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의 전사는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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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칩22
작품등록일 :
2024.09.1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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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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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1.




죽지 않는 기사





나는 죽기 싫었다.

더 아프기 싫었고 하루를 절단된 신체의 고통과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별수 있겠는가.

난 전쟁이란 죽음에 발을 들였다. 이 정도는 각오하고 온 것이 아니던가.


유일하게 죽음의 바다에서 살아남은 내 신세를 보라.

지옥 같은 이 불모지 위에 알량한 명줄만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몰골이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그렇게 아프면. 그렇게 고통스러우면.

죽으면 되지. 죽음을 받아들이면 되지 않나. 죽음은 모든 경험이 무감각해지는 것이잖아. 죽으면 편해지잖아.


그런데 죽기 싫다니.

단장의 고통에 눈앞에 허상이 보일 정도였는데도.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지만은 남아 있었다.


보이지 않는 구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저 멀리 어둠과 빛이 혼재된 영역을 향해.

그것 또한 허상일지도 몰랐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닿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닿는 법은 없었다.

내겐 두 팔도 없었고 하반신은 통째로 날아갔으며 머리의 반쪽이 날아갔으니까. 당연히 뻗을 수조차 없었다. 사고를 지속하고 있다는 것도 기적이었다. 아니면 이것 전부가 단지 꿈이었을 수도 있고.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됐을까.’


애초에 이 전쟁에 참전한 것부터가 잘못인가?

천만의 군세로 시작하여 단 한 명의 생환자밖에 남지 않은. 이 처절한 싸움에 스스로 몸을 던진 지대한 원인이 있었을까.


다시 떠올려보자. 왜 이곳에 왔더라. 평화롭게 잘살고 있는 내게 기사 하나가 손을 내밀어서?


승리를 쟁취하면 일확천금을 준다는 얘기에 솔깃하여 온 것일까? 아니다.


전부 아닌 것 같다. 그 모든 것들이 이유가 될 수 없었다.


그럼 왜 이런 지옥 같은 곳에 제 발로 기어들어 왔나.


‘그야 너는 줄곧 저 땅을 원했잖아.’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마을 친구의 얘기가 떠올랐다.

하필 죽을 때가 다 되어서야 떠올랐다.


“그런가. 그랬었지.”


노예로 태어나 매일 핍박받고 천대받으며 살아왔다.

단지 고아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노예가 되었다.

그래서 이름 모를 잡배들에게 멍이 나도록 얻어맞았고 그런 그들에게서 도망 다니며 항상 올려다봤었다.


내가 사는 나라에서 가장 높이 솟은 성탑.

그곳엔 세상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왕이 존재한다고···.

그리고 눈앞에서 직접 왕을 봤을 땐.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황홀함을 느꼈다.

저절로 동경심이 피어올랐다.


자신이 세운 국가. 자신이 거느리는 기사와 신하들의 보필을 받고 신하들을 다스리는.

모든 이의 정점에 서 있는.


왕의 모습을.


나도 저런 왕처럼 누구보다 높이 올라가고 싶었다.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드높은 왕좌에 앉아 나만의 국가를 세우고 싶었다.


‘이런 작은 땅의 왕도 저렇게 빛나 보이는데. 그렇다면 나는 저 넓은 땅에 나라를 세운다면.’


세상 어떤 땅보다 넓게 펼쳐진 곳.

그곳에 만약 내가 왕이 된다면. 멋지지 않겠냐고 말이다.


그것이 내가 전쟁에 참여한 이유였다.


사람들이 절대로 가질 수 없었던 너머의 땅.

그 넓은 땅이. 모두 나의 것이었으면 하고 말이다.


가운데 홀로 남겨져 고고히 빛나는 땅.

미들랜드(Middle Land)를.


‘전쟁에서 승리하면 너희들은 위대한 국가, 비잔토르의 개국공신이 된다.’


무료한 나날을 보내던 내게 한 줄기의 빛이 되었던 이야기.


전쟁에 승리하면 저 주인 없는 땅에 국가를 세울 기회를 준다고.


‘휘황찬란한 미래를 제 손으로 개척할 영광을 주겠다.’


난 그 희망 하나만을 바라보며 이곳에 온 것이다.


전쟁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함께한 동료들을 잃고 존경하던 장군들이 눈앞에 죽어 나가고.

