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 이등병의 1차 대전 생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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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
작품등록일 :
2020.11.21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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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0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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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4

  • 작성자
    Lv.99 증오하는자
    작성일
    22.06.21 11:04
    No. 31

    하여간 국무장관으로서 스팀슨 독트린'이라는 국제정치사에 중요한 선언을 하였는데, 공화당 정권에서 활약하였음에도 후에 프랭클린 루즈벨트에게 발탁되어 1940년부터 다시 전쟁부장관에 올라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미국과 연합군 승전에 큰 역할을 하였답니다 그가 분명 지일파고 유명한 저서 국화와 칼도 미국의 일본 기행문등 미국 기록들을 모아 분석할 정도 몇 안되는 일본 경험이 꽤 많은 사람으로서 교토의 학구적이고 정적인 분위기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건 분명합니다 그탓에 석기시대 마니아 커티스 르메이와도 엄청 싸웠고 다른 과학자들은 학자들이 "일본인들은 야만인이기 때문에 그나마 문화인인 교토 시민들이 아니면 핵폭격의 의미조차 못 깨달을 거다"라고 반론할 정도였으며 공병 병과 출신으로서 맨하튼 프로젝트 책임자면서 원폭 뿐만 아니라 전쟁전인 1940년에 펜타곤을 건설하였던 레슬리 리처드 그로브스 주니어 장군과도 엄청 싸워 어떻게든 원자폭탄 표적선정 위원회의에서 수장 역할로서 막았다고 하죠

    그렇게 보면 교토 문화재에 관하여서는 보호하여야 한다면 원폭 대상에서 빠지게 한 것은 분명하나 단순하게 그렇게 볼 수 만은 없습니다 전쟁부장관으로서 그렇게 활약한 것만 봐도 과연 지일파였을까하는 의문도 나며 미국 역사에서 가장 흑역사로도 유명한 미국 거주 일본인과 일본계 이민자들을 수용소에 가둔다는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에 적극 관여하였을 정도며 마냥 강경파인 매파라 볼 수 없을 정도로 국익파로서 양쪽을 왔다갔다 하면서 전쟁을 수행하였다고 봐야하죠 정말 문화 탓에 막았다고 한다면 원폭에서 나가사키를 포함한 것은 뭘까요? 미래를 모르는 당대에서는 독일 본토에서 벌어졌던 소련의 보복 약탈과 전쟁범죄를 목격하고 점령한 오키나와 군정을 통하여 민심 확보가 중요하다 여겼으며 그런 상황에서 만약 일본 천황을 죽이거나 일본의 정신적 문화 수도를 박살내면 일본이 얼마나 더 폭주할 지 모를 걱정을 하였을 것 같습니다 당시 유럽 전선에서는 노르망디 상륙후부터 포인트 제도를 마련하여 포인트 점수에 따라 전역 우선권을 주도록 하였고 그에 따라 유럽 전선 마무리한 후에 제대자와 태평양 전선 참전 병력들간의 부대 전출등 혼란 벌어졌고 그에 따라 그러한 전출 후에도 전체적 전력은 이전보다 하락할터였고 그런탓에 다른 섬들과 달리 일본은 본토라서 그나마 전차 기동전 가능할 정도 땅도 넓었음에도 그러한 연유로 올림픽 작전을 포함한 몰락 작전을 할 경우 엄청난 예상 사상자가 비슷한 상황이 나올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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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99 증오하는자
    작성일
    22.06.21 11:34
    No. 32

    그탓에 도쿄 대공습을 하였을적에도 도쿄 황거는 공격을 안한거죠 지도부가 살아야 하는건 동서고금을 막론한 암묵적 합의로서 나름 지켜졌고 일본 지도부가 산 상황에서 공포를 봐야 항복을 한다고 보았겠죠 문화재 보호한다는 것도 보면 좀 달라요 폭격한 것은 아니지만 육군 참모본부를 폭격하면서 주위가 다 불바다인데 황거만 무사할 턱이 없었으며 그에 따라 메이지 황궁으로 알려졌던 정전을 포함하여 에도 시대 정이대장군(쇼군)의 궁정건물 27동 전소하였으며 당시 일본군과 40대의 소방차를 포함한 경찰 소방대, 민정문관 등 약 1만의 인력이 동원되어 소화 작업에 들어갔죠 쇼와 덴노는 도쿄가 폭격을 받던 기간 내내 일본 황실 도서관의 지하 방공호에서 생활하였기에 무사할 수 있었으며 천황가의 보물인 청동거울과 청동검 그리고 곡옥으로 구성한 미쿠사노카무다카라는 도쿄 궁성에 보관되어 있지 않아 유실되지 않았지만 이 화재로 일본무가궁정건축 및 예술연구에 꽤 타격을 주었습니다.

