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의 전사는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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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칩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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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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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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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2.




죽음은 싫다. 아직 내 꿈을 이루지 못했다.


이렇게 죽으면 지옥에서 기다리는 수백만의 동료들과 수천만의 적이 날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네가 비밀을 밝히고 왔어야지!’

‘우리 모두를 밟고서 도달한 곳이 겨우 여기냐?’


아냐, 아니다.

난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불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땅에 마찰이 일어나 피부가 산 채로 벗겨져도.

상처 부위를 지질 듯이 곧게 자란 잔디를 헤쳐가면서.

보이지 않는 구원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갔던 게 아니다.


내 두 번째 기회를 이렇게 헛되이 보내버릴 수 없단 말이다.

고작 이런 곳에서 죽을 순 없다.


“하!”


고통에 찬 신음이 대차게 흘러나왔다.

죽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지혈에만 집중했다.


그러자 멧돼지에게 뚫렸던 오른쪽 옆구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여러 조각으로 흩어진 지방과 근육 조각들이 차차 모여들기 시작했고 파열된 내장이 점점 재생되는 것이 느껴졌다.

직감으로 판단 가능한 현상이었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두통에 잠시 휘청거렸지만, 의외로 정신력은 온전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날 잡아 왔던 멧돼지 한 마리가 저 멀리서 경계하고 있었다.

분명 즐겁게 식사하기 위해 데려온 인간 아이가 갑자기 눈을 뜨고 일어나니 놀랄 법도 한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내 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했다. 작은 구멍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대로였다.


-꾸웩!


당황한 멧돼지가 다시 덤벼들었다.


퍽!


아프다. 말보다 더 빠르게 돌진해오는데 안 아프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그 수준이 조금 달랐다.


전생의 전쟁에선 손가락 하나만 절단돼도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고통에 민감했는데.

지금은 아프긴 해도 단지 그뿐이다. 그저 아픈 것에만 그쳤다.


환생 후에 오른쪽 옆구리가 뚫리고 이번엔 갈비뼈를 포함한 상체 장기 전부 터졌다. 전생과 비할 바도 못되었다.

폐도 위장도 심장도 전부 피로 환원되기까지. 수없이 많은 파열과 훼손이 반복했다.


그 과정 하나하나 속에서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고통도 전부 현실이었지만.


“심장이 멈추면 이런 기분이구나.”


뇌에 혈액을 공급할 심장과 혈관이 전부 으스러졌는데도 정신 상태는 너무나도 맑았다.

고통이란 감각 자체가 익숙해진 듯.

이보다 더 또렷할 수 없었다.


멧돼지에게 날려가 눈밭에 계속 누워있었더니 다시 몸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요리할 때 보글보글 끓는 물처럼. 내 남은 혈액도 들끓으며 그 속에서 새로운 장기들을 만들어냈다.


신선하고 원래의 상태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부품이 수 초 만에 완성되었다.

멧돼지는 다시 일어난 날 보자마자 기겁하며 다시 달려들었다.

이번엔 상체를 포함한 하체의 허벅지와 내 중요 부위까지 가루가 되어 날아갔다.

그리고 다시 완벽하게 재생했다.


뒤이어 내 얼굴 가죽이 통째로 벗겨져 안면 근육과 골격이 밖에 훤히 내다보이기까지 했다.

차가웠다. 뼈 사이사이에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치니 이토록 시린 적은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계속 되풀이되다가 마침내 멧돼지의 돌진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멧돼지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동시에 눈동자에 두려움이 비쳤다.


“어디 보자.”


방금 다시 돋아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허리춤에 단도 하나를 꺼내 멧돼지에게 접근했다.

그놈은 놀라 도망갈 준비를 했지만 이미 내게 여러 번 박치기하느라 힘을 소진한 듯하다.

제자리에 엉거주춤 서 있는 그놈의 눈동자에 단도를 박아넣었다.


-꾸웨에에엑!


고통에 찬 신음과 나 또한 아직 힘과 기술이 부족해 팔목이 부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딱히 문제 될 건 없지 않나.

부러진 뼈가 저절로 기존의 자리로 조립되어 맞춰 들어갔는데 아픔도 빠르게 사라졌다.


