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든 오브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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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모쿠
작품등록일 :
2016.02.07 07:09
최근연재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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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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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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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글자수 :
25,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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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15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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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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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글자
11쪽

강철정원

인생에는 오직 두 가지의 비극이 있다. 첫째는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고, 둘째는 바라는 것을 얻는 것이다. _오스카 와일드




DUMMY

저런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방법이 있었을까. 자신 없는 일이다.


곁에 두고 볼 수 없음이 상처가 되는 사랑을 노래하던 자들이 있었다. 고작 그런 것을 상처라 하다니, 너무나 알량해서 하품이 나오는 노래들이었지.


매일 보고 있음이, 눈앞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일상이 나를 상처 입혀왔다. 고개만 돌려도 얼굴이 스칠 정도로 가까이, 대수롭지 않게 손과 마음이 가 닿는 곳에 있음에도 사랑해선 안 되는 사람이 있었다.


어째서 너는 내게 타인이 될 수 없는가.


이런 사랑은 불공평해. 죽고 싶어질 만큼 불공평하다. 차라리 멀었으면 했다. 내게서 아니, 이 삶에서.


보고 싶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누가 알려줬으면 좋겠는데. 이제부터 내가 네 얼굴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사랑에 긁힌 뺨이 아리고 슬펐다. 잠으로는 그 오랜 슬픔을 지울 수 없었다. 단지 멈춰 세울 수 있을 뿐이었다.


오래 잠들고 싶었다. 가능하면 영원히. 침대에 누웠지만 날은 밝았고 쉽게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달각!


옷장에 집어넣기도 귀찮아서 외투를 말아서 던져놓으려는 순간, ‘그것’이 책상에 떨어졌다. 젊은 노숙자가 건네 준 플라스틱 덩어리였다.


귓구멍에 집어넣을 수 있을 만큼 가늘고 긴, 2센티미터 정도 길이의 막대. 귀에 넣고 잠을 청하라고 했던 것이 그제야 기억났다.


무슨 조용하고 따분한 음악이라도 나오게 돼 있는 모양이지, 라고 생각은 했지만 큰 기대는 안 했다. 노숙자가 건네준 물건이다. 값어치가 있을 리 없지.


그러나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려니 놈의 표정과 말과 상처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큰 손해를 떠안게 되는 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뭔가를 더 잃을 수 없는 처지였으니까.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음악 같은 건 나올 기미도 없었다. 뭔가 스위치 비슷한 걸 눌러놓은 다음에 귀에 집어넣었어야 했나 싶었지만, 다시 꺼내기는 귀찮았다.


커튼을 쳤어도 아침빛은 화창해서 천장의 무늬가 가물가물해졌다. 벽지에 졸음이 덧발라지고 있었다. 잠깐 마음만 놓으면 곧바로 잠에 빠져들 것만 같은 순간, 그럼에도 신경 한 자락이 곤두서 있었다.


아마 그때까지도 내가 놈을 믿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귓속에서 삐이, 하는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이명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약한 진동이 이어졌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내 반응은 늦었다.


피식,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귓속의 공기를 쭉 빨아들이더니 플라스틱막대를 고막에 바짝 붙였다. 내가 넣은 곳보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박혔다.


누운 채로 그것을 꺼내려던 내 손가락은 한번 미끄러졌다. 그리고 곧바로 날카로운 이빨 여럿이 귀의 벽을 물어뜯는 듯한 통증이 왔다. 귀를 잘라내고 싶어질 정도의 통증이어서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아무래도 그 작은 돌기들에는 바늘이 숨겨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뒤늦게 손가락으로 막대를 잡았지만 이미 단단히 박혀서 빠지지 않았다. 잡아당길수록 생살을 낚싯바늘로 꿰어 뜯어내는 느낌이었다.


두려움에 소리를 질러 도움을 청하려는 나와, 밖에 있는 누나에게는 절대로 알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내가 충돌했다. 그리고 그 몇 초의 망설임이 이후의 내 삶과 꿈을 결정지어버렸다.


