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만 (1)
진주만의 전경은 내가 생각했던 모습과 많이 달랐다.
휑한 항구에 드문드문 배치된 시설물.
드넓은 부지가 무색할 정도로 비어있는 공간.
몇몇 보급함과 구축함, 잠수함 정도만 계류되어 있고 그 외에는 죄다 마주로 환초로 떠났는지 보이지 않는다.
만일 이 세계에서 갑자기 지옥에 있는 1항함이 환생해 진주만 공습을 벌인다고 해도 그다지 큰 피해는 없을 거라 생각이 들 정도다.
<입항―!>
여기가 바로 미 본토를 제외한 태평양 최대의 거점.
진주만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많이 어색하다.
나는 예전에도 이 장소에 온 적이 있거든.
원래 세계에서 해외 훈련 때문에 방문했을 때는 정말 온갖 나라에서 온 수많은 군함들로 북적거렸는데.
항구에 정박한 구축함 숫자만 해도 당시 우리나라 해군의 몇 배에 다다랐을 정도다.
거기에 10만 톤급 초대형 항공모함까지 정박했던 하와이 최대의 군항이 지금은 이렇게 썰렁하기 그지없다니.
유일하게 정박한 대형함이 이 이순신함과 정운함, 그리고 나대용함뿐이다.
휑한 풍경과 반대로 항구의 기본 구조는 또 그때와 비슷하게 느껴져 더더욱 이질감이 느껴진다.
새삼 내가 다른 세계에 있다는 게 실감이 든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감상은 잠시 뒤로하고서.
“제13기동부대 사령관, 상급 대령 정운룡.”
“수고 많았네, 정말 고생했어.”
태평양 기동군 사령부에 출두하자 중장 계급장을 단 제독이 나를 반겼다,
근 몇 달 만에 보는 류시원 제독.
웨이크 섬에서 내렸을 때와 비교하면 정말 몰라볼 정도로 나아졌다.
“건강하신 듯하여 정말로 다행입니다.”
“내가 아니라 자네에게 할 말이지. 13기동부대를 살려줘서 고맙네, 사령관.”
전신에 붕대를 칭칭 감고 미라처럼 누워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몸이 좀 불편하기는 해도 어느 정도 업무도 가능해졌다는 모양이다. 다리를 절뚝거리는 게 못내 신경 쓰이지만.
하긴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쉴 새 없이 격전을 거듭하다 보니 개전 후 반년이 흘렀다는 것도 몰랐다.
이쯤 되면 본국도 어떤 상황일지 슬슬 걱정이 든다.
장병들 사기에 영향이 갈까봐 일부러 정보는 가려 받았지만 최소한 아직 일본군에 함락당하지 않은 건 확실하다. 하지만 아마도 그뿐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한성이 공습당하고 있네.”
태평양 기동군 사령부에 들어서자 류시원 제독이 꺼낸 첫마디는 꽤나 무거웠다.
“군수공장뿐만 아니라 민간 구역에도 폭탄이 떨어졌네. 일본 측에서는 고의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상 의도했다고 봐야겠지.”
인자한 첫인상과 다르게 담담히 입을 연 제독의 얼굴은 차가운 강철처럼 굳어 있었다.
수도가 공격당했다.
그것도 30년간 원한을 품은 적국에게.
다시 수도가 불타올랐다.
결코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다.
“한성이 공격당했다는 말은···.”
“남해안의 제공권은 사실상 어렵다는 말이네. 부산항에 좌초한 충무함도 고정 포대로 대공 방어에 동원하는 형편이라더군.”
제주 해전 이후 공습을 피해 남해안으로 도주한 충무함은 그대로 고립되어 고정 포대가 되었다.
거포를 최대 앙각까지 올리며 저항하는 충무함의 모습은 부산 시민들의 희망으로서 자리 잡았지만, 일본군도 그 배를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테니 상황은 암울하리라.
“그렇기에 더욱 자네들의 공이 커.”
잠시 후,
류시원 제독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붙잡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희망이야. 자네들이 건네준 그 희망 말이네.”
악수하는 손바닥 위로 굳은 힘이 느껴졌다.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질 만큼.
이윽고 그의 입에 나온 말은 예상되면서도 곤란한 주제였다.
“진급 말입니까?”
“원래는 자네도 별을 다는 게 맞지만···.”
말끝을 흐리며 한숨짓는 류시원 제독.
사실 단순히 진급시키고 훈장 달아주기에는 상황이 좀 애매하긴 하다.
당장 나는 대령조차도 상당히 일찍 단 몸.
상급 대령으로 진급한 지도 몇 달 안 돼서 바로 소장까지 달아버리면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 말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일본군 수준의 연공서열은 아니더라도 공직 사회인 이상 어느 정도 눈치 보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지금은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으니 가만히 있지만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기다렸다는 듯 물어뜯을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겠지.
당장 13기동부대에도 내 능력을 의심하던 시절이 있었고.
···문득 지나온 인연들이 떠오르며 나는 입을 다물었다.
물론 이대로 두기도 곤란하다는 입장도 이해된다.