이후 난도질이 시작됐다.

몸부림치는 녀석의 몸통을 두 다리로 봉인시키고 머리통에 단도를 있는 그대로 박아넣었다.

머리를 이리저리 휘저으며 저항해보지만 소용없었다.

그놈의 상아에 내 목과 뺨에 구멍이 숭숭 뚫려도 난 개의치 않고 놈의 목숨을 끊는 데에만 집중했다.


-꾸웨엑! 꾸에에엑!

“그냥 죽어!”


정말 나 자신도 형편없었다.

내지르는 족족 팔목이나 어깨뼈가 나갈 정도였고 급소를 알아도 솜씨가 없으니 살육을 결착 짓지 못했다.

전쟁에서 그만큼 굴러도 싸운다는 행위 자체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몸이 정말 둔했으니까.


그래도 괜찮았다.

기술이 부족하면 어떤가.

이렇게 장기가 파괴되고 다시 재생을 반복하며 끝까지 가면.

내가 다 이긴다. 이길 수밖에 없다.


-꾸웨에에....


결국, 출혈량이 한계치를 넘었는지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닥의 눈조차 대량의 피를 흡수하지 못할 정도까지 미치자 그놈은 숨을 거뒀다.

핏물에 입고 온 옷이 전부 검붉게 물들었다. 내 머리카락도 검은색이었는데도 붉게 보일 정도였다.


바닥에 손을 집어넣었다.

얼굴에 묻은 나와 저놈의 피를 눈으로 대충 씻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내 몸을 둘러봤다.


“멀쩡하네.”


스스로가 비현실적인 현상에 넋이 나가 있었다.

이런 능력을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었지만, 매우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살아있는 송장인 채로 목숨을 갈구하던 100년 전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래. 그때도 이런 감각이었나.”


살기 위해 발버둥 쳤고 이를 악물며 죽음에 저항했다.

부서진 신체를 회복할 때에도 같은 감각이 전신에 감돌았다.


악착같이 살아남고자 하는 강력한 투지가.


“후우.”


생각이 길었다.

나는 멧돼지의 사체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냈다. 단검이 잘 안 들어가기도 했지만 상관없었다.

내가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 자체로 이미 스스로가 전사임을 입증한 것 아닌가.


다만 문제는.


“뭐라고 둘러대야 할까.”


멧돼지를 잡은 건 그렇다 치자.

그런데 그 전에. 멧돼지에게 공격을 받았는데 상처 하나 없이 돌아가면 의심을 살 수밖에 없었다.


이 능력은 가급적으로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고, 아귀가 들어맞는 증거가 필요했다.


그러자 한 가지 수가 생각났다.


허리춤에서 단도를 다시 꺼내 멧돼지와 충돌한 바로 오른 옆구리. 그 지점에 큰 상처를 의도적으로 냈다.

치명적이지 않으면서 막상 살펴보면 그렇게 얕지도 않은 상처를.




*




“단테!”


단테의 눈앞에 눈물범벅이 된 셋째 형, 오드릭이 보였다. 그 뒤로 함께 사냥한 제 5 사냥대와 나머지 인원. 그리고 아버지도 같은 표정으로 내게 먼저 달려와 껴안았다.


아버지와 오드릭에게 숨이 멎을 듯이 끌어안기는 바람에 등을 몇 번이나 두드려서 겨우 뗐다.


“무사했구나.”


“네. 보다시피요.”


“내가 미안하구나. 널 데려오는 게 아니었는데.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해다오.”


“괜찮아요, 아버지.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좀 떨어져 주세요. 많이 아프거든요.”


단테가 짚은 오른 옆구리엔 피가 가득 고여있었다.

아버지는 바로 자신의 옷감을 입으로 물어뜯어 단테의 상처를 지혈했다.


“당장 헝겊을 가져와라!”


일단 단테를 자리에 눕혔고 오른 옆구리에 난 상처를 대충 봉합하기 시작했다.

더 정교한 수술은 본성에 돌아가야 가능할 것이다.


단테는 그 짧은 순간에 모든 이들의 눈치를 살폈다.

