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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좀
작품등록일 :
2021.02.05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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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0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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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0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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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DUMMY

말을 이었다.


“인간의 기준이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뭐 그런 얘기?”


“그것도 전에 누가 말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 왜 있잖아.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대서 지겨운 철학적 화두 같은 거.”


“막 교과서에도 실리고 좀 재미없는 얘기.”


“무슨 말인지 알지?”


“······.”


“지겹다는 표현도 부족해···. 뭔가, 뭔가 답답해.”


“······.”


“그냥 존나 지겨워! 씨발 새끼야!”


“개씨발 새끼들아!”


그는 발작적으로 고개를 강하게 흔들면서 사방으로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가 지금껏 일부러 미친 척을 하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놀라서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이건··· 예를 들어서, 15년 내내 먹은 군만두를 오늘 아침밥으로도 씹는 기분이거든.”


“너도 알다시피 뻔한 소리잖아···. 이런 얘기를 안 해본 사람이 더 적지 않겠어?”


“대충 술자리에서 취한 친구들끼리 자주 공상 과학에 관한 다양한 주제들을 툭툭 던지는 거야.”


“근데 맨날 결론은 인간이 멸망한다는 거고.”


“아무튼 인공지능이 우리를 지배할 거라면서, 무슨, 로봇청소기님 만세? 이런 소리로 끝나는 거.”


“근데 늘 여기저기서 씨불이는 건데··· 인간의 정의를 왜 자꾸 찾겠냐?”


“이런 잡담에서조차 거론되는 이유가 뭐겠냐고, 응?”


“······.”


“언젠가 인체 개조 기술이 상용화될 때가 오면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미리 대비하는 거지.”


“······.


“왜 대비하겠어?”


“자기 정체성을 잃는 게 두려워서 그래.”


“자기 존재가 변하는 것을 두고, 스스로에 대한 상실이라 느낀다고.”


“변화를 상실로 여긴다니까? 발전이 아니라?”


“겁이 참 많아. 사람들은.”


“아··· 나도 그게 이해가 되긴 해! 변화를 두려워하고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건 본능적인 거잖아.”


“······.”


“아무튼! 내 말은 이제 와서 인간성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개똥철학은 지겹다는 거야.”


그가 말하는 것은 인간성에 대한 논의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그는 그냥 대답을 회피한 것 같았다.


미친 놈답게 의사소통도 중구난방이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래서, 얘기하기 싫다는 게··· 니 결론이야?”


그가 대답했다.


“아니, 그건 아니고.”


“나중에 얘기할게.”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니가 먼저 말해봐.”


“인간성이 뭐인 거 같아?”


“니가 생각하기에 인간의 기준은 뭔데?”


“한번 얘기나 좀 들어보자.”


그와 이런 주제로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여 약간 정신을 못 차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마··· 육체와 정신이겠지.”


그가 나에게 물었다.


“니 말은, 그 두 가지가 인간의 기준이라는 거지?”


나는 대답했다.


“그렇지?”


그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육체의 기준은 뭔데? 육체가 사람이면 되는 건가?”


나는 대답했다.


“응.”


그가 다시 물었다.


“사람의 육체의 기준은 또 뭔데?”


“그 ‘사람’의 범위를 누가 어떻게, 어디부터 어디까지로 정하느냐는 말이야.”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당연히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분류가 있잖아···.”


그가 말했다.


“그건 우리가 정한 거지.”


“진리가 아니라.”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은 그저 궤변이었기에.


그러자 그가 대신 입을 열었다.


“자, 그러면 정신의 기준이 뭔데?”


“······.”


“일단 정신이란 게 뭔데?”


“뭐, 주술을 걸어서 영혼을 소환한다는 미신 같은 거?”


그는 두 손을 허공에 젓거나 손가락들을 꿈틀거리며 괴상한 몸짓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지금 장난하는 거지?”


그가 손짓을 멈추고 대답했다.


“장난 같아?”


“······.”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가 원하는 대로 지껄이도록 내버려두었다.


이윽고 그가 말을 이었다.


“육체와 정신의 기준은 중요한 거지.”


“인간의 기준을 어디부터 어디까지로 정하느냐 하는 얘기니까.”


“근데 니가 말하는 ‘인간성’이라는 게··· 너무 모호하다는 거야···.”


“기존 육체에서 벗어나면 인간이 아닌 건가?”


“그러면 사고나 질병, 어떤 계기 탓에 특정 부위에 손상을 입어서, 의체로 대신하는 임플란트 시술을 받은 사람은?”


“사람이 아닌 거지? 인간성이 훼손되었으니까.”


나는 말했다.


“그건 일부고···.”


“팔다리나 이빨 좀 갈아 끼운다고 해서 인간이 아니라고 하지는 않잖아.”


그가 물었다.


“그러면 전신에서 얼마만큼 의체로 구성되면 인간이 아닌 거지?”


“몇 퍼센트라는 기준이 있나?”


“딱 절반?”


“그러면 절반의 기준은? 사람을 어떻게 정확히 반으로 나눌 거지?”


“······.”


나는 대답했다.


“잘 모르겠네.”