믿고 따라줬던 후발대 인원들이 잿더미로 되는 것을 두 눈으로 보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 또한 사지가 잘려나가고 안구 한 쪽이 적출되었다.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쉽사리 떠올리지 못한 것이리라.


정신이 또렷하지 못한 가운데 전쟁의 동기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렇게 너덜너덜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상기한 것이었다.


내 나라.

내가 왕인 국가.

내가 직접 싸워서 쟁취한 땅을 원했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 내가 서길 원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나라를 세운 인물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왕위를 찬탈한다면 그것은 곧 내가 세운 국가이자.


내가 군림하는 땅이지 않나.


죽음만이 기다리는 이 혈투를 시작한 건 그 이유에서였다.


“지금 와서 다 무슨 소용이냐.”


결국, 다 덧없다.

홀로 살아남았다 한들, 설사 전쟁에서 승리했다 쳐도.

이미 몸은 만신창이. 정신도 아팠고 뇌가 깨질 듯이 요동쳤다.


이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도. 모르겠, 다.


난. 죽고 싶지 않다.


그때 허상으로만 여겨왔던 검고 하얀빛 아래에 무언가가 모습을 드리웠다.

말을 탄 한 남성이었다.


그는 차가운 어조로 내게 말했다.


“단테인가, 네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난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곳이 네가 가고자 하는 곳인가?”


그가 가리킨 지평선 너머의 빛. 내가 다 죽어가는 몸을 쓸어가며 다다르려 했던 그곳에서.


내가 꿈꾸던 내 나라의 성이 보였다.


외벽이 전부 새하얗고 멋들어지게 하늘 위로 치솟은 성이다.


줄곧 그려왔던 상상 속의 성.


“아······.”


“진정으로 원한다면.”


남성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의식이 흐려졌다.

그다음 말을 꼭 들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숨이 끊어졌다.


너무나도 허무했다.



*



100년이 지났다.


“결국, 이 땅은 아무도 주인이 없는 것이군요.”


렌버그 가문의 두 사람은 저 멀리 중앙에서 빛나는 땅을 보았다.

어떤 땅보다 비옥했고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곳이었다.


“그래. 100년 전에 여러 세력이 충돌했고 생환자는 없다고 기록되어있지. 전부 저 땅 위에 피를 흘리며 스스로 시체를 묻은 거야.”


“참 이해는 가지만 어리석다고 생각되네요.”


“네가 그 시대에 살았어도 분명 전쟁에 참전했을 거다. 우리 가문의 조상들도 다 그랬으니까.”


“에이, 아버지. 저는 개죽음은 싫어한다고요. 한 번뿐인 인생을 고작 땅 하나 차지하겠다고 버린다니.”


“허허. 누구나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지.”


두 사람 중 연장자가 땅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둬 발밑의 꽃 한 송이에 손을 갖다 댔다.

북부에서만 자라는 얼음꽃이었다.


그런데 연장자가 꽃을 코에 갖다 대려는 순간.

파괴되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버지?”


연장자는 아들의 부름에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아들이 다가오자 기색을 억지로 감췄다.


“아무것도 아니다. 돌아가자꾸나.”


“네···.”


“점점 우리가 살 곳이 줄어들고 있구나.”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북쪽의 땅으로 돌아갔다.

대륙 최북단에 렌버그 가문이 자리 잡은 영역으로.





“예? 땅을 밟고 있기만 해도 자기 소유가 된다고요?”


북쪽의 관리자. 렌버그 가문의 막내 아이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럼요. 하루면 돼요. 단 하루 동안 그 땅에 두 발을 붙이고 있다면 땅은 그 사람을 주인으로 삼죠.”


유모가 말해준 역사 이야기는 꽤 흥미로웠다.


“그럼 지금 당장 밟으러 가야죠!”


차가운 북부와 메마른 남서부, 온갖 마물이 들끓는 동부와 달리.

대륙의 중앙에 있는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미들랜드.


누구나 탐낼 만한 땅이었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제가 말했듯이 그곳의 땅은 단 한 명만이 가질 수 있어요.”


미들랜드는 주인이 정해지기 전까지 아무런 쓸모도 없는 땅이었다. 불모지와 다름없었다.

겉으론 비옥해 보여도 주인이 정해지지 않으면 농사도 안되고 사람이나 가축이 먹을만한 품목도 자라지 않았다.

