"..."

"집에 가면 그 근화가지나 잘 심어놓게나."


뭐가 그리 우스운지, 백광현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쿡쿡 웃으면서 말했다. 이쯤 되니 최석정도 왠지 돌조각을 씹은 느낌이 들었다. 더는 씹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삼킬 수도 없고, 차라리 입을 열어 뱉어버리면 입안이 개운해질 것만 같은.


"아니 아까부터 왜들...이 근화가지에 특별한 의미라도 있습니까?"

"모르지 그거는."

"영감님!"

"이보게! 얼른 와서 최봉교 좀 데려가게나!"


백광현은 버럭 소리지르는 최석정을 피해 건너편에서 기다리는 홍만종에게 손짓하며 소리쳤다. 체건이나 백광현의 태도로 봐선 딱히 무슨 추잡하거나 흉악한 일은 아닐 것만 같았다. 단지 서로 자기들만의 묵계가 되어있는 모양이었다. 최석정은 어쩐지 찜찜한 느낌 그대로, 어쩐지 소외된 기분으로 할 수 없이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최석정이 집에 돌아오니 그의 처 경주이씨가 눈물어린 눈으로 최석정이 타고 온 수레를 반겼다. 관리들이 타는 남여도 아니라 짐짝이나 싣는 수레를 타고 돌아왔으니 가슴 속이 진탕될 수 밖에 없었다. 임신초기라 유난히 예민해졌던 신경끝이 한순간에 긴장이 탁 풀리는 느낌도 들었다. 최석정의 딸, 아들도 며칠간 아비가 보고 싶었는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달려나왔다.


"아부지!"

"아버지! 이제 안 아프시어요?"


눈물을 글썽이며 큰딸이 최석정의 허리춤을 잡고 물어왔다. 워낙 맑은 눈망울에 깊은 걱정과 불안을 담고 말하니 최석정은 더욱 가슴이 뭉클했다. 사실 임신한 처보다도, 그 뱃속의 아기보다도, 당장 눈에 밟혔던 건 이리 사슴같은 눈망울을 한 어린 딸과 아들놈이었다.


"저리 깜찍한 따님이 있으셨군요. 제 막내놈 또래 같은데."

"..."


홍만종의 말에 최석정은 힐끔 흘겨보곤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사돈 맺자는 소리가 나올까봐 겁이 덜컥 났다. 주인에게 얽매인 천민들이나 시집장가를 늦게 가지, 양반들이나 중인들은 으레 열두어살만 되면 일찌감치 알음알음으로 혼처를 알아보는 터였다. 그나마 조부 최명길에 대한 반감이 조성되어 마땅한 혼처 알아보기도 힘든 최석정이었지만, 벌써부터 어린 딸의 혼처를 알아보려 안달하고 싶진 않았다. 아무리 상대가 생명의 은인이어도.


"하기야 여기저기서 서로 달라고 난리들이겠습니다. 저리 인물이 빼어나니."


최석정은 대꾸는 않고 메마른 손가락으로 딸아이의 손가락끝을 쪼물거렸다. 딸아이도 오랜만에 잡아보는 아비의 손이 좋아서 마냥 헤실거리는 참이었다. 그렇게도 아비가 좋은지. 아비의 얼굴이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수복이 수레에서 근화가지를 줏어서 가져오자 이내 열두살 딸아이는 한눈을 팔아버렸다.


"나으리, 이거요."

"아..깜빡 했으이."

"아버지, 그게 무엇이옵니까?"

"근화란다. 가지만 흙속에 심어놓아도 잘 자라지."


최석정의 설명이 이어지려는데, 이미 어린딸은 손을 뻗어 젖은 삼베로 감싼 근화가지에 달린 잎파리를 손끝으로 톡톡 쳐보면서 함박 웃어버렸다.


"제것이옵니까?"

"어?"


최석정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김석하란 놈이 자신에게 재산루 방문기념으로 준 것이지만, 굳이 담벼락 아래에 심을 생각은 없었다. 괜스레 말을 빙빙 도리며 웃기만 하고 속사정은 속시원히 밝히지 않는 체건과 광현 때문에 어쩐지 내키지도 않았다.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수복에게서 근화가지를 받아들었다.


