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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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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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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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9.19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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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205

DUMMY

석정이 양화당 앞에 당도하니, 우측 섬돌 위에 놓인 목화 한켤레가 눈에 들어왔다. 목부분에 흰선을 두른 것이 한눈에도 당상관의 목화였다. 뒤축에는 무거울중重자가 뒤축에 수가 놓였다. 가죽이 해진 곳은 있어도 구겨진 곳은 없었다. 흔히들 급할 때면 꺾어신는 뒤축조차도 멀쩡했다. 저토록 깔끔한 자라면...


민정중? 민유중? 김만중?


석정은 미간을 살며시 찌푸렸다. 끝자가 무거울중重자인 당상관이 셋이나 있었다. 모두 성격이 섬세하다보니 누구의 것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한글자 만으로는 서체 분간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밑창을 뒤집어서 거기 새겨진 이름을 확인하는 실태를 보일 수도 없었다. 세사람 모두 자신의 도력장에 문제가 있다고 왕에게 고변할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전하, 최전한을 데려왔사옵니다."

"들라 하라."


두광이 어쩐지 불안한 음정으로 동온돌에 고하고, 동온돌의 장지문이 열렸다. 석정이 장지문 앞으로 다가서니, 홍단령을 입고서 납작 엎드린 채로 힘겹게 차를 마시는 신료의 옆모습이 문틈으로 보였다. 한뼘의 간격을 남기고 엎드린 채로 듬성듬성 희끗희끗한 수염을 늘어뜨린 것이, 김만중은 아니었다.



민유중? 민정중?


석정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둘중 누구든 상관이 없었다. 저들 형제는 송시열과 석연치 않은 혼담이 오가는 입장이었다. 석하가 만종 앞으로 보낸 서찰에서도 혼담이 가짜라 했었다. 단언하는 말투는 아니었지만, 심증을 품은 심중을 비쳤다. 가짜혼담을 내세워 송시열이 민유중의 여식을 불러들일 이유는 무얼까. 머릿속이 의혹으로 들끓는 와중에도 석정의 버선발은 차분하게 문턱을 넘어 동온돌 안으로 들어섰다.


"전하, 어인 일이온지요."

"..."


마침 숙종은 한숨을 내쉬며 서안 위에 공좌부를 접어놓는 참이었다. 위아래 입시울이 안으로 말려들 정도로 힘껏 앙다물고 악물었다. 하지만 두 눈시울 사이의 눈동자는 평정을 잃고 흔들렸다. 그저 당혹스러웠다.


"전하?"


석정이 의아히 되묻는데, 마침 노란 국화꽃잎이 띄워진 차를 홀짝거리던 눈앞의 당상관이 살짝 고개를 드는 것이 보였다. 찻잔 위로 드러난 그 옆얼굴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호조판서 민유중.


수상쩍은 산학청 산원들을 보냈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우상대감이나 호판대감이나 형제가 다 똑같이 자신의 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특별히 어느 한쪽에 확신을 굳히지 못했을 뿐, 상대가 민유중이란 사실이 전혀 놀랍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적이 민유중이라 해서, 민정중이 적이 아니라고 방심할 수도 없었다.


"여기 호판이 산학청의 산원들에게 맡겨 도력장을 확인한 바로는, 최전한이 정리한 옥당의 도력장에, 그것도 전임 전한 권언적의 사수仕數(근무일수)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 하오."

"오류라 하심은..."

"권언적이 미흡했던 사일仕日(근무일) 열흘...그가 제술시관製述試官(과거에서 작문시험을 주관하던 임시관직)으로 성균관에 사진했던, 그 열흘을 누락한 거였소..."


숙종이 자신이 없는 지 웅얼거리듯 발음을 흐리면서 애먼 공좌부만 그저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열흘..."


석정은 흠칫 놀라 두눈을 깜빡였다. 제술시관으로 성균관에 사진했던 기록을 열흘이나 누락했다? 당혹스러웠다. 성균관에서 열리는 반제泮製(성균관의 시험), 별시別試(식년시 외에 특별히 여는 과거), 대윤차大輪次(낙방한 사람에게 추가로 보게 하는 과거)에 권언적이 사진했던 열흘이라니.


"전하, 정녕 열흘입니까?"

"그렇...소."

"신이 열흘이나 누락했을 리가 없습니다. 공좌부를 보여주소서."


석정이 자신도 모르게 빨라진 어조로 아뢰자, 숙종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이미 자신도 이미 서안 위의 옥당 공좌부를 샅샅이 살핀 참이었다. 호조판서 민유중이 대령해놓은 것이었다. 전한 권언적은 성균관에 사진했던 열흘을, 태학 공좌부가 아닌 여기 옥당 공좌부에 똑바로 서명을 했었다. 그러니 사수仕數를 사흘도 아니고 열흘이나 틀릴 이유가 없었다. 민유중은 싸늘한 눈초리로 석정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이미 고람考覽(자세히 살펴봄)을 하셨네. 전하께서도 이상히 여기셨으이. 권언적이 똑바로 수결을 해놓았으이. 헌데 어찌 진進이 부진不進으로 둔갑했겠는가. 이건 누군가의 실수失手가 아니라 술수術數네."


석정을 희끗 돌아보며 민유중은 일부러 술수術數 두글자에 힘을 주어 분명히 발음했다. 당연히 석정에게 혐의를 두는 발언이었다. 숙종은 그런 민유중의 시선이 최석정에게 닿는 것 만으로도 몸서리를 쳤다.


"술수?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아는가?"

"예, 압니다."

"안다?"

"실수로 공좌부를 잘못 계산해도 해당 관원은 물론 수장까지 관복을 벗어야 하는 일. 하물며 최석정이 실수가 아니라 술수라면, 최석정은 그 이름이 사판仕版(벼슬아치명부)에서 지워지고, 심지어 유배를 떠나야겠지요."


민유중이 담담하게 답하였다.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석정은 그저 치가 떨렸다. 그때 공좌부엔 분명히 전임 전한 권언적이 제술시관으로 성균관에 사진했던 기록이 없었다.


물론 제술시관으로 열흘을 사진했었는지, 사흘을 사진했었는지, 빠지거나 틀린 기록마저 찾아서 보완할 여력은 없었다. 그저 홍문관 외에 각청에서 밀려드는 공좌부를 계산하고 도력장을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 공좌부에 있는 그대로 셈을 했었다. 관료가 각자 서명란에 제 이름을 서명해놓은 진進의 횟수와, 서리가 결근한 관료의 서명란에 찍은 부진不進 도장의 횟수를 정확히 대조하여 오차를 없앴었다.