    게다가 교토도 20차레 정도 폭격을 당하였답니다 그 과정에서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었던 교토 어소도 당하였으며 그 결과에 연합군의 폭격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주요 전각을 해체해 부재를 보관한 적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교토대 이화학 연구소는 당시 일본 원자폭탄 개발계획의 중추 중 하나였으며 해군의 직접자금지원을 받아 당시 미국을 제외하고는 세계 최대의 사이클로트론(입자 가속기)이 건설 중이던 곳이었고, 당연히 폭격을 받았으며 20차례 공격 중 19번은 전부 저런 대학 연구소를 노린 폭격이었습니다 그당시 일본의 학문 및 과학기술의 중추였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죠 그러한 요소는 단순하게 당시 미국에서 문화재 보호에 인식 적었다고만 할 수 없었고 그러한 정신적 충격을 더하여 일본 전체를 흔들어봐야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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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99 증오하는자
    작성일
    22.06.21 12:00
    No. 33

    그후에 선정한 원폭 요건을 보면 분명 중요한 장소는 분명합니다 히로시마는 청일전쟁 당시 대본영이 설치되었던 곳으로서 5사단 사령부 뿐만 아니라 일본 남쪽 영토를 관장하는 제2 육군 육군본부도 있었고 그 근처에 일본판 진해항 같은 일본 최대군항 구례항이 있었기에 공업도 발전하여 구례의 보급창 역할과 통신과 물류며 부대집결지 역할을 하였죠 그 다음으로 선정된 고쿠라 같은 경우에는 간몬 해협에 위치한 평야에 있어서 관측도 좋았을 뿐더러 30식 총검등 육군에 보급하는 개인화기를 만들던 최대 조병창이 있었습니다 교토 대신 선정된 나가사키는 더욱 중요한데, 과거부터 네덜란드와 중국과의 유일한 교역창으로서 발전하였고 그곳에는 야마토급 2번함 무사시가 건조된 미쓰비시 조선소가 있었고 그와 함께 진주만 공습에도 사용한 어뢰를 제작한 공장도 있거니와 근처에는 인천상륙작전에 나선 함대가 출발하는등 전후 미국 함대의 주요 기항지로도 활약한 사세보 군항이 위치하였습니다 그것 말고도 또 논란나온게 원폭을 하면서 민간인 사망자가 많을테고 그 도시들은 원폭 폭격 목표에 들어간 탓에 그전부터 공습을 의도적으로 적게 하면서 피난민들이 밀려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트루먼을 설득하여 욕을 먹더라도 원폭 투하를 하여야한다며 강행하도록 한것을 보면 스팀슨도 나름 고민을 하였다는게 드러나죠

    그러한 사정을 본다면 결코 만주국은 살아남을 수 없을 뿐더러 태평양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봐야 합니다 근데, 역사변화로 따져도 분명 스팀슨은 비슷하게 활동을 할터였고 그렇게 보면 원역사처럼 대독강경파 성향도 보였을테고 도리어 대독 강경론이 더 강하였을 겁니다 게다가 루르공업 점령은 없으나 에메하게 끝난 종전에 관한 불안을 없에고자 서부유럽 국경을 확고하게 정한 로카르노 조약과 앞서 말한 부전조약 비슷한걸 체결할텐데 암만 소련에 관하여서는 그냥 방임한다고 하더라도 스팀슨은 마냥 독일을 결코 곱게 보지않는게 사실이죠 그렇기에 그가 나서서 만주국 사례를 들어 소련과 함께 독소전에 나선 독일도 비난을 할겁니다 모스크바 전투후에 과연 영프미가 독일을 엄청 지원할까냐는 문제를 보면 소련에 관하여서 엄청나게 도와주지는 않을지언정 독일도 적극적으로 안 도울 가능성 높고 도리어 미국과 영국은 프랑스를 적극적으로 밀어주면서 균형추가 엄청나게 줄었을 경우, 독일이 소련영토를 모두 토하면서 본토가 공격받을 상황에 들어가서야 엄청난 지원을 할것으로 보여집니다 트루먼도 그렇고 그 당시 미국 정계에서 소련이든 독일이든 누가 이기든 상관없다는 사람들 성향 많으며 결코 정계도 온통 고립주의만은 아니란걸 보면 요번 독소전은 마냥 독일에게 좋다고 볼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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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99 증오하는자
    작성일
    22.06.21 22:30
    No. 34

    좀더 보충하면 과학자와 군인들이 그나마 교토에 있는 사람들이 문화적으로 뛰어나다는것은 인종주의 영향도 있으나 그만큼 지식인들이 많고 엘리트들이 있으니 금방 상황파악이 되어서 종전 여론을 만들거라는 생각이 반영된 겁니다. 또한 기상 문제로 고쿠라에서 나가사키로 변경되었는데 그 고쿠라에는 후에 미국에 귀화한 후 토네이도의 강도를 분류한 후지타 스케일슬 비롯해 대기과학 분야에서 토네이도 및 뉘우로 인한 돌풍 연구의 대부가 된 테드 후지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나가사키 원폭 피해 현장조사를 하였고 그것이 뉘우에서 발생하는 다운버스트 및 토네이도 연구의 첫발을 내딛는 중대한 기로였다합니다.

    다른 일화로 야마구치 쓰토무라고 미쓰비시 중공업 유조선 설계 기사가 있는데 히로시마에 있다 원폭 중심지에 있는 목적지에 도착을 좀 지체하면서 살아남았고 부상 후 고향인 나가사키로 갔다가 또 원폭을 두 번 맞았다고 하네요. 그런 인원이 150명 정도인데 야마구치 쓰토모는 일본 정부에서 공인된 피해자라 하며 가족들은 방공호에 들어가면서 무사했답니다. 가족 전부 원폭 후유증은 앓았으나 부인도 80세에 별세하고 본인도 2010년에 위암으로 사망하는등 장수했다네요.

    정말 그 당시에 대통령이 프랭클린 루즈벨트고 외무장관이 헐이고 전쟁부 장관이 스팀슨이면 외교에서 진짜 조심해야하는데... 무식한 히틀러나 나치당 그리고 독일제국은 여전히 자기 기준에서 낙관적으로 본듯 싶어서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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