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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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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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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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26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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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130

DUMMY

"쓸 수 없다?"

"송구...합니다."


최석정은 머뭇머뭇하며 자조적인 쓴웃음을 머금었다. 왜 하필 자신이 지엄한 어명을 거역하는 순간에, 자신이 김석하를 타박하며 송구란 말 입에 담지도 말라고 역정내던 순간이 떠올랐는지. 엎드려 빌어도 모자랄 판국에, 빌어먹을 웃음이 나오다니?


"웃어? 최수찬, 자네 지금 미쳤는가? 자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는 건가?"

"..."


김석주가 기가 차서 질책했다. 숙종도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바로 성을 내지 않고 오히려 최석정을 더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미 정탈된 일을, 왜 또 반대하는 거요?"

"급하게 먹는 밥은 체하기 마련입니다. 발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민생이 중요한 것입니다. 천천히, 찬찬히 검토하여 만전을 기하시옵소서."


최석정이 여전히 상평통보를 반대하자 허적과 권대운이 각각 날카로운 언변으로 숙종에게 진언했다.


"전하, 이미 정탈된 일을 문제삼는 것은 사관으로서의 자각이 부족한 처사이옵니다. 수찬 최석정을 체차遞差(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것)하시옵소서."

"예 전하. 최석정은 수찬이지 교리가 아니옵니다. 교리도 아닌데 나서서 국가정책에 참견하였으니 엄히 다스리옵소서.""

"수찬은 그저 문한(문서편찬 및 관리)과 지제교(교서를 쓰는 직임)의 일만 겸하면 그만입니다. 자신의 직분을 망각하고 감히 왈가왈부하는 최석정을 파직하여주시옵소서."


숙종은 최석정을 보며 입맛을 쓰게 다셨다. 벌써 남인일색인 조정신료들이 최석정을 돌아보는 눈초리가 매서웠다. 파직하여 주시옵소서, 신료들이 이구동성으로 고개를 조아리는 참이었다.


"수찬 최석정을 체차한다."


드디어. 편전 안의 신료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최석정의 직언에 왕도 이제는 피로를 느끼나 싶었다. 이제는 왕의 눈밖에 난 모양이었다. 벌써 옥음이 메마르고 성마르게 들렸다.


"고기는 씹어야 제맛이지만, 너무 질긴 고기는 씹다가도 결국 뱉는 법이지..."

"전하께서 달리 생선을 좋아하시는 게 아니지요."


허적이 비웃음어린 눈길로 최석정을 쳐다보며 혼잣말하자 권대운이 곁에서 동조하듯 피식 웃는 순간이었다. 더 푸석푸석 건조해진 옥음이 그들의 고막을 대꼬챙이처럼 찔러버렸다.


"또한, 직언을 잘하니...정5품 홍문관 교리校理로 명한다."

"네?"


허적이 두눈을 부릅떴다. 홍문관 정5품 교리라면, 경연관, 사관, 지제교는 물론 심지어는 사간의 직임까지 겸하는 자리였다. 오히려 왕은 최석정의 권역을 넓혀준 것이었다.


최석정은 자신도 모르게 슬쩍 헛웃음이 나와서 고개를 돌렸다. 마침 민점이 얼굴을 와락 찌푸리고 민희에게 푸념하는 참이었다.


"아니, 수찬이나 교리나...그게 그거잖..."

"..."


민희가 얼른 눈짓하며 민점의 옆구리를 찌르자, 그제야 민점도 당황하여 입을 다무는가 싶더니, 이내 찔끔 한마디 더 덧붙이며 궁시렁거렸다.


"오히려 더 귀찮게 되었..."


숙종은 민희와 민점을 힐끗 쳐다보곤 냉랭히 말했다.


"앞으로 최수찬, 아니 최교리가 더 바빠지겠군. 사간원과 함께 화폐의 일을 세심히 규찰하여 혹여 문제가 생기거든...과인에게 수시로 간언토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최석정이 엷은 웃음으로 답하였다. 이제 수시로 상평통보의 일을 살펴서 폐단이나 폐해가 생기거든 속속들이 파헤칠 생각이었다.


그런 최석정을 쳐다보는 신료들의 눈시울이 발작적으로 꿈틀거렸다. 물론, 김석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최석정을 쳐다보며 그는 입을 실룩거렸다. 마침 가려운 곳을 긁어주듯 다시 허적이 입을 열어 간언했다.


"전하, 외람되게도 수찬 최석정은 전하의 교지를 받들기는 커녕 오히려 제지를 하였사옵니다. 그런 자를 벌하기는 커녕 오히려 간쟁하고 감찰할 직임을 주심은...당치도 않사옵니다."

"영상?"


숙종은 의아한 눈초리로 허적을 쳐다보았다. 요즘들어 허적이 최석정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느낌이었다. 이제 와서 허적이, 최석정에게 칼끝을 들이대는 건가?


"최석정을 교리에 제수하신다는 명을 거두어주시옵소서."

"그러는 영상도 지금 내게 환수를 말하고 있잖소?"

"하오나 서로 직분이 다르옵니다. 수찬이 외람된 간언을 하였으니..."

"그래서 수찬에서 체차를 한 거고, 그래서 교리로 서용을 한 것이오. 더 적당한 자리로 바꾼 건데 뭐가 잘못됐소?"

"하오나, 짐승의 털갈이도 아니고..."

"그만! 나는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아니라 빗자루를 원하오. 그대들이 앞만 보면, 옆도 봐줄 눈을! 가를 말할 때 불가를 말할 입을! 이판사판일 때 쓸어버 ..!"