"얼른 주시어요. 소녀가 심겠사옵니다."

"..."


딸아이가 호수같은 눈을 똘망똘망 반짝이며 조막손을 내밀었다. 최석정은 매번 딸 앞에서 지는 느낌으로 근화가지를 내밀었다. 지금까지 딸아이가 글을 가르쳐 달라면 가르쳐 주고, 셈을 가르쳐 달라면 가르쳐 주었다. 산가지를 달라면 산가지를 주고, 붓을 달라면 붓을 주었다. 하고 싶은 대로 오냐오냐하며 그 응석을 다 받아준 그였다. 별 생각 없이 내어준 근화가지를 딸아이는 최석정의 손에서 신이 나서 받아들었다.


"심고 올게요!"

"..."


얼른 돌아서서 마당으로 달려가는 딸아이의 뒷모습을 백광현이 의미심장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3년만 있으면 여기저기서 서로 데려가겠다고 아우성을 칠 정도로 꽃처럼 어여쁜 아이였다. 왕을 오랑캐에게 무릎꿇린 매국노라느니 배덕자라느니, 간인이라느니, 온갖 오명을 뒤집어쓴 최명길의 후예라 해도, 당장 지금 최석정이 왕의 신임을 한몸에 받는데다, 장차 화용월태의 미모를 보이기만 한다면야, 서로들 데려가려고 하지 않을까.


"딸아이가 몇살이랬지?"

"그건...알아서 뭐하시게요?"

"그냥 궁금해서...나중에 좋은 혼처 소개시켜줄 수도 있고."

"열둘입니다."

"음..."


뭔가 한두마디 더 할 것 같더니 백광현은 힐끗 홍만종을 쳐다보곤 아무 말도 없었다. 능구렁이 한마리 삶아먹은 듯한 모습에 최석정은 그를 흘겨보곤 자신의 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딸아이는 주방에서 깨진 놋그릇 뚜껑 하나를 집어다가 열심히 담장 아래의 흙을 파서 근화가지를 파묻는 참이었다. 앙증맞은 손으로 어찌나 열심히 흙을 톡톡 두드리는지, 아무리 자신의 딸이지만 하늘에서 실수로 내려보낸 꼬마 선녀가 아닐까, 그런 착각도 잠시 들었다. 정말 이제부터라도 슬슬 딸의 혼처를 알아봐야 하나. 한 3년여를 물색하다 보면 좋은 신랑감을 구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최석정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열두살, 아직은 천천히 또 천천히 알아보고 싶었다.



"몸은 이제 다 나았소 사부?"


열흘이 지나서야 녹단령으로 의관정제하고 편전에 나선 최석정을 숙종은 두광만 곁에 두고 가만히 윤대하여 정겹게 물어왔다. 최석정은 자신이 여태 왕에게 운서를 바치지 못한 것을 잊지 않고, 무릎 맡에 운서 및 부록 합본 인쇄본을 가지런히 놓아둔 채로 납작 엎드린 채였다.


"예 전하. 염려해주신 덕분이옵니다."


자신처럼 품계도 관직도 낮은 녹단령 신세가 이토록 살뜰히 어의와 의녀의 간병을 받기도 드문 일이었다. 최석정은 어쩌면 후사를 이을 수도 있겠다는 백광현의 놀림조의 축하인사를 들으면서 집을 나선 터였다.


"사부를 이토록 애먹인 그 운서나 좀 봅시다."

"예 전하."


최석정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김두광에게 운서를 건네었다. 두광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인쇄본을 받아들어 숙종에게로 가져왔다. 고개를 조아리고 공손히 인쇄본을 바치면서도 내심 궁금하여 입을 꼬물거리면서.


"어디 볼까..."