"공좌부를 보겠습니다."


석정이 다급히 재차 아뢰자, 숙종은 문간의 두광을 부를 것도 없이 그저 서안 위의 옥당 공좌부를 집어 석정의 무릎맡으로 던졌다. 상황이 워낙 다급하여 피차 예를 차릴 것도 없었다.


"그러시오."


석정은 공좌부를 펼쳐 권언적의 진부진進不進 기록을 두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그동안 두광이 찻상을 들였다. 헌데 이번엔 민유중과 달리 금빛 찻물엔 꽃잎 한닢도 없었다.


"왜 나는 꽃잎 한닢 없는가."


석정이 푸념해 보았자, 두광은 대꾸도 없이 물러갔다. 주는 대로 먹게 생겼다. 맛도 쓰고 맵고 요상했다. 석정은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마시며 공좌부를 마저 훑었다. 권언적의 서명 횟수가 눈에 띄게 늘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석정은 두눈을 깜빡이고 부진不進 직인의 갯수도 똑바로 세어보았다. 간혹 관리들이 부진不進 직인을 지우고 슬쩍 서명날인하는 일이 있는 탓이었다.


하지만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진進의 증거로 권언적이 그날그날 친필로 서명한 사수仕數가 열흘이 늘어서 무려 오십오五十五였다. 많은 관료들이 환국으로 석달전에 복귀하였으니 사일仕日이 일고一考(6개월)의 반절에 못 미친다 해도, 전한 권언적은 환국 직전에 복귀하고도 사일이 사십오四十五일로 턱없이 모자랐다. 그런데 지금은 진進이 열흘이 늘고 부진不進이 열흘이 줄었다. 뭔가 셈을 잘못해서 닷새가 왔다 갔다 한 건가. 하지만 닷새든, 열흘이든 결코 자신의 머리에선 나올 수 없는 오차誤差였다. 그것도 예문관 관원도 아니고 홍문관 관원이 성균관 제술시관으로 사진한 날이 무려 열흘? 석정은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돼."

"..."


숙종은 흔들리는 눈길로 석정을 보았다. 이미 이번 도목정을 기화로 석정을 전한에 앉히기로 미리 이민서와 논의가 되어 있었다. 그 사실을 이민서가 사전에 최석정에게 귀띔을 했을 수도 있었다. 고의든, 아니든, 석정은 사일仕日을 열흘이나 누락했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 석정은 승냥이 같은 신료들에게 먹잇감이 될 터였다. 6품관 이상이 모이는 상참의 때도 아무도 풀지 못하는 마방진을 내어놓는 저 천재가 실수로 전임 전한의 사일仕日을 열흘이나 누락했다고 믿겠는가.


"자네의 실수로 득을 본 사람도 자네니,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구만."

"..."


석정은 온몸을 뜨겁게 휘도는 피가 차갑게 식어 굳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민유중이 자신에게 활과 살을 겨누었다. 배신감 따위가 아니었다. 자신은 왕을 잘 알았다. 최소한 조정 안의 문무백관들 중에서는 제일 잘 알았다. 왕은 필요에 따라서 사람을 쓰고 버리는 냉혈한이었다. 곧잘 감정이나 감상에 휘둘리고, 금세 혈기가 끓어오르지만, 그만큼 쉬이 식었다. 필요가 있으면 아끼고, 필요가 없으면 버렸다. 왕이 자신을 누구보다 아끼는 것도, 사실은 누구보다 아깝기 때문일 뿐...


민유중.


숙종은 차가운 눈초리로 민유중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바싹 말라버린 아랫입술을 혀끝으로 훑었다. 뇌리에 산가지가 춤추느라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검지와 중지가 자신도 모르게 불안하게 서안 위를 톡톡 두드렸다.


열흘이 문제였다. 최석정이 열흘씩이나 실수로 사일을 빠뜨렸을 리가 없었다. 최석정이 뭔가 정신나간 상황이었으면 몰라도, 그럴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차분했던 모습을 보면, 느긋하게 옥당 댓돌에다 산원들더러 풀라고 마방진을 적어놓은 것을 보면, 결코 실수할 상황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고의로든, 혹은 실수를 인지한 상황이든 뻔뻔하게 전한 자리에 앉을 최석정도 아니었다. 최석정의 공명정대한 인품을 믿는 게 아니었다. 좀더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안목을 믿는 것이었다. 언발에 오줌 눌 만큼 얕은 수작을 쓸 만큼 멍청한 최석정이 아니었다.


최석정의 실수가 아니고 술수라...민유중은 최석정에게 혐의를 돌렸지만, 누군가의 함정이 분명했다. 도력장이 틀리지 않았다면, 공좌부가 틀린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틀린 공좌부로 최석정에게 함정을 파놓을 만한 사람은 자신이 알기로 단 셋이었다.


전임 홍문관 대제학이자 제학이었던 김석주,

현임 호조판서 민유중,

그리고 며칠 전에 사임한 이민서.


이들 셋이 가의인可疑人(용의자)이었다. 얼마든지 서리나 산원을 포섭하여 홍문관 공좌부에 장난을 쳐놓을 법한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이민서는 아니었다. 자신이 사전에 최석정을 전한에 앉힐 의중을 알렸으니 미리 장난을 쳐둘 시간이 충분한 자이긴 했다. 하지만 이민서는 최석정의 상관으로서 도력장을 책임진 인물이었다. 최석정이 관복을 벗으면 이민서도 관복을 벗어야 했다. 삼정승도 부러워하는 문형文衡의 자리를 잠시 내려놓을 수는 있어도 그렇게 먹칠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의심스러운 건 단 둘 뿐..


"상평통보 일은 어찌 되어가는가?"


뜬금 없는 왕의 물음에 민유중은 잠시 멍한 얼굴이 되었다. 최석정의 부정을 밝히는 자리에서 갑자기 상평통보의 일을 꺼내다니. 상평통보는 허적을 비롯한 남인들이 착수한 일이었고, 남인정권이 실각한 지금은 김석주와 자신이 이어받아 계속해서 추진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찌 왕이 묻는 건지 이상했다. 자신도 모르게 곁눈으로 등뒤를 훔쳐보며 최석정의 눈치를 살피니, 최석정은 무릎쪽의 단령자락을 힘껏 비틀어쥐는 참이었다.


지금 전하께서 민유중을 시험하신다...