건물을 지으려고 땅을 파면 그 즉시 대지에 삼켜졌다.


인간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땅을 이용하는 즉시 무용지물로 되어 사라지거나 땅으로 꺼졌다.


한 마디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주인이 없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대륙의 5할을 차지하는 거대한 중앙의 땅, 미들랜드는 100년전이나 지금이나 주인없는 땅으로.

홀로 고고히 저 멀리서 빛나고 있었다.


“그럼 그 넓은 땅에 오직 한 명. 지배자가 될 그 사람만 하루동안 딛고 서있어야 된다 말이죠?”


“그렇죠. 그런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과거엔 정말 많은 전쟁이 일어났어요. 땅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수 천 수 만의 인원이 모두 같은 땅 위에 죽었으니까요.”


“지금은 그럼 비었을 거 아니에요. 지금이 기회에요!”


“아니에요, 아가씨. 그 넓고 비옥한 땅을 누가 포기하겠어요. 대전쟁 이후 그 잔당이 미들랜드를 중심으로 고루 퍼졌지요. 저희 북부 뿐만 아니라 다른 미들랜드 외의 영역에 다른 세력이 많아요.”


“그리고 그쪽 사람들도 전부 땅 위에 발을 붙이고 있겠죠. 여러 사람이 발을 붙이고 있으면 땅은 주인을 정하지 않으니까. 다른 이에게 뺏기기 싫어서 24시간 365일 각자 세력에서 발을 붙이고 있을 것이고, 우리 북부도 소수 인원이 현재 미들랜드 위를 밟고 있겠죠?”


유모의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렌버그 가문의 또 다른 막내 쌍둥이가 힐끔 쳐다봤다.


“어머 단테 도련님은 이해가 빠르시네요. 말씀하신 그대로에요.”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치사하다. 정정당당히 붙어서 승자를 가려내야죠. 진짜 땅의 주인을 말이에요.”


“치사한 게 아니라 당연한거야, 레인. 방심하면 눈 깜짝할새에 뺏길 수도 있는걸. 조금만 생각을 해보라고.”


단테 렌버그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얘기했고 뭔가 바보취급 당한 것같은 레인 렌버그는 뾰루퉁해졌다.


“넌 나랑 쌍둥이면서 왜 자꾸 오빠인척 구는거야. 기분 나쁘게.”


그러고선 밖으로 나가버렸다.


유모는 곤란해보였지만 단테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런, 또 제가 단테 도련님만 편애한 줄 알고 속상해하시면 어떡하지.”


“그건 걱정마요. 어쨌든 유모.”


“네 단테 도련님.”


“미들랜드라는 땅은. 또 뭔가 있는 거죠?”


대륙과 미들랜드에 얽힌 이야기는 어딘가 모순점이 있었다.

비옥하다는 건 알겠다. 몇 백만년동안 펑펑 써도 충분할 자원이 매장되어 있는 것도 알겠다.

가장 넓은 땅이기에 모든 권력자들이 탐낼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그런데 고작.


“분명 뭔가 더 숨겨져 있는 게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것이잖아요. 전쟁도 수십번 일어나고.”


유모는 단테 렌버그에겐 못당해냈다. 이 아이는 또래에 비해 통찰력이 깊다고 해야하나.

의중을 단번에 파악할 능력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맞습니다. 도련님 말씀대로 미들랜드엔 한 가지 전설이 있죠.”


“그게 뭐에요.”


“동방에선 천하를 뒤흔들 막강한 힘을 얻는다는 말도 있고, 서쪽의 기사들은 영원한 빛의 검을 신으로부터 하사받는 얘기도 있죠. 저희 북쪽에선 세상에 영원한 겨울을 내리게 한다는 소문도 돌았죠.”


유모가 손가락 하나를 세우며 하늘을 가리켰다. 이야기는 계속됐다.


“각 지역마다 말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뜻은.”


“이 대륙 전체를 마음대로 휘잡을 수 있다, 이런 말인가요?”


단테가 답을 예상하고 말하자 유모는 웃음을 지었다.


“도련님도 알다시피 이 세상의 모든 권력은 강함과 재력에서 온다는 것은 알고 있으시죠?”


단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았다. 사실 이 시대의 인간들보다 더 잘 알 수 있었다.


그는 한 번 죽었다 다시 환생한 몸이었으니까.