소리를 쩌렁쩌렁 지르면서 벌떡 일어서던 숙종이 갑자기 상체를 휘청거리면서 어좌 앞 연상을 겨우 짚었다. 연상이 삐끄덩하는 소리가 나면서 잠깐 밀려 움직이는 소리가 나자, 신료들은 흠칫 놀라 왕의 용태에 시선을 두었다.


잠시 멍하니 연상을 짚어보던 숙종이 왼손바닥 손배뼈에 힘을 주어 미간을 짚었다. 신료들이 미심쩍은 눈길로 숙종을 쳐다보며 두눈을 깜빡였다.


사람은 곤란한 상황에선 꾀병을 부리거나 해서 모면하기도 한다. 워낙 병약한 왕인 만큼 오히려 자신의 병환을 이용해서 의지를 관철하려고 이러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숙종은 너무 괴롭게 상체를 웅크렸다. 평소 곧디 곧던 등허리가 축 앞으로 늘어진 상태였다. 신하들 앞에서 위엄을 중시하던 왕인 만큼 어떤 상황이든 등허리 만큼은 곧게 유지하던 왕이 지금은 등허리는 물론 팔다리도 힘이 없었다.


"전하...괜찮으시옵니까?"


숙종은 겨우 상체를 일으키려다가 고개만 겨우 들었다. 시야가 흐릿하니 휘감겼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두눈을 깜빡였다.


워낙 용태가 심상치가 않아서 신료들이 눈길을 들어 감히 왕의 안색을 살폈다. 이미 익선관 아래는 식은땀으로 축축한데다 항상 특유의 짙고 또렷한 광채가 감돌던 점칠안은 총기가 흩어져 있었다. 정신조차도 몽롱해 보였다. 식은땀을 비오듯 흘리면서 왕은 힘없는 목소리로 뇌까리는 참이었다.


"무, 물, 물..."

"전하?"


곧바로 통명전 옆 양화당에 약방이 차려졌다. 수의 이동형은 물론 어의들 여럿이 한꺼번에 불려왔다. 고열로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로 의식이 혼미한 와중에도 숙종은 끊임없이 갈증을 호소하며 물을 찾았다. 수의는 왕을 직접 진맥하고 놀라서 흠칫 놀라서는 두눈을 지그시 감았다.


"기허氣虛에, 간열肝熱입니다."


수의의 진맥이 끝나기 무섭게 바로 두광이 물을 대령했다. 숙종이 두광의 부축을 받아서 꿀떡꿀떡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보며 약방 책임자인 허적과 김석주가 자신들도 모르게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이제 보령 열여덟인 왕이 벌써 기허, 열이라니.


하긴, 탈상을 하자마자 황달에 걸렸던 왕이었다. 물론 지독한 일벌레라 평소에도 몸을 혹사한다 싶긴 해도, 하필이면 공교롭게도 왕과 중궁이 복침할 시기만 되면 황달이나 간열 같은 병증이 생기다니. 혹시 이번에도 무리한 합방으로 왕이 원기를 상한 건 아닌가 싶었다.


"간열?"

"예, 하여 백작약과 이공산으로..."

"기허는 둘째치고, 간열이라니?"


하필이면 양화당 바로 옆이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까운 통명전이라서, 이미 통명전 지밀나인들이 그 앞에 목을 빼고 지켜보는 참이었다. 게다가 아예 중궁이 당화당으로 건너와서 그 옆 퇴선간에 장지문 하나만 사이에 두고 수의의 진단을 유심히 듣는 참이었다.


"간열?"


퇴선간쪽 장지문에 비친 중궁의 그림자가 의아히 물어왔다. 김석주와 허적은 난처한 눈빛을 교환하고 수의에게 턱짓을 하였다. 뻔히 간열의 병증을 알면서도 보고는 수의에게 미루는 그들이었다. 수의 또한 중궁의 눈치를 살피며 답하였다.


"황달처럼 간에 피로가 누적되어...열이 생기는 병증이옵니다. 사지에 힘이 없고 쥐가 나는 근위증이 생기며, 고열로 식은땀이 나서 움직일 수도 없게 되는 병이옵니다. 허니 정무를 파하시고 앞으로는 부디 안정과 보양에 전념하심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숙종이 당장 손을 내저었다.


"그럴 수는 없다. 정무를 파하다니? 앞으로 여기 양화당에서 정무를 볼 것이다. 낮은 본래 일하라고 있는 것이다."

"하오시면 밤...이라도 무리하지 마시고 쉬시옵소서."

"그건..."


장지문을 흘끗 쳐다보며 묘하게 머뭇대는 허적의 말에 숙종은 얼굴이 살짝 벌개졌다. 사실 좀 억울한 오해였다. 소산후에 백일 안엔 회임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해서, 애써 중궁과의 복침도 미루는 참이었다. 그 대신 자신의 동온돌에 서책으로 탑을 쌓고 미친 듯이 읽어대던 터였다.


하지만 구차하게 신료들 앞에서 변명을 한다고 통할 것 같지도 않았다.


"...이젠, 달밤에 책낭자들도 그만 만나셔야겠네요."


진홍이 등허리를 곧게 세우고서 침착하게 옥음을 가다듬고 한 말이었다.


"달밤에 책...낭자?"

"여봐라, 동온돌에 쌓인 서책들을 당장 홍문관으로 내가거라."

"예? 하오나 전하께오서 보시는 것들이라..."


두광이 문간에서 얼른 답하면서 왕의 눈치를 보았다. 숙종의 눈가가 여느때보다도 세차게 꿈틀댔다.


"아니 중궁, 그건..."

"쾌차하면 그때 보시옵소서."

"..."

"여봐라!"