최석정은 자신도 모르게 온몸을 옹송그렸다. 어깻죽지는 소름이 끼쳐서 움츠러드는데, 손엔 땀이 쥐였다. 지금 왕의 뇌리엔 천칭天秤이 놓였다. 웬만해선 시전에서조차 잘 쓰이지 않고 가벼운 금품이나 패물 같은 거나 달 때 쓰는 맞저울이었다. 정확한 무게를 가리기 위해서라도 따로 일정한 추錘를 달지만, 정확한 무게를 매기려는 것도 아니고, 누가 더 무게가 나가는 건가를 가릴 때는 추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저 두 맞접시에 각각 자신과 민유중을 올려놓고 비교하면 끝날 일이었다. 누가누가 더 필요한가.


"상평통보라면, 은자은銀自銀 전자전錢自錢, 병판대감의 견해대로 시세에 각자 맡기게 하되, 전주全州, 청주淸州, 공주公州 등지에 가게를 설치하여 시장을 늘려서, 백성들이 돈의 편의를 깨닫도록 추진 중입니다. 또한 새로 가설된 가게의 현황을 전라감사에게 수시로 보고받아 면밀히 살피는 참입니다."

"새로 가설된 가게의 현황이라?"

"예 전하. 지난 한달간 전주의 시전은 고작 열두곳이 늘었고 또 서른다섯곳이 심의 중입니다. 아직은 백성들이 쌀을 더 선호하지만 은銀의 통행량도 마흔여덟 근斤이 늘었습니다. 이렇게 돈을 풀고 반대로 쌀을 사서 회록會錄(관아의 곡식을 다른 창고에까지 보관하는 일)을 한다면, 쌀 대신 돈에 더 백성들이 의존하게 될 것입니다."


민유중의 답변은 술술 막힘이 없었다. 석정은 천천히 두눈을 깜빡였다. 애초에 자신은 돈의 유통을 반대했다. 부익부 빈익빈을 더 악화시킬 거라 믿은 탓이었다. 하지만 왕도, 김석주도, 조선이 돈과 수레로 굴러가는 것을 꿈꾸었던 잠곡潛谷 김육의 혈통들답게, 돈의 통행을 추진했다. 아니, 애초에 뒤에서 역관들과 상인들을 시켜 남인들을 움직인 게 왕과 김석주일지도 몰랐다. 그러니 왕이 민유중에게 돈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것도, 정말로 맞저울에 둘을 함께 달아놓고 비준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헌데, 민유중은 보기 좋게 왕의 요구에 부합했다. 하지만 제법 달변이 빼어난 답변인데도 석정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쌀의 통행을 묶어둔다면 결국 쌀의 가격은 더 오를 것입니다."

"어차피 삼남三南은 쌀이 남아도니 그 정도는 괜찮으이. 오히려 2만석을 감손減損시키면 다른 지방과 물가가 균동均同해져서 나라의 근심이 없어질 걸세."

"멀리 내다보십시오. 차라리 삼남의 쌀을 다른 지방으로 유통시킬 방안을 찾는 것이 낫지, 겨울에 회록이라니요. 어딘가에서 백성들은 더욱 굶어죽을 것입니다."

"어차피 삼남의 곡식을 다른 데로 보낼 수도 없는데 회록 쯤이 뭐가 문젠가!"

"문제지요. 차라리 삼남의 곡식을 삼북으로 돌려서 백성들의 기근을 달랠 방도를 마련해야지요."

"방도가 없지 않은가 방도가!"

"없으면 찾아내야지요. 쌀 한톨도 백성 한목숨도 헛되이 해선 안됩니다!"


두사람은 치열하게 설전을 벌였다. 민유중은 삼남의 각 지역의 물가를 균등하게 맞추는 것을 더 우선했다. 하지만 최석정은 쌀이 관아의 곳간에서 썩어나는 것을 더 고민했다. 두사람의 치열한 설전을 지켜보면서, 숙종은 머릿속의 저울이란 놈이 팽팽하게 수평을 이루는 것을 보았다.


"알았으니 전한 최석정은 먼저 나가보라."


최석정보다 한발 앞선 곳에 엎드린 민유중은, 왕이 최석정을 먼저 내보내는 것에 흠칫 놀라 두눈을 반짝였다. 평소 왕이 서안 위에 새끼손가락을 까딱거리면서 최석정을 항상 나중에 남겨두는 사실을 이미 눈치챈 터였다. 그런데 지금 최석정을 먼저 내보내고 자신을 남겼으니, 어심에 박힌돌 최석정을 자신이 튕겨낸 건가 싶었다.


"알겠습니다."


최석정이 살짝 가라앉은 음성으로 답하고선 두손을 모으고 사배를 올리고 물러났다. 문턱을 넘는 석정의 발소리에 민유중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헌데 고막으로 왕의 옥음이 파고들었다.


"이번 일을 누구 아는 사람이 또 있소?"


평소답지 않게 왕이 경어체로 정중히 묻는 말에, 민유중의 입가에서 회심의 미소가 꿈틀거리다가 굳어졌다. 이번 일을 누구 아는 사람이 또 있냐니. 왕의 질문이 심상치가 않았다. 민유중은 눈꺼풀이 뻣뻣해지는 느낌으로 자신도 모르게 두눈을 치켜떴다. 그나마 고개를 숙인 탓에 감히 용안을 훔쳐보는 것이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라면 다행이려나.


"예?"

"더 있는가 물었소."

"없습니다."


민유중은 안색이며 음색 하나도 바꾸지 않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이번 일을 아는 사람은 무려 셋이나 있었다. 한사람은 음모를 주재한 김석주, 또 한사람은 자신의 가형인 우상대감 민유중, 그리고 아마도 스승 송시열 정도였다. 지금쯤 저 회덕 화양구곡의 스승에게 자신의 노비가 밀서를 전했을 터였다.


"없다? 정녕 없다?"

"예, 전하."

"허면 사흘 안에 이 일을 누군가가 입에 담으면 경의 목숨부터 거둘 거요."


살벌한 발언을 마치 듣기 좋은 꽃노래를 부르듯이 입에 담는 왕이었다. 민유중의 동공이 확대되긴 커녕 오히려 좁아졌다.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왕이 무슨 재주로 자신의 목숨을 거둔다는 건지. 허적과 윤휴를 비롯해서 거물들의 목숨을 취하고 나니 대신들의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빈말이 아니오. 얼마전 호판의 종놈 하나가 도망갔다지?"

"아, 예, 그건 어찌..."

"그 종놈이 웬 패도 한자루를 훔쳐 달아났다는데..."


