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의 순정에 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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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결
작품등록일 :
2016.03.31 08:14
최근연재일 :
2016.04.03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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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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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31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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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 여인과 두 사내

DUMMY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엔 경황이 없어서 자세히 볼 겨를이 없었는데 눈빛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초희의 얼굴이 더 가까이 다가가는 그때, 선비가 들고 있던 서책을 뒤집으며 그녀의 앞에 내밀었다. 그대로 눈을 아래로 내리는 순간 초희의 미간이 구겨졌다. 다름 아닌 서사 주인이 자신에게 몰래 건넸던 외설이 난무한 패설잡기였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소? 이 서책의 주인이라 하지 않았소?”


“...... 도대체 저를 이리 농락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혹, 저를 만만하게 보시는 겁니까?”


“난 선비를 농락하는 것도 만만하게 보는 것 또한 추호도 없오. 난 그저......”

선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초희는 등을 보이며 걸어갔다. 그 순간 사내는 긴 팔로 초희의 팔을 낚아채며 앞으로 당겼다. 그녀의 몸은 순식간에 사내의 가슴에 닿았다. 알 수 없는 선비의 행동에 초희의 얼굴에 살짝 붉은 빗금이 그어졌다.


콩닥콩닥. 두근두근.


요란하게 요동치는 심장소리에 초희는 사내의 두 팔을 힘껏 밀어냈다.


“이게 무슨 행동입니까? 무릇 선비란 어디에서든 격식을 차려야 하는 법인데.”


여인의 입에서 선비란 말이 나오자 선비는 실소를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무례했다면 내 사과하리다. 하나, 나에게도 그럴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그만 화를 거두시오.”


그때 선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말 한 마리가 미친 듯이 날뛰며 방금 전 초희가 서있던 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하마터면 말에 깔려 죽음을 면치 못 했을 터. 이윽고 따고 닥 따고 닥. 말 굽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말은 점점 두 사람이 서 있는 옆까지 돌진 해왔다. 선비는 달려오는 말에 기지를 발휘해 잽싸게 뛰어올라 말안장에 올랐다. 한 손으로 말고삐를 부여잡고, 또 다른 손으로 말의 몸통을 어루만지며 거친 숨소리를 내뿜는 말을 진정시키며 달랬다.


“워, 워. 그래. 그래. 착하지. 워~ 워~ 이제, 안심해도 된다. 너도 많이 놀랐겠구나. 하하하. 녀석. 그래.”


말은 서서히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듯 숨소리를 작게 내기 시작했다. 발길을 멈추며 불안에 떨며 서있던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초희의 귀까지 들려왔다. 다들 선비의 행동에 감탄을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초희는 고개를 치켜세우며 말을 달래고 있던 선비에게서 눈을 떼지 못 하고 고스란히 눈동자에 담았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살짝 눈초리를 옆으로 옮겼다. 그때, 두 사람의 시선이 한대로 모아졌다.


어느덧 중천에 떠 있던 해는 조금씩 저물며 제 모습을 반쯤 숨겼다. 청량하던 하늘은 금세 붉은 석양으로 물들여지고 있었다. 초희의 얼굴 위로 따뜻한 붉은빛이 드리웠다.


“왜 그런 눈으로 빤히 쳐다보십니까?”


“누가 알면 내가 남색을 밝히는 음탕한 선비인 줄 알겠소. 나는 그저 지는 해의 석양을 감상하고 있었을 뿐이오.”


선비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곧장 뛰어내렸다. 선비의 두루마기가 공중에서 춤을 추듯 펄럭이며 부드럽게 떨어졌다.


그때, 허겁지겁 부리나케 달려오는 중년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섰다.


“아이고, 헉헉. 헉헉.”


사내는 한 쪽 손을 가슴에 갖다 대며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이 말의 주인인가 보군.”


“예. 쉰내가 살짝 한 눈 파는 사이 냅다 도망가지 뭡니까.”


“그런데 말일세. 말 몸통에 상처가 보이던데. 어떻게 된 것인가?”


사내는 변명을 늘어놓기에 여념이 없었다.