"예 중전마마!"


중궁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건너편 동온돌의 궁인들과 내시들이 답하더니, 곧바로 동온돌에서 수십권의 서책들을 한아름씩 안아들고 나왔다.


"중궁!"


진홍은 자신이 서 있는 장지문을 열어젖혀 동온돌에서 나가는 엄청난 수량의 서책들을 약방 도제조, 제조 이하 수의와 어의들까지 똑똑히 볼 수 있게 하였다. 허적과 김석주가 감탄하면서도 치를 떨었다.


"세상에...어떻게 저 많은 책들이 저기서 나옵니까?"

"전하, 도대체...책을 얼마나 읽으셨기에..."

"하긴, 역병이 돌아도 경연은 중지시키지 않으신 전하이시니..."


숙종 역시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살점 같은 서책들이 동온돌에서 내쳐지는 광경을 똑똑히 목격했다. 그런데 경연이란 단어에 장지문에 비친 진홍의 그림자가 바로 답하는 것이었다.


"아, 허면 경연도 중지해야겠군요."

"중궁! 중궁! 정말 이러기요?"

"부디, 얼른 쾌차하시옵소서..."


진홍의 모습은 열린 장지문 뒤로 가려져서 그 윤곽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음성은 살짝 젖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냥 감상에 젖지도 않았다. 지아비의 위신을 살려주곤 곧바로 약방의 관료와 의원들을 독려했다.


"그대들은 전하의 환후를 보살피는 데에 성심을 다하라."

"예 중전마마."


김석주와 함께 허적이 가만히 고개를 조아렸다. 동온돌에서 저토록 많은 서책들이 나올 줄이야. 밤에도 결국 왕이 독서에 매진했다는 뜻이었다.


하긴 야대청에서의 경연에서도 왕은 신료들에게 자신의 학식과 식견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다 보니 신료들은 함부로 왕을 얕잡아볼 수도 없었다.


허적은 애써 웃음을 참느라고 입가가 간질간질하였다. 다행이었다. 이렇게 학문에 매진해온 왕이라니, 당분간 중궁의 회임 소식은 없을 것 같았다. 더욱이 왕이 간열까지 걸려서 요양을 하게 생긴 마당에.



기세등등한 겨울바람이 부드러워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봄꽃이 저마다 연노랑 연분홍 봉오리를 내밀었다. 서로 마주한 통명전 동온돌과 서온돌에서 아침을 맞은 왕과 왕비의 수랏상에도 진달래꽃전이 올라왔다. 동글납작한 찹쌀반죽에다 다섯닢의 진달래꽃잎을 곱게 펴서 쑥잎으로 장식해서 한눈에도 봄빛이 완연했다.


겨우 혈색을 되찾은 얼굴로 숙종은 구부정히 상앞에 앉았다가는 진달래꽃전을 보고 이내 등허리를 쭉 폈다. 그는 가만히 젓가락을 들어 집어들었다. 손에도 힘이 돌아왔는지 그나마 무리없이 쉽게 집어들 수 있었다. 숙종은 진달래꽃전을 집어든 채로 문득 장지문을 보았다.


"문을 열어라."


숙종의 턱짓에 두광이 입을 살짝 비죽이며 웃고는 동온돌 장지문을 열어주자, 대청마루가 훤히 드러났다. 그러자 문이 열리는 소리에 건너편의 서온돌 장지문도 열렸다. 진홍이 수라상을 맞고 수저를 들다 말고 숙종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숙종이 젓가락으로 진달래꽃전을 들어보였다.


"네?"


하지만 다음 순간 젓가락에서 진달래꽃전이 툭 떨어졌다. 숙종은 자신의 의지를 배반한 진달래꽃전을 내려다보았다. 하필이면 진분홍 때깔도 곱게, 다섯닢 꽃잎의 맵시도 빼어나게 박혀서는 오히려 자신의 속을 뒤집어놓는 느낌이었다.


"아직, 손끝에 힘이 안 돌아오신 것입니까?"

"장지문을 늦게 연 탓이오."

"..."

"다시 보여주겠소."


숙종은 다시 젓가락을 집어들어 이번엔 제대로 진달래꽃전을 진홍의 눈앞에서 들어보였다. 두번째로 집어서인지 바로 흘리지 않고 계속 야무지게 집은 채로, 숙종은 빙그레 웃었다.


"봤소?"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다 나았소. 강남갔던 제비도 돌아온다던 그 삼짇날이잖소."

"아...부녀자들이 일년 열두달에 한번 진달래꽃전 싸들고 나들이 간다는 그 삼짇날이지요."

"그러다 외간사내와 눈이 맞아서 도망간다는 그 삼짇날이오."

"있을 때 잘할 걸 그랬다고 사내들이 후회한다는 그 삼짇날이옵니다."


숙종과 투닥투닥 입씨름을 하면서도 진홍의 얼굴에 화사한 웃음이 번졌다. 그 웃음이 숙종은 좋았다. 장지문이 열릴 때마다 매섭고 매운 겨울바람이 휘몰아치더니, 이제는 대청과 마주한 장지문을 열어도 그다지 추운 줄도 몰랐다. 오히려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진홍의 웃는 얼굴이 비쳐서 좋았다.



"이보게. 명곡! 게 있는가?"


인정이 울리고 동촌의 마을이 이슥한 정적에 휩싸이자, 최석정의 초가로 은밀한 발길이 찾아들었다. 최석정은 사랑채에서 홀로 서책을 들추다가 흠칫 놀라서 두눈이 움찔했다.


