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보따리도 건져 준다. (2)
이영준을 돕기로 했다.
다만, 내 역할은 이영준과 장민식을 만나게 하고 소요비용 70만 달러를 해외의 지정 계좌로 송금하는 것으로 끝났다.
“... 내 이 은혜 잊지 않겠소.”
“이거 공짜 아닙니다.”
“대충 장 사장한테 얘기는 들었소. 그의 말대로 하기로 했소.”
“... 이영준 씨에게 위험한 건 아니겠죠?”
장민식은 이영준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활용할지 내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국정원이 수긍할만한 일이고 이영준에게 위협이 가해질 가능성이 적다고 했을 뿐.
“그럴 가능성은 적소. 그리고 아내를 구할 수 있는데 감당 못 할 위험이 있겠소?”
“... 뭐, 본인이 그렇게 판단한다면야···.”
“장 사장이 한동안 남영훈 씨와 연락하지 말라고 하더군. 인사는 이걸로 마무리합시다. 내가 장 사장을 통해 은혜는 열심히 갚겠소.”
“일이 잘되길 바랍니다.”
돈이 송금된 후 작전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누구를 통해 어떻게 고용됐는지 모를 프리랜서 용병들이 중국에 들어가 목표물과 접촉했다.
목표물이 장민식의 아내임을 확인한 뒤 그들은 육로를 통해 라오스를 거쳐 태국으로 이동했다.
장민식의 아내는 태국의 한 경찰서에 2주간 수감 됐다가 무사히 우리나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송금부터 입국까지 1달이 조금 넘은 빠른 속도였다.
위이잉.
책상 서랍에서 2G 폰을 꺼내 열었다.
- 택배가 손상 없이 도착했습니다.
이상한 번호로 온 문자 메시지 하나.
미리 약속된 성공 암호다.
이 2G 폰은 장민식이 나를 드러내지 않게 하려고 사무실 열자마자 취한 여러 조치 중 하나다.
도현이가 만든 일종의 비화폰인데 난 이 핸드폰으로만 장민식에게 연락한다.
어떤 방식인지는 모르겠는데 추적도 안 되고 도청도 안 된다는 폰.
내가 이런 걸 쓰고 있으니 아름이 부부장네 계장이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쉽게 짐작했었지.
- 남 서방, 얼른 가야지!
“서두르지 마라. 산은 어디로 도망 안 간다.”
재촉하는 갑이에게 시큰둥하게 답하며 2G 폰을 서랍에 넣었다.
- 도망가는 게 아니고 산이, 아니 산의 기운이 날 부른단 말이다!
“... 넌 산이랑 대화도 하니? 참 대단하다.”
- 흐흐흐. 대단하지. 아, 그런데 그 비실비실한 서방 오늘도 같이 가냐?
“어.”
- 어휴, 그 서방 보면 아슬아슬하다. 산만 타면 금방 숨넘어갈 것 같잖아.
갑이가 말한 비실비실한 서방은 해커 박도현을 말한다.
최근 이 녀석은 내 산행에 동행하고 있다.
동행하지 않을 시 녀석이 애지중지하는 장비를 하나씩 압수하겠다는 협박에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르는 중이다.
“... 뭐, 차츰 나아지겠지.”
- 나아져? 아니, 앞으로 얼마나 더 데리고 다니려고?
한숨을 내쉬고 갑이에게 답했다.
“넌 별로 상관없잖아. 걔 챙기는 건 완전히 내 몫인데.”
- 뭐, 그렇긴 하지만 남 서방이 봐도 답답하지 않아?
“... 그냥 말을 말자.”
컴퓨터 앞에서 사는 놈이 무슨 산행할 체력이 있겠나.
그 녀석, 올라갈 땐 두 발이지만 내려올 때는 네 발도 아니고 거의 포복하듯 기어서 내려온다.
산중에서 걔 챙기다 보면 이거 인간 개조가 아니라 학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장민식한테 도현이 사람 만들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이얏~ 호응.
아름이의 톡 알림음에 얼른 핸드폰을 열었다.
- 오늘 산에 간댔지? 조심히 잘 다녀와. ♡♡
흐뭇하게 톡을 확인하고 번개같이 답했다.
- 알았어. 오늘 수고하고 좋은 하루 보내. ♡♡♡
갑이가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느끼한 표정으로 묻는다.
- 그렇게 좋냐, 남 서방?
“보면 몰라?”
핸드폰을 품에 넣고 배낭을 챙겨 오피스텔을 나섰다.
완연한 높고 푸른 가을 하늘에 기분이 상쾌한 아침이다.
“룰루~!”
부르릉.
SUV에 시동을 걸고 박도현의 집으로 출발한다.
응? 아름이랑 라면은 먹었냐고?
... 흐흐, 보면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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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렀다.
“송 과장님, 어제자 현황표 업데이트 좀 해주세요.”
“아, 네. 이사님.”