윙, 위잉, 하는 소리가 울렸다. 마치 살아있는 벌레처럼, 주삿바늘 같은 이빨로 내 귓속 이곳저곳을 헤집고 있었다.


-그 미친 새끼가...! 이게 대체 뭐ㅎ...


손끝에서 힘이 쪽 빠져나갔다. 이어 흡혈귀에 물어뜯기는 희생양이라도 된 듯 온몸이 순식간에 나른해졌다.


만일 어릴 적에 큰 수술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면 그 상태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를 두고 난감해했을 것이다.


전신마취였다.


지르르르, 하는 기계음을 끝까지 듣지도 못한 채 나는 의식을 잃었다. 곧장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



정신을 차린 것은 꿈속이었다. 꿈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꿈, 그러니까 루시드 드림Lucid Dream이라고도 불리는 꿈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둥둥 떠 있었다.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은 물론, 내가 마취당했었다는 기억까지도 가진 채였다.


내가 속해 있는 공간은 모든 방향을 향해 막힘없이 열려 있었다. 아니, 어쩌면 공간이라는 것조차 없었는지 모른다. 하늘도 땅도 경계도 기둥도 벽도 색채도 명암도 없는, 어느 구석에든 도무지 뭔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 공간.


혼돈인 것 같으나 혼란스럽지 않고, 질서처럼 고요하나 내용이 없었던 그 공간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 전신마취와는 달리, 그것은 내가 겪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공중인지 지하인지 아니면 물속인지 가늠할 수 없는 곳에 떨어진 내게로 당혹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그 당혹은 새로운 당혹으로 지워졌다.


눈앞에 글자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단지 하얀 글자만이 떠올라 앞을 가렸다.



프로그램에 접속하시겠습니까?

YES/NO



글자는 큰 것 같기도 했고, 작은 것 같기도 했다. 먼 것 같기도 했고, 가까운 것 같기도 했다. 어떤 공간적 잣대도 들이댈 수 없는 글자들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한글로 돼있다는 것이 다만 신기했다.


모든 방향은 고요했다. 그대로 놔두면 아무 일 없이 잠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무슨 프로그램인지 안내받은 적이 없는 나로서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노숙자가 던져준 플라스틱 막대를 귀에 넣고 잠들었을 뿐이었다.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밑도 끝도 없이 동의하느냐는 말에 순순히 YES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더군다나 악몽인지 뭔지도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만일 YES라는 대답 뒤에 어마어마한 불행이 기다리고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꿈속의 불행이라 해도 꺼림칙했다. 그러나 NO를 누르려고 보니 숙면에 도움이 될 것이라던 노숙자 녀석의 말이 떠올랐다.


불안한 미지와 안전한 복귀. 그러나 현실은 뒤틀려 망가져 버렸고, 모든 것이 꿈이라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다. 그렇다면 불안한 미지가 아니라 이미 안전이 보장된 미지나 다름없다. 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현실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하다못해 인터넷쇼핑을 하려고 해도 수많은 약관들에 동의해야 하는 세상이다.


나는 YES에 손을 가져갔다. 손이 닿는 곳에서 물방울이 떨어질 때 같은 파문이 일었다. 질문은 사라졌다. 나는 무슨 일이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에 오감을 곤두세웠다.


예상과는 달리 아무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눈앞에 다시 글자가 나타났다.



실험계획에 동의하십니까?

YES/NO



이번에는 조금 더 빨랐다. YES.


파문이 사라지자마자 공간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힘의 파장이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던 무無의 이곳저곳에서 빛나는 ‘실’들이 나타났다.


픽셀들과는 좀 다른, 빛이면서 동시에 질량과 실체를 가진 실들이 잠깐 사이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 실들은 서로 엉키고 뭉글거리며 덩어리지어졌다.


어느새 나는 땅에 내려서 있었고, 사방에 입체들이 자리 잡았다. 기억에 깊이 각인된 장소가 구성되어 있었다.