인정이 울린 지가 언제인데. 동촌에 있는 자신의 집이 꼭 반촌으로 옮겨오기라도 한 것처럼 사흘이 멀다하고 한밤중에 불청객이 찾아들곤 했다. 도대체 무슨 심술인지 병조판서는 순라꾼까지 떡하니 붙여서 송시열의 제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꾸역꾸역 밀어넣는 터였다. 이제는 집에 와서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최석정은 숨부터 죽이게 되었다.


"뉘시오?"

"이보게 명곡! 날세."


상대방이 눈치를 보듯 낮은 목소리로 답하였다. 누군지 자신을 밝히지도 못하고 상대가 자신을 알아주길 바라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상대방이 재차 속삭이듯 말하였다.


"날세!"

"나가 누구요? 뉘시오?"

"나와보면 알 것이네."

"..."


최석정이 조심조심 대청마루로 나와보니 검푸르스름한 행의를 입고 방갓으로 얼굴까지 가린 조가석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방갓을 슬쩍 들어 어색히 손을 들어보였다.


자의대비 조씨의 사촌동생인 동시에 조사석의 아우였다. 자신처럼 그 선대가 송시열의 눈밖에 나서 두고두고 업신여김을 당했는데도 송시열을 비호한 죄로 파직에 문외출송까지 당한.


"태촌공께서 여긴 어떻게..."

"큼큼"

"무슨 일로...어떻게 오셨습니까? 분명 문외출송..."

"쉿..."


최석정이 자신을 알아보자, 조가석은 누가 볼세라 얼른 방갓을 깊숙히 눌러썼다.


"혹시 영감도 병판대감께서 순라꾼을 붙여주셨습니까?"

"나 혼자 왔으이."

"이 밤중에 순찰을 혼자 뚫고 오셨다구요?"

"허흠. 들어가서 이야기 하세나."


조가석이 평소보다 훨씬 활기차고 밝아진 음성으로 말하면서 사랑채 앞 섬돌에 태사혜를 신은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는 얼른 태사혜를 벗고 대청으로 올라섰다. 최석정은 목구멍까지 들어찬 한숨을 코로 내쉬고는 자신의 방으로 조가석을 안내했다.


"내 보여줄 것이 있으이."


조가석은 병풍을 등지고 상석에 앉더니 대뜸 품에서 돌돌 말은 장지 한장을 꺼내어 서안 위로 펼쳤다. 워낙 장문이라 서안 좌우로 늘어지는 것이, 한눈에도 책문이나 비문 같았다.


"이게 뭡..."


최석정은 등불에 비친 유려한 서체를 한눈에 알아보고 멈칫했다.


"이건...대로 어르신의 서체인데..."

"읽어보게나."


이미 최석정의 두눈이 분주하게 송시열의 서체 사이를 훑는 것을 보고도 조가석이 으스대듯 말했다. 최석정은 얼른 장지를 집어들고 대답할 겨를도 없이 바삐 글을 읽어내렸다. 한자한자, 한줄한줄 읽어내릴수록 그의 두눈이 놀라움에 물들었다.


"이건...선친 되시는 분의..."

"그래. 묘갈문. 대로께서 내 선부의 묘갈문을 써주셨으이. 그것도 귀양지인 장기에서 손수 써서 인편으로 보내주셨다네."


최석정이 중간에 읽다 말고 확인하듯 묻자 조가석이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젖은 음성은 마치 가문을 살린 듯한 자부심과 동시에 사십여년 묵은 한이 한순간에 풀린 듯한 허탈함이 한꺼번에 뒤엉켰다.


송시열에게 묘갈문을 얻는 것을 모두가 사후의 영광으로 친다. 송시열은 학문만 방대한것이 아니었다. 그 붓끝은 산 사람을 죽일 수도, 죽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었다. 백헌 이경석, 지천 최명길 같은 거인들도 끌어내리고, 사리사욕만 탐하다 죽은 사람도 시궁창에서 끌어올려내는 붓끝...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송시열이 써주는 묘갈문에 목을 매고 매달리는 참이었다.


"허면 대로께서 용서를..."

"계속 읽어보게. 다 읽어보게."


조가석이 계속해서 자부심을 갖고 독촉했다. 최석정은 눈치를 보면서, 어쩐지 자신의 식도에 시고 떫은 질투심이 얹히는 느낌을 애써 억누르며, 송시열이 친필로 써준 조계원의 비문을 가만히 읽어내렸다. 뜻밖에도 조계원의 비문은 칭찬일색으로 끝이 났다.


- 몸은 이 언덕에 묻혔으나 이름은 후세에 머물러 있구나. 봉황의 새끼를 알고 싶으면 다만 그 한낱 깃털을 볼지어다.


봄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한 유려한 문체 사이로 최석정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런 최석정의 귓전에 조가석이 감격어린 어조로 자랑했다.


"믿어지는가? 믿어지냔 말일세...나는 믿어지지 않으이. 자네나 나나...선대들이 대로께 찍혀버린 탓에 날 적부터 가슴에 대못이 박혀 숨도 제대로 못쉬고 산 신세가 아닌가?"

"..."

"보세, 보세...3년 전엔가 그 윤증이한테도 제대로 써주지 않은 묘갈문을...이렇게 구구절절 영광스럽도록..."


조가석은 눈물을 글썽이며 맨손으로 장지를 어루만졌다. 불면 날아갈세라 마냥 조심스러우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장지를 움켜쥐는 손가락 끝이 떨렸다. 그 손가락끝을 내려다보는 최석정의 곧은 속눈썹도 가만히 흔들렸다.


"내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으이...대로께서...선친에 대한 역정을 거두어 주셨으이..."

"..."