“네. 잘 알고있죠.”


전쟁터에서 숱하게 봐왔다.

자신이 속한 군세는 새로운 국가의 건설과 대륙의 군림을 위해.

그밖의 적들 또한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힘과 돈. 그 뿐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의 의미가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미들랜드 지배권엔 강한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한 번 땅의 주인이 되면 그 어떤 강한 기사라도, 무자비한 전사라도, 전지전능한 마법사라도. 미들랜드 지배자의 뜻을 거역하지 못할 것입니다. 심지어 그게 창조신이라 할지라도요.”


단테는 전생에서도 몰랐던 미들랜드의 마지막 조각을 알고는 뒤통수라도 한 데 맞은 듯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그런 힘이 존재할 줄은 몰랐다.


“그렇군요.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것이군요.”


환생한 인간, 단테는 사색에 잠겼다.



*



죽은 줄 알았다.

미들랜드의 끝자락에서 자신의 군대는 전멸했었고 홀로 살아남아 정처없이 기어다녔다.

그 끝에 갑작스레 나타난 말을 탄 남성.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목숨이 다하여 죽었다.


죽었다라는 사실을 인지할 정도로 기억은 또렷했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왠 침실이었다.

전생에서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고급스런 침실.


시대는 흘러 단테가 참전한 1차 대전쟁 이후 100년이 흘러 있었다. 그리고 환생한 장소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북부의 땅.

렌버그라는 영주가 관리하고 있는 영역이었다.


“우리 아가들. 잘 태어나줘서 너무 고맙구나.”


단테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옆에 동시에 태어난 쌍둥이 남매 레인을 번갈아보며 깨달았다.


환생했구나라고. 그것 외엔 달리 설명할 말이 없지 않나. 전생이 단지 태아시절에 꾼 기나긴 꿈이었을 리는 없다.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 1차 대전쟁은 역사에 고스란히 남겨져있었으니까.


어떻게 환생을 했을까라고 특별히 의문도 가지지 않았다.

이름도 전생과 똑같은 단테가 됐다. 그냥 우연이겠거니 싶었다.


중요한건 주어진 환경을 잘 이용하여 자신의 꿈을 관철하는 것이다.

대전쟁 이후 100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미들랜드의 주인이 정해지지 않았다니.


기회는 있었다.


‘미들랜드에 나라를 세우는 것은 나다.’


여전히 단테의 꿈은 미들랜드의 정복과 자신만의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음 속에 응어리진 것들이 너무 많았다.


고작 땅하나 가지겠다고 100년 전 그 장소에서 억대가 넘어가는 인간이 죽었다.

대륙의 인원 9할이 전멸했다고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중엔 단테와 서로의 등을 맡길 정도로 우애가 깊은 동료들도 있었다.


그들은 단테와 달리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거나 강제로 동원되어 온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도 빠짐없이 같은 결말을 맞이했다.


단테는 환생 후 매일같이 쏟아지는 별똥별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 미들랜드엔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그곳이 아무리 풍요로운 땅이고 가장 넓다고 해도.

대륙에서 미들랜드를 제외한 외곽지역에서도 잘 살 수 있지 않나.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농사하고 벌목을 하고 사냥을 해서 잘 먹고 잘살아가는데도.


수없이 많은 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던질 만큼, 아직도 기억에 남은 동료들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곳에 과연 수억 명분의 목숨과 비등한 가치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적어도 이 세상에 미들랜드 정복을 해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모든 것이 다 추측이었고 전설일 뿐이었다.


단테는 알고 싶었다.

미들랜드의 가치. 그리고 훗날 자신이 세울 국가의 미래.

이런 좁아터진 곳의 왕이 아닌, 가장 드넓은 땅 위에 당당히 일어설 초대왕.


나의 미래가.


단테는 자신에게 주어진 두 번째 인생을 절대로 허송세월로 보낼 생각이 없었다.

나이 하나라도 더 어릴 때 대비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강해져야 한다.


결국, 수많은 경쟁자들을 제치기 위해선 가장 강해야 했고 당연하게도 고분고분 자신의 얘기를 들어줄 자들도 아니었다.


돌고 돌아 무력이다.

뜻에 반하면 힘으로 해결해야 했다.


지금 세상은 그런 세상이었으니까.

100년이 지나도 토씨 하나 바뀌지 않는 야만의 시대였으니까.