“말 잘 듣는 짐승이라 할지라도 가끔 매질을 해야 길들여지는 법이지요. 쉰내 혼자 그런 것도 아닌데. 별일 아니니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사내는 선비가 잡고 있던 말고삐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선비는 사내의 손을 뿌리쳤다. 선비는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사내의 행동에 나무라듯 다그쳤다.


“무엇이 별일 아니란 말인가? 보시오. 여기 이 상처를. 이리 학대를 하면 쓰나.”

사내는 눈을 치켜뜨고 어이 성실한 표정으로 대받아 쳤다.


“학대라니요? 그저, 조금 매질을 한 것 밖에 없습니다. 설마, 재산과 같은 말을 죽이기라도 하겠습니까?”


초희의 눈에 그것이 피라는 것을 짐작하듯 말의 몸통 중앙에 붉은 액체가 곳곳에 묻어있었다. 그간, 아팠을 말을 생각하니 측은 지심했다. 되려 그녀의 마음이 아리듯했다. 다시 선비의 말이 이어졌다.


“말 못 하는 짐승이라도 아픔을 모르는 것이 아니네. 한낱 미물에 불과한 짐승이라도 생명이 있는 한 사랑으로 보듬으며 정성껏 보살펴 주어야 하거늘. 이리 매질만 하고 살갗에 난 상처를 외면한다면 학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선비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그의 말은 전부 옳았다. 올곧은 선비의 가르침에 사내는 그만 고개를 떨구었다. 선비가 사내를 향해 나지막하게 물어왔다.


“얼마면 되겠는가?”


선비의 말에 사내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예?”


“얼마면 되겠냐고 물었네. 내게 이 녀석을 주게. 얼마든지 원하는 값을 지불해 주겠네."


사내는 속으로 '이게 웬 떡이야.' 하고 다소 밝은 표정을 내보이며 양 손바닥을 펼쳤다.


“열 손 가락이면......”


“백 냥이옵지요.”


“뭐? 뭣이? 배... 백... 냥?”


“이리 세상 물정을 몰라서야. 말 한 필에 오십 냥이일리 있겠습니까? 지나가는 개가 웃겠습니다."


“누가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것이냐? 가만. 내게 백 냥이 있었던가?”


선비는 팔 한 쪽을 들어 올리며 소맷자락 안을 살폈다. 초희는 선비의 행동에 더는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연신 팔 안쪽을 살피는 선비를 살짝 옆으로 밀치며 한 발작 사내 쪽으로 다가섰다.


“이보시오. 거 듣자 하니 누굴 바보로 아는 것이오? 말 한 필 값이 노비 세 명의 값이거늘. 보통 한 노비에 스무 냥이니. 그렇담 60냥이 아니오? 그리고 한 번 보시오.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이 늙은 말이 아니오? 그러니 50냥이 맞지 않소? 어디서 그런 터무니없는 값을 불러서 사람을 속이려 드는 것이오. 흥정을 하려거든 어느 정도 이치에 맞아야 하거늘. 어서, 받고 썩 물러가시오. 이대로 관아로 끌려가고 싶지 않으면.”


초희는 일사천리( 一瀉千里)로 상황을 순식간에 종료시켰다.

사내는 말의 고삐를 잡고 있는 선비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냉랭한 반응과 서늘한 말투뿐이었다.


“어서, 가지 않고 뭣 하시오.”


사내는 멋쩍은 듯 표정을 지으며 선비가 건네는 엽전을 받아 들고는 줄행랑을 치며 그대로 달아났다. 그 꼬락서니가 속된 말을 빌리자면 딱 고양이 앞에 쥐걸음을 하는 꼴로 달아나고 있었다. 계속해서 아니꼬운 눈으로 멀어져 가는 사내를 바라보는 초희를 선비가 곁눈질을 하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말 한필의 값을 알고 있었소. 오해하지 마시오.”