"이걸 만수전에 가져가면, 자의전께서도 서인들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조금은 누그러질 지도 모르이..."

"허면 이제 저만..."


늘 단아하던 최석정이더니 돌이라도 삼킨 듯이 목젖이 꿀떡거렸다. 목구멍이 얼얼했다.


정말로 조가석은 원을 풀었다. 아끼던 윤증에게도 그 아비 윤선거의 비문을 건성으로 써주던 송시열이, 이토록 성의를 다하여 비문을 써주었다. 송시열이란 쓰디쓴 쓸개가 다디단 당과가 되어버렸다. 이제는 조가석은 물론 그 선친 조계원의 망령까지도 송시열의 곁불을 쬘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자네만 남았으이...자네만..."

"..."

"자네도 나처럼 대로와 문곡공을 신구하는 상소를 올리게."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팔꿈치부터 어깨죽지 사이로 소름이 기어오르는 느낌에 최석정은 뒷골이 온통 얼어붙었다. 이젠 뿌리칠 수도 없었다.


그는 창문 옆 횃대에 반달돌칼 및 호패, 가죽주머니와 함께 걸어놓은 자신의 청단령을 가만히 돌아보았다. 이토록 영예로운 청단령이 자신의 숨통을 옥죄는 수의로 둔갑할 줄은 몰랐다. 조정의 머리인 홍단령도 아니고 허리인 청단령일 뿐인데.


"서인을 위해서가 아닐세. 자네 자신을, 자네 조부를, 자네 집안을 위해서야. 자네를 위해서 하게나."

"..."

"대로를 위해서 과감히 상소를 써보게. 그리하면, 대로께서도 여기저기 자네 조부를 간신이라 칭한 비문을 고쳐 주실 거고, 또 자네 조부 비각에 새긴 간인이라 새긴 글자도 지워주실 걸세. 아니, 이런 한장의 비문이라도 써주실 것이네. 자네도 언감생심 꿈꿔왔던 일이잖나..."

"..."

"전하의 진노는 잠깐이지만, 조부모의 명예는 평생일세. 눈 딱 감고 귀양 좀 다녀오면 되네. 나처럼."

"생각할 시간을...주십시오..."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유혹 앞에 최석정의 목소리가 억눌렸다. 조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무 오래는 생각하지 말게나. 이건 생각하고 자시고 할 일도 아닐세."

"..."


조가석은 고개를 떨군 최석정을 두고 일어섰다. 힐끗 최석정을 내려다보니 그 올곧던 등허리는 한순간에 구부정해진 채였다.


이만 항복하게. 이미 자넨 대로의 손아귀에 뒷덜미가 잡혔으이.


그는 물끄러미 최석정의 등줄기를 내려다보곤 가만히 툭툭 쓰다듬고 방문을 열었다. 어느덧 사랑채 바깥의 마당은 안개보다 진한 는개가 뿌옇게 들어찬 뒤였다.


"갔나?"


김석하는 사랑채 초가지붕 위에 드러누운 채로 이 모든 대화를 몰래 엿들었다. 푹신푹신한 지붕이지만 어느덧 는개가 보슬비로 변해버리는 바람에 등밑 이엉이 눅눅해진 참이었다. 당연히 조가석이 나왔으니 벌떡 일어서서 맞이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냉담한 눈길로 마당의 조가석을 흘낏 보곤 하늘이나 한번 더 쳐다보았다. 별도 자취를 감추고 달무리가 사람의 가슴을 심난하게 맴도는 것 같았다.


"갔나 진짜? 아니, 어디로 내뺀 거야?"


슬슬 불안해진 음성으로 조가석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문외출송된 죄인이 도성 안에서 야금을 어긴 죄로 순라꾼들에게 잡혀서 경수소로 끌려가면 큰일이었다. 경수소의 패장이 호패를 확인하기라도 하면 일이 걷잡을 수 없게 될 터였다.


그러기 전에 병조판서가 붙여준 호위를 데리고 어서 동소문 밖을 벗어나야 했다.


그냥 갈까? 그나마 동촌에서 동소문까지 가까운 편이니 혼자서라도 다닐 만은 하였다. 그는 조심조심 사립문을 열고 문밖을 살피며 동소문 쪽으로 돌아섰다.


"여깁니다."


순간 등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조가석이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김석하가 사랑채 쪽 초가지붕 위에 올라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참이었다.


"자네?"

"별, 별 구경 좀 했습니다."


김석하의 어감이 묘하였다. 단순히 말을 더듬은 건지, 아니면 별별이라 붙여 말한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김석하의 눈길은 분명 하늘을 향했는데, 안개인지 는개인지 척척한 기운이 허공을 메운 탓에, 하늘의 별이 온통 흐릿했다.


조가석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별 구경 좀 하겠다고 담벼락 위로, 또 지붕 위로 올라간 건지, 해괴한 노릇이었다. 별 구경이 아니라 혹여 자신들의 대화를 엿들은 건지.


엿들어도 큰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김석주는 저자를 자신에게 호위로 붙여주며 한마디 단서를 붙였다. 호기심이 많은 놈이라고. 그 말은 대놓고 엿듣겠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으니.


그런데 찜찜한 건, 이리로 자신을 데려올 때만 해도 서글서글하니 웃는 얼굴로 호위를 해온 녀석이 한순간에 얼굴을 굳히고 눈빛부터 서늘서늘해진 것이었다.


"뭐 저 같은 후손은 선조의 묘문 대신에, 한번이라도 더 천문을 올려다 보니까요."

"뭣이?"


조가석의 귀엔 징그럽게 또렷한 발음이었다. 이 고요한 적막을 뚫고 저 최석정의 고막에도 들릴 얘기였다.