전생처럼 무력하게 쓸려나가는 건 사양이었다.


“뭐? 단테도 함께 데려가 달라고?”


단테는 유모의 얘기를 들은 뒤, 순찰을 다녀온 아버지와 첫째 형의 앞으로 다가왔다.


“내일 멧돼지 사냥에 가신다고 했죠. 저도 데려가 주세요.”


말에서 내린 첫째 형은 코웃음을 치며 단테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단테. 넌 아직 너무 어려.”


단테는 아무 말 없이 오로지 아버지에게만 시선을 뒀다.

렌버그 가문의 가주, 에룬드 렌버그는 고민에 빠진 눈치였다.


렌버그는 북부의 전사 피를 강하게 이어받은 거대한 가문이었다. 북쪽 전체를 관리할 정도로 규모도 컸고 현 대륙에서 미들랜드를 제외하면 가장 넓은 땅을 지배 중인 북쪽의 실권이었다.


이곳에서 가장 강한 전사는 에룬드였다.

그리고 전사가 될 아이는 끊임없이 본인의 가능성을 우두머리에게 증명해야 했다.


“저 혼자 멧돼지를 잡아 오겠습니다. 그럼 지금 제게 외침을 가르쳐주세요.”


단테는 북부 전사들에게만 전승되는 진노의 외침을 배우고 싶었다.

함성 하나만으로 적군의 기세를 무너뜨리는 그 기개를.


직접 그들의 무지막지한 검과 도끼를 맞대본 단테는 자신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했다.


전생에서 제대로 된 능력 하나 없이 지옥에서 살아남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야! 단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 하냐. 넌 아직 12살밖에 안 됐잖아.”


첫째 형은 계속 헛소리만 해대는 단테의 머리를 붙잡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가주가 멈춰 세웠다.


“단테. 네가 한 말을 책임질 수 있겠느냐?”


단테는 양쪽 어금니를 꽉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잡아 오겠습니다.”


본디 16살 이전엔 그 어떤 사냥터에도 갈 수 없었고 북부 전승을 이어받기에도 일렀다.

지금은 그보다 활을 더 정교하게 쏘거나 기본 검 동작에 더 집중해야 할 때였다.


그렇지만 한시라도 빨리 전쟁에 나갈 수 있을 만큼 강해져야 하지 않나.

렌버그 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단테도 함께 간다.”


“아버지! 단테는 아직 애라고요.”


“북부인은 지킬 수 없는 말을 입에 담지 못한다. 책임질 수 없는 말도 내뱉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우리들 선조의 가르침이니까 단테. 너도 그게 무엇인지 몸소 깨달으면 좋겠구나.”


그의 말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너 스스로가 진정한 북부인임을 증명하라. 자신이 입에 올린 말을 철저히 완수하라.

그리고 만약 실패한다면 넌 북부인으로서 자격을 박탈.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진노의 외침을 다 늙어 죽을 때까지도 가르쳐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



멧돼지 때문에 북부에서는 꽤 골치를 앓고 있었다.

온통 눈밭인 북부에서 무슨 손해를 끼치느냐고 할 수 있다. 망칠 논밭도 없는데 말이다.


“실제로 사람을 잡아먹는데. 끔찍하지 않냐.”


같이 사냥을 온 셋째 형이 대놓고 겁먹으라며 귀에다 입김을 불어댔다.

단테는 살짝 귀찮다는 듯 떼어냈다.


“알았다고.”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좋을걸.”


북부의 멧돼지는 사람을 잡아먹었다. 그것도 집안에 직접 쳐들어가면서까지 말이다.

그 때문에 최근 영지 바깥 마을의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직접 렌버그 영주가 나선 것이었다.


온갖 무기로 무장한 사냥대 최후미에 선 단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돌아갈 순 없어. 그리고 난 멧돼지를 잡고 돌아가야 해.”


“바보. 네가 어떻게 잡겠냐. 성인 남성 여럿이 달려들어도 감당키 힘든 놈인데.”


북부의 멧돼지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덩치가 곰처럼 크고 날렵하기로 유명했다.

그러므로 실력있는 전사가 아니라면 제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잡는다는 의미가 꼭 제압까지 하라는 의미는 아니지 않나.

장정들의 공격으로 약화된 멧돼지에게 결정타를 먹여 쓰러트리면.


“내가 잡은 거지.”