송진우 과장이 회사 공유 폴더에 보유 자산 현황표를 올렸다.
e젠 일이 마무리된 얼마 뒤부터 NASDAQ에 상장된 한 회사의 주식을 매수하고 있다.
이를 위해 송 과장 아래 경력직 직원과 신입 직원을 하나씩 채용했다.
전에는 송 과장 혼자 하던 일을 셋이 나누니 부담이 줄었다.
‘순조로운 편이네.’
현황표를 확인한 뒤 송 과장에게 OK 사인을 보냈다.
그걸 본 송 과장이 피곤이 묻어나는 얼굴로 웃는다.
다른 직원은 아직 재택근무 중인데, 송 과장의 팀만 모두 회사에 출근하고 있다.
회사 컴퓨터로만 주식거래를 할 수 있게 했기에 불가피한 조치.
그들을 챙기기 위해 나와 김 대표가 번갈아 나오고 있지만, 직접적인 일까지 나눠서 해주는 건 아니다.
‘... 송 과장 팀에 직원을 더 뽑아야 하나?’
내가 소수 정예 회사를 지향하는 건 맞지만, 직원들에게 과중한 노동을 감내하게 할 생각은 없다.
앞으로 회사의 자산은 꾸준히 늘어날 테고 주식 관련 업무도 늘면 늘지 줄어들 리는 없다.
‘이번 일이 끝나면 김 대표, 송 과장이랑 다시 얘기를 해봐야겠군.’
어느새 점심시간이 됐다.
송 과장과 신입 직원을 먼저 식사하라 내보내고, 나와 경력직으로 뽑힌 직원이 남았다.
위이잉.
“저 전화 좀 받고 올게요.”
“네, 알겠습니다.”
사무실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조 회장님.”
- 통화 괜찮은가?
“네, 말씀하시죠.”
HS 조성민 회장이다.
한동안 연락이 없더니 무슨 일이지?
- 신규 투자 진행하고 있지?
“...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 생각하는 게 아닐세. 아는 거지. 아는 방법이 있네.
“우리 회사 스토킹이라도 하시는 겁니까?”
- 하하. 스토킹까지는 아니고 YH의 행보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고 답하지.
가만히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양반, 날 조심스럽게 대하겠다고 약속한 뒤로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다만, 날 존중하는 건 좋은데 우리 회사의 일거수일투족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회장님, 아무리 악의가 없는 관심이라지만, 지나치면 부담스러운 건 마찬가지입니다.”
- 그런가? 허허. 그럼 내 더는 말 돌리지 않음세.
“듣고 있습니다.”
- YH에 자금을 맡겼으면 하네.
“... 저희 지분을 원하시는 겁니까?”
뜨악한 느낌으로 묻자, 조 회장이 서둘러 답했다.
- 그럴 리가 있나. 내가 그렇게까지 철면피는 아닐세.
“... 그러면?”
- 단순히 자금을 맡길 테니 그걸 운용해달라는 거지. 투자성과에 대한 수수료는 높이 쳐주겠네.
“HS 그룹에 종금사 있지 않습니까?”
- 쩝, 아무리 우리 그룹사지만, YH에 비하면 수익률이 형편없는 걸 어쩌겠나. 아, 이참에 우리 증권이랑 협업 같은 걸 해보는 건 어떻겠나?
“... 하하.”
지분을 노리는 게 아니라는 건 다행이다.
조 회장 정도의 재력과 영향력이면, 좋게 구슬리든 압박해 강제하든, 밥상에 자기 숟가락 올리는 대신 밥상을 독차지하려 하기가 쉬우니까.
사실, 다른 재벌 중에 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YH는 지난 몇 년간 단 한 번의 실패 없이 투자에 성공해 왔다.
재벌들의 자산 규모에는 비할 바가 아니나 분명 그 수익률에 군침 삼키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군침 삼키는 이들이 함부로 접근 못 하는 이유가 있으니 바로 양태호 회장의 존재다.
밑바닥까지 파고든다면 몰라도 YH는 대외적으로 양태호 회장이 실질적인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 중에 양 회장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고.
내가 괜히 양 회장에게 지분을 나눠준 게 아니란 말씀.
“양 회장님은 아십니까?”
- 말씀드렸더니 자네랑 상의하라고 하셨네. 웬만한 일에는 나서지 않으신다면서.
“......”
-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지 않겠나?
“......”
양 회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조성민 회장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바르다’는 세평에 어울리는 사람이긴 한데, 역시 기업가답게 높은 수익률을 외면하기 힘든가 보다.
“하아, 조 회장님.”
- 듣고 있네.
“제가 일전에 YH 인베스트먼트는 일체의 외부 차입금 없이 운영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 했었지. 잊지 않았네. 하지만, 원칙은 상황에 따라 변화할 수 있지 않은가?
“... 어떤 상황일까요?”
- 음, 투자금을 늘려서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는 상황?
조 회장의 목소리가 어색하다.
