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계 만천과해
토끼의 마지막 뼈를 던져버린 선우명은 배가 부르자 행복했다. 그리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배가 고팠을 때는 사는 것이 우선이었으나 배가 부르면서 어느 정도 살만해지자 이것저것 생각할 여유가 생간 것이었다.
“어디 보자 동탁이 반동탁 연맹군이 해체되고 나서 죽었으니까 아직 시간은 있다.”
동탁이 죽는 시기는 황건의 난 이후 반동탁 연합군이 해체되고 나서기에 황건의 난이 시작도 안 된 지금은 시간적인 여유는 많았다.
동탁이 눈앞에 있을 때는 복수만이 머릿속을 지배했으나 손이 닿지 않은 곳으로 가버린 지금은 여유가 생겨서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조급해한다고 달라지지 않기에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걸 이용해서 만반의 준비를 하기로 했는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과연 내가 역사를 바꿔도 되는 걸까?”
삼국시대의 정확한 역사는 몰라도 굵직굵직한 것들과 중요 인물에 대한 정보를 안다는 건 엄청난 힘이 될 수 있었다. 선우명같이 어린애가 다루기에는 지나친 힘이 될 수 있겠으나 다룰 힘이 생긴다면 역사를 바꿔버릴 수 있다.
처음 환생하고서 이곳이 후한 말엽인 걸 알고는 꽤 많이 놀랐었다.
자기 기억 때문에 역사를 바꾸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했으나 다행히 그가 태어난 초원은 역사와는 거의 상관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걱정하지 않고 있다가 이제는 상관해야 했다.
고민하던 선우명은 쉽게 결정을 내렸다.
“그딴 거 알 게 뭐냐.”
어차피 자기도 이 역사의 인물인데다가 이곳은 한국이 아니었다.
이기적으로 보여도 어차피 남의 역사인데다가 까마득할 정도의 먼 미래의 일은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중요한 건 복수라서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확실한 목표가 세워지자 세부적인 계획을 짤 생각인 선우명은 동탁에 대해 생각해 봤다.
“이 시기가 정확히 어딘지 모르겠지만 황건의 난 이전이고 동탁이 북방 토벌하는 시기니까 184년이 안 됐겠지.”
중원이 아니라 북방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자란 선우명이라서 정확한 년도를 알 수 없었다.
“년도가 이쯤이면 당연히 동탁의 힘이 별 볼 일 없을 때겠지. 그럼 난 어떻게 해야지 힘을 키울 수 있을까?”
동탁이 정권을 잡으며 극강의 힘을 갖게 되는 시기는 190년이 되기 전이라서 대략 5년에서 6년 정도의 시간이 있다고 생각한 선우명은 그 기간 안에 어떻게 해야 힘을 가질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다행히 역사를 알기에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황건적에 가담해서 토벌하러 온 동탁을 죽이거나 한수의 반란에 가담할 수도 있었다. 그것도 싫으면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하거나 여포가 동탁을 암살하기 직전에 직접 죽이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동탁을 제거하는 방법은 다양해졌으나 그런 것들을 하기에는 네 살이란 나이는 걸림돌이었다.
나이가 어려도 총명하고 집안이 좋아서 뒤를 받쳐줄 힘이 있다면 나이는 걸림돌이 아니겠으나 불행하게도 선우명에게는 둘 다 없었다.
환생 전의 기억이 있어서 나이에 비해 총명해 보일 뿐이지 실제로는 평범한 어른의 지능일 뿐이고, 천애고아가 됐기에 힘이되 줄 가문 또한 없었다.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던 선우명은 결정을 내렸다.
“정원에게로 가자.”
군벌 중 한 명인 병주자사 정원은 정권을 잡은 동탁의 20만 대군에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두며 압박해가다가 막판에 여포의 배신으로 살해되면서 실패한 사람임과 동시에 동탁을 암살한 여포의 양부이기도 했다.
역사대로만 흘러간다고 가정했을 때 다른 건 다 실패해도 여포 옆에만 있으면 최소한 동탁을 죽이는데 한몫을 할 수 있는 선우명은 정원에게 가기로 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쯤이야?”
정원에게 가고 싶어도 자기가 있는 위치를 몰라서 갈 수가 없었다.
병주자사 정원을 만나려면 진양으로 가야 하지만, 선우명은 진양으로 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진양으로 가려고 했으나 말도 안 통하는데 괜히 가 봤자 고생만 할 뿐이라서 말을 익히고 그럴싸한 신분을 만들 생각으로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큰 저택으로 찾아가서 문을 두드렸다.
벌써 해가 저물었기에 닫아둔 저택의 대문이 열리면서 중년의 하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일이니 꼬마야?”
하인은 한어로 말해서 못 알아들은 선우명은 흉노어로 말했다.
“이곳 주인을 만나고 싶습니다.”
“흉노족인가?”
“그렇습니다.”
흉노의 지역과 인접한 곳이라서 이 정도 크기의 저택이라면 흉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선우명의 생각대로 하인은 흉노어를 할 줄 알았다.