일단 아버지와 오드릭은 다른 감정은 없었다. 오로지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에 감격하고 슬퍼했다.


오랫동안 함께 지낸 근위대장들도 비슷한 감정이었고 그 외 나머지 장정은 솔직히 믿기 힘들다는 눈치였다.

그래도 구태여 묻는 이는 없었다.


당분간은 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장황한 거짓말을 늘어놓지 않아도 될 듯싶었다.


“일단 집에 빨리 돌아가자꾸나.”


“아버지 그것보다.”


단테는 손에 멧돼지의 상아와 얼굴 가죽을 들어 보였다.

이제야 그것을 목격한 아버지와 오드릭. 나머지 인원들의 눈이 더욱 휘둥그레졌다.


“멧돼지 잡았어요. 제가.”


“단테......”


그러게 조금 이상했다.

단테의 전신에 핏물이 말라붙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 모든 피가 단테의 것이라면 이미 죽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 피는 그럼······.”


멧돼지를 죽이면서 그놈이 흘린 피이기도 했고. 단테가 소멸과 재생을 반복하며 흘린 피도 섞여 있었다.

그래서 단테는 가장 적절한 답을 내놓았다.


“제 피만 있는 건 아니긴 하죠.”




*




본성에 돌아오자마자 단테는 처치대로 옮겨졌다.

차가운 돌 위에 모직물을 깔고 그 위에 단테를 눕혔다.

처치대의 수도원과 의료원들은 단테의 상처 부위를 살피며 여러 수술 도구를 가지고 봉합하고 있었다.


다들 숨죽이며 단테의 상황을 지켜보는데 정작 당사자 본인은 빨리 이 시간이 끝났으면 했다.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미세한 바늘이 꽤 기분이 나빴다. 고통에 익숙한 지경에 이르렀어도 겪을 필요도 없는 것은 사양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바로 재생할 수 있었는데 굳이 이런 의미 없는 짓을 계속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다.


“일단 지혈은 잘 됐으니까 수술은 금방 끝났습니다. 봉합도 성공적으로 됐고요.”


“다행이군요, 감사합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끝난 듯하지만. 사실 단테가 조금씩 재생 능력을 조절하고 있었기 때문에 봉합이 잘 된 것처럼 보였다.


처치대에 남은 아버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서 단테의 옆에 앉았다.

아버지의 손이 단테의 이마를 쓸고 넘어갔다. 단테는 손을 들었고 아버지가 맞잡아줬다.


따뜻했다.


“아버지.”


“음.”


“저 진노의 외침, 배울 수 있게 해주세요.”


“하하.”


아버지는 처음으로 표정이 풀리면서 웃음을 지으셨다.


“그래 이놈아. 열 번이고 백 번이고 가르쳐주마.”


“감사합니다.”


지금은 그저 웃음으로 넘길지 몰라도 단테에겐 꽤나 심각한 사안이었다.

오늘 멧돼지 한 마리를 잡으려고 사실상 30번은 넘게 죽었지 않았나.

그것도 본인의 약한 신체적 능력과 형편없는 재능 때문에.

그래서 한시라도 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기본 검술과 활 솜씨뿐만 아니라 진노의 검술까지 더해 단기간에 강해져야 했다.


그렇게 해야만 평균과 같은 위치에 간신히 설 수 있을 테니까.


‘그 정도로 난 너무 약해.’


아마 대륙에서 손꼽히는 약체일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대륙에서 손꼽히는 파멸적 능력을 갖추기도 했다.


단테는 새삼 자신에게 주어진 이 재생의 능력을 되돌아봤다.

고마운 선물이었다.


“그런데 단테.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


“뭔데요?”


“넌 6살 때부터 북부 전승에 관해서 궁금해했지.”


“그렇지요?”


“지금이라도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 항상 나중에 나중이라고 둘러댔지 않았니.”


단테는 천장을 응시했다.

줄곧 밝히진 않았었다. 그토록 강해지려는 이유를 말이다.

굳이 원래의 꿈을 밝힐 이유도 없었지만, 지금은 그냥 말해도 될 듯싶었다.

어차피 알려질 사실이었다.