뭐라는 거야? 초희는 한심하다는 듯 표정을 내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 선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헌데 대단하오. 겉보기엔 연약해서 살짝만 밀쳐도 쓰러질 것 같아 별 도움 같은 거 못 받을 성싶었는데. 이리 도움을 받으니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오. 하하하. 아무튼 제법이구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니. 서로 통성명이나 하는 게 어떻겠소? 나는 박경이라고 하오.”


칭찬이야? 놀리는 거야? 한데. 갑자기 뜬금없이 통성명이라니. 남장을 하던 이래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이름... 이름이라. 사내다운 이름이 뭐가 있었던가? 생각지도 못 한 난관에 부딪히자 대충 둘러댈 만한 이름을 골똘히 생각했다. 초희는 메마른 입술을 살짝 깨물며 생각을 곱씹었다. 생각. 생각하자. 경은 초조해하는 초희의 모습을 보자 괜한 짓 한 것 같아 속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음,음.”


초희는 주먹 쥔 손을 입술 위에 붙이며 가다듬었다. 천천히 입술이 떨어지고 속삭이듯한 목소리가 선비의 귓가로 들려왔다.


“허 현이라 하옵니다.”


또다시 경은 웃음이 터져 나올 것 만 같아 마음속으로만 실소를 터트렸다. 그러나 얼굴엔 웃음꽃이 만발하듯 활짝 드리워졌다.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어지게 만드는 여인이었다. 이 여인을...... 보고 있으니 얼음장 같았던 그의 마음에 뜨거운 불꽃이 일었다. 이내 굉음을 내며 온 사방에 불씨가 확 붙어 활활 타올랐다. 냉골 가득한 그의 차가운 마음은 금세 따뜻한 온기로 탈바꿈 되고 있었다.


이윽고 경은 긴 팔을 말의 몸통을 짚으며 가뿐하게 말안장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살짝 몸을 아래로 숙이며 초희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내 손잡으시오.”


“...?...”


“내 집까지 바래다줄 터이니 올라타시오.”


“저는 그냥 걸어가는 것이 편합니다. 그러니 혼자 타고 가십시오.”


“날도 제법 어두워졌고 좀 전에 금방 가야 한다 하질 않았오? 냉큼 올라타시오. 걸어가는 것보다 말을 타고 가는 것이 더 빠를 터이니. 뭘 그리 꾸물대는 것이오. 사람 무안하게.”


“......”


“어서, 타래도. 어서.”


경은 계속해서 손을 거둬들이지 않고 초희를 재촉했다. 하지만.

초희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완강히 거절했다. 높은 곳이라면...... 지레 겁을 먹는 그녀였다.


“괘, 괜찮습니다. 그러니 더는 강요 마시고 먼저 가십시오. 저는 걷는 것이 더 편합니다.”


초희는 머리에 쓴 갓을 더 깊이 푹 눌러 쓰며 제 갈 길을 걸어갔다. 경은 자신의 손을 외면하며 등을 보이며 걷고 있는 초희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경은 연분홍빛 두루마기를 펄럭이며 땅 아래로 내려왔다. 발이 땅에 닿자마자 초희의 몸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말안장에 다소곳이 내려놓았다. 놀랄 겨를 틈도 없이 경은 초희의 바로 뒤에 바짝 붙어 앉았다.


콩닥콩닥. 정신없이 뛰는 심장은 서서히 제 기능을 잃어갔다. 태어나서 여태껏 한 번도 타 본적 없는 말을 방년(芳年) 열여 덜 살에 타보게 되는 날을 맛보는 초희였다. 높은 곳이라면 지레 겁을 먹고 불안에 떨던 그녀였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 이상하게도 두렵다는 생각을 전혀 느끼지 못 하는 초희였다.


이윽고 경의 양손의 말고삐가 잡혔다. 경은 말의 몸통을 발로 '툭' 살짝 건드렸다.


“이랴.”


말은 따고 닥 따고 닥 따고 닥. 말 굽는 소리를 내며 저잣거리 한복판을 달렸다.

이런... 일탈. 한 번쯤 해볼 성싶었던 때가 한두 해가 아니었다. 그게 오늘 일 줄은 생각도 못 했을 뿐이었지만.


