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드: 파랑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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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1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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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1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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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태워버린 기억

DUMMY

[ 1장, 당신은 누구일까요. ]


# 여는 이야기 00.


“어? 백일홍이다.”

그 사람이 말했다.

“혹시, 백일홍의 전설을 알아?”


# 1-1. 태워버린 기억

***

쨍한 햇볕이 내려앉은 여름날이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숨죽이고 서서, 오직 한 남자의 손끝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손아귀에는 낡은, 그러나 기품 있는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남자는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푸-욱.

남자는 뜨겁고 비릿한 냄새의 피가 자신의 몸을 뒤엎는 것을 느꼈다. 역겨웠지만, 동시에 짜릿했다. 남자는 소매를 이용해 피 묻은 얼굴을 쓱 닦아내며, 싸늘한 미소 비슷한 무언가를 지었다.

곧이어 쿵, 소리와 함께 상대가 쓰러졌다. 우레와 같은 함성소리가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아아아!!!!”

“각하께서 해내셨다!!!!!! 만세!!!!!”

“위대하신 지도자님 만세! 만세! 만만세!”

사람들의 열망에 찬 목소리는 뜨거운 태양만큼이나 강렬했다. 사람들은 남자를 숭배했다. 그는 모두의 구원자였으며, 지도자였으며, 영웅이었다. 그러나 강력한 군주는 무릇 두려운 존재일 터. 남자가 거슬리는 듯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번쩍 들자, 사람들은 순식간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오직 한 아낙네만 제외하고서.

“안 돼애애애애애애!!!!!”

아낙네의 절규소리는 어찌나 처절했는지, 사람들의 마음 속에 활활 타올랐던 흥분은 순식간에 사그라져버렸다. 남자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굳이 명령을 입 밖으로 내뱉을 필요가 없었다. 군주의 경멸하는 표정을 보자마자, 그의 충직한 부하들은 아낙네의 입을 막으러 달려갔다.

까악-.

그것은 불길함의 시초였다.

아낙네의 구슬픈 울음소리에 화답하듯, 까마귀 한 마리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사람들도 그를 따라 일제히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새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가 저 찬란한 하늘 아래, 이 땅에, 마침내 서있다는 사실이 벅찼다. 그들의 사기는 말그대로 ‘하늘을 찔렀다’.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아무도, 그들의 최고 지도자를 막을 수 없었다.

까악-까아악-.

까마귀 울음소리가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메아리가 아니었다. 쨍한 하늘에는, 순식간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사람들의 얼굴에 공포심이 차올랐다. 하지만 남자의 표정에는 미동이 없었다.

“으악!”

누군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동시에 검은 그림자들은 시끄러운 까악 소리를 내며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수백 마리의 까마귀들은 귀가 먹을 정도로 무섭게 까악거리며, 하늘에서 떼거지로 내려왔다.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기에 바빴다. 공포에 질린 비명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여전히, 남자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그는 쥐던 칼로 날아오던 까마귀 하나를 무참히 베어버린 뒤, 짤막하게 명령했다.

“죽여라. 전부.”

사람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의 지도자가 두 번 입을 여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모두들 벌벌 떨면서 칼을 빼 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충실히 남자의 명령에 따랐다.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렀다. 닥치는 대로, 그들을 뒤엎은 검은 그림자들을 베어냈다. 무수히 많은 검은 깃털들이 사방에서 흩날렸다. 비참한 까악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퍼졌고, 사람들의 잔인한 고함소리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더이상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이 마주한 것은, 까만 까마귀와 빨간 피뿐이었다.

끔찍한 도살의 현장이었지만, 남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저벅저벅 걸어가 자신의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무심하게 마른 수건을 집어 얼굴을 닦은 뒤, 자신의 검에 묻은 새빨간 피를 닦아냈다. 그리고 그의 옷에 붙은 까만 깃털을 떼어내려는 찰나였다.

남자가 멈칫했다.

그는 빠르게 칼을 들어올리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하얀 머리의 상대는, 목에 칼이 들어왔음에도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저라면 그러지 않겠습니다. 어린 아이 앞에서.”

남자는 흘끗 놈의 옆에 서 있는 여자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벌벌 떨고 있었다.

“웬 놈들이냐.”

놈은 수상했다. 젊은 나이의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머리칼을 지닌 사내였다. 최고 지도자인 남자를 겁내지도 않았다. 이상한 자였다.

“중앙신문사에서 나왔습니다. 그래, 몇 가지 여쭈어 볼 것이 있는데요.”