“미들랜드요.”


순간 아버지의 기색이 약간 바뀐 것이 느껴졌다.

맞잡은 손아귀에도 미세한 뒤틀림이 있었다.


“미들랜드?”


“네. 저는 미들랜드를 정복하고 싶어요.”


한참 동안 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옅은 웃음으로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좋은 꿈이구나. 그래, 그 정도 꿈이라면 그렇게 강해지고자 하는 이유도 납득이 되는구나. 북부의 전사라면 응당 꿈을 크게 가져야지.”


“네. 저는 아직 너무 약하고 약하니까요. 빨리 강해지고 싶어요. 누구보다 강해져서 스스로가 정복자에 걸맞은 인물임을 증명해야죠.”


“그래. 네 말이 맞는다. 결국, 약하면 어떤 이들도 네 뜻을 따라주지 않을 거다.”


아버지와 처음으로 진심을 터놓고 얘기하니 단테도 속이 후련했다.

오랜만에 두 부자는 따뜻한 난롯불 앞에서 허심탄회한 얘기를 계속해나갔다.




“단테!”


이제 움직여도 된다는 말에 병실에서 나오자 첫째 형 포드와 셋째 형 오드릭이 가장 먼저 달려왔다.

그 뒤로 쪼끄마한 레인도 덤으로 달려와 단테를 껴안았다.


“아 그래그래. 나 돌아왔어.”


“다행이다. 그러게 내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


“앞으로 넌 사냥 금지다. 내가 허락할 때까진 가지 마.”


“알았다고. 그러니까 좀 놔.”


남정네들이 한꺼번에 달려드니 없던 상처도 생길 판이었다. 억지로 밀어내자 그 밑으로 레인이 파고들었다.


그녀는 단테의 옷자락을 붙잡고 울음을 삼켰다.


“단테. 괜찮아?”


“괜찮아. 별일 없었지?”


“응.”


잔뜩 부풀어 오른 레인의 뺨을 잡아당기니 그제야 멀리 떨어졌다.


“단테 도련님! 무사하셔서 너무 다행입니다.”


단테와 레인의 유모와 전속 하인들도 다가와 단테에게 문안을 올렸다.

너무 부담스러운 과잉 관심에 단테는 그들을 모두 밀쳐내고 답답한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아 그만!”


하루 동안은 접근금지 명령을 내렸다.


한바탕 사냥이 지나간 이후엔 본성에선 만찬이 열렸다. 만찬이라고 해봤자 오늘 잡은 멧돼지 고기를 익혀 먹는 것밖에 더 있냐 만은.

그래도 북부인들에게 고기 식사는 만찬이나 다름없었다.


함께 극한의 상황을 이겨내는 본성의 하인들과 영지 만들까지 다 같이 모여 맛있는 고기를 먹었다.


“단테, 더 안 먹어?”


레인은 입에 고기를 잔뜩 쑤셔 넣으며 단테의 팔을 붙잡았다.


“어디가.”


“좀 쉬려고.”


“곧 대장간 아저씨랑 사람들이 네 무훈시 연극을 해주신다고 했는데. 안 봐도 돼?”


“무훈시는 무슨.”


무훈시라니.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그만큼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니었고······. 아니다. 지금 12살의 나이에 홀로 거대한 멧돼지를 혼자 때려잡았다니. 단테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좀 대단한 무용담이긴 했다만.


역시나 미심쩍은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긴 했다. 본성엔 모두가 단테의 무훈시를 믿는 눈치였지만 그들 중 몇몇은 미심쩍어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도 뭐 어찌할 건가.

재생 능력을 두 눈으로 목격한 것도 아닌데 말이지.


일단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우선 잠을 좀 자야 할 듯 싶었다.


재생 능력의 후폭풍 때문일까, 잠이 미칠 듯이 쏟아졌다.


단테는 침실에 누워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꽤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었다.



*



만찬이 끝난 날의 밤.

한밤중의 렌버그 영지의 성에선 단 한 곳에만 등불이 밝혀져 있었다.


집무실의 기다란 탁자에 렌버그 영지의 영주이자 가문의 가주. 에룬드 렌버그와 근위대장 및 경비대장.