한 사내를 만나고 그 사내로 인해 지금껏 경험해 본 적 없는 것을 하고 있었다.

초희는 지금 자신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있는 생전 처음 보는 선비에게서 좋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또 언제 어디에서 만나게 될지 기약할 수 없지만. 그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마주하고 싶었다.


한편. 경은 자신의 앞에 있는 여인이 어딘가 모르게 묘하게 끌렸다. 어쩌면 자신의 운명의 정인(情人) 일 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설령, 운명이 아닐지라도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이 여인이라면...... 어쩌면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감싸 안아 줄성싶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자신의 또 다른 내면을 조금 전 바라보던 그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봐 줄 것이라고.

*

까만 밤이 드리워지자 밝은 달이 어둠 속을 비추어 세상의 등불이 되어주고 있었다. 깊은 밤 고요 속에서 말발굽 소리만이 울려퍼쳤다. 두 사람은 목적지까지 오는 동안 아무런 담소도 나누지 않았다. 초희는 평소 집에 도착하는 시각보다 이 이각이나 빨리 도착하자 그제야 마음을 내려놓았다. 제 집으로 오는 동안 어머니께 꾸중을 듣지는 않을까 별의별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리 일찍 도착할 줄 알았더라면 마음 편히 왔을 터인데. 괜한 걱정을 해서 여태껏 불안에 떨었다. 초희는 걱정 어린 마음을 전부 내려놓으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차가운 공기가 초희의 코끝에 살며시 닿았다.


경은 말의 고삐를 앞으로 끌어당기며 대문 앞에 멈춰 세웠다. 말은 주인의 행동에 금세 따르듯 그 자리에 곧바로 멈췄다. 경은 가볍게 뛰어내리며 땅 밑으로 발을 내려놓았다. 발이 땅에 닿자 두 팔을 높이 들어 올리며 떨어지는 초희의 몸을 잡고서는 바닥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예까지 바래다주셔서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선비님 말마따나 평소 걸음 보다 한참을 빨리 도착했습니다. 말을 타고 오기 잘 한 것 같습니다.”


“우리 사이에 감사 인사는 생략해도 무방하오.”


“가까운 사이일수록 감사를 표해야 하지요. 그게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맞소. 선비 말이 백번 옳소. 흠, 그건 그렇고 언제 약주나 한 잔 기울이는 게 어떻겠소.”


선비의 입에서 약주라는 말이 나오자 초희의 가슴이 파도를 치듯 철렁거렸다. 하아, 초희는 들릴 듯 말 듯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몸이 평소 좋질 않아서 약 주는 힘들 것 같으니. 차 한잔 기울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직 술을 입에 대본 적도 본 적도 없으니 할 수 없이 거짓말로 얼버무려야 했다. 뭐, 어차피 차나 약주나 물과 같은 성질을 내고 있으니. 매한가지였다.


“좋소. 내 조만간 시종에게 기별을 올릴 터. 이왕이면 맑은 계곡이 흐르는 곳에서 함께 담소를 나누며 마시는 게 어떨까 싶은데. 괜찮겠소? 내 굳이 강요는 하지 않을 터이니.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사양해도 상관없소만.”


점점 산으로 치닫고 있었다. 오늘은 두고두고 잊지 못 할 하루가 될 성싶었다. 한편으로는 사심적인 마음을 풀었다가도 선비의 입에서 알 수 없는 말이 새어 나오면 순간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사양이라니요. 뭐 그리 서운한 말씀을......하하하.”

그녀는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대로 뒤를 돌아 담벼락 위로 손을 뻗으며 다리 한 짝을 올렸다. 있는 힘껏 다리를 들어 올려 봐도 자꾸만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다시 다리를 쭉 뻗어 올려도 보기 좋게 실패했다. 사내의 몸으로 겨우 담장 하나 못 넘는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행여 의심의 눈초리라도 받는다면 안 될 성싶었다.


