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물 배우가 연기력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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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딩동
작품등록일 :
2024.09.21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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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1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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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의 끝, 연기의 시작(1)

DUMMY

소년이 눈보라를 맞으며 나아가다가 그만 멈춰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엄마······ 엄마에게 가야 하는데······.”


울먹이던 아이가 다시 일어서 제 눈을 슥- 닦고는 눈보라와 맞섰다.


“분명 엄마가 날 기다리고 있을 거야······.”


새빨개진 뺨, 올망졸망한 이목구비엔 간절함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아이가 눈보라를 헤치고 걸어갈 무렵.


“오케이!”


감독의 확성기에서 오케이 소리가 나왔다.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스탭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추운데 고생했지? 세상에 너 같은 아역만 있으면 좋겠다니까.”


감독이 기가 찬 탄성을 뱉었다. 보통 10살이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수십의 스태프에게 기가 죽기 마련이다.

게다가 오늘 같은 야외 촬영은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더 부담스러웠을 텐데.

아무리 얼굴이 귀엽고 연기 학원 출신이라 해도 막상 카메라 앞에 세워 놓으면 오른쪽 왼쪽도 구분하지 못하는 게 대부분 아역이었다.

그러나 이유한은 달랐다.

그는 3세에 기저귀 광고 모델을 시작으로 이미 7년 차에 진입한 어엿한 배우였다.


“그래도 모니터할래요.”

“그럼, 이리로 와봐.”


유한이 감독이 조금 전 찍은 장면을 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한 번만 더 가면 안 돼요? 대사를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 버전도 좋아.”

“눈 그치기 전에 한 번만 더 갈게요. 네?”


유한은 단순히 천재적인 아역이 아니라 나이만 어린 참 배우였다.


“그럼, 한 번만 더 가자. 지금 단체 씬 찍을 다른 아역들이 내내 기다리고 있으니까······.”

“우선, 유한이 핫팩부터 갈아주고.”


아역의 세계도 냉정했다. 하지만, 유한에게는 친절한 세상이었다.


“엄마······ 엄마에게 가야 하는데······.”


역시 유한의 연기 실력은 보통 아역이 아니다.


“분명 엄마가 날 기다리고 있겠지?”


대사가 바뀌었다.


“그럴 거야······ 그러니 나는 꼭 엄마를 찾아야 해.”


유한이 신동으로 알려진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감정에 따라 나오는 애드리브였다.


“오케이! 이거 완전 퍼펙트하네!”


감독이 신이 나서 확성기에 대고 소리를 다 질렀다.


“자, 그럼 다음 씬은 아역 단체 씬이니까 다들 준비하고.”


그 말에 끝도 없이 기다리던 아역들이 하나둘 엄마 손으로 준비하고는 카메라 앞에 섰다.


“자, 씬 넘버 57. 태욱이는 유한이랑 같이 대사 잘하고, 나머지는 울기만 해.”


드라마든 영화든 대본의 순서대로 촬영할 수는 없다. 제작 여건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즉, 이번 씬은 아까 유한이 찍은 씬의 과거 장면이 되는 것이다.


“레디, 스타트!”


감독의 말과 함께 슬레이트 치는 소리가 울렸다.

유한은 아까처럼 자연스럽게 눈발이 흩날리는 곳에 서서 다른 아역인 태욱을 바라봤다.


“난, 엄마를 찾아서 갈 거야.”


유한의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결연하게 빛났다.

그에 비교해서 상대인 태욱은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나, 나는······.”

“다시 할게요.”


태욱이 대사를 소화하지 못하자 유한이 의연하게 말했다.


“너도 너무 긴장하지 마. 그냥 내가 친구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거야.”


태욱에게 조언한 유한이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러자 촬영이 재개됐다.


“난, 엄마를 찾아서 갈 거야.”

“나, 나도······.”


목소리가 떨리긴 했지만, 아직 NG까진 아니었다.

그때 유한이 아까처럼 태욱의 눈을 봤다.

긴장이 풀렸는지 태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같이 가.”