숙종 자신도 이미 다섯살에 효경을 뗀 천재였다. 열네살에 통감과 같은 사서를 신료들과 자유자재로 논할 만큼 엄청난 학식을 쌓은 데다, 지금도 열일곱 나이답지 않게 주역에 대한 깊이는 신료들에게 밑지지 않았다. 천부적인 영민함도 있었지만, 집요하고 끈기있게 학구열을 갖고 파고든 덕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함께 학문을 궁구하면서 더 깊은 세계로 이끌어준 최석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최석정이 정리한 운서였다. 당연히 어렵게 느껴질 리가 없었다. 기대는 하였지만 최석정이 자신을 깜짝 놀라게 만들 거란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몇장 넘기다 말고 숙종은 훈민정음이 부록으로 정리된 부분을 발견했다. 이미 웬만한 건 피차 파헤칠 만큼 파헤쳤다. 더는 최석정이 자신을 놀라게 할 내용은 없었다. 그래도 흥미를 갖고 한장한장 넘기던 숙종의 눈앞에 열수지상이란 네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御製諺文二十八子卽列宿之象也


"열수지상이라...은근슬쩍 암시를 흘리셨소."

"네. 하오나 전하께서 헤아려 주시리라 믿었사옵니다."


최석정은 담담히, 또 당당히 대꾸하곤 품에서 한장의 고이 접은 종이를 무릎맡에 펼쳐놓았다. 그 그림은 홍만종이 존경각에서 그 요의를 깨우쳐서 먼지 위에 그려보인 윷판의 배열과 사못 흡사했다. 윷판처럼 정중앙의 방方을 훈민정음 28자가 동그랗게 에워싼 광경이었다. 다만, 윷판의 정중앙의 방方자리엔 단 한글자가 써져 있었다. 그것도 왕王이란 글자가.


"중앙의 자미성, 혹은 북극성 자리에 놓인 임금왕王...그 왕자를 에워싼 스물여덟 글자...즉, 훈민정음은 왕을 중심으로 하는, 왕의 문자이옵니다."

"..."


최석정의 설명을 듣기도 전에 이미 임금왕王자를 보는 순간에 벌써 숙종의 눈동자에선 노기가 씻은 듯이 사라진 채였다. 최석정은 운서의 부록을 통해 말하고 있었다. 훈민정음 28자는 함부로 비하할 수 없는, 조선왕실의, 왕의 문자요 언어라는 것을.



증광시 시제 사건은 보름 넘도록 논란이 일다가 마침내 시제를 뽑은 시관들의 귀양으로 일단락이 되었다. 워낙 남인들이 작정을 하고 나온 탓에 이정영 등은 그나마 도성에서 가까운 지역에서 징역을 하는 도배徒刑로 그쳤지만 시제를 직접 시제를 발의한 박태보는 머나먼 변방에 정배定配까지 가야 했다. 당상관도 아니고 당하관이 귀양을 가는 신세가 되니, 금부도사가 아닌 의금부 나장이 인솔을 맡았다.


"옛소 출마패. 그리고 이건 필요한 물건이나 낼모레까지 준비해 주시오."


집과 처자를 버리고 멀리 귀양을 떠나게 된 것도 막막한데, 의금부 나장이 전날 밤에 박태보에게 출마패出馬牌(역참에서 말을 빌려쓸 수 있는 호패)와 함께 웬 장지 한바닥을 쓴 물품목록을 내밀었다. 당장 박태보의 눈앞에 펼쳐지는 그 내역은 기가 질릴 만큼 장황했다.


입모笠帽 一, 무명 五十, 저고리 一, 갖신 一, 토시 一, 귀마개 一, 우의 一, 포의 一, 쌀...


심지어는 쌀 서말과, 술 석동을 비롯해서 온갖 요구사항이 다 적혀 있었다. 박태보는 입이 떡 벌어져서 나장을 쏘아보았다.


"이게 다 뭐요?"

"형장께서 필요한 목록이요. 더불어 내것도 똑같이 준비해주면 더 좋고."

"미쳤소? 이렇게나 많이?"

"원래 다 그런 법이요."

"..."


박태보는 할 말을 잃었다. 의금부 옥사에 함께 갇힌 시관들 중에서 자신이 유독 품계도 낮은데다, 형벌도 제일 컸다. 구석에 모여 앉아있던 이정영, 오도일 등은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무릎으로 기어오다 시피하여 박태보의 물목을 살펴보고 눈살을 크게 찌푸렸다.


"아니, 이걸 다 준비하라고?"

"혼자 귀양가는 것도 서러운데..."


