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옥정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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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우
작품등록일 :
2019.02.01 10:00
최근연재일 :
2023.01.0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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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1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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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천인의 굴레

DUMMY

옥정이 깜짝 놀라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청이라...... 하셨사옵니까?"


"그래, 내 너와 함께 할 수만 있다면, 청이든 왜든 어디든 가고자 한다."


조태구는 옥정을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옥정은 조태구가 한순간의 충동으로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옥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슴이 뭉클해졌다.


"도련님께서 소녀를 생각하시는 마음, 감읍하기 이를 데 없사오나, 소녀는 도련님을 따를 자격이 없는 몸이오니, 부디, 혼담을 거두어 주소서."


옥정이 인사하고 자리를 떠나려 하자, 조태구가 손을 들며 소리쳤다.


"옥정아!"


옥정이 발걸음을 멈추자 조태구가 다가와 말했다.


"부디, 다시 한번 생각해다오. 네가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안다. 내 평생, 너 이외에는 다른 여인을 받아들이지 아니할 것이며, 누구도 너를 핍박하지 못하도록, 아버님과 내가 너의 방패막이가 될 것이다. 또한 내 반드시, 네 가문을 복권시킬 것이다. 나의 청혼을 한번 생각해 보겠느냐?"


옥정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자격이 없는 소녀가 다시 생각한들, 무엇이 달라지겠사옵니까? 도련님, 부디, 현실을 직시하소서."


옥정은 다시 인사한 후 자리를 떠났다.


조태구는 떠나는 옥정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볼 뿐이었다.


"옥정아! 기다려 보거라!"


옥정은 등 뒤로 들려오는 희재의 부름도 못들은 척하고 종종걸음으로 산을 내려섰다.


눈물이 옥정의 시야를 가렸다.


천인이라는 굴레가 옥정의 가슴을 옥죄이고 있었다.


조태구의 혼담을 받아들이고 싶어도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옥정이 산길에서 나무를 등지고 옷고름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을 때, 멀리서 철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씨! 아씨!"


옥정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철영에게 처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는 나를 아씨라 부르지 말거라! 나 역시 천인이거늘, 누가 들으면 비웃지 않겠느냐?"


철영은 말문이 막혀 잠시 주저하다가 굽신거리며 말했다.


"쇤네가, 아씨를 아씨라 부르지 아니하오면, 뭐라 부르겠사옵니까?"


뺨까지 내려온 눈물을 옷고름으로 훔치는 옥정에게 철영이 무릎 꿇고 말했다.


"아씨, 쇤네, 하늘이 무너져도 아씨를 상전으로 모실 것이옵니다."


옥정은 늘 한결같이 자신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켜주는 철영이 한없이 고마웠다.


마음을 추스린 옥정이 철영에게 말했다.


"일어나거라. 그만 가자꾸나."


옥정이 철영과 함께 대문을 들어서자 마당에서 서성이고 있던 윤씨가 옥정의 손목을 잡고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태구 도련님의 혼담을 받아들였느냐?"


옥정은 서러움에 목이 메어 침묵으로 대답했다.


"태구 도령께서 오늘 혼담을 넣으실 때 하신 말씀을 들어보면 생각이 달라질지 모르겠구나."


이렇게 운을 뗀 윤씨는 조태구의 말을 전해주었다.


"태구 도령께서 오래전부터 네게 연정을 품어왔으나 명안공주와 혼담이 오가는 바람에 연정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더구나."


옥정은 가슴이 갈갈이 찢어지는 듯했다.


'내가 천인이 되기 전에 청혼해주셨던들, 청혼을 거절하지 아니하였을 터인데......'


옥정의 가문이 역모에 연루되기 전에 조태구에게 시집갔다면, 옥정은 중인의 신분이 유지되었을 것이다.


그리만 된다면, 호랑이같은 권씨 부인의 며느리 노릇도 견딜 수 있을 듯 싶었지만, 비천한 천인의 신분으로 권씨 부인의 구박과 냉대를 견딜 자신은 도저히 없었다.