“양심이 없구나.”


“그럼 내가 직접 멧돼지 상아에 달라붙어서 때려죽이기라도 할까. 이 앙상한 팔로?”


절대 불가능했다.

이 작고 여린 몸으로 맹수 상대로 뭘 할 수 있을까.

처음부터 염치없이 사냥 아닌 사냥을 생각하며 온 것이다.


애초에 전생의 건장한 청년이었던 시절이었어도 잡을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단테라는 인간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목장 일이나 거들어주는 한량이었을 뿐이다.

전쟁에 참전하며 검 휘두르는 법을 대강만 알았을 뿐.

특별히 기술이 뛰어나다거나 잘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전투 센스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저 죽지 않을 정도로만 검을 휘둘러 왔기에 더욱이 진노의 외침을 터득해야 했다.

능력이 뒷받침한다면 전쟁에서 빛을 발할 수 있지 않나.


“여기서 각자 흩어진다.”


최전선에서 인원을 분배시키던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최후미에 선 인원을 보았다.


셋째 아들 오드릭과 막내아들 단테.


“너희는 무뤼와 일리오를 따라가거라.”


가장 약한 전력엔 가장 믿을 수 있었던 근위대장 둘을 붙여뒀다.

그에 더해 장정 몇 명이 더 합류하며 제 5 사냥대를 이루었다.


아버지는 이후 제 1 사냥대 쪽으로 말을 돌리셨다.


“너희들은 꼭 내 뒤를 따라야 한다. 함부로 대열을 흐트러뜨리면 곧바로 죽음이다.”


근위대장 무뤼와 일리오를 선두로 제 5 사냥대도 출몰 지역에 접어들었다.


근처 마을 피해도 역력히 보였는데 차마 눈을 뜨고 못 봐줄 광경이었다.


집집이 커다란 구멍과 함께 그 속에서 뿜어져 나온 핏물이 바닥에 얼어붙어 있었다.


시체 조각은 물론 이따금 사람 뼈도 중간중간 떨어져 있었다.


이곳의 살아남은 사람은 없다고 들었다.


“미친 짐승 새끼들.”


무뤼는 전열을 가다듬고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산 초입 부분을 오를 때였나.


“나타났다!”


전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외침이 들려왔다.

앞을 올려다보니 산 중턱에서 멧돼지 한 마리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꾸웨에엑!


‘크다...’


이것이 북부의 멧돼지인가.

단테는 실제로 처음 보는 북부의 멧돼지를 보고는 경악했다.

곰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거대한 몸집과 그에 맞지 않는 빠른 속도.


-꾸웨에엑!


뛰어난 전사였던 무뤼와 일리오 근위대장이 아니었다면 방금 단테는 상체가 전부 뚫릴 뻔했다.


다행히 둘의 발 빠른 대처로 고꾸라져 저 멀리 나무에 처박고 말았다. 더 움직임은 없었다.

급소를 정확히 찔러 급사한 모양이었다.


“우리들이 전부 처리할 테니까 너희들은 후방지원을 돕거라.”


단테와 둘째 형 오드릭을 중심으로 근위대장과 장정들이 원형으로 둘러싼 형태를 취했다.


사방에서 달려들 멧돼지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고 아직 코흘리개 꼬맹이인 둘은 원거리에서 활을 쏴서 지원할 계획이었다.


단테는 최대한 얼굴을 들이밀며 달려드는 멧돼지들에게 집중했다.

결국, 결정타는 자신이 날려야 했다. 방금 근위대장 둘이 처리한 멧돼지는 운 좋게 바로 죽었다 해도 꼭 그러리란 보장은 없다.


공격을 받고도 질주하는 별종이 있다고 했으니 더욱 주의해야 했다.


촤악! 촤악!

-꾸웨에에엑!


수많은 멧돼지가 먹잇감의 등장에 사방에서 달려들었지만, 상대가 될 리가 만무했다.

장정들도 각자 꽤나 검 좀 다루는 사람들이었고.

무엇보다 근위대장 둘이 너무나 강력했다.


칼질 한 번에 머리가 잘려나가고 몸통이 꿰뚫리기 일쑤였으니 당연했다.


“잡았다!”


옆에서 오드릭 형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쏜 화살이 약간 숨통이 붙어있던 멧돼지 이마에 명중한 것이다.


그에 반해 단테는.