본인 스스로 멋쩍어하는 것 같다.
“저로서는 인정할 수가 없네요.”
- 쩝. 야박하구만.
조 회장이 아쉬운 목소리로 물러선다.
집요하게 매달리지 않는 게 다행이다.
찔러는 봐도 선은 안 넘겠다는 건가?
나에 대한 예의인지 양태호 회장에 대한 예의인지 모르겠지만.
“건강 조심하시고요. 이만 끊겠습니다.”
- 그래. 혹시 생각 바뀌면 연락 주게나.
“그럼 영영 연락 드릴 일이 없을 텐데요?”
- ... 하여간, 재미없는 사람이라니까. 다시 연락하자고.
뚝.
전화기를 귀에서 떼며 중얼거렸다.
“조만간 제게 선 지키길 잘했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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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새해가 됐다.
열심히 회사 다니고, 아름이와 알콩달콩 연애하니 시간은 잘 가더라.
1월 말의 어느 날, 나에게 ‘Go’ 사인을 받은 김현민 대표가 송진우 과장 팀을 호출했다.
“이제 매도를 시작하죠.”
“알겠습니다, 대표님.”
“뭘 주의해야 할지 잘 알죠, 송 과장?”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김현민 대표와 송진우 과장이 생각보다 차분히 대화한다.
웬만한 사람이면 흥분을 감추지 못할 텐데, 역시 남다른 사람들이 맞다.
미국의 고모도 내일부터 움직일 거다.
- 드디어 매도구나. 어휴, 심장이 너무 뛴다.
“기다리느라 고생하셨어요, 고모.”
- 아냐. 네 말대로 그대로 갖고 있길 잘했어.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네요.”
- 아무튼, 내일부터 정리 시작할게.
“네. 타이밍 잘 보셔야 해요.”
- 호호. 나도 그 정도는 안다, 조카야.
“고모, 거래는 꼭 홀수일에만 하셔야 한다는 걸 명심하세요.”
- 귀에 못 박히겠다, 녀석아. 알았어.
YH가 보유 중이던 한 NASDAQ 상장사 주식을 매도하기 시작했다.
미국 현지 시각으로 짝수일에만.
그리고 고모가 관리 중인 내 페이퍼 컴퍼니 소유의 주식도 매도가 시작됐다.
미국 현지 시각으로 홀수일에만.
한국과 미국에서 번갈아 피를 말리는 시간이 흘러갔지만, 결론적으로 매도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악전고투 끝에 매도가 끝난 날 아침.
“... 여기 약식 보고섭니다. 정식 보고서는 며칠 안으로 제출하겠습니다.”
“아뇨. 보고서는 좀 더 미뤄도 됩니다. 며칠 푹 쉬고 처리하죠.”
“하하, 알겠습니다, 사장님.”
“이대로 팀원들이랑 퇴근하세요. 그리고 월요일에 출근하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송진우 과장 팀이 퇴근하자 김 대표가 한 장짜리 보고서를 한 번 살피고 내게 내밀며 말한다.
“... 영 현실감이 안 드는, 아니 있던 현실감도 사라지게 하는 숫자네요, 남 이사.”
“그러네요, 사장님.”
- 로바 백스 주식거래 정리.
0이 잔뜩 붙은 숫자가 몇 줄 나열되어 있다.
우리가 1, 2차에 걸쳐 투입한 총 자금이 얼마, 당시 평균 환율이 얼마, 그래서 매수한 주식이 총 몇 주 등.
핵심은 이거다.
1차 매입.
- 평균 매수 단가 3.49 $.
- 평균 매도 단가 285.18 $.
2차 매입.
- 평균 매수 단가 86.24 $
- 평균 매도 단가 285.18 $
1차로 매입한 물량만 따지면 1주당 80배가 넘는 시세차익이다.
1차로 주식 매입에 투입한 금액은 342억 원.
수익금은 2조 8천억 원 이상이다.
2차로 매입한 것까지 포함하면 더 대단해진다.
물론, 세금을 제하면 많이 줄겠지만 그래도 어마어마한 성과라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어떻게 그렇게 무덤덤할 수 있어요?”
김 대표의 질문에 웃으며 답했다.
“... 아직은 그냥 숫자에 불과하니까요.”
증권가에 빠르게 소문이 돌았다.
- YH? 저번에 e젠으로 재미 봤던 거기?
- 이번엔 미국 회사라고? 나스닥?
- 어. 제약회사라던데?
- 시세차익이 대단하다고? 어느 정도길래?
- 조 단위라는 소문이 있어.
- 에이, 설마. 근거 있는 소문이야?
- ... 미친···.
e젠으로 제법 알려졌던 YH.
이번엔 모두가 그 이름을 머릿속에 똑똑히 기억하게 될 정도의 대박을 터뜨렸다.
- 작가의말
글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사건, 지명 등등은 사실과 관계없는 허구입니다.
선작, 댓글, 추천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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