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물 배우가 연기력을 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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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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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1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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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1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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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의 끝, 연기의 시작(2)

DUMMY


다음 날.

유한은 왠지 홀가분한 기분으로 대본을 펼쳤다.

이제 퇴물 배우를 연기하는 걸 멈추기로 했으니, 진짜 실력을 보여줄 때였다.

그리고 지금 놓인 기회는 바로 스타 작가 정해란의 ‘러브 다이어리’였다. 작품은 스타 작가와 감독의 만남으로 이미 최고 시청률을 찍고 연이어 화제가 되고 있었다.

역시 최근 가장 기대작이니만큼, 대본 자체는 무척 훌륭했다.

문제는 그래도 특별 출연이라는 제 대사가 서너 마디에 불과하다는 것뿐.


“다 읽었다.”


대본이 재미있어 읽다 보니 벌써 마지막 장이었다. 시간은 고작 20분밖에 흐르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작품의 주연은 어떤 기분일까?”


유한은 아역 시절 이후 주연을 맡아본 적이 없었다.

만일 이게 유한의 역할이었다면 아버지는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그러자 문득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갔던 첫 촬영장이 떠올랐다.

너무 일찍 어른들의 세계에 입문한 게 힘들긴 했지만, 뜨거운 조명과 현장의 열기는 어린 유한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


“고작 대사 세 마디인 내 눈에도 정말 탐나는 대본이야.”


한때 유한은 천재 아역으로 불리며 온갖 광고와 영화, 드라마에 출연했다. 하지만 영광은 아역 시절에 멈췄고 유한의 성장은 그대로 끝난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렇게 보이게끔 연기했다.


“뭐······ 세 마디라도 있다는 게 어디야.”


유한은 밖에선 퇴물 행세를 했지만, 여전히 연기에 대한 열정만은 놓을 수가 없었다.

혼자 있는 시간에는 다른 배우의 역할을 연습해 보곤 할 정도였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제 대사가 고작 세 마디라도 그는 다시 대본을 펼쳤다.


[S#1. 별이 가득한 하늘 / 밤]


그의 눈동자가 다시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아까는 전반적인 재미를 봤다면 지금은 남자 주인공의 서사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확실히 작가 구력이 장난이 아냐.”


이번 작품은 스타 작가와 감독, 그리고 요새 한창 잘 나가는 배우 주시현의 만남으로 화제가 되고 있었다. 과연, 2번을 봐도 질리지 않았다.

아니, 질리기는커녕 대본의 행간이 품고 있는 의미까지 흠뻑 음미할 수 있었다.


[S#1. 별이 가득한 하늘 / 밤]

[찬혁 (E) 그날 밤엔 유성우가 내렸다.]


유한의 시선이 한 군데 멈췄다. 주시현이 맡은 찬혁의 독백이었다.

비록 현실은 세 마디짜리 조연이었지만, 지금 대본을 읽는 유한의 마음은 주인공 찬혁과 같았다.


“그래서 첫 씬이 밤하늘이었던 거였어······.”


왠지 오늘은 기분이 이상했다.

똑같은 대본을 읽어도 집중력이 어마어마하게 올라간 기분이 들었고 대본 사이사이의 행간마저 눈에 쏙쏙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오죽하면 행간에 담긴 의미조차 하나하나 실감 나게 다가와서 마치 제가 정말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유한이 퇴물 연기를 시작한 게 9년 전이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아빠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은 정말 몰랐는데.”




그리 생각하니 그간의 슬럼프가 끝난 것처럼 후련했고 무척 오랜만에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어차피 내일 해봐야 알겠지.”


내일, 세 마디짜리 촬영이 있었다. 유한은 자신이 퇴물이라 불리는 것이 철저한 연기라는 걸 믿었다. 하지만, 너무도 오래 연기했던 퇴물 배우 역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아니.”


그건 연기였다.

누구보다 유한이 가장 잘 아는 일이다.


“내 연기력은 달라지지 않았어.”


29세에 벌써 퇴물 소리를 듣는 건 이제 지긋지긋했다.

한때 유한은 반드시 멋들어진 배우가 되어 별이 되고 싶었다.

아니, 구체적으로는 칸의 레드 카펫을 밟고 싶었다. 어릴 적엔 그 꿈이 비현실적이었지만, 한류가 세계를 휩쓸고 있는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고작 세 살부터 온 인생을 연기에 바쳐왔으니 그 레드 카펫을 밟으며 제 인생이 옳았노라고 인정받고 싶었다.

그것만이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유일한 길이었다. 그걸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미칠 듯이 뛰어왔던가.