가뜩이나 억울하게 귀양을 떠나게 생겼는데, 그 와중에도 등골을 빼어먹으려고 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오히려 당상관이 귀양을 떠날 때는 금부도사가 직접 예를 갖추어 안내하는데다 이런 목록들을 굳이 준비할 것도 없이, 지나는 역참마다, 관아마다 서로 온갖 물품이며 노비, 심지어는 각종 특산품에 기녀까지 제공하는 마당에, 당하관 이하 양민이나 평민들은 자신이 직접 귀양경비까지 대야 했다. 게다가 그 와중에도 의금부 나장이나 서리에게 밉보이면 귀양길이 고달픈 탓에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줘야만 했다.


"그 목록 나한테 주게나."


어느덧 병석을 떨치고 일어난 최석정이 형형한 눈빛으로 의금부 나장을 쏘아보며 옥사로 걸어들어왔다. 의금부 나장은 미간을 찌푸리고 얼굴로 최석정을 쳐다보았다. 녹단령 주제에 의금부 옥사로 이렇게 버젓이 출입을 하다니.


"뉘시요?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최석정은 곧바로 허리춤에서 호패를 꺼내어 내밀어보였다. 의금부 나장은 무심히 호패를 받아들다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이번 옥사는 워낙 말들이 많았다. 과장에 최석정이 있었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 않았을 거란 소문도 암암리에 돌았다. 그 최석정이 직접 찾아와서 자신이 박태보의 물품을 준비하겠다고 나서는 형편이었다. 호패를 받아든 나장의 손가락 끝이 굳는 것을 보고 최석정은 박태보를 향해 돌아서서 손을 뻗었다.


"내가 준비해줄테니 이리 주시게."

"이러실 필요는..."

"미안해서 그러이. 진즉에 내가 시제를 같이 골랐어도 자네가 이 지경은 안 당했을테니."

"하지만 목록이 워낙...게다가 내것도 아니고 저 나장 것도 부담해야 하고.."

"일단 주시게. 스승님들께도 내가 준비하겠다고 하였으니."


기어이 박태보의 손끝에서 종이를 낚아채는 최석정이었다. 그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물목들이 눈에 들어오자, 미간을 와락 찌푸리고 나장을 돌아보았다.


"이게 뭔가? 입모는 그렇다치고, 탁주? 탁주 석동?"

"모..가다 보면 목이 마르기도 하니..."

"나가 있게."

"예? 하지만 나으리."

"내가 여길 어떻게 들어왔겠나. 전하께 윤허를 구하고 온 것이야. 얼른 나가 있게."


최석정은 날카로운 눈짓으로 나장을 쏘아보았다. 의금부 나장이 단단히 잘못 걸린 느낌으로 쭈볏쭈볏 옥사를 나갔다. 박태보는 도대체 최석정이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서 두눈을 멀뚱거렸다. 최석정은 박태보의 등뒤로 바짝 붙은 이정영과 오도일에게 잠시 비켜달라 눈짓을 주었다. 이정영과 오도일은 불만어린 눈초리로 최석정을 쳐다보곤 군말 없이 도로 구석으로 물러났다. 이쯤 되니 박태보의 기대와 불안은 더욱 증폭되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전하께서, 반년후면 풀어주겠다고 내게 약조하셨소."

"정말..입니까?"

"정말이오."

"..."

"그러니 모쪼록 몸 성히 다녀오시오."

"고맙소이다."


박태보는 안도의 한숨을 나직이 내쉬었다. 그나마 녹단령의 최석정이라도 건재하니 다행이었다. 납치되어 사경을 헤맨다는 소문도 있었고, 후사를 잇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고, 온갖 소문이 무성한 최석정이었지만, 이렇게 두눈으로 보니 반갑고 든든했다.


"정말, 명곡은 우리 서인의 희망이요."

"그런 말 마시오."


박태보를 바라보는 최석정의 눈동자가 그늘에 잠겼다. 그는 애써 음울한 기색을 떨치고 종이를 힘껏 움켜쥐며 밝게 말했다.


"이건 내가 가지고 가겠소. 출발은 언제 어디서..."

"낼 모레 청파역에서 진시에 출발합니다."

"알았소. 내 그리로 가겠소."