태욱이 무사히 대사를 끝내자, 감독이 ‘오케이’라고 외쳤다. 그러자 태욱의 엄마가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와서 고가의 패딩을 태욱에게 입혀주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유한이 수고 많았어.”

“감사합니다, 감독님.”


유한의 엄마 미희가 감독에게 인사하고는 도도하게 다른 아역들의 엄마를 지나쳐갔다.

천재 아역의 엄마라는 타이틀에 흠뻑 취한 모습이었다.


“자, 가자. 유한아.”


미희가 유한의 팔을 잡아끌려고 할 때 태욱이 다가와 작은 초콜릿을 건넸다.


“아까······ 고마웠어.”

“별거 아냐. 너무 긴장하지 마.”


유한은 초콜릿을 받아 들고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차로 향했다.

시각은 벌써 저녁 9시였지만, 지금부터 CF 촬영이 있었다.


“가는 길에 먹어.”


미희가 평소대로 김밥을 건네자 유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집안의 어린 가장이 되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다른 아역들이랑 어울리지 마. 수준 떨어지잖니.”


유한은 어릴 때 귀여운 어린이 대회에서 우승했고 그때 소속사 사장인 한성철의 눈에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CF를 찍으며 연예계에 데뷔해서 지금까지 온 것이다.

아역으로서 이유한의 위치는 그야말로 독보적이었다.

모든 매스컴이나 유한과 일해본 감독들은 입을 모아 유한이 한국의 배우계에 큰 획을 그을 거라고 예측했다.


“넌, 하던 대로만 하면 돼.”


늘 똑같은 미희의 말에 김밥을 먹으며 유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19년이 지났다.

이유한은 29세가 되어 남자 배우의 전성기를 맞이할 때가 되었다.

훤칠한 키에 아역 때의 올망졸망함은 어디로 가고 수려한 얼굴을 갖춘 유한은 어딜 가나 환영받는 배우였다.


“아유, 우리 유한이 왔어? 이렇게 일찍 올 필요 없다고 했는데······.”

“세트 분위기나 읽으려고요.”

“온 김에 바로 시작할까?”

“그래도 되고요.”


이제 유한을 둘러싼 스탭들은 고작 몇십 명이 아니었다.


“왜 그랬을까, 이해가 안 가.”


유한이 독백을 소화하고 있었다.


“아니, 내 여자가 되라는데 고민할 여지가 있나?”


순수하게 오만한 대사를 소화하는 능력도 발군이었다.


“참······ 이해가 안 가는 여자란 말이야.”


그때 감독이 오케이를 외쳤다.


“유한이는 캐릭터 장악이 뛰어나다니까.”

“다들 하는 건데요 뭐.”


유한이 싱긋 웃자, 촬영장의 분위기가 화사해졌다.


“그래, 다들 하는 거긴 하지.”


조명 때문에 얼굴이 뜨거웠다.


“그런데 유한아.”

“네?”

“너는 왜 다들 하는 걸 못 하냐.”


순간, 유한이 몸을 벌컥 일으키며 잠에서 깨어났다.


“헉······ 헉······.”


조명의 열기라고 생각했던 건 에어컨도 없는 원룸 탓이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깨어난 유한은 제 스마트 폰을 보며 현실을 깨우쳤다.


[지난번 오디션 떨어졌다. 아깝게 됐으니, 사장님이 다음 주 오디션 2개 필참이라 하셨어.]


아깝긴.

유한은 오디션에서 제 실력의 백 분의 일도 보여주지 못했다.

긴장해서? 10살 때도 그리 태연했는데 말이 되질 않는다.

천재 아역 배우였던 이유한이 막상 전성기를 맞아야 할 29세에 이런 원룸에 처박혀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밑도 끝도 모르는 슬럼프였다.

정확히는 그 스스로가 만든 슬럼프였다.

유한은 스물이 되자마자 어머니 미희의 손에 이끌려 기획사를 옮겼다. 유한을 그리도 잘 보살펴줬던 한 엔터를 계약금에 배신한 것이다.