옥정은 신분의 굴레에 갖혀버린 자신의 운명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조태구와의 혼담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는 윤씨의 권유에 옥정이 침묵으로 일관하자, 윤씨가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태구 도련님께서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듯한데, 이것도 인연이 아니겠느냐?"


옥정이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소녀, 이제 천인이 되었사온데, 대감댁 도령과 인연이 있다 한들, 어찌 마음에 둘 수 있겠사옵니까?"


어떻게 해서든 옥정을 조태구와 맺어주고자 작정한 윤씨가 옥정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대감께서 너를 돌봐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또한 대왕대비마마께서 태구 도련님을 총애하신다 하니, 혼인만 하면 방도가 생기지 아니하겠느냐?"


"설령 방도가 생긴다 한들, 마님의 며느리 노릇을 할 자신이 없사옵니다."


연신 고개를 가로젓는 옥정에게 윤씨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했다.


"마님이, 본래 그리 무서운 분은 아니시다. 이 어미가 미운게지, 네가 아들이라도 낳으면 달라지지 아니하시겠느냐?"


옥정은 자신을 노려보며 호통치던 권씨의 모습이 떠오르자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궁인이 될 지언정, 호랑이같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기는 싫사옵니다."


궁인이라는 말에 윤씨가 입을 다물었다.


길고 무거운 침묵이 흐른 후 윤씨가 말했다.


"네가 싫은 것을 이 어미가 어찌 강요하겠느냐만, 우리 처지에 태구 도령만한 혼처는 다시는 없을 듯하니, 한번 잘 생각해보거라."


이날 밤, 옥정은 밤새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느 가문에 시집가도 자신은 물론 자식마저 천인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 한없이 서러웠다.


양반집에 시집간다 한들, 천인의 신분인 자신이 아들을 낳아도 얼자라고 하여 천대받을 터, 차라리 궁인이 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천인의 굴레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할 바에야 궁인이 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허나 임금의 총애를 얻지 못하면 평생을 궁에서 쓸쓸히 독수공방할 생각을 하자니...... 그것이 두렵구나.'


30여년 전, 장현의 장녀인 옥희가 궁인이 되어 효종의 총애를 입은 바가 있었다.


장현은 효종이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에 인질로 잡혀갔을 때 역관으로 따라갔던 인연으로 효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지만, 서인들의 모함에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옥희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자청하여 궁인이 되었던 것이다.


옥희로부터 장현의 무고함을 들은 효종은 의금부에 명을 내려 장현의 죄를 다시 조사토록 하였고, 장현은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작년에 세상을 떠난 옥희가 떠오르자, 옥정은 문득 궁인이 되어 임금에게 장현의 억울한 누명을 고한다면 가문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궁인이 된다면 우리 가문이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 가문이 옛 영화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한평생을 궁에서 독수공방하여도 결코 헛되지 아니할 터인데......'


낙엽이 붉게 물든 가을, 하얀 삼베옷에 짚신을 신은 옥정이 옷감을 잔뜩 담은 커다란 바구니를 두손으로 움켜 잡은 채 곳곳에 두창으로 숨진 시체가 널부러진 거리를 걷고 있었다.


짚으로 만든 거적에 덮힌 시체들이 풍기는 지독한 악취에 옥정은 한손을 들어 코를 막으며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걸어가다 돌멩이에 발이 걸려 고꾸라지고 말았다.


"앗!"


외마디와 함께 넘어지는 순간, 바구니에 담긴 옷감들이 땅으로 쏟아졌다.


며칠 전, 비가 온 탓에 땅에 떨어진 옷감들과 옥정의 삼베옷이 진흙투성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어머나! 이걸 어찌하나!"