그러나 미희가 이끌고 간 길은 유한이 가지 말아야 하는 길이었다. 오죽하면 그리 열정을 쏟아붓던 연기를 내려놓고 퇴물 연기를 했을까.

하지만 그런 유한에게 퇴물 연기를 그만둬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다.

바로 유한이 그동안 돌아보지 못했던 아버지였다.



“노력에 대가가 따르기만 한다면······ 나는 할 수 있어.”


이번엔 미희의 도박 자금이 아니라 퇴물 배우란 역할을 끝내기 위해서 연기해야 했다.

어찌 보면 오랜 세월 함께한 퇴물 배우란 역할과 드디어 이별하는 셈이었다.


“다시 돌아간다라······.”


유한이 대본으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연출을 상상해 가며 읽어볼 생각이었다.

고작 대사 몇 마디짜리 ‘특별 출연’ 아니··· 실상은 단역이나 마찬가지라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노력해 볼 가치는 있었다.


“혹시 모르니, 한 번만 더 읽어볼까.”


유한이 소파에 누운 채 대본을 들었다.

그리고 엄청나게 강해진 집중력은 그를 깊은 잠으로 빠져들게 했다.


-지잉, 지잉.


그때 유한의 알람이 울렸다. 12시간이나 기절한 탓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특별 출연’이란 이름의 단역 알바를 나갈 때였다.


“안녕하십니까.”


현장에 도착한 유한이 여기저기 인사를 했지만, 장비를 세팅하느라 분주한 스태프들은 인사도 제대로 받아주지 않았다.

감독은 이미 주연인 주시현과 시시덕거리며 웃고 있었다.

지금 저 자리에 주시현이 아닌 유한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내가 출연하는 씬은 1컷. 대사는 세 마디였지.’


어제 기절할 때까지 대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었더니 자꾸 자신이 주인공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현장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십여 명이 주시현을 둘러싸고 점검을 마치자, 감독이 메가폰을 들었다.


“원, 투 쓰리, 슛!”


드디어 촬영이 시작됐다.

오늘치 촬영분은 주시현과 여주인공이 드디어 마음을 확인하고 본격적인 러브신에 들어가기 위한 좌충우돌을 그리고 있었다.


“오케이, 커트! 바로 다음 씬 준비해!”


다행히 오늘은 유한이 찍는 장면이 먼저였다.

그게 아니라면 현장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유한의 역할은 주인공들이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생뚱맞게 끼어드는 옆집 사람이었다.

그는 일부러 입고 왔던 후줄근한 옷을 그대로 입고 세트장의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주시현이 발간 얼굴로 나와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 옆집인데······ 죄송하지만, 설탕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이게 유한이 가진 대사의 전부였다.

평소라면 현장에 도착해서 읽어보고 바로 들어가도 되는 씬이다.

하지만, 유한은 왠지 신비로웠던 꿈 때문에 대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그 덕분인지 지금 자신이 역할이 정확히 무엇인지 1미리의 오차도 없이 잘 알 수 있었다.


“컷! 시현이 왜 대사 안 해?”


감독의 외침에 유한은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대사를 놓친 건 자신이 아니라 시현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다시 갈게요.”


시현이 인사하고 다시 슛이 떨어졌다.

혹시, 여기서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저, 옆집인데······ 죄송하지만, 설탕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유한이 물끄러미 시현을 바라봤다. 온 연기력을 다 쏟아부은 1초였다.


“서, 설탕이요? 잠, 잠시만······.”


주연인 시현이 말을 더듬자 바로 커트 소리가 날아들었다.


“죄송합니다.”


감독도 스탭들도 다 이상하단 눈치였지만, 어찌 됐든 촬영은 계속되어야 했다.


“잠깐 쉬었다 가지.”


이런 간단한 씬에서 두 번이나 실수를 저지를 시현이 아니었다.

감독은 다른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잠시 휴식을 선포했다.


“왜, 오늘 컨디션 안 좋아?”

“아닙니다. 그냥······ 러브 씬 중간에 끊기는 장면이라 좀······.”


시현이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진짜 이웃이 찾아온 거 같기도 해서 좀 당황스럽기도 했고······ 뭐지? 갑자기 제 머릿속이 확 하얘지는 거 같아서.”


그 말에 감독의 시선이 유한을 향했다.

단 세 마디, 하찮은 대사였으나 시현의 말처럼 정말 현실에서 튀어나온 인물 그 자체였다.

이른바 씬 스틸러라는 것이다.


“거기, 이리 좀 와봐.”


감독에게 부름을 받는 게 얼마 만일까.

유한은 떨리는 마음으로 감독 앞에 섰다.

괜히 주연의 컨디션을 망쳤다고 쫓겨나도 할 말은 없었다.


“뭐야, 세 마디 대사에 영혼이라도 갈았어?”