조언가 역할인 학사가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나눴다.


에룬드 렌버그는 며칠 전 순찰을 나가며 보았던 현상을 그대로 읊었다.


“미들랜드 영역과 우리 북부의 땅의 인접 지역에서 이상 현상을 포착했다.”


“설마 그것입니까?”


에룬드는 며칠 전 기억을 상기시켰다.

분명 아직 북부의 땅이었을 그곳에서. 흙바닥 속에 작게 피어난 꽃을 꺾어 코에 갖다 대는 순간. 곧바로 대기 중에 흩어졌던 것을.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가 미들랜드 영역에 있는 요소 하나를 활용한다는 행위를 할 경우. 나타나는 이상 현상이었다.


식물을 뽑아 가져간다거나, 땅을 파서 집을 짓는다거나, 혹은 에룬드가 그랬던 것처럼 꽃의 향기를 맡는다는.

행위자의 의지 때문에 상호작용이 일어날 시, 요소가 바로 소멸한다는 현상. 미들랜드 안에서만 일어나는 이상 현상.


그것이 북부의 땅에서 일어났다는 의미는 그즉슨.


“우려했던 것이다. 미들랜드의 영역이 점점 넓어지고 있어.”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사실이긴 했다. 다만 그 속도가 예년보다 훨씬 빨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미리 표시해뒀던 북부 땅과 미들랜드 간의 경계선이 있었다. 그 경계선을 훨씬 뛰어넘는 북쪽의 땅까지 미들랜드의 영역이 확장된 것이다.


“그럼 우리가 살 곳도 좁혀지겠군요.”


말 그대로였다.

아직 미들랜드 영역에 포함되지 않은 북부의 땅과 그 외에 존재하는 땅들도 똑같이 좁아진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미들랜드의 주인이 결정되지 않으면 당연히 그곳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미들랜드 땅 위에선 오로지 전쟁과 죽음만이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고, 머지않아 대륙 전체가 미들랜드의 영역이 될 것이다.


이때까지의 경험을 미루어보아 현재 같은 속도로 확장이 진행되면 채 30년은 버틸지 모르겠다. 길게 버텨봐야 20년 남짓일 것이다.

그 안에 무조건 해결해야 했다.


곧 자라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무조건.


지금 상황은 그렇게 설명할 수 있었다.


이대로 놔두면 눈 뜨고 삶의 터전을 잃는 꼴이며 곧 인류가 자멸하는 길이라고.


“그래서 자네들의 의견을 들어보고자 이렇게 불렀네.”


현존하는 북부의 전사 중 가장 강한 근위대장과 경비대장들. 그리고 북부에서 가장 총명한 학사는 다 같은 고민에 빠졌다.


특별한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고 그것을 실행할 동의를 구하고자 모은 것이었다.


“결국, 전쟁이군.”


오른팔 무뤼가 에룬드를 향해 낮게 읊조렸다.

그 옆에 있던 학사 마드로도 거들었다.


“인류 모두가 죽음의 갈림길에 서느냐. 아니면 최소한의 인원만이라도 살아남느냐. 그 차이로군요.”


에룬드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떨궜다.


“그렇다네. 서쪽의 기사들도, 동쪽의 무림인들도. 남쪽의 마법사들도 전부. 포기하고 싶지 않겠지.”


대륙의 그 어떤 세력이 세상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땅이 남의 입에 들어가는 꼴을 보고만 있으랴.

차라리 다 같이 죽자는 마음가짐으로 임할 것이 틀림없었다. 남에게 뺏길 바에 가지지 못하는 것이 이 세상의 섭리였으니.

그만큼 각 지역은 서로를 죽일 듯이 미워했고 북부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결국은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답은 전쟁밖에 없었다.

이미 이곳에 모인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눈치기도 했다.


에룬드는 안광을 번뜩이며 각자에게 명확히 전달되도록 얘기했다.


“오늘부터 전쟁을 차츰차츰 준비하도록 한다. 20년 이내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현재 미들랜드에 주둔하고 있는 개척대 병사들과 합류할 것이다. 다들 각오 단단히 하도록.”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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