민유중은 흠칫 놀라서 귀를 의심했다. 종놈들이 도망하는 일쯤이야 조선팔도에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종놈이 패도 한자루를 훔쳐서 달아났다고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하필 잃어버린 패도는 딸 진여의 것이었다. 그것도 상의원에 소속된 이덕재란 소은장小銀匠이 직접 세공한 물건이었다. 워낙 명장이라 칼등에 자신의 이름 끝자인 실을재載자까지 새겨놓는 것이 그 버릇이었다. 하필이면 화양구곡에서 잃어버렸다 하여, 그저 아깝다고만 여기는 참이었는데, 그 패도가 왕의 손에 있다면...특히나 지금 왕은 달아난 노비와 잃어버린 패도를 결부시켜 자신에게 낚싯줄을 드리웠다. 여차하면 도망한 노비를 여식에게 갖다붙여 추문으로 엮을 기세였다.


설마...


잃어버린 패도가 왕의 수중에 들어간 건 아니겠지. 민유중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럴 리는 없었다. 그 밤중에 잃어버린 패도가 왕의 수중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괜한 걱정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자꾸만 가슴 한구석이 켕겼다. 그때 웬 도깨비가 스승의 암서재 추녀 아래에다 애기살을 꽂아놓고 스승의 외손주를 데려갔다 했다. 만일 왕의 수중에 진여의 패도가 들어갔다면...


이러다 여식 앞길을 망칠까 더럭 겁이 났다. 마음이 급해졌다. 얼른 여기 양화당을 나서서 소은장 이덕재를 찾아야 했다. 혹시라도 왕에게 패도가 들어갔더라도, 소은장만 입막음을 하면 될 일이었다.


"헛소문인가? 요즘 워낙 말도 안되는 얘기들이 돌아다녀서 말이오."


헛소문도 퍼뜨리겠다는 압력인가. 민유중은 순식간에 입안의 침이 말라붙었다. 억지로 삼키다가 오히려 양쪽 고막이 울릴 지경이었다. 자신의 목숨이라도 거두겠다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민유중 자신이 죽든 여식이 죽든, 둘중 하나는 죽어야 끝날, 아니 죽어도 끝나지 않을 일이었다. 자신의 가문이 추문에 휘말릴 터였다.


"이만 물러가 보시오. 경의 입이 무거우리라 믿겠소."


왕의 부드러운 음성이 민유중의 뒷덜미를 훑었다. 아직 해가 중천에 뜨기 전인데도, 민유중은 어쩐지 눈앞이 침침해지는 것을 느꼈다. 겨드랑이는 벌써 축축하게 젖어서 척척했다. 두피의 모공은 물론 그 속까지 진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사흘...앞으로 사흘만 침묵을 지켜라...생각해 보니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 사흘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소은장小銀匠장의 입을 막는 데엔 충분했다. 혹여 그 패도가 왕의 수중에 있다면, 손을 쓰기엔 빠듯할 지도 모르지만. 생각에 잠겨 걸어가던 민유중은 문득 왕이 자신의 입만 막은 사실을 떠올렸다.


최석정.


그놈의 입을 통해 세간에 흘러나가도 문제였다. 최석정이 혼자 끙끙 앓다 죽을 것도 아니고, 사흘간 누군가에게 발설하지 말란 법도 없었다. 한시 바삐 최석정을 찾아 수단방법을 동원해서 입을 막아야 했다. 민유중은 급해진 걸음걸이로 양화당 앞마당을 가로질러 통명전 동협문으로 빠져나왔다.


어디로 갔을까.


민유중이 동협문을 나서자마자 황망히 고개를 두리번거리니, 마침 담벼락에 기대어 선 최석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민유중은 너무도 놀라서 헛숨을 들이켰다. 찾던 얼굴을 보고도 놀라고 말았다. 자신이 찾을 줄 알고 기다린 건가. 어떻게 알고 예서 자신을 기다렸는지 의아했다. 왕이 미리 언질을 준 것도 아니었다. 촌음을 다투는 일이라 여긴 건지, 자신의 보고를 듣자마자 왕은 지체하지 않고 최석정을 불러들였으니, 최석정이 뭘 알고 자신을 기다렸을 리가 없었다.


"자네...마침 찾아가는 수고를 덜었구먼."

"저는 어이하여?"

"전하께서 불문에 부치라 하신 걸 알고 날 기다린 게 아닌가?"

"불문에...부치라?"

"전하께서 참으로 자네에 대한 총애가 대단하시네. 자네 잘못을 알고도 묻어두라 하신 걸 보면."


석정은 미간을 찡그렸다. 불문에 부치라니. 민유중이 고작 사흘의 말미를 얻었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그로선 어쩐지 서운했다. 입안 가득 매운 한숨이 들어찼다. 전하께서 민유중에게 이번 일을 불문에 부치라 하셨을 지는 몰라도, 자신은 불문에 부칠 생각이 없었다.


"제 잘못이요?"

"그럼 누구 잘못이겠나. 사판에서 이름이 지워질 짓을 했는데도 불문에 부치다니...참으로 복도 많아."


석정은 더이상은 대꾸하지 않고, 물끄러미 민유중의 두눈을 직시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민유중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아둔하시군요."

"뭐?"


민유중은 얼굴이 벌개졌다. 아둔하다?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스승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자신이었다. 물론 스승 곁엔 권상하와 이상이, 또 지근거리엔 윤증이 있다지만, 스승 밑에 기라성綺羅星같은 문재文才들이 모이는 것도, 콩을 심겠다고 모여드는 것이 아니라 콩고물을 먹겠다고 모이는 것이었다. 스승의 기반은 초야에 묻힌 윤증 같은 은자들이 아니라 조정에 박힌 자신이나 가형 같은 제자들이었다. 아둔해선 도저히 버텨낼 수가 없는 이곳 조정에서 버텨내며 스승의 원대하신 뜻을 대신 펼치는 자신더러...뭐? 아둔?


"열흘은 너무했습니다."


석정은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로 웃었다. 최석정 같은 천재가 결코 실수로 셈을 틀릴 리가 없다, 술수로 틀린 것이다, 대충 이런 논리로 누명을 씌우기 위해서 사일仕日에 농간을 부린 모양인데, 그렇다면 오히려 오차를 줄였어야 했다. 오차를 늘린 탓에 세상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안 믿어도, 왕은 자신을 믿어주게 생겼다.


"한 사흘로 하지 그랬습니까? 그랬으면 전하께서도 저를 의심하셨을텐데."

"무슨 소린가?"

"아무리 아둔하셔도 그정도는 알아들으셨겠지요. 듣는 건 잘하실테니."

"..."