그 비슷한 건 갈아 넣은 것 같았다. 그마저도 아주 손쉽게.


“저······ 감독님. 제게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유한이 용기를 내서 말을 꺼냈다.

그러자 스태프들의 차가운 시선이 바로 유한을 향했다.


‘뭐라는 거야, 퇴물 주제에.’


이유한이 주연을 맡은 지가 도대체 언제 적이던가.

그러니 지금 이렇게 말로만 특별 출연이지 세 마디짜리 단역이 된 거다.

그런 놈이 감히 감독에게 아이디어? 무슨 약이라도 빨지 않고서는 할 말이 아니었다.


“감독님, 시간이 없으니까 어서 슛 들어가시죠.”


조감독이 유한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 감독을 재촉했다.

한물간, 아니 이미 너무도 퇴물이 되어버린 배우의 아이디어 따윈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뜻이었다.

나머지 스태프들도 침묵으로 그 뜻에 동의했다.

그러나 감독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막 방송국에 입사했을 때 한창 아역으로 빛나던 유한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그 재능은 진짜였는데 왜 이유한이 여기까지 추락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말이라도 들어보지. 뭔데, 그래?”


감독의 말에 유한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최악의 경우 여기서 잘릴 수도 있지만, 어차피 세 마디짜리 단역이 아닌가.


“대본상, 주인공들이 집에서 러브씬을 나누다가 제 등장으로 방해를 받게 된 건데 솔직히 요즘 이웃한테 뭘 빌리는 것도 어색하고 차라리 제가 불이 났다고 소리라도 지르는 게 어떨까요?”


감히 세 마디짜리 조연이 대본을 바꾸자고 하고 있었다.


“어차피 제 역할의 목적은 주인공들이 본격적 러브씬에 들어가기 전에 훼방을 놓는 거잖아요.”


평소 같으면 감히 단역 주제의 조언에 쌍욕을 퍼부었겠지만, 오늘은 운이 좋게도 유한이 아역 시절 촬영 감독이었던 사람이 총 감독이었다.

즉, 유한의 리즈 시절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면 주시현 씨는 안 나와도 되니 러브씬이 끊기는 감정선만 유지하면 되고 저는 불이 났다고 문만 두드리고 퇴장하면 될 거 같아서요.”


발칙하지만,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특히 이번 회차를 전반적으로 봤을 때 포인트가 부족했는데 화재 에피소드를 더하면 생동감이 살아날 것 같았다.


“자신 있어?”

“네, 저 자신 있습니다.”


늘 처진 어깨로 촬영장을 다니던 유한이 어쩐 일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감독은 그 눈빛에 한 씬을 걸어보고 싶었다.


“그럼, 애드리브로 해봐. 시현이는 여기서 나랑 모니터하고.”

“예!”


유한이 씩씩하게 답하고 다시 세트에 섰다.

지금 모든 조명과 장비는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마치, 과거처럼 말이다.

그럼, 중요한 건 지금부터였다. 아파트의 어느 집에서 불이 났다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

유한은 미리 신발을 벗고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준비됐습니다.”

“그럼, 슛!”


탈칵, 슬레이트 소리가 나기 무섭게 유한이 맨발로 앞집에 가서 문을 쿵쿵 두드렸다.


“불이요! 불났어요!”


본래 역할은 여기서 끝이어야 했다.

하지만 유한은 팔꿈치를 접고 그 안에 코와 입을 파묻은 채 어리바리 낮은 자세로 엉거주춤 계단으로 내려갔다.

순간, 그 자리의 모든 스태프들은 진짜 어디선가 연기라도 나는 것처럼 불안하게 주위를 살폈다.

분명 세트장은 아무 일도 없는데 어디선가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불에 탄내가 나는 것 같았다.

유한이 더 내려갈 계단 세트가 없어서 멈췄지만, 감독은 카메라 대신 유한의 모습을 맨눈으로 보면서 컷 사인을 외치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커, 컷!”


감독이 뒤늦게 컷을 외쳤다.

그러자 스태프들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한심함이 담긴 한숨이 아니라 막 화재 현장에서 벗어난 것과 같은 안도의 한숨이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유한은 맨몸에 연기력 하나로 특수 효과도 없이 현장 전체에 화재가 난 것처럼 모두의 숨을 틀어막히게 했다.

이건 그저 아역 때나 반짝 빛났지, 완전 퇴물이 된 배우에게서 나올 연기가 아니었다.


“오케이! 잘했어!”


감독이 뒤늦게 칭찬했다.

현장에서 연기로 칭찬받은 게 얼마 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와······ 경력자는 경력자네요.”