내가 할 말은 그게 전부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의 의중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진실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인간성을 논하는 게 지겹다느니 나중에 얘기하겠다느니 하면서도 온갖 괴상한 말들을 지껄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안타깝게도 독심술사가 아니었기에 그의 본심을 꿰뚫어 볼 수는 없었으니.


그가 나를 살리고 싶다고 주장한 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괴물로 살아가는 게 좋은 것이든 아니든 간에, 지금으로써는 최선의 선택을 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나에게는 감히 그럴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평선’의 근거지 어딘가에 위치한 이런 골방에, 벽에 붙어서 족쇄에 묶여 저항도 할 수 없는 상태.


게다가 몸부림이라도 치면 진정제가 혈관에 꽂힌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고를 수 있는 것은 죽는 것과 괴물로 사는 것.


이것 외에 또 다른 선택지는 내가 그걸 만들어낼 여력이나 기회가 있을 때 고려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가진 정보나 수단, 그와 협상하거나 그를 회유할 때 써먹을 수 있을 만한 재료는 아무것도 없었으니.


어설프게 머리를 굴려본들 늙어 죽는 것을 기다려도 마땅한 해답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시간과 인지적 자원을 아무리 소모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것밖에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다.


개인의 의지로 이겨낼 수 없는 강제력을 마주한다는 건, 그러니까 그때 겪는 깊은 절망이란, 문자나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표현하지 않으려 한다.


‘······.’


‘······.’


‘······.’


미친 남자는 내가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갑자기 찾아온 침묵 속에서도 자세를 지켰다.


그저 내가 입을 열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나는 코로 아주 무겁게, 어찌 보면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어찌됐든, 다양한 요건을 고려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나는 죽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렇다면 결국 괴물이 되는 것 말고 더 나은 결정은 없었다.


당장 이러한 상황에 놓인, 나와 동일한 가치관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만약 어쩔 수 없이 죽는다 하여도 그것이 특정한 목적을 지닌다면 그나마 괜찮을 터.


허나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 시점에서 왜 굳이 목숨을 버리겠는가?


내가 살아있을 수 있는 방법은 괴물이 되는 것뿐이었으니.


나는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졌다.”


“그냥 괴물로 만들어줘.”


그러자 그는 내 요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혀를 차며 말했다.


“쯧, 아직도 이해를 못했나 본데···”


그는 당황한 내 머리를 붙잡고는, 흔들림 없이 정면에 놓인 유리통으로 향하도록 강하게 고정시켰다.


그리고 단호한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똑바로 봐라.”


“저 인공자궁에서 자라나는 건 괴물이 아니라 신인류다.”


“그래, 거창하게 말해서 우리의 미래지.”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육체를 갈아치우는 기술도 상용화될 테니··· 결국 인간의 기준이란 무형의 가치가 될 수 밖에 없어.”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저 괴물이 인간이라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인간의 정의는 우리가 내리는 거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우리? 우리가 아니라 너겠지.”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아니.”


“우리야.”


나는 눈을 찡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내 말을 들은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나에게 되물었다.


“그럼 굳이 이렇게 하면 안 되는 이유는 또 뭔데?”


그는 나와는 가치관이 극도로 판이했다.


그는 쉴새 없이 말을 이었다.


“현재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지고의 경지를 미신에서 비롯된 개념과 비교하는 건 불쾌한 일이야.”


“괴물은 암세포라는 단어처럼 모욕적인 표현이잖아.”


“앞으로는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표현해.”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헛기침을 흘렸다.


나는 표현을 바꾼다고 해서 본질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어서 나는 괴상한 소리만 늘어놓는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껏 미친 척 한 게 아니라, 진짜 미친 거였지?”


나는 그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었지만 손이 묶여있는 바람에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다.


이후 내 빈정거림을 들은 그는 대답했다.


“아니, 나 안 미쳤어.”


“미친 척 한 거 맞아.”


아니, 그의 말은 거짓말일 것이다.


그는 미친 척을 한 게 아니라 그냥 미친놈이다. 또한 나는 이 사실을 두고 논쟁을 벌이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 그만하자.”


“이제 확실히··· 정했어.”


“나를 그 신인류, 어쩌고 몸뚬아리로 옮겨줘.”


“됐지?”


그가 대답했다.


“그래, 잘 생각했어.”


그는 말을 끝내고는 잠시 고민을 좀 하는 듯 하더니 말을 이었다.


“1세대들은 손가락이 세 개인데, 2세대들은 다섯 개야.”


“2세대로 해줄게.”


“더 고차원적인 활동이 가능할 테니 너한테도 딱 맞겠지.”


“적응하기도 쉬울 거고.”


아마 괴물의 육체는 손가락 개수를 기준으로 종류가 나뉘는 모양이었다.


일단 손가락이 인체와 같은 개수인 게 나을 터이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러려니 했다.


내가 그런 식으로 체념을 하자 그는 나에게 다가와서 내 팔뚝 혈관에 주사기를 꽂았다. 아까처럼.


어떤 액체가 피를 타고 흘러 들어갔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마취제니까 걱정 말고.”


나는 어차피 결정을 내린 이상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고개를 끄덕이고 그에게 마지막으로 말을 건넸다.


“살려줘, 친구야···.”


“부탁한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안 죽인다니까?”


“친구야.”


나는 그 알맹이 빈 친구 소리를 귓구멍으로 받아들이며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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