어떻게든 혼자의 힘으로 담벼락을 넘어야 했다. 그래야 사내로 알고 눈치채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다시 한 번 더 힘을 다해 기어오르기 위해 다리를 뻗어 보지만...... 더는 올라 가지 않았다. 이렇듯 자신의 짧은 다리가 원망스럽다고 느낀 적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이대로 이실직고 모두 털어버리는 게 속 편할 것 같았다.


자신은 사내가 아니라 여인이라고. 초희는 등을 보인 채 고개를 숙이며 허탈한 심정을 내비쳤다.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경은 말 대신 몸으로 보여줬다. 성큼성큼 담벼락 아래로 걸어가 그 자리에 그대로 제 몸을 숙이며 엎드렸다. 초희는 경의 행동에 의아해하며 선뜻 발을 떼기가 망설여졌다. 말보다 행동으로 몸소 보여주는 선비의 행동에 초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시오. 어서 밟고 올라가지 않고. 언제까지 이 자세로 기다리게 만들 거요?”


“...... 앗”


그렇다고 생판 남인 사내의 등을 밟는다는 게 쉽지가 않았다. 계속 머뭇거리는 사이 경은 벌떡 일어나며 초희의 몸을 번쩍 들었다.


“이, 이게...... 무슨...... 행동...... 이십니까? 내, 내려 주십시오.”


초희는 허공을 향해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내려 줄 경이 아니었다.


“그러게 등에 올라타라고 할 때 일찌감치 탔으면 얼마나 좋았소? 이게 다 선비가 자초한 일이니 그만 발버둥 치시오. 내가 직접 올려줄 터이니 그만 좀 움직이시오. 아니면......”


초희는 선비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대로 저 담벼락 위로 내 던져버릴터이니.”


초희의 몸은 그대로 경직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여인의 몸이라 그런지 솜털처럼 가벼웠다. 경은 곧바로 담벼락 위에 초희를 올려다 놓았다. 이윽고 경은 소맷자락 안에 들어 있는 서책을 꺼내들며 초희에게 가볍게 던졌다. 자신의 앞에 날아오는 서책을 가뿐히 잡은 초희는 동그란 눈으로 멀뚱멀뚱 거리며 선비를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거 같은데. 애써 넘은 담벼락 필히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서 들어가시오. 그리고 오늘 선비를 만난 것이 내 인생 통틀어 가장 잘 한 일이자 즐거운 하루였소.”


말을 끝낸 경의 얼굴에 생기 가득한 환한 꽃이 나타났다. 그는 곧 말안장에 오르며 고삐를 부여잡고 말을 몰았다. 등을 돌린 모습 뒤로 경은 팔을 들어 올리며 가볍게 흔들며 작별을 고했다. 초희의 얼굴에 여인의 미소가 지어졌다. 점점 더 어둠 속에서 경의 모습이 자취를 감추자 초희는 두 팔로 서책을 감싸 안으며 조심스레 담장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다.


바닥에 내려온 뒤 주위를 살피며 곧장 발걸음을 떼며 안채로 향했다. 도둑고양이 마냥 사뿐사뿐 걸어가는 뒤태는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웃음을 자아냈다. 그렇게 얼마 동안 숨죽이며 걸었더니 드디어 자신의 방 앞까지 발길이 닿았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얼른 섬돌 위에 발을 올리며 신을 벗었다.


“어?”


그때. 그녀의 눈에 반듯하게 놓인 신 두짝이 드러왔다. 그렇담. 자연스레 눈은 환하게 초를 비추고 있는 방안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향해 있었다. 가지런히 놓인 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지레 짐작하며 곧장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삐거덕. 문이 열리는 소리에 초희가 제 방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강유는 감은 두 눈을 천천히 떴다. 초희의 발이 방바닥에 닿기도 전에 다급한 강유의 목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이제야 오는 것이냐?”


내 너의 얼굴을 보니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구나.


“언제 오신 거예요?”


네가 오기 훨씬 전부터 와있었다. 강유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방 안에 서있는 초희를 힐끔 쳐다보았다.


“대체 어디서 무얼 하다 술시(戌)가 다 돼서 이제 돌아오는 것이냐?”