옥정은 삼베옷에 엉겨 붙은 진흙덩이를 대강 털어낸 후 온통 진흙이 묻어 엉망이 된 옷감 몇 개를 줍더니 크게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오늘이 기일인데,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옥정이 어머니 윤씨와 함께 밤을 새워가며 바느질한 이웃 아낙네들의 옷감이었다.


때마침 추수철인데다 두창이 도는 바람에 일손이 턱없이 부족하여 동네의 여러 이웃 아낙네들이 맡긴 옷감을 바느질에 빨래까지 해 놓은 것이 이 모양이 된 것이다.


개중에는 추수 제사에 쓰일 새옷도 있었다.


추수 제삿날에 새옷을 입는 풍습이 있었는데, 제사 전에 입거나 빨면 부정이 탄다는 미신이 있어 옥정의 마음을 짓눌렀다.


옥정은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옷소매로 훔치고 나서 옷감들에 묻은 진흙을 손으로 떨궈낸 후 시냇가로 향했다.


시냇가에는 십여명의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옥정이 자리를 잡고나서 옷감 하나를 바구니에서 꺼내어 시냇물에 담구어 빨고 있을 때, 중년 여인 하나가 다가오더니 갑자기 옥정의 등을 힘껏 밀어 버렸다.


"악!"


비명 소리와 함께 옥정이 그대로 시냇물에 빠져버렸다.


옥정이 겨우 허우적거리며 물속에서 중심을 잡고 일어나 바구니를 놓아둔 자리를 쳐다보니, 이미 중년 여인이 바구니를 나꿔채 어디론가 달아나고 있었다.


"도둑이야! 저기, 도망치는 옷감 도둑을 잡아주세요!"


온 몸이 흠씬 젖은 옥정이 시냇물에서 나와 옷바구니를 훔쳐 달아나는 중년 여인을 손으로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지만, 바라보기만 할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흠뻑 젖은 옷 때문에 옥정은 쫓아가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제발, 도와주세요! 도둑 좀 잡아주세요!"


절규하듯 소리치는 옥정의 외침에도 아낙네들은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옥정은 바구니를 훔친 여인이 사라진 방향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다 주저앉아 땅을 치며 통곡했다.


"어찌 이런 일이......"


지난 보름간 윤씨와 함께 밤을 세워 바느질한 옷감들을 모두 도둑맞은 옥정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동안의 노고는 두말할 것도 없고 도둑맞은 옷감을 모두 배상해주어야 하니 허망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흠씬 젖은 채 통곡하던 옥정은 갑자기 온몸에 한기를 느끼며 부들부들 떨다 옆에 장옷을 걸치고 있는 아낙네에게 말했다.


"옷이 젖어 집으로 갈 수 없어 그런데, 장옷을 잠시 빌려 주실 수 없으신지요. 집에 도착하는 대로 사람을 보내 돌려 드리겠습니다."


아낙네는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나는 양인 가문의 지어미로, 천출인 그대에게 옷을 빌려줄 수 없소."


옥정은 순간 멍하였다.


천인에 대한 양인들의 멸시가 이토록 무자비한 줄이야!


옥정은 뼈마디가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참으며 장옷을 입은 여러 아낙네들에게 잠시만 장옷을 빌려달라 사정해 보았으나 하나같이 시선을 돌린 채 외면했다.


옥정은 마침내 자포자기하여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멀리서 철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씨!"


"철영아!"


옥정이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걱정된 윤씨가 철영을 보낸 것이다.


철영은 옥정이 혹여 두창이라도 전염되어 쓰러진 것인지 걱정되어 동네 방방곡곡을 찾으러 다니다 시냇가에서 온몸을 부르르 떨며 주저앉아 있는 옥정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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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화 천출이 되다 20.03.24 259 1 11쪽
3 3화 폐허로 변해버린 장현의 집 20.03.16 302 1 11쪽
2 2화 정해진 운명 19.10.19 505 3 11쪽
1 1화 경신대출척 +2 19.02.01 1,734 5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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