민유중의 눈동자가 분노로 굳었다. 하지만 석정은 더는 말을 섞을 생각도 없는지, 그대로 홱 돌아서서 걸음을 내딛다가, 문득 생각난 듯 걸음을 멈추었다. 등뒤의 민유중을 곁눈으로만 돌아보는 석정의 눈빛이 서늘했다.


"설마 병판대감과 손잡으신 건...아니지요?"

"뭐?"

"제가 알기로는 잠곡공潛谷公(김육의 별호)의 장례 당시 감히 무덤에 굴을 팠다 하여 대감께서 병판대감의 부친과 숙부를 탄핵했던 일로 사이가 단단히 틀어졌었는데...설마 아니지요?"


웃음기가 가신 두눈으로 민유중을 보는 최석정의 시선은 닿기만 해도 베일 것처럼 날카로웠다. 폐부를 꿰뚫어보는 듯한 눈길에 민유중은 흠칫 놀랐다. 만만한 놈은 아니라고 여겼지만, 조금은 물렁한 구석이 있을 것 같았던 저 눈매는 이제 보니 칼날 같았다. 게다가 저 머릿속엔 선대의 은원들에 대해서도 빼곡하게 들어찬 모양이었다. 감히 무덤에 굴을 판 죄로 김좌명과 김우명 형제를 거침 없이 탄핵하여 한때 서로 척을 졌던 일까지도. 민유중은 긴장하여 다소 높아진 음성으로 대꾸했다.


"정치란 영원한 피아彼我(이쪽과 저쪽)도 없는 걸세."

"아무리 그래도 부모의 원한을 잊기란 쉽지가 않지요. 무언가 막후의 거래가 있었다면 모를까."


석정은 정색으로 응수하곤 이젠 정말 더는 말도 섞고 싶지 않은 듯이 그대로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어서 육조거리로 가서, 이민서를 만나봐야 했다. 육조거리로 향하는 석정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적어도 이민서는 이일에 대해서 알아야 했다. 문제가 불거지면, 자신과 함께 관복을 벗든, 사판에서 이름이 지워지든, 귀양을 가든, 운명을 같이할 존재였다.


전란의 잔해가 남았지만 탁 트인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이르러, 석정은 오히려 눈앞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이조의 삼문 앞에 이르러, 석정은 문을 쳐다보고 고개를 떨구면서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석정은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였다. 삼문을 지키는 수문장들이 의아한 눈길로 석정을 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신임 이조판서 이민서 대감을 뵈러 왔네."


석정은 수문장을 시켜 연통을 넣고 당상청사로 들어가 이민서를 만났다. 석정에게 소식을 들은 이민서는 충격으로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도력장에 문제가 생길 리가 없었다. 호조와 병조에서 보낸 산원들이 뭔가 꼼수를 부릴 기미를 보였지만, 석정이 이미 직접 검산을 하면서 원천봉쇄를 했다. 실수는 있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열흘이나 계산이 틀릴 리가 없었다. 설령 성균관에 제술시관으로 파견되어 사진했던 열흘을 통째로 빠뜨렸다 해도, 옥당 공좌부에 적혀 있었다면 석정이 누락했을 리가 없었다.


"옥당 공좌부엔, 적혀 있었을 게 아닌가? 성균관에 제술시관으로 갔다 해도, 성균관에서 그 사진기록을 보내왔더라면..."

"제가 처음 고람했던 옥당 공좌부엔 사일仕이 사십오일만 적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하께 올라간 공좌부엔 오십오일로 적혀 있었습니다. 누군가 권언적의 성균관 사일 열흘을 뒤늦게 추가로 적어놓은 겁니다."

"그럴 리가? 진이 부진으로 둔갑할 순 있어도, 부진이 진으로 둔갑할 순 없으이. 누가 뒤늦게 적어놓은 게 아니면."

"..."

"그럼 태학 공좌부는?"

"워낙 늦게 올라와서...그건 미처..."


이민서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하필이면 성균관에 사진했던 열흘이 빠졌다가 뒤늦게 기입되었다? 태학 공좌부는 늦게 올라왔다? 이건 말도 안되었다. 최소한 홍문관, 성균관, 산학청의 관원들이 합심해서 공좌부를 조작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왕에게 고한 것이 민유중이라면 역시 민유중도 가담했을 법도 했다. 하지만 성균관이라면...


"내 알아볼테니, 너는 이만 돌아가거라."

"혹시 짚이는 데라도..."

"나중에 얘기하자꾸나."


이민서의 얼굴이 밀랍처럼 굳어졌다. 목소리도 차갑게 식었다. 석정은 이민서의 온기 없는 음성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가 놀라워서 두눈을 깜빡였다. 이렇게 차가운 이민서의 얼굴을 본적이 없었다. 이복아우 이민철과 절친한 친우라서, 또 왕이 신임하는 천재라서, 친우 남구만이 아끼는 제자라서, 그렇게 매번 볼 때마다 다정한 눈웃음을 짓던 이민서였다. 그런 이민서가 지금은 모든 감정이 굳어버린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듯했다. 아니, 자신의 어깨너머로 다른 누군가를 보는 건가.


"대감..."

"나중에..."


이민서는 나중이란 말 밖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이번 일은 성균관의 누군가가, 그것도 자신이 아끼는 조카 이사명이 관여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이민서는 최석정을 당장 내보내고, 자신도 다급한 걸음으로 당장 육조거리를 나섰다. 탁 트인 거리엔 인절미 장수를 비롯해서 괴나리 봇짐을 진 유생이며 장사치들까지 온통 북적였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전쟁의 잔해 덕에, 거리 구석구석에 깨진 도자기 파편이나 사금파리 같은 것이 널린데다, 어디서 날아온 건지 틀어박힌 건지 알 길 없는 돌부리들 탓에 주의하지 않으면 목화 갑피가 온통 찢어지고 해어지는데도, 이민서는 가마꾼을 부르고 할 것도 없이 정신없이 홍문관 옥당으로 항하였다.


아직 면신례도 치르지 못한 탓에, 이사명은 옥당에 없었다. 어차피 품계가 낮은 옥당관원들은 옥당에 딸린 행각을 낭관청사로 삼았으니, 차라리 행각 다락방으로 가야 했다. 이민서가 사다리 같은 목조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다락방 깊숙한 구석에서 낡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한권을 얼굴에 엎어놓고 잠든 청단령의 관원이 눈에 들어왔다.


"사명아!"


숙부의 노한 음성에 책 밑의 얼굴이 움찔 놀라 꿈틀하는 듯 했다. 무려 3백권에 가까운 자치통감강목 한질에서 한권을 빼서 읽다가 들킨 탓인지, 뭔가 켕기는 거라도 있는 탓인지, 책이 얼굴에서 툭 떨어지며, 이사명의 잘생긴 얼굴이 윤곽을 드러냈다.