야심한 밤에 여인의 몸으로 혼자 다니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것도 아닐 터.


“설마, 여태 저 오기만을 기다리신 건 아니시죠?”


그렇다고 하면 어쩔 것이냐? 목 빠지게 기다렸다.


“내가 뭣 하러 하릴없이 네 걱정을 한단 말이냐?”


네 걱정에 한 시도 편안히 있지 못 하였다.


“아, 그러세요. 이리 아무 일 없이 돌아온 걸 확인하셨으니. 이제 그만 가보셔요.”


다시는 내 걱정하게 하지 말아라. 혹여, 네가 잘 못 되기라도 할까 봐 가슴이 바싹 타들어갔다.


“안 그래도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양반다리를 풀며 자리에 일어나던 강유는 초희의 앞에 다가섰다. 그의 손 하나가 그녀의 가느다란 어깨 위에 걸쳐졌다.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쇄골뼈가 손바닥에 닿았다.


강유는 충고하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나를 너무 걱정 끼치게 하지 말거라. 사내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너는 일개 연약한 여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또 명심해라. 사내 것들이란 하나같이 속물이니 스스럼없이 다가와도 함부로 마음을 다 내어 주어서는 아니 된다. 설령, 정인이라 할지라도.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 알겠느냐?”


“그런 충고하지 않으셔도 소녀 알고 있습니다. 한데, 오라버니. 오라버니께서도 사내이니 내일부터 이곳 출입을 줄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원 녀석. 뭔 말을 못 하겠구나.”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아무리 제가 늦게 온다 한들 외간 여인의 방을 함부로 들어오시면 어떡해요? 혹여, 아래 것들이 보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우리 사이가 보통 사이도 아니고 아래 것들 입방아에 오를 일도 없는데 왜 그리 걱정을 하느냐?”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저도 이제 열여덟 먹은 여인입니다. 제게도 저만의 사생활이 있으니 존중해 주라는 말이에요.”


똑 부러지게 말을 하는 초희가 제법 당돌하기까지 했지만 오히려 그 모습마저 강유는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강유는 두 발을 밖으로 빼내며 섬돌 위에 놓여있는 신을 신고는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말 한 번 잘 못 했다가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이 밤.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는 둥근달 이 하늘에 걸쳐 있는 밤.

늑대의 울음소리가 초희의 귓전에 들려왔다. 대문 밖으로 나온 강유의 눈에 정체가 불확실한 무언가가 '쓱' 하고 순식간에 지나갔다.


작가의말

이제 우리 이선비의 짠내나는 캐릭터가 시작됩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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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3. 돌연변이의 탄생(2) +1 16.04.03 33 0 15쪽
14 12화 돌연변이의 탄생(1) +1 16.04.02 77 0 29쪽
13 #11. 수수께끼의 선비(2) +1 16.04.02 46 0 21쪽
12 #10. 수수께끼의 선비. +1 16.04.01 58 0 21쪽
11 #9. 비와 당신...... 그리고 +1 16.04.01 39 1 21쪽
10 #8. 천명(天命) +1 16.03.31 64 0 16쪽
9 #7. 달 밝은 밤. 두 사내의 은밀한 조우. +1 16.03.31 31 0 19쪽
8 #6. 님과 함께...... 달 밤을 거닐며. +1 16.03.31 66 0 21쪽
7 #5. 화려함 속에서 살아가는 외로운 부용화 꽃 한 송이. +1 16.03.31 103 0 11쪽
6 #4. 흩날리는 벚꽃 잎이 떨어지는 어느 멋진 봄날. +1 16.03.31 29 0 17쪽
5 #3. 앙칼진 새끼 고양이 +1 16.03.31 22 0 10쪽
» #2. 한 여인과 두 사내 +1 16.03.31 94 0 21쪽
3 #1. 남장여자 & 묘(妙) 한 선비 +1 16.03.31 86 0 13쪽
2 [프롤로그] #1-2 늑대 선비. +3 16.03.31 87 0 12쪽
1 [프롤로그#1. 만월(滿月)의 밤] +3 16.03.31 199 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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