해군 창설 이래 최대의 전공을 세운 전쟁 영웅에게 아무런 보상도 없이 계속 구르라고 하면 현 내각이 무슨 소리를 듣겠나.
결국 내부의 불만을 무시하자니 또 그것대로 부작용이 염려되고. 훈장 같은 걸로 때우려니 우리 함대의 위상이 고작 이 정도냐며 물어뜯을 여론이 두렵다.
일종의 가불기에 걸린 셈.
그렇기에 당사자인 나의 의견을 참고하겠다는 말이다.
잠시 생각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상급 대령이라는 직함에 만족합니다.”
눈을 크게 뜨는 류시원 제독과 마주 보며 나는 담담히 말했다.
줄곧 생각해 보았다.
내가 혼자서만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 걸까.
설령 내게 아무리 능력이 있었어도 이순신함을 움직여준 내 부하들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못 했을 텐데.
당장 함 승조원에도 결원이 생긴 와중에 나 혼자서만 별 달고 후방으로 빠지게 되면 이순신함은, 13기동부대는 누가 책임지는 거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장 저보다 먼저 진급해야 할 선배님들이 많습니다.”
“지금은 자네가 최선임이··· 아.”
내 말뜻을 이해한 류시원 제독이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수많은 희생이 13기동부대를 지켜왔다.
상처 입은 이순신함을 지키기 위해 적의 전함에 용맹히 돌격한 구축함 전대장.
개전 초부터 제독을 지키며 산화한 13기동부대 참모진.
그 외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장병들.
사후 추서일지라도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보답해주는 게 먼저 아닐까. 그 전에 나 혼자서만 승리의 과실을 독차지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죽어간 이들을 떠올리고 부족하게나마 보답해주지 않으면, 앞으로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위해 희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군. 그런 생각인가···.”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 채 고개를 끄덕이는 류시원 제독.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 내가 당장 계급장에 별 달고 꺼드럭대는 것보다 전사한 이들의 사후 추서와 유족들에 대한 보상이 먼저다.
물론 실질적인 이유도 있다.
미 해군 측에서 현장 지휘관을 맡는 제독은 대부분 소장이다.
내가 소장 계급으로 13기동부대를 지휘하면 그건 미 해군과 독립된 지휘 계통으로 활동하겠다는 뜻이 된다.
현장에서 공동 작전 하는 미 해군과 지휘권 교통정리가 어렵다는 뜻. 그렇다고 저쪽이 우리 밑에 숙이고 들어오긴 어렵지 않겠나.
차라리 내가 상급 대령으로 나름대로 자율권을 부여받는 편이 뒷말 안 나오고 편하다.
어차피 둘 다 미군에서는 ‘Rear Admiral’인데 상급, 하급으로 나누는 거라고 알고 있고.
계급장만 도착 안 했지 사실상 별은 이미 달았다 이 말이야. 여기서 더 올라가봐야 이순신함의 직접 지휘권만 잃어버린다.
함의 세부 운용은 오직 함장만이 결정하니까.
“확실히···.”
여기까지 이야기가 통하자 제독도 안도한 듯 미소 지었다.
“자네의 자리가 가장 적절하기는 하네. 미 해군에 보급이랑 수리까지 맡긴 주제에 지휘권까지 양보하지 않겠다고 굴면 저쪽에서도 불만이 나올 테니.”
이 사람도 내심 내가 진급 욕심을 내면 곤란해서 걱정한 모양이다.
나는 오히려 지금 자리가 견제도 덜 받고 가장 무난하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내가 참모총장 하겠다고 나온 것도 아니고.
아무리 이순신함이 혼자 1항공함대 찢어발기고 야마토의 허리를 접어버려도 결국 연료 대주고 보급 대주는 물주는 미국이다.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줬더니 지휘권은 안 넘기고 우리 맘대로 놀겠다고 하면 좋은 소리가 나오지는 않겠지.
그런 의미에서 나도 확실히 할 부분이 있다.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사항이 있습니다.”
“뭔가?”
“제13기동부대의 입지상, 앞으로 수리와 보급에 지휘권 문제까지 여러 잡음이 발생할 소지가 큽니다.”
제독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더러 뒤치다꺼리를 해달라는 소리군.”
어··· 그렇게 되네?
아니 직설적으로 말하면 결국 그건데.
이러면 내가 좀 싸가지 없이 말한 게 되잖아.
“농담일세. 당연히 해줘야지. 그러라고 내가 여기 있는 건데.”
다행스럽게도 제독은 껄껄 웃으며 내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이씨, 괜히 쫄았네.
이 사람도 가끔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때가 있다.
이게 권력의 힘인가?
그런 거면 나도 조금 가지고 싶을지도···.
“확실히 자네는 현장에서 일하는 게 적성이긴 해. 나처럼 후방에서 손가락만 까딱거리고 입만 주절대는 건 재능이 없어.”
뭔가 돌리는 건지 칭찬하는 건지 모를 이야기를 하고서.
“허나 그렇기에 나는 자네가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네.”