"숙부님?"


눈을 뜬 이사명의 눈앞엔 자신을 차디차게 내려다보는 숙부 이민서의 얼굴이 있었다. 이사명은 숙부의 노한 얼굴과 눈빛에 가슴 한구석이 켕겼다. 자신이 한짓을 숙부가 알아차린 것이 분명했다. 묻지 않아도 스스로 알 거라고 느꼈는지, 숙부는 굳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참이었다.


"왜 그러시는..."

"몰라서 묻느냐?"


이민서는 기가 차서 파르르 치를 떨었다. 존귀한 백강의 후예가 이리 비천한 협잡이나 하다니. 용서가 되질 않았다. 가문의 영예에 먹칠, 아니 똥칠을 해도 유분수지.


"네 감히..."

"알아듣게 말씀을 하시지요."

"그래도 네놈이...감히 가문의 깨끗한 명성을 더럽히고도..."


흥분해서 얼굴이 온통 벌개지는 이민서를 보면서, 이사명은 말없이 굵직하고 넑직한 제 귓볼만 문질렀다. 유달리 굵고 넓은 귓볼은 자신들 백강 혈족의 도드라진 특징이었다. 여차하면 친조카가 아닌 친구 제자의 편을 들게 생긴 숙부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동작이었다.


"전 그저 태학 공좌부를 조금 늦게 낸 것 뿐입니다. 제 잘못은 그저 바늘만한 잘못일 뿐...바늘을 몽둥이로 키우지 마시지요.""

"너, 너..."


이민서는 숨이 턱 막혔다. 어떻게 된 사태인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최석정이 각사各司 공좌부를 검토하는 동안 이사명은 일부러 한발 늦게 태학 공좌부를 제출했다. 성균관이 예조 관할이란 것만 생각하다 보니 홍문관의 전한이 제술시관으로 사진하기도 한다는 걸 미처 생각지도 못한 최석정의 실책이었다. 당사자인 전한 권언적은 홍문관이 아닌 성균관 공좌부에 대충 서명을 해놓고 그냥 넘어간 모양이었다. 하지만 태학 공좌부를 제때에 보기만 했어도, 최석정은 권언적이 성균관에 제술시관으로 사진한 것을 생각해냈을 지도 몰랐다.


"바늘? 네놈이 똑바로만 했어도, 석만이 그놈은 권언적의 성균관 사일이 누락된 걸 알아차렸을 게다."

"글쎄요. 제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권언적 본인이 서명도 않고 옥당 서리들도 부진不進이라 찍어놓은 걸, 최석정이 무슨 수로요..."


이사명은 차갑게 비웃었다. 옥당 공좌부엔 권언적의 서명도 빠지고 부진不進이라 찍혀 있고, 태학 공좌부엔 별도의 언급도 없었으니, 각사各司의 공좌부를 살피느라 몸이 열개라도 모자란 최석정으로선 죽었다 깨어나도 알지 못할 일이었다. 이민서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역시 원래는 부진不進이라 되어 있었겠구나. 부진不進이 진進으로 둔갑한 게로구나. 그러자면 공좌부를 중간에서 바꿔치기 했을 거고?"

"이제 아시겠습니까...이번 일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담했는지...그냥 혼 좀 내주겠다고 각사 공좌부를 떠넘긴 줄 아셨지만, 사실은 혼을 빼놓고 망쳐놓겠다고 나선 거죠. 그러니 최석정 혼자 어찌 감당했겠습니까?"

"너만, 너만 똑바로 했어도..."


이민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사명이 말 한마디만 더하면 그대로 주먹으로 뺨을 칠 기세였다. 더는 숙부의 심기를 건드려선 안된다는 것을 느낀 탓인지, 이사명은 다시금 귓볼을 매만지며 이민서의 눈치를 보았다.


"제가 아니어도, 최석정은 어차피 당했습니다."

"아니...네놈은 똑바로 했으면 안 당했다. 네놈만 아니었으면."

"저 아니어도 당했다니까요...그 많은 공좌부를 떠맡기지 마셨어야죠. 최석정도 사람인데."

"흥, 아무렴 내가 난간도 없이 친우의 제자를 물가에 방치했을 성 싶으냐?"


이민서가 차갑게 건넨 말에, 이사명은 두눈을 발작적으로 깜빡였다. 지금 숙부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다.


"무슨..."

"석만이도 사람인데. 아무렴, 실수로 손발이 삐끗할 수도 있는 건데. 내가 아무 대비도 없이, 마냥 손놓고 당하게 놔뒀을 거라 믿었더냐? 이 숙부가 그리 무책임한 인간이더냐?"

"숙부님?"


이사명이 조금 긴장하자, 이민서는 차갑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사명은 영문을 몰라서 인상을 쓰고 이민서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숙부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무슨 말씀을..."


이사명이 계속해서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을 던졌지만 이민서는 들은 체 만 체 그냥 뒤돌아설 뿐이었다. 마음이 급했다. 그런데 등뒤에서 이사명이 하는 말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친우에의 의리義理로, 육친에의 정리情理를 버리시진 않겠지요?"

"뭐?"


의리냐 정리냐, 두 단어를 들은 이민서의 눈밑이 잘게 경련했다. 애초에 비교할 수도 없는 단어였다.


"소질에겐 숙부님이 선친 대신입니다. 숙부님이 제 부친이십니다."

"..."


이민서의 얼굴이 굳어졌다. 7년 전에 세상을 뜬 형을 입에 담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당금 조선에선 대공친大功親처럼 피를 나눈 6촌 이내는 피차 부양의 의무를 졌다. 형이 죽었으니 이사명에겐 자신이 아비 대신이었다. 또한 이사명이 아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난 7년간을, 여막살이 할 때를 제외하곤 제 아비의 공백을 느끼지 않도록 알뜰살뜰히 챙겨주었다. 그런 부모자식 같은 정情을 들먹이며, 조카 사명은 지금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손발을 꽁꽁 묶을 심산이었다.


"제가, 숙부님 아들이라구요."

"그래, 내가 형님 대신 네 아비다. 그래서 더 네놈 막아야겠구나."

"제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 그냥..."

"그러니 더 막아야지. 네 의지가 아니면 더더욱..."

"숙부님! 저도 이미 발을 들였는데 잘못되면 저까지..."

"걱정 마라. 네놈 다치게는 안한다."


이민서는 이를 악물고 대꾸하곤 거침 없이 행각 다락방을 나섰다. 등뒤에서 조카 이사명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지만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마침 서리들이 마당 앞을 비질하다 이민서를 보고 엉거주춤 했다.