"옛날 사람들은 꼭 사람이 죽으면 그날의 천체를 관측해서 함께 무덤에 새겼습니다. 그건 수백, 수천의 글자보다 성좌를 새기는 게 더 죽은 사람의 마지막을 그려주는 일이라 여겼을테지요."


"그 옛사람들은 문필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잖나. 지금 우리 조선은 송시열이라는 큰별을 얻었으이. 그러니 굳이 하늘의 별을 볼 필요가 없으이."

"..."


김석하는 동의하지 않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그의 시선은 어느덧 더욱 흐려진 밤하늘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자 조가석은 사랑채에 인접한 담벼락쪽으로 바짝 다가서며 짐짓 엄하게 말하였다.


"그리고, 자네는 병판대감께서 날 책임지고 호위하라 명하신 걸 잊었나? 호위나 똑바로 하게."

"그러지요."


김석하는 선뜻 답하고는 지붕 위에서 그대로 몸을 날려 담벼락을 밟고, 순식간에 담벼락 바깥으로 훌쩍 내려섰다. 그것도 조가석의 코앞으로 바짝.


"흐윽!"

"가시지요."

"..."


조가석이 귀신이라도 본듯 하얗게 질린 얼굴로 김석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정작 조가석을 놀라게 한 김석하는 덤덤하게 앞장서서 동소문으로 향하였다. 그 뒷모습을 쏘아보았지만 조가석도 별 수 없이 뒤따랐다.


김석하는 그냥 조가석을 수행해서 유유히 밤길을 걸어갔고 순찰하는 순라꾼들을 마주친 때마다 아무도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어둠은 조용히 그들의 그림자를 삼켰다. 그들의 발자국도 조금씩 굵어지는 봄비가 씻어버렸다. 3월이 지나고, 귀신도 몰라본다던 썩은 윤3월 초하루의 밤이었다.


그리고 최석정은 창가에서 왕이 하사한 청단령을, 또 대율리 조부의 묘 인근에서 주운 반달돌칼을 번갈아 만지면서 갈팡질팡하다가 뜬눈으로 윤3월의 새벽을 맞이했다.


푸석푸석해진 눈두덩으로 그는 벽에 건 달력을 들여다보았다. 윤삼월...그 다음은 사월...그는 바로 우물가로 가서 간단히 세안을 마쳤다. 그리고 의관을 정제하고 허리춤에 호패와 반달돌칼을 차더니 가만히 굴피를 손에 들고 부엌으로 나와서 쌀독 뚜껑을 열었다. 쌀독 안엔 쌀이 서너되 분량 밖에 남지 않았다.


"..."

"벌써 등청하시게요? 아침은..."


처 경주이씨가 나와서 최석정의 어깨너머로 눈길을 흘끗흘끗 던지며 물었다. 쌀독에 쌀은 떨어져서 당장 오늘치 쌀만 남았는데 지아비는 쌀을 챙겨나가려는 모양이었다.


"쌀이 얼마 없구려."

"당신이 월름(녹봉으로 주는 곡식)을 안 받아왔잖아요."

"아...이번달이 하필 윤달이라 아직 광흥창이..."

"이, 삼, 윤삼, 사...윤달은 왜 끼어갖고..."

"..."


최석정은 입맛을 쩝 다시며 손에서 되를 놓았다. 그는 양쪽 무릎을 짚고 일어서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일단 집밖으로 나서려면 쌀이든 베든 뭐라도 챙겨야 한다. 빈손으로 나돌아다닐 수는 없다.


쌀을 챙길 상황이 아니니 면포라도 챙겨야 했다. 그는 다시 사랑채 방으로 들어가서 문갑을 열었다. 차곡차곡 접힌 면포를 꺼내었다. 상태를 확인하려고 펼쳐보니 미처 한필 단위로 재단한 게 아니었다.


그는 투레질을 하듯 한숨을 내쉬더니 포백척布帛尺(피륙의 길이를 재는 자)를 문갑 안쪽에서 꺼내어 한필의 길이를 재어놓고 다시 접어서 절단선을 표시하곤 허리춤을 뒤척였다. 돌칼을 풀어서 손에 꼭 쥐고서 힘을 주어 벽에 대고 면포를 자르려는 순간, 뇌리에 불현듯 도사리는 생각에 잠시 손이 엇나갔다.


"어엇?"


이미 면포는 대각선으로 뭉텅 잘려버렸다. 엉뚱하게 잘라놓았으니 그만큼은 제값을 못할 터였다.


"이 아까운 것을..."


최석정은 아쉬움에 다시금 한숨을 내쉬고선 아내가 볼세라 주섬주섬 면포를 접었다. 그는 결국 빈손으로 터덜터덜 사랑채를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윤삼월의 아침햇볕은 앙상한 졸가리에 새순을 돋게 하고 알록달록한 꽃들을 피워낼 만큼 따사로웠다. 이제는 숙종도 몸이 제법 가뿐해졌다. 어엿하게 편전에서 정무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왕의 평복平復(회복)을 종묘사직에 고하고 진연을 벌이자며 남인들이 유난을 떨었지만, 숙종으로선 기분이 가히 좋지만은 않았다. 종묘사직에 고하자니. 자신의 조상들에게 면구한 일이었다. 후사도 아직 없는 후대 주제에 벌써부터 비리비리하니 왕통을 끊어놓을 놈이라고 북녘에서 혀를 찰 지도 몰랐다.


헌데 그간 멀쩡히 정무를 보던 미수 허목이 갑자기 사직소를 제출했다. 숙종은 허목의 사직소를 들고 부채 대신 부치면서 허목을 노려보았다. 간열이 나았긴 했어도 언제고 재발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시기에 하필이면 사직소라니.