남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중앙신문사에서 오늘 사람을 보낸단 말은 못 들었는데. 자세한 사항은 내일······.”

“미스터 R께서 특별히 보냈습니다. 각하를 칭송하는 글을 쓰고 싶다 하시던데요.”

남자는 미스터 R이라는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칼을 거두었다. 하얀 머리의 사내는 남자의 손에 쥐여진 칼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칼자루가 붕대로 칭칭 감아진 검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게 바로 당신의 검이로군요, 듣던 대로 귀한 보석 장식이 다 빠진. 그런데도 이 검을 고집하시는 이유는 뭡니까? 그 많은 전투를 치르시는 동안, 딱 이 낡은 검 한 자루만 쓰시는 이유가.”

하지만 남자는 조금 거북한 듯, 검을 칼집에 넣어버렸다. 그는 여전히 의심 가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살폈다. 그리곤 여전히 떨고 있는 여자아이를 흘겨보았다.

“요새 중앙신문사에서는 저런 어린 애도 기자로 뽑나?”

그러자 하얀 머리의 사내는 간단히 답했다.

“아, 제 조수입니다.”

그의 말에, 여자아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다소 부루퉁한 목소리였다.

“동업자죠, 조수가 아니라.”

“제 조수의 무례를 용서하시지요, 각하.”

하얀 머리의 사내는 여자아이의 따가운 시선을 무시하며 사과했다. 그리고는 질문을 이어 나갔다.

“그 뛰어나신 검술은 언제 처음 배우신 겁니까? 누구로부터 배우신 거죠?”

남자는 미간을 좁히며 자리로 가 앉았다. 하얀 머리의 남자는 품에서 낡은 회중시계를 꺼내더니, 어째서인지 조금 다급해진 말투로 계속 물었다.

“형이 있었다고 하시던데, 혹시 검술도 형님께 배웠습니까? 그때의 기억이 있습니까?”

남자는 불편하다는 기색이었다.

“형은······오래전에 죽었다. 바보같이, 여자 때문에. 그 일은 왜 캐묻지? 그 이야기는 기사에서 빼도록 하게.”

“그럼, 레드포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확실히 이상했다. 남자가 눈을 부라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자가 죽은 지는 이미 20년도 더 지났거늘! 어찌하여 그 이름을······. 네놈들은 기자들이 아니다, 뭐하는 놈들이냐!”

그러자 하얀 머리의 사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시간이 다 되어 버렸군, 그래.”

“네 이놈들, 여왕을 따르던 잔당들인 것이냐? 내 싹을 제대로 잘라 버렸어야 했는데!”

남자가 칼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가 칼을 손에 쥐기 전에, 하얀 머리의 사내가 재빨리 그의 검을 빼앗았다.

“네놈이 감히!”

남자는 노여움에 가득 찬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사내는 태평하게 어깨를 으쓱이면서, 여자아이와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아무래도 저 불 같은 성격 고치기가 쉽지 않겠어.”

“그 검은 왜 가져가는 거예요?”

“쓸모가 있을 거야. 정확히 이걸 언제 어디에 가져다 놓아야 할지 알기만 한다면.”

그때 남자의 고함소리를 듣고 그의 부하들이 우루루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각하!”

“저놈들을 당장······.”

그러나 남자가 다시 두 사람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는, 하얀 머리의 사내도, 어린 여자아이도,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엔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남자가 다시 한번 무시무시한 고함을 내질렀다.

“당장 이놈들을 잡아!!!!!”

그때 남자의 귓가에 그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 걱정하지 마시죠. 성질이 꽤 고약하시지만, 우리 거래를 물리지는 않을 테니.

남자가 고개를 휙 돌렸다. 하지만 그곳에 하얀 머리의 사내는 없었다.

“이게 무슨······.”

하지만 남자의 눈 앞에는 더욱 괴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의 충직한 부하들이 하나둘씩 안개처럼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부하들만이 아니었다. 남자의 옆에 있던 책상도, 막사도. 모든 것이 흐릿하게 너울거리며 눈앞에서 사라져갔다. 위대한 최고 지도자의 세상이 소멸되고 있었다. 아니, 이 남자의 삶이 사라졌다. 지금 막.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글쟁이 다보람입니다. 일과 후 밤마다 조금씩 조금씩 써 왔던 작품을 조심스럽게 강가에 내놓습니다. 2000~2010년대의 향수적 장르 정통 판타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서툰 부분이 많지만, 재밌게 읽어주시면 큰 보람으로 다가올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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