미희는 새로운 회사에서 엄청난 계약금을 받고 유한을 팔아치웠다. 그러고는 유한의 모든 걸 회사에 맡겨버렸다.

그때부터였나.

유한은 카메라 앞에서 울고 웃는 자신에게 환멸이 들었다.

그가 마음에도 없는 작품의 역할이 되어 연기하는 동안, 모든 돈은 미희에게 갔고 정작 유한은 청춘만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사람이 받는 꼴이었다.

그리고 그때, 유한은 결심했다.

더는 재주나 넘는 곰이 되지 않겠다고.


‘커트! 유한이 오늘 왜 그래?’

‘죄송합니다.’


시작은 작은 반항이었다.

미희가 계약 연장을 하며 또 계약금을 챙겨갔다는 소식을 들은 날, 유한은 촬영장에서 그 어떤 의지도 느낄 수 없었다.


‘지금 이번이 몇 번째야? 이 간단한 장면에서 NG가······.’

‘이유한! 제대로 안 할래?’

‘이런 식으로는 촬영 못해.’

‘너 원래 잘했잖아. 그대로만 하면 된다니까?’


그때 슬럼프라는 단어가 나타났다.

간혹 천재 아역들이 성인역으로 전환하는 데 실패하고 슬럼프에 빠지는 일이 종종 있는데 유한이 바로 그런 케이스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었다.


‘그래. 나는 천재 아역에서 퇴물이 된 배우가 되는 거야.’


유한은 그때부터 천재 아역에서 퇴물 배우가 된 ‘역할’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잘하는 건 어려워도 잘할 수 있는 걸 못하는 건 너무도 쉬웠기에 유한의 슬럼프는 길고도 깊었다.

그리고 그 연기는 어머니인 미희마저 속여 넘길 정도였다.


‘너,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곧 계약금 다시 협상하는 거 모르니?’

‘슬럼프가 온 것 같아요. 좀 쉬고 싶어요.’

‘그런 계약이 아니잖아! 위약금은 뭐 어디 땅 파서 주는 거야?’


유한의 계산대로라면 미희가 가져간 돈의 액수는 꽤 됐다. 문제는 미희가 도박에 빠져있다는 거였다. 도박에 빠진 사람은 밑빠진 독과 같아서 아무리 물을 부어도 독을 채울 수 없는 법이다.

유감스럽지만, 미희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어차피 도박판에서 탕진할 돈이라면 굳이 카메라 앞에서 다른 사람이 되어가며 벌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미희는 유한의 슬럼프 연기에 방점을 찍었다. 그때 이미 유한의 마음속은 회색 안개 같은 것이 가득 찬 후였다.


‘이게 내 재능의 한계였나 보지.’

‘유한아, 잘 생각해.’

‘아역이야 조금만 영리하면 되지만, 배우는 달라. 난 그냥 좀 영리했던 아역이었어.’


그러니까, 더 내게 기대하거나 짐을 주지 마.

유한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미희는 가치가 없어진 유한을 다시 찾지 않았다.

그래도 유한의 연기는 멈추지 않았다.


-뭐라고 하나······ 이유한 씨는 좀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이야.

-몸은 자랐는데 연기력은 아역의 틀에 갇혀 있는 것 같아.

-최근에 선호하는 비주얼이 아냐.


그의 퇴물 연기는 업계의 의견을 통째로 바꿔 놓았다.

그 후 유한은 소속사 사장이 물어다 주는 작품에만 간신히 출연했다.

대부분 아침 드라마의 순애보를 가진 남자 주인공 역할이었는데 정통 멜로 시장이 줄어들면서 작품 수도 하나둘 줄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자, 유한은 철 지난 멜로에나 출연해서 이미지를 다 소비한 옛날의 천재 아역이 되어 있었다.


“빌어먹을 꿈자리는 사나워서······.”


유한이 적적함에 TV를 켰다.

그러자 누구를 놀리기라도 하듯 멋들어진 커피 CF에 출연한 신태욱의 모습이 보였다.