"왜 또 사직소요?"


헌데 그렇다고 화를 내거나 할 수도 없는 것이, 눈앞의 허목은 눈썹부터 수염까지 할 것 없이, 온통 새하얗게 반짝이는 신선 같은 존재였다. 자신이 와병 중이었던 그 한두달 새에 부쩍 늙은 느낌이었다. 이미 여든 중반에 이른 허목을 붙잡을 명분도 없었다.


"신이 워낙 연로하여 정무를 볼 수가 없사옵니다. 청컨대 이만 면직시켜 주시옵소서."

"정무가 힘들면 편의를 봐주겠소."

"송구하오나...이제는 걸어다닐 기력도 없사옵니다."


허목은 몹시 고단한 음색으로 답하였다. 그간 몇번이고 사직소를 낼 때마다 신료들이 허목을 만류했다. 하지만 신료들이 침묵 속에 눈길을 돌리며 제 옷자락을 괜히 만지작거리거나 한눈을 팔 뿐 아무도 나서질 않았다. 이번엔 허적마저 애써 눈을 마주치지 않고 딴청을 부렸다. 허목의 제자인 대사간 권해만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어쩔 줄을 몰라했고, 평소 허목과 허적을 함께 섬기다시피 한 이담명 정도가 허목과 허적을 번갈아쳐다보면서 두손을 초조히 비비적거릴 뿐이었다.


어쩌다 허적의 눈밖에 났을까.


느낌 탓일까. 허목은 ㄱ자로 꺾어진 흰 눈썹이 눈시울을 찌르는 듯 따끔거렸다. 그는 눈을 비비면 자신이 울기라도 하는 걸로 오해할세라 그저 두눈만 끔뻑거렸다.


"알았소."


숙종은 목이 콱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대로 보내면 두번 다시 허목을 볼 수나 있을까. 판부사로 삼아 두고두고 오래오래 붙잡아둬야겠는데.


숙종은 문득 동궁시절 후원에서 잘못 따먹었던 주목나무 열매를 떠올리고 말았다.


자신의 손톱보다 작은 열매를 무심코 따먹었다가, 입안 가득 씹히는 쓰디쓴 맛에 기겁을 했었다. 새빨개선 한가운데가 배꼽처럼 패인 열매였다. 한입 물기만 해도 풍부한 과육이 터지면서 입안 가득 다디단 맛을 볼 줄 알았더니, 갑자기 몸서리처지도록 쓰디쓴 맛이 혀를 아리게 하다니.


"우의정 자리가 비고, 판부사 자리가 차겠군."


숙종이 중얼거리며 좌중의 신료들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허목이 우의정에서 물러나서 판부사 자리로 이동할 터였다. 헌데 딱히 허목을 대신하여 우의정 자리에 앉힐 만한 얼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달리 천거할 만한 이가 있는가?"

"..."


허적이 바로 답하지 못했다. 숙종은 허적에게 잠깐 눈길을 주었다가 권대운, 윤휴, 민희, 민점 등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기껏 꼽아봐야 윤휴일까. 하지만 윤휴를 재상으로 꼽기에는 그 괴팍스런 성정이 문제였다. 병거를 시험한답시고 자신 앞에서 감히 예고도 없이 화포를 쏘질 않나, 대비를 조관하란 글을 거침 없이 쏟아내질 않나...잠시 윤휴에게 머무른 눈동자에 살짝 가시가 박히는가 싶더니 숙종이 입을 열었다.


"전 영의정 김수흥을 서용하고, 또 영암에 유배 중인 김수항을 용서한다."

"김, 김수항..."


왕의 옥음에 윤휴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지금 왕은 윤휴 자신을 우의정으로 삼을 의향이 없는 탓에 서인의 수뇌인 김수흥 형제를 도로 조정에, 또 도성에 불러들일 기세였다.


특히 김수항은 자신을 맹비난하다가 귀양간 자였다. 대비김씨의 야대청 사건 당시 대비를 조관하라 하였다고 김수항에게 탄핵받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런 자신의 적인 김수흥과 김수항을 불러들인다는 것은...


"그 말씀은...우의정에 김수흥을..."

"하오나 전하..."


신료들의 시선도 이미 윤휴에게 쏠린 상태였다. 김수항을 불러오면 그만큼 윤휴의 입지가 좁아지게 된다. 아니, 이건 윤휴만의 문제가 아니다. 김수흥은 송시열이 시키는대로 효종의 국상을 잘못 이끈 죄로 귀양갔던 자였다. 그런 자가 조정에 돌아온다는 것은...머지않아 그도 돌아온다는 뜻이었다.


"아니되옵니다. 전하. 김수흥이 누굽니까? 송시열의 뜻대로 예론을 잘못 이끌었다는 죄를 입은 죄인이었나이다."

"김수흥을 서용하신다는 명을 환수하여 주시옵소서."

"환수하여주시옵소서!"


허목만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할 뿐 남인들의 반발이 치열했다. 그들의 눈길이 김석주와 최석정에게 사납게 쏠렸다. 누군가의 입김이 작용했다. 누구냐? 네놈이냐? 또 네놈이냐?


김석주는 섣불리 찍어낼 수 없다. 대비 김씨가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끈이었다. 그를 잘라내고 찍어내면 대비 김씨가 미쳐 날뛸 것이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 했다. 대비 김씨를 자극해서 좋을 건 없었다. 허면 최석정이라도 찍어내야 한다.


"..."