“야 단테. 내가 말했지. 쉽지 않을 거라고.”


단 한 번도 잡지 못했다.

생각보다 자신의 활 솜씨가 형편없다는 것을 깨달은 단테였다.

그렇다고 괜히 너무 강한 근위대장 둘을 탓할 수도 없었다.


숨통이 옅게나마 남아 있는 멧돼지가 몇 마리나 있었는데 전부 오드릭이나 장정들이 마무리했다.


충분히 마지막 일격을 날릴 기회는 많았다.


놓친 건 본인이다.


‘역시 나는 무기에 재능이 없는 것일까.’


단테는 전생과 다름없는 현생의 형편없는 신체 능력에 실망한 참이었다.

활 연습을 게을리한 것도 아니었다.

걸음마를 떼고 바로 잡은 것이 검과 화살이었는데. 이토록 재능이 없을 줄이야.


“겨우 다 정리했군.”


총 스무 마리의 멧돼지를 토벌했고 이쪽은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

인원은 준비해둔 자루를 펼쳐 단검을 들고 멧돼지 사체를 썰기 시작했다. 갑옷 제작이나 식량으로 쓸 것이었다.


“단테. 너무 낙심하지 말라고.”


오드릭도 자신이 잡은 멧돼지 가죽을 벗기면서 단테의 눈치를 살폈다.

단테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만큼 지금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빨리 검술을 배우고 싶은 마음은 알겠다만 넌 아직 너무 어려. 활도 제대로 못 쏴서 검은 어떻게 다루겠다는 거야.”


“그러게.”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셔다 하더라도 정말 네게 진노를 안 가르쳐주시진 않을 거야.”


“그럴까.”


단테는 한숨을 푹 쉬며 오드릭을 거들어줬다.


“그래도 난 그 모습이 더 낫다고 본다. 누구처럼 한시라도 더 강해지려고 반항하다 집 밖으로 뛰쳐나간 것보다 네가 낫지.”


“둘째 형 말하는 거 맞지? 이름이 분명······.”


“말하진 마. 떠오르기도 싫으니까.”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야 너랑 레인은 그때 막 태어났고 그 자식은 이미 나가고 없었으니까.”


“그렇구나.”


“내 말은 너무 조급해하면 그 자식 꼴이 난다는 거야. 천천히 기본 전투 기술부터 익혀가면서 배워나가는 거지. 처음부터 다 잘하는 사람은 없다고.”


맞는 말이긴 했다.

아직 기반이 다져지기도 전에 층부터 쌓으려 했으니 당연히 빈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단테는 한시라도 빨리 강해져야 했다.


상황은 언제나 빠르게 그리고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어야 했으니까.

언제 하루아침에 미들랜드가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갈지도 모르지 않나.


그전에 강해지고 군대를 일으켜 모든 경쟁자를 제치고 나아가야 했다.


‘다만 너무 조급해한 탓도 있겠지.’


단테는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오늘의 경험을 반추하여 전투 실력을 키워나갈 필요가 있었다.


그런 생각이 미칠 즈음.

바로 옆에 달려온 존재를 인지하지도 못한 단테였다.


“단테!”


오드릭의 외마디 비명만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이미 오른 옆구리를 강타한 무언가에 몸이 붕 뜨다시피 날아갔고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격통에 수없이 많은 피를 토해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멧돼지 하나가 자그마한 단테의 몸통을 상아로 관통시켰다.

그런 다음 단테를 상아에 끼운 채, 근위대장과 장정들의 포위망을 뚫고 저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단테!”


오드릭과 장정 몇 명이 멧돼지에게 납치된 단테를 쫓아가려고 해도. 근위대장 둘이 막아섰다.


“이미 늦었다. 더 쫓아가면 저놈들의 소굴에 빠질 뿐이야.”


하나하나 상대하면 몰라도 군집을 이룬 좁은 장소라면 제아무리 전사인 근위대장이라 하더라도 이길 수 없었다.


게다가 이미 단테는 공격을 받은 시점에서.


“죽었을 거다.”


“지랄하지 마요!”


눈물을 흘리며 단테를 되찾으려는 오드릭을 근위대장 무뤼가 붙잡았다.


오드릭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사라져가는 동생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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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의 전사는 죽지 않는다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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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 24.09.16 2 0 18쪽
» 1 24.09.16 7 0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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