최석정은 물목을 살짝 구겨쥐고 다시 한번 옥사 바깥쪽을 쏘아보았다. 칼만 안 들었지 숫제 날강도라고 속으로 온갖 욕을 퍼부으며.


그렇게 이틀 후에 박태보는 청파역을 거처 송산, 포천, 영평, 풍전 등의 역참을 거쳐 변방으로 귀양을 떠났다. 하루에 70리를 가는 것이 원래 법전에 명시된 규정이다 보니, 나장이 계속해서 길을 보채었다. 지위라도 높은 당상관이라면 편의를 봐주느라 하루에 70리는 커녕 30리도 안갈 때도 있으련만, 윤선도나 송시열이나 귀양길에 팔자좋게 관리와 향반들의 연향을 받으면서 쉬엄쉬엄 가고 또 각종 살림살이에 노비까지 수십명을 제공받았지만, 말단의 귀양살이는 너무도 고달팠다. 중간에 나장은 박태보만 남겨두고 혼자 볼일을 보고 돌아다니기도 하였지만, 박태보는 그러지도 못하였다. 반년후에 두고 보자고 그저 속으로만 이를 바득 갈 뿐이었다.



"살수대첩을 이끌어내 우리 동방의 영토를 지켜낸 고구려 을지문덕은 호국의 공이 크니 그 사우에 액호를 내려주고, 또한 예조좌랑 김익화로 하여금 직접 평안도 안주를 찾아 치제하게 하라."


시제사건이 일단락되자마자 왕이 느닷없이 편전에서 내린 전교였다. 저번에도 을지문덕 타령을 하더니, 이번에도 또 을지문덕 타령이다. 한가하게 모든 문관들에게 제문을 짓게 하더니 그나마 예조좌랑 김익화로 지명하여 분부를 내리는 것이 다행이면 다행일까.


예조좌랑 김익화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미 음력 시월도 거의 지나간 마당에, 벌써부터 초저녁만 되면 뼈가 으슬거릴 정도로 시린 바람이 온몸에 스며드는 판국에, 남도도 아니고 북도로 가게 생겼다. 생각만 해도 춥고 고달픈 일이었다.


하지만 왕이 지목한 김익화란 이름에 신료들의 표정도 미묘하게 흔들렸다. 김익화가 누군가. 광산김문의 일원이요, 다름아닌 중궁의 숙부뻘인 자다. 그런 김익화를 왕이 중궁 곁에서 떼어놓는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어차피 김익훈처럼 중궁에게 각별한 사이는 아니지만, 중궁의 사람들이 하나라도 도성을 비운다는 사실이 남인들은 기꺼웠다.


어탑 가까이 앞으로 나아가서 전교를 받드는 김익화의 눈에 전교 틈새에 적힌 밀지가 들어왔다. 김익화는 뜻밖의 밀지에 두눈을 깜빡였다. 그는 가만히 뒷걸음질로 물러나서 제자리로 돌아왔다가는 상참이 끝나자마자 편전을 빠져나와 행각 사이를 걸어가며 황급히 펼쳐보았다.


- 김만중을 함께 데려가서, 안주 주변의 안학궁과 만월대의 두군데 첨성대 터를 유람하고 오라.


안학궁과 만월대의 두군데 첨성대라니. 평양 안학궁은 고구려의 궁성이고, 개성 만월대는 고려의 첨성대였다. 명분은 을지문덕의 제사이지만, 그 이면에는 첨성대를 돌아보라는 뜻이 숨어 있었다. 말이 유람이지, 세밀히 살펴보라는 얘기였다. 김익화는 혀를 빼어물고 인상을 썼다. 이거 아무래도 왕이 김만중에게 밀명을 내리는 데에 자신이 잘못 엮인 느낌이었다.


효자인 만중이가 도성을 뜰 리도 없는데.


그는 우거지상을 하고 속으로 푸념했다. 지금 김만기가 총융사가 되어 도성 밖에 나가 있는 터였다. 형도 없이 홀로 되신 노모 곁을 김만중 혼자 지키는 와중에 왕이 밀명을 내렸다고 따를 리도 없었다. 그 두 형제의 효성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회현방 사람들은 물론, 광산김문 일족이라면 누구나 다 알 정도였다.