그는 무거운 눈빛으로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자네들의 어깨에 이 전쟁의 향방이 달려있네. 그러니 부디···.”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여는 제독.
“살아남아주게. 대한을 위해서.”
영웅이 되어서 돌아왔지만 어깨 위로 무거운 짐이 늘어난 기분이었다.
***
진주만에서 미 서해안으로 향하기 위해 마지막 보급에 착수한 이순신함은 모처럼의 휴식에 상당히 들떠 있었다.
“함 내 장병들 교대로 상륙시키고. 외박은 2박 3일까지 허용해줘. 사고 치지 말라고 교육 단단히 하고.”
“예!”
일주일을 좀 넘는 시간.
반년 만에 안전한 기지에서 긴장 풀고 보내는 상륙이다.
서해안까지 장거리 항해 전 마지막 보급이니 이 틈에 충분히 쉬게 해줘야지.
물론 나는 밀린 일들 처리하느라 한가롭게 보낼 시간 따윈 없었다.
“시발, 죽겠다 진짜.”
죄악의 탑처럼 쌓인 사무 업무들.
반년 새 급한 일부터 짬짬이 처리했지만 여전히 그 숫자는 동부전선 소련군 못지않게 바글바글하다.
아니 당장 항공모함에 야마토랑 머리끄댕이 잡고 싸우기 바빴는데 일할 시간이 얼마나 있었겠냐고.
끝없는 결재판의 사인 요청에 쉴 틈 없이 씨름하던 와중.
머리 식힐 겸 본국에서 보낸 프로파간다 신문도 살펴봤다.
본국에는 그새 류시원 제독을 통해 내 결정이 알려진 모양.
반응이 사뭇 폭발적이다.
<진급은 필요 없다.>
<일본 기동함대 단함으로 궤멸시킨 정운룡 상급 대령, 진급 거절 후 전사한 동료들의 추서 우선해.>
<훈장 대신 격침할 적함을 더 보내달라.>
<별을 다는 날은 오직 승전 기념일 뿐.>
아니 이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는데요.
뭐야, 돌려줘요.
내 제독 계급장.
우리 애들 기호품 좀 보내달라는 말은 왜 격침할 적함을 더 보내달라는 말로 바뀌어 있는데. 혹시 그새 한국말의 언어 체계가 달라졌나.
나가토나 무츠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커피랑 술이나 좀 보내달라고! 우리 애들 맛난 것 좀 맥이게!
그 와중에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가 했던 몇몇 제안은 납득할만한 이유로 반려되었다.
대표적으로 내 급여 반납 문제.
‘자네가 급여 반납하면 자네 위로나 밑으로나 죄다 급여 뱉으라고 강요될 판인데. 우릴 모두 실업자로 만들 셈인가?’
쩝.
딱히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차피 나야 해군총장이 뒷배 봐주는 사람이고.
딱히 내 집안에 돈이 부족하지는 않은 듯해서 한 말이었데.
마음속 빚을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여 급여를 전부 유족들 지원금으로 전달해달라고 한 건데.
다시 생각해보니 좀 눈치 없는 윗사람처럼 군 거 같네.
‘전쟁 영웅 정운룡 상급 대령을 본받아 우리 모두 자진해서 월급을 반납하자!’라고 하면 너무 어디 북쪽 유사 국가처럼 보이지 않는가.
다행히 대한제국은 그렇게 사리분별 못 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어쨌든 간에 자네의 정신은 상부에서도 높이 샀네. 해군총장께서도 자네를 대신해 비공식적으로 급여를 반납하겠다고 하셨고.”
···뭐라고요?
지금 신순성 총장님이 나 대신 월급 까셨다고?
별 4개짜리 제독님이 고작 상급 대령 하나가 입 나불댄 거 때문에?
싸늘한 한기가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거 분명 나 때문에 총대 메고 나선 거잖아.
총장께서는 웃으면서 괜찮다고 하셨다지만 원래 화내야 할 상황에 웃는 게 더 무섭다.
본국··· 살아서 돌아갈 수 있겠지?
“재미 동포들 중 자원입대한 이들이 있네.”
한편,
긍정적인 소식도 들려왔다.
180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건너온 한국인 노동자들.
그 숫자는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
진주만에 입항한 우리 함대도 많은 도움을 받을 정도.
수많은 교포들이 자진해서 식료품이나 기호품 등을 기부하며 함대의 복지가 더욱 건강해졌다.
뿐만 아니라 대한의 위기를 듣고 떨쳐 일어난 자원 입대자들까지. 태평양 기동군의 역할 중 하나가 바로 이들 중 건장한 청년을 모병하고 훈련시켜 기동부대의 지원병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미합중국 또한 말도 안 통하는 자국 병사들로 우리 함대의 결원을 채워주기는 곤란했던지라 자원입대라는 명목으로 이들의 모병에 찬성했다.
징집이 아니라서 얼마나 올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소수라도 보태준다면 그야말로 천군만마다.
“일단 준비된 병력은 현재까지 2개···.”
“2개 소대라면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2개 대대가 준비되었네.”
“???”
좀,
너무 많은데···?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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