"대감..."

"최전한은?"

"예? 그게 성균관엘 다녀오신다고..."

"성균관?"


이민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길이 엇갈리려나 싶었다. 최석정이 성균관으로 간 용건은 권언적의 사일仕日이 진짜로 열흘이나 되는 건지 서리나 수복, 혹은 유생들에게 확인하고, 또 공좌부가 늦게 올라온 경위를 조사하기 위함인가 싶었다. 더불어 누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나 하는가도.


이민서의 예측대로 석정은 성균관 정록청에서 동장의 서종태의 주재 하에 성균관전적 두명을 만나 권언적의 실제 사일仕日을 알아보는 참이었다. 서리 하나가 소반에 국화차를 받쳐들고 와서 시큰둥히 내어놓았다. 노란꽃잎이 동동 떠선 찻잔 위로 넘실거리는 금빛 찻물을 따라 찰랑거렸다.


"요기...거 주는대로 마시지, 멀 그리 까탈을 부려싸..."

"미안하이. 내 원래 엽차를 마시면 속병이 좀 도져서..."


석정은 민망한 안색으로 윗배를 감싸쥐었다. 엽차를 한모금씩 마시면 마실수록 입안이 더 바싹바싹 마르고 텁텁해지는 것도 모자라서 속이 쓰리니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굳이 국화차를 가져오라 일렀더니 저 야단이었다. 상전의 신분에 따라 종놈의 위세가 달라진다지만, 고작 관노가 이토록 무례한 건 속사정을 알 수가 없었다.


"정말...두어달간 열흘이나 제술시관으로 사진했다, 이 말이신가?"

"그렇다니까요."

"예문관도 아니고, 어찌 홍문관에서..."

"글 하면 홍문관이니...그때 대제학이셨던 김석주 대감께서 특별히..."

"열흘이라...공좌부 좀 보여주겠나?"

"그게...산학청에서 검열을 한다고 가져가서...아직...그렇지 않나 장서리"


전적이 대답하다 말고, 구석의 서리한테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장서리라 불린 자가 제 볼을 긁적이며 대꾸했다.


"야, 아직 안가져 왔슴다."


아까부터 자꾸 긁어선지 눈밑이며, 목덜미며, 군데군데 벌겋게 부어올랐다. 헌데 외관 뿐만이 아니라, 발음도 어눌했다. 아무리 반촌의 사투리가 알아듣기 어렵다지만, 발음 자체가 뭉개져서 도저히 분간할 수 없었다. 서종태는 고아한 몸짓으로 엽차를 한모금 마시다 말고,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자네 목소리가 왜 그런가?"

"목이 좀...부어서...."


장서리가 목울대를 부여잡았다. 하도 목을 부여잡아선지, 목젖까지 살구씨 색깔보다 붉어진 모양이었다. 서종태는 그런 장서리를 보고 미간을 더 찡그렸다. 자신도 모르게 콧잔등이 벌름거려졌다.


"자네..."

"아으, 매워...."


장서리가 괜히 코를 감싸쥐었다. 그 손끝은 어쩐지 연한 분홍빛이었다. 아까부터 콧잔등을 계속 찡긋거리면서 실룩거리게 되는 참이었다. 목소리도 갈라졌다.


"자네....뭐 잘못 먹었나?"


서종태는 의아한 눈길로 장서리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눈이 매운 듯이 자꾸만 두눈을 끔뻑이는데다, 눈시울, 콧시울, 입시울 주변이 특히 불그스름했다. 목젖 부분도 벌건 것이, 뭔가 매운 것을 먹은 사람 같았다.


"오날 좀 고뿔 기운이 있어..."

"고뿔?"


장서리가 코를 훌쩍이며 대답하는데도 서종태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고뿔하곤 좀 증세가 다르지 않나 싶었다.


"고뿔이 아니라 뭐 잘못 먹은 거 같은데. 약방엔 가 봤나?"

"아니 아직...."

"안 가봤다고? 이상하다...엊그제부터 계속 반한지...그런 냄새가 나던데..."

"소인한테서요?"


장서리는 영문을 몰라서 두눈을 깜빡였다. 반하半夏? 반하 자체가 냄새가 흐려서 좀처럼 맡기도 힘들 뿐더러, 원체 독이 있어 생강으로 법제法製를 해야 하는데, 그러고 나면 더 냄새가 생강에 묻혀서 식별이 어려웠다. 그런 반하의 냄새를 맡는 것도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지만, 애초에 자신은 반하는 물론 약방 근처에도 간 일이 없었다. 물론 성균관 동재 맨앞칸에 설치된 저 작은 약방을 말하는 것이라면, 문턱도 넘지 않았다.


"목은 아프지 않은가?"

"목이요? 목은 와요?"


장서리는 두눈을 깜빡이면서 저도 모르게 오른 손으로 목을 문질렀다. 이미 침도 제대로 삼키기 힘들긴 했다. 목이 제법 부은 모양이었다. 마치 대못을 삼켜서 목에 걸린 느낌이었다. 침을 삼킬 때마다 뾰족하니 찔러서 침을 삼키기도 겁이 났다. 장서리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좀..."

"아픈가?"

"그기...좀..."

"또?"

"눈이...좀..."

"맵거나 아린가?"

"좀..."

"저 약방에 한번 가서 물어보게. 반하독半夏毒일 수도 있으니. "

"반하독? 아니 반하가 냄새가 오데 있다고..."

"글쎄 반하냄새래도!"


서종태가 동재 맨앞칸을 눈짓하며 장서리에게 건넨 말에 석정은 두눈을 깜빡였다. 반하독...어쩐지 신경이 쓰였다. 홍문관 서가에서 책을 꺼내고 넣을 때마다 손목에 긁히는 대못처럼 신경이 쓰였다. 장서리는 지금 눈밑이며 코밑이며, 목젖까지, 며칠 전 자신이 도력장 정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가 동경을 들어 보여주던 얼굴과 흡사했다. 더구나 목이 아팠다니...그때 목이 조금 부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증상도 엇비슷했다. 그저 공좌부 정리를 했을 뿐인데.


"반하? 반하에 중독되면 증세가 정확히 어떻게 되는가?"


석정이 끼여들어 묻는 말에 서종태는 두눈을 크게 떴다. 몰라서 묻느냐는 눈빛이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는 눈을 쳐다보려니, 속눈썹 하나하나가 뾰족한 가시 같았다.


"정말 모르십니까?"

"뭘 말인가?"

"그날 잡숴보셨지 않습니까?"