노모의 생신만 되면 색동저고리를 입고 마흔 넘은 나이에 코흘리개 아이마냥 온갖 재롱을 부리며 즐겁게 해드리는 그 못말리는 효자들을. 왕이 당할 수나 있을까.


"송구하오나 천신은 홀로 계신 노모를 두고 먼길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김익화의 예상대로 김만중은 곧장 왕의 침전을 찾아 고하였다. 하지만 숙종 또한 예상했었는지 바로 느긋하게 대꾸했다.


"총융사인 김만기를 잠시 도성으로 불러들일 것이다. 되었는가?"

"형님을, 아니 김만기를 부르시오면..."


김만중은 바로 백기를 들었다. 아무래도 장남이 곁을 지키는 것이 어미로선 든든할 터였다. 특히나 자신은 그간 어미 곁에 있었지만, 형은 곁을 비우고 있었으니 더욱 어미로선 형의 빈자리가 아쉬웠을테니.


"가겠소?"

"예 전하..."

"허면 조심히 다녀오시오."


김만중을 쳐다보는 숙종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짙었다. 김만중은 왜 왕이 자신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래전에 젊은 객기로 지구고증을 썼던 탓일까. 그 책 한번 썼었다가 여기저기서 뭇매를 흠씬 두들겨 맞았었다. 지구가 둥글다는 그 한마디를 세상은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자 또한 지구가 둥글다는 심증을 갖고 말한 적이 있었다. 스승 송시열이 떠받드는, 자고로 조선의 성현들이 숭배하는 그 주자조차도. 그런데 그 주자가 한 말이어도 지구가 둥글다는 말만은 유독 배척을 당하는 것일까.


어쨌거나 천문 및 지리에 관심이 많은 탓에 왕에게 낙점된 느낌이었다. 이런 일은 최석정이 직접 다녀와도 좋으련만, 이런 생각도 뇌리에 잠시 머물면서도, 김만중은 이번 기회에 고구려와 고려의 옛 첨성대들을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었다.


헌데 이튿날 아침에 김만중이 여행객 신분으로 김익화와 함께 예조 서리 및 군사 일행이 예조 앞에서 출발하려는데, 그들의 군사로 뽑힌 자들이 어쩐지 낯이 익었다. 한사람은 얼굴이 청풍김가의 혈통을 떠올리게 할 만큼 거무스름한 귀남자였고, 또 한사람은 상투도 없는 머리카락이 전립 아래로 뾰족뾰족 삐쳐나온 머리카락이 유독 고슴도치 같았다.


"자네들은..."


의혹어린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며 입을 열다가, 김만중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새파랗게 어린 놈들이 호위로 따라붙는 것은 그렇다 쳐도, 도대체 왕은 왜 이토록 은밀하게 천문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지, 도대체 왕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머리 끝까지 호기심이 솟구치는 순간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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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0

  • 작성자
    Lv.82 수훈
    작성일
    13.07.30 19:15
    No. 1

    체건은 아닐테고. 호위가 누굴지...^^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8.05 17:09
    No. 2

    다음화로 보심이...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3.07.30 20:15
    No. 3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8.05 17:10
    No. 4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3.07.30 20:19
    No. 5

    한글의 비밀이 슬쩍슬쩍 드러나니 엉덩이가 들썩거립니다.
    최석정의 저 말, "왕을 중심으로.. "를 다른분들이 곡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8.05 17:11
    No. 6

    고맙습니다. 요즘 왕실이 주체적으로 언문을 수호해왔다는 연구들이 더러 나오는 상황이라 괜찮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숙종이 언문에 애착을 보인 물증도 있구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3.07.30 20:54
    No. 7

    정말 호기심이 많은 왕이네요
    매번 새로운 것들을 챙겨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8.05 17:12
    No. 8

    숙종이 천문과 언문에 관심을 보인 건 사실이니까요. ^^ 제대로 담아내야 할 텐데, 제가 과학 쪽엔 약해서...=_=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0 jk******
    작성일
    13.07.31 02:09
    No. 9

    왕노릇하기가 쉽지 않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8.05 17:12
    No. 10

    예. 조선후기 보면 왕노릇도 힘들고 신하노릇도 힘들고...ㅎㅎ;;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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