최석정은 잠자코 붓을 잡고 교지를 받들 기세였다. 그런 최석정을 쏘아보는 남인들의 눈빛이 과격하게 번들거렸다. 대사간과 사간이 서둘러 아뢰었다.


"전하, 김수흥은 아니되옵니다!"

"그는 송시열의 함께 효종대왕의 국장을 잘못 처리한 죄인입니다."


숙종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초리로 사간을 마주하였다.


"김수흥은 비록 죄려罪戾가 있더라도 벌을 받은 지가 이미 오래 되었고, 여러 번 고초를 겪어 흠을 씻었으니 수용하는 것도 도리이다.”

"하오나 전하..."

"번거롭게 하지 말라."

"..."


사간들이 허적의 눈치를 보았다. 여기서 물러나선 안될 일이었다. 김수흥이, 또 김수항이 돌아온다는 건 송시열도 돌아온다는 의미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발밑이 바뀌는 듯한 충격으로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사정없이 위축되어 흔들리는 사간의 눈초리를 본 허적의 눈빛이 독해졌다.


"하오시면 전하, 송시열은 어쩌실 겁니까?"

"송시열?"


숙종의 눈빛이 잠시 멈칫했다. 그는 최석정을 잠시 흘낏 쳐다보았다. 이미 교지를 다 써내린 최석정이 가만히 교지를 내려다보는 참이었다. 그런데 그 목젖이 가만히 꿀떡거렸다.


최석정은 이대로 왕의 옥인만 찍히기를 내심 간절히 빌었다. 왕이 이대로 김수흥을 서용하기만 해준다면, 또 김수항이 풀려나서 도성에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리하여 송시열이 돌아올 만한 발판을 마련해주기만 한다면, 자신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김수흥 형제가 모든 걸 알아서 할 테니까.


제발...지금은 그들이 한사람이라도 더 아쉬울 때였다. 상평통보를 남인들이 제멋대로 사사로이 이용하고, 또 지나치게 부를 축적하고 세를 불려가려 그 탐욕스런 아가리를 벌리는 지금은, 남인을 대적할 서인이 필요했다.


하지만, 송시열에게 바다보다 깊은 원한과 분노를 가진 왕이, 송시열을 겨울엔 북쪽 산간벽지로, 여름엔 남쪽 해안오지로 귀양지를 옮겨서라도 병들어 죽어 없어지길 학수고대하는 왕이...과연 풀어주긴 할까?


"환수하여 주시옵소서."


허적이 환수라는 두음절에 천천히 힘을 주어, 숙종에게 아뢰었다. 이만 낙향하고 싶다는 허목을 도로 눌러앉혀서라도 송시열 떨거지는 한놈도 끼워넣을 수 없었다. 시선 끄트머리로 최석정을 흘겨보는 허적의 눈동자가 스산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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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3.09.26 00:41
    No. 1

    이런거 보면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게 참 절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석정이 참 똑똑해도, 결국 사람이라는 틀에서 못벗어 나는거군요.
    그나저나 중궁과 숙종에게 남은 시간이.. 에휴. 참 애틋합니다 ㅠ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9.26 01:52
    No. 2

    최석정이 똑똑해도...너무 똑똑해서 탈이지요. 그리고 중궁과 숙종에겐 아직도 시간이 좀 있습니다. 4번의 회임에서...이제 두번 회임이니. 아무래도 이 소설 2부 내지는 속편에서 몰아치는 전개가 될 것 같네요. =_=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3.09.26 10:01
    No. 3

    인재가 필요한 거지
    송시열을 용서한다는 것은 아니지

    그나저나 이번에는 최석정이 속태울 차레인가요?
    윗분 말씀대로 천재이지만 틀속에 있는 한 인간인지라...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9.26 17:35
    No. 4

    이야기가 슬슬 한꺼번에 몰아칠 때라...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일화환
    작성일
    13.09.26 12:38
    No. 5

    80 넘어서까지...ㅎㄷㄷ 일 잘하는 음흉한 허적, 괴팍한 윤휴, 허목까지 남인에 매력적인 인물이 많네요. 서인들 있을 때는 송시열 포스가 너무 커서 서인들 중엔 그닥 인물이 안 보였는데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9.26 17:36
    No. 6

    나름대로 당파에 편중하진 않는다고 생각합니다만...;;; 송시열이 워낙 대단해서요. 해리포터의 그분 급인 듯.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2 수훈
    작성일
    13.09.26 13:51
    No. 7

    김수항 서인의 수뇌 김수항.. 앞에 김수항은 빠져도 될 것 같네요^^
    다디단(달디단)은 일부러 맞추신 것 같구요. 마치 시같은 느낌??^^
    송시열을 절대 부르지 않죠. 김수항만 와도 남인들이 지레 짐작으로 좀 알아서 기지 않을까 싶지만. 또 정치판이란 게. 음....

    오늘의 진홍은 너무 멋졌어요. 대신들이 지아비를 낮게 보고 밤.... 이럴 때, 책낭자들이라며 책들을 꺼내가게 하는 모습. 숙종의 위신도 세우고 건강도 챙기게 하는...^^

    정말 제 이상형으로 묘사되는 ㅎㅎㅎ
    내일은 아침기온이 최저래요. 건강 잘 챙기세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9.26 17:37
    No. 8

    아, 고맙습니다. 수정했습니다. 송시열은 정말 숙종의 딜레마죠. 건강 걱정도 고맙습니다.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0 jk******
    작성일
    13.09.28 02:52
    No. 9

    영웅은 밖에서 불리는 이름이고, 집안에서는 '쓸모없는 놈' 이 되는거지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9.29 17:35
    No. 10

    최석정을 말씀하시는 듯...?? ^^;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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