아까 유한의 말을 들을 것도 없다고 잘랐던 조감독마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스태프들은 아직도 입을 반쯤 벌린 채로 유한을 보고 있었다.

놀라운 건 주연인 주시혁까지 입을 반쯤 헤- 벌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같은 배우이기에, 지금 유한이 해낸 맨몸 연기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 수 있었다.

휴우, 걱정과 달리 호의적인 현장 분위기에 유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한이 아직 안 죽었네.”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뛰었다.

무심한 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유한은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계속 끝나지 않는 터널 속에서 서 있던 기분이었는데 멀리서나마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설마 대본을 다 본 거냐?”

“예.”


고작 세 마디짜리 단역이다.

그런데 이 정도로 작품에 대해 이해가 깊다면 대본을 한 두 번 본 정도가 아니었다.


“저도 괜찮던데요.”


감독 뒤에서 30대 여자가 나와서 도도하게 말했다.

유한은 뒤늦게 그녀가 이 작품의 작가 정해란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꾸벅 폴더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저······ 멋대로 대본을 바꿔서 정말 죄송······.”

“아뇨, 뭐 현장에 따라 바뀔 수도 있는 거니까.”


뿔테 안경을 쓴 정해란이 보조 작가 두어 명과 무어라 두런거렸다.


“지금 주인공들이 러브씬만 가지려고 하면 방해가 나온다는 설정인데, 우연이 계속 겹치면 또 이상하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차라리 앞집 남자 혼자서 꾸준히 빌런이 되는 건 어떨까요?”


확실히 주인공들이 사랑만 하려고 하면 무슨 사소한 일이 터져서 아쉽게 끊기곤 했다.

이 작가의 유명한 절단 신공인데, 대본에서도 갖가지 방해가 나오곤 했다.

하지만 고작 세 마디짜리 단역이었던 유한의 연기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일까.


“제가 고정 빌런이 된다고요?”


매번 주인공 커플을 방해하는 역할은 비중이 적다고 해도 임팩트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아예 앞집 남자를 빌런으로 만들고 오늘처럼 불이 났다거나 지진이 났다거나 외계인이 쳐들어왔다거나······ 뭐 그런 식으로 일관적인 방해를 하는 거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유한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리고 조금 전, 무언가를 해냈다는 생각에 그만 말이 먼저 나오고 말았다.


“저, 또 아이디어가 있는데요.”


정해란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한을 향한 시선들이 조금 달랐다. 방금 보여준 연기 덕분이리라.


“만일 옆집 남자가 정신에 약간 문제가 있거나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면 꼭 불이 진짜로 나거나 연기가 있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유한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러브 씬을 잘라먹는 방해꾼이었다.

그러니 그들을 방해만 하면 되지, 모든 게 진짜일 필요는 없었다.


“오······ 그거 괜찮은데요? 앞으로 이런 에피소드 뽑을 때 종종 사용해도 되고.”


스타 작가 정해란의 긍정에 유한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본을 열심히 보셨나 봐요.”

“아, 예······ 너무 재밌어서 몇 번이나 몰입해서 봤더니······.”


유한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긁으며 말했다.

그러자 작가는 싱긋 웃더니 보조 작가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감독은 그들을 따라갔다가 금세 자리로 돌아와 유한을 찾아왔다.


“이유한, 오늘 좀 치는데?”

“네?”

“정해란 작가가 널 고정 역할로 쓰겠대.”


설마했던 예감이 맞았다.


“그럼, 저 또 나올 수 있는 겁니까?”

“그래. 저 작가 특기가 절단 신공인데, 마침 네 역할이 쓰기 편했나 봐.”


확실히 매번 러브 씬을 끊어놓을 변명을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건 대본을 너덜너덜하게 만들면서 유한도 느낀 점이었다.

하지만 빌런을 한 명으로 만들면 그런 수고가 줄어들면서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제법이다.”


감독이 유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들 네가 감이 떨어졌다고 하는데, 오늘 보니 확실히 아니네. 이유한이 아직 살아 있어.”


그 말을 얼마나 듣고 싶었던가.

유한이 여태 지나오던 터널 속에선 이런 격려의 한마디조차 없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유한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다음 날, 유한은 새로운 대본을 받아볼 수 있었다.

‘옆집 남자’가 아닌 ‘홍두깨’라는 이름이 새로 붙은 대본이었다.

그리고 홍두깨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곳엔 볼펜으로 메모가 있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 느낌으로.’


이건 작가의 코멘트였다.

유한은 단 세 마디짜리 조연에서 이름이 생기고 작가의 관심까지 얻게 된 것이다.


“이제 퇴물과는 멀어져야겠네.”


비록, 아주 작은 진전이었으나 퇴물 배우란 이름에서 탈출하는 첫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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