정원이었다. 오래 전, 이직으로 도시를 떠나게 된 아버지가 나와 누나와 함께 살던 곳. 누나와 나에게만 허락된 놀이터. 가장 사랑스러웠던 장소.


세월에 침식돼 기억은 아련하고 희미했지만, 꿈에서만큼은 또렷했다. 적어도 시각적으로는.


나도 모르게 걷기 시작했다. 아니, 찾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시절의 누나를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걸음을 뗄 때마다 잎이 넓은 식물들과 나무들이 제 온몸을 들이밀어 왔다.


정원에 잔뜩 심어져 있던 안스리움Anthurium들은 이제 머리 위까지 자라 뻗어나가 있었다. 오랜 세월, 따로 자라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트럼프의 스페이드Spade를 닮은 널따란 잎이 어디에든 펼쳐졌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깊은 실망을 느꼈다. 모든 것이 예전 같지 않았다. 아무도 없었다.


한창 젊었던 아버지도, 정원이 풀과 나무들 사이로 넘겨보던 누나도 없었다. 가족이 살던 벽돌집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색이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이 아쉬웠다.


오직 정원의 형체뿐이었다. 내가 오감으로 기억하는 것들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초록빛도, 풀벌레 소리도, 흙냄새도, 산들바람도 사라지고 없었다.


흑백으로 변한 안스리움의 잎을 만지던 손가락에서 피가 흘렀다. 그때서야 정원에 가득한 잎과 줄기가 식물이 아니라 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철로 만들어진 정원이었다. 나는 아연해졌다.


곧장 원형의 공터가 나왔다. 기억에 없는 곳이었다. 그곳에 들어서서 뒤를 돌아본 뒤에야 갇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철로 된 식물들이 나를 함정으로 몰아넣은 것 같았다.


정원은 그 공터를 둥글게 둘러쌌다. 쯧, 이래서 철조망하고 다를 것이 없잖아. 하지만 어차피 혼자였기 때문에 두려워할 만한 것은 없었다.


공터는 넓었다. 지름은 적어도 6미터 이상이었다. 땅은 울퉁불퉁했고, 크고 작은 돌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돌과 모래를 집어 살폈다. 현실과 어떤 차이도 없어 보였다. 완벽한 감촉이었다.


꿈속에서 그렇게 생생히 모래와 돌의 감촉을 느낀 적은 없었다. 또한 꿈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꿈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모든 것이 의문스러웠다. 어째서 생애 가장 좋았던 순간이 이렇게 살벌하게 변해버린 거지? 아니, 그보다 누나는 어디 있지?


의문을 느낀 순간, 세계가 내 의문에 반응했다.


공터 한복판에 얼굴 없는 사람이 나타났다. 나는 깜짝 놀랐지만, 다행히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데서 그쳤다. 신발 밑창에 바닥이 긁히는 소리가 마치 현실인 것 같아서 한 번 더 놀랐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얼굴만 없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가 보이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저 실루엣일 뿐인 형체였다. 공터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현실과 같았지만, 그 형체만은 예외였다.


그것은 그림자와도 달랐다. 거리감이라든지, 명암이라는 것을 모두 무시한 채 서 있는 사람. 전체가 한 가지 어두운 빛을 띠고는 있었지만, 그것들을 색이라고 하기는 불완전했다.


그러나 그것은 홀로그램영상 같은 것이 아니라 온전한 실체였다. 그것만큼은 의심할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낭랑한 음성이기는 했지만,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기계음 같았다. 입이 없는데 어떻게 소리를 낸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당황한 내 대답이 조금 늦었다.


-뭐야, 넌?


기다렸다는 듯이 답변이 들려왔다.


-저는 아무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아무나 다이기도 하죠.



_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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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안스리움 16.02.17 763 6 11쪽
4 03:00 16.02.15 798 5 11쪽
» 강철정원 16.02.15 863 8 11쪽
2 집으로 16.02.15 922 8 11쪽
1 터미널 16.02.15 1,235 1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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