"내가? 뭘?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반하에 중독되면 목이 바늘로 찌르는 듯 아프고, 또 온몸이 마르고 뜨겁고, 그러다 보니 눈도 제대로 못뜨고 졸리고, 또 괜히 여기저기 가려워서 긁다 보면 벌개지고, 또 변비도 생기고...유독 더위를 타지요."

"..."

"심하면 말을 할 수 없게 되거나 목숨을 잃지요."


석정의 얼굴이 굳어졌다. 최근 그런 증세를 보인 날은, 자신이 공좌부를 고람하고 도력장을 작성한 날 뿐이었다. 집에 갈 때쯤 해서 워낙 비몽사몽이라서 정확히 자각은 못했지만, 유난히 눈시울이며 입시울이 얼얼하고, 목도 마르고 따갑고, 또 최근까지 계속 더위를 탔었다. 헌데 그날 궐에서 먹은 거라곤 집에서 싸온 육포 정도였다. 뭘 먹어서 중독된 게 아니었다. 이해가 되질 않았다.


"뭐, 영감께선 생강도 드셨으니 중독이 심하진 않으셨겠지만."

"무슨...내가 언제 반하를 먹고, 생강도 먹었다는 겐가?"


석정이 미간을 찌푸리고 묻는 말에, 서종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긴 해도, 둘다 냄새가 났습니다. 현묵자형이 절 불러서 직접 영감을 찾아가서 냄새도 맡아보고 왔거든요."

"언제?"

"잠드셨을 때요. 특히 영감 손가락과 입에서 냄새가 났습니다. 냄새가 조금씩 다른 걸 보니 반하 따로, 생강 따로였지요. 천운이 돌보셨습니다."

"반하 따로 생강 따로..."


석정은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도대체 자신이 얼마나 반하에 중독되어 있었으면 걸어다니면서 잠을 자고, 또 잠잘 때 누가 왔다 가는 것도 몰랐다는 건지. 그렇게 정신이 없었으니 언제 어디서 어떻게 중독이 되고 해독이 된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손가락과 입에서 냄새가 났다면 자신이 직접 집어먹었다는 얘긴데, 도무지 짚이는 데가 없었다.


"이상하다 싶었는데, 지금 장서리한테서 비슷한 냄새가 나는군요. 생강 냄새만 빠진 채로."

"그래?"


종태의 얘기를 들을수록 헷갈렸다. 석정은 자신이 중독되고 해독된 경로를 되짚어 보았다. 워낙 집중한 탓에 자기가 지금 반하독에 중독된 거냐고, 장서리가 갑작스런 반촌 사투리로 묻는 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되짚어봐도 자신이 중독된 계기를 알 길이 없었다. 답답하여 한숨을 내쉬는데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이 후끈했다. 어느새 자신이 가운뎃손가락을 쪽쪽 빠는 참이었다.


석정의 얼굴이 도토리묵처럼 굳어졌다. 뭔가 셈에 몰두할 때 나오는 습성이었다. 그 습성이 그대로 이용되어, 독에 중독되고 해독도 된 건가. 모든 게 이 망할 손가락 탓인가 싶어서, 석정은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을 꾹꾹 비틀어 눌렀다.


"허면 독은 내손에 닿는 곳에 묻혀져 있었겠군."


석정은 혼잣말을 하다가 문득 짚이는 것이 있는지 장서리를 돌아보았다. 그날 자신이 반하에 중독되고, 또 여기 장서리도 지금 똑같이 중독된 건가...하지만 옥당에 틀어박힌 자신과, 반촌에 틀어박힌 저 장서리가 똑같이 반하에 중독되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자신은 닷새전, 또 장서리는 오늘이라면...


"서곡瑞谷(서종태의 별호)...당장 저친구에게 강즙薑汁(생강즙)을 먹여보게. 지금 당장."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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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85 사자버거
    작성일
    14.09.19 09:36
    No. 1

    오호라....반하독이 이민서가 남겨둔 보험인가보네요...
    다음편이 궁금합니다!!
    탐정 최석정 출동!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5 네오아주
    작성일
    14.09.19 16:43
    No. 2

    조선의 정치는 오늘날 만만치 않게 무섭군요

    지인의 제자에게도 반하독이라니...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4.09.19 20:38
    No. 3

    살벌하고도 섬뜩한 조선의 정치풍토네요;;
    고증 백단 정치 싸움에 수리학에 역학에 본초학까지 가미하시는 작가님의 두뇌도 섬뜩?하군요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8 뚱뚱한멸치
    작성일
    14.09.21 16:15
    No. 4

    음...
    만만찮구만^^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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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해의 그림자 219 +1 14.12.05 1,628 21 43쪽
219 해의 그림자 218 +3 14.11.30 1,357 29 41쪽
218 해의 그림자 217 +1 14.11.25 1,623 23 43쪽
217 해의 그림자 216 +2 14.11.20 1,575 28 43쪽
216 해의 그림자 215 +3 14.11.14 1,718 30 43쪽
215 해의 그림자 214 +3 14.11.10 2,374 30 35쪽
214 해의 그림자 213 +3 14.11.06 1,321 27 42쪽
213 해의 그림자 212 +3 14.11.02 1,615 29 43쪽
212 해의 그림자 211 +3 14.10.26 1,831 33 44쪽
211 해의 그림자 210 +3 14.10.20 1,635 26 42쪽
210 해의 그림자 209 +4 14.10.13 1,957 30 44쪽
209 해의 그림자 208 +3 14.10.07 1,496 28 43쪽
208 해의 그림자 207 +3 14.10.02 1,318 22 43쪽
207 해의 그림자 206 +4 14.09.25 2,693 34 43쪽
» 해의 그림자 205 +4 14.09.19 1,628 26 43쪽
205 해의 그림자 204 +3 14.09.12 1,715 26 40쪽
204 해의 그림자 203 +6 14.09.05 1,502 30 39쪽
203 해의 그림자 202 +7 14.08.30 1,735 31 41쪽
202 해의 그림자 201 +4 14.08.21 1,849 42 41쪽
201 해의 그림자 200 +5 14.08.14 1,387 30 42쪽
200 해의 그림자 199 +4 14.08.07 2,041 34 42쪽
199 해의 그림자 198 +5 14.07.31 1,859 41 43쪽
198 해의 그림자 197 +3 14.07.21 1,789 41 41쪽
197 해의 그림자 196 +7 14.07.15 1,852 34 42쪽
196 해의 그림자 195 +3 14.07.11 2,020 32 41쪽
195 해의 그림자 194 +3 14.07.06 1,947 34 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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