“흉노 아이가 왜 주인님을 만나려고 하지?”
“부탁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무슨 부탁인지 몰라도 주인님은 너 같은 어린애와 얘기할 정도로 한가한 분이 아니다. 그러니까 집으로 가.”
“며칠 전에 도둑의 습격을 받아 천애고아가 됐습니다. 게다가 가진 것도 없어서 살 방법이 없습니다. 절 이곳의 하인으로 받아주십시오. 돈은 필요 없습니다. 그저 먹여주고 재워주고 우마처럼 부려 먹지만 않으면 됩니다.
이 말을 이 저택의 주인님에게 전해주십시오.”
부탁하는 주제에 조건까지 거는 선우명이 어처구니가 없는 하인은 말했다.
“사정은 딱한 거 같은데 내가 주인님에게 그런 부탁을 할 수야 없지.”
“그럼 나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다 보면 밖으로 나오시겠죠?”
“쯧쯧. 그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라. 하루 정도는 묵게 해주마.”
“감사합니다.”
하루를 묵게 됐으니 조급해할 것 없이 기회를 엿보기로 한 선우명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투박하긴 해도 제대로 된 밥을 먹고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자서인지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잠에서 깨어난 선우명은 저택 안을 돌아다녔다.
‘이 저택 주인이 어딘가에 있을 텐데.’
이 시대 사람은 입은 옷만 봐도 신분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격차가 있어서 입은 옷을 통해 이 저택의 주인이란 사람을 몰라도 알아볼 수가 있어서 그런 사람을 찾아다녔다.
선우명이 어리기 때문인지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 중 그 누구도 그를 막아서지 않았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선우명은 뒤뜰에서 찾아다니던 사람을 찾아냈다.
평범한 평민이라면 고생을 많이 해서 나이보다 겉늙어 보이겠으나 수수해 보여도 깨끗한 비단옷을 걸친 걸쳐서 평민이 아닌 이 남자는 마흔쯤 돼 보였다. 그리고 이 나이의 남자라면 일가를 이뤘을 나이라서 이 저택의 주인이 확실하다고 생각한 선우명은 그의 앞으로 가서 넙죽 엎드렸다. 그리고는 미리 하인에게 배워둔 서툰 한어로 말했다.
“절 시동으로 삼아주십시오.”
“허참.”
벗의 저택이 며칠 놀러 왔던 소담은 선우명의 말에 난처해하다가 말했다.
“일단 일어나렴.”
“저는 한어를 할 줄 모릅니다. 저는 흉노어만 할 줄 압니다.”
“이걸 어찌해야 한다.”
흉노어를 할 줄 모르는 소담이 난처해서 도움을 받을만한 사람을 찾으려고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 이 저택의 주인인 승원이 다가왔다.
마른 체구의 소담과 달리 풍채가 좋아서 전형적인 부자인 승원은 엎드린 선우명을 보고서 물었다.
“이 아이는 누구지?”
“나도 모르는 아이인데 나보고 시동으로 써 달라고 하더라.”
“그래? 그런데 왜 이렇게 엎드려 있는 거야?”
“흉노족인지 흉노어만 할 줄 안다고 하더라.”
소담과 달리 흉노족과 거래하느라 흉노어에 능숙한 승원은 흉노어로 말했다.
“애야, 무슨 연유인지 알고 싶으니 일어나 봐라.”
“예.”
한어였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겠으나 흉노어로 승원이 말했기에 선우명은 몸을 일으켰다.
“대체 이 친구에게 시동으로 써 달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인가?”
“도둑에게 일가족이 모두 살해당해서 저는 천애고아가 됐습니다. 그래서 의탁할 곳이 없어서 시동으로 써 달라고 한 것입니다.”
말을 들은 승원은 소담에게 그대로 전해줬다.
“시동이라…….”
딱히 시동이 필요하지는 않은 소담은 잠시 생각하다가 거절하려고 할 때 선우명은 말했다.
“저는 글을 읽고 쓸 줄 압니다.”
약간 다급하게 말하는 선우명의 말에 반응한 건 흉노어를 할 줄 아는 승원이었다.
“정말이냐?”
“예.”
“올해, 네 나이가 몇이냐?”
“네 살입니다.”
네 살에 글을 안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서 승원은 말했다.
“한번 글을 써봐라.”
“뭐라고 쓸까요?”
“손자병법의 첫 번째 계책인 만천과해를 적어봐라.”
“예.”
최근 손자병법을 읽는 중인 승원의 말에 선우명은 곧장 바닥에 ‘瞞天過海‘ 라고 적었다. 이걸로 선우명이 글을 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이 친구는 됐고, 박하게 대하지 않을 테니 내 시동이나 되어라.”
네 살인데 글을 안다는 건 신동이란 얘기라서 잘만 키우면 큰 인물이 되겠다고 생각한 승원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누가 됐든 말을 익힐 때까지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되는 선우명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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