‘커피, 그 이상의 커피를 만나다.’


대사는 물론이고 비주얼도 요즘 트렌드에 맞는 태욱의 모습이 마치 그림같이 완벽했다.

열등감? 내가 저 자리에 있어야 했다는 생각?

그런 건 이미 백만 번도 넘게 했다.

하지만 그거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어쨌거나 퇴물 배우가 되기로 한 건 유한의 선택이었으니까.

다만 괴로웠던 건, 회사에선 유한의 계약금을 다 받아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어떤 작품이든 돈만 주면 유한을 내돌렸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온 업계에서 이유한이 퇴물이 되었다는 게 정설이 되었다.


“오늘도 날렸구나.”


유한이 텅 빈 스마트 폰의 메시지 함을 보며 말했다.

이젠 이유한이란 배우를 찾는 사람이 없었다.

29세, 남배우로선 한참 전성기를 달릴 시기인데도 말이다.

그때 유한의 스마트폰에 어쩐 일로 메시지가 떴다.


[저번에 조연 오디션 친 거 붙었으니까 촬영 준비해.]


그 말에 유한은 입이 썼다.

그 작품은 주시현이 주연으로 나오고 인기 작가와 감독이 손을 잡은 기대작이었다.

거기에서 유한의 역할은 그저 앞집에 살며 대사 두어 마디가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 아역 시절의 이름이 있어서 ‘특별 출연’이라는 말이 붙은 채였다.

그래. 어찌 보면 아역 시절과 운명이 바뀐 셈이었다.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유한이 능숙하게 몇 가지 짐을 챙겨 가방에 넣고 어디론가 향했다.

그가 간 곳은 수도권의 한 요양 병원이었다. 이미 오래전 미희와 이혼한 아버지가 항암 치료를 위해서 머무는 곳이었다.


“아들, 바쁜데 뭘 또 왔어.”


유한은 늘 유쾌하고 자상했던 아버지가 좋았다. 미희가 유한을 아역 배우로 내돌리며 돈을 벌 때도 유일하게 유한을 위해 반대해 준 사람이기도 했다.

결국, 그것 때문에 싸움이 잦아져서 이혼하고 말았지만.


“괜찮아. 아빠, 몸은 좀 어때?”

“이번에는 저번보다 훨씬 낫다.”


유한의 아버지 준혁은 얼마 전 대장암 1기 판정을 받고 수술했다. 의사는 1기에 알아낸 경우가 드물다며 운이 좋다고 했지만, 혹시나 재발을 막기 위해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


“그래, 요즘 일은 잘 되고?”

“그냥 똑같지, 뭐.”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으니 TV 보는 게 유일한 낙이더라.”


그 말에 유한이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여기 영감님들한테 우리 아들이 엄청 잘 나갔던 배우라고 했는데······ 싸인이라도 해주고 가시죠, 배우님.”

“아니야. 아빠는 언제 얘기를······ 그리고 아빠는 나 연기하는 거 싫어했잖아.”

“누가 그래?”


엄마가.

유한은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어린 네가 추운 밤에도 고생하는 게 싫었을 뿐이야.”


확실히 아역 시절은 고됐다.


“이제는 우리 아들 다 컸으니, 다시 TV에서 보고 싶네.”


준혁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다시 TV에 나오면, 좋을 것 같아?”

“그럼. 여기 영감님들한테 자랑도 하고 우리 아들 얼굴도 매일 보고.”


순간 유한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치솟는 게 느껴졌다. 괜히 눈시울도 시큰해지는 것 같았다.

지금 준혁의 눈에는 유한이 긴 슬럼프에 빠져 방황하는 어린 자식으로 보일 것이다.

안 그래도 암을 앓고 있는 준혁에게 그런 걱정까지 끼칠 수는 없었다.


“아빠.”

“응?”

“나, 곧 TV 나올 거야. 조금만 기다려.”

“정말이야?”

“그럼.”


유한이 자신 있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제 퇴물 배우란 역할을 끝내기로.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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