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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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연재수 :
1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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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20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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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1. 계절이 바뀌는 때 (1)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0

심장의 울림, 그것은 황홀한 파동. 살아있다면 누구나 품을 수 있는 환희.

그것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꺼져가는 생명은 작은 손아귀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넌…….”

다른 손이 그 손목을 두들겼다. 마찬가지로 작고 가냘프다. 그 두들김에 화답하듯, 꽉 죄어든 손아귀에서 힘이 풀렸다. 아이의 몸은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아이는 입을 열어 물었다.

어째서. 어째서냐고.

하지만 그 소리는 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졸려 있던 목이었다. 발끝이 쳐들려져 버둥거리기 까지 했다. 풀려났다 하여 바로 말이 튀어나올 리 없다. 그 말은 물론, 말 속에 들어 있는 의문 역시 전해질 수 없었다. 그것이 정상이다.

“어째서냐고?”

하얀색 탈을 쓴 얼굴이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무섭지 않았다. 표정이 없는 탈바가지 같은 모습은 이제 익숙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게 있었으니, 가면 뒤에 숨겨진 적의(敵意)였다.

대체 저 아이는 왜 날 죽일 것처럼 굴며 괴롭히는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이 있었을까?

어째서 모습을 비추지 않는 것일까. 단지 꿈속에 등장하는 가공의 인물이라서? 빈약한 상상력 때문에 저런 탈바가지로 가려놓은 거라고?

작은 발이 가슴팍으로 올라왔다. 다음 순서는 알고 있다.

진각으로 내리찍듯 힘차게 밟힐 것이고, 튀어 오른 몸뚱이는 걷어차일 것이다.

“컥!”

가슴이 찍히고…….

“악!”

이번엔 틀렸다. 가슴이 아니라 머리다.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기에 아이는 당황했다.

“크흐흐……꽤나 신선한데?”

제대로 잘못 맞은 것인지, 머리가 욱신거리다 못해 두근거린다. 마치 심장이 머리로 이사를 온 것처럼 맥동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 바람에 하얀 탈바가지가 하는 말을 놓치고 말았다.

“……차라리 죽어라.”

결론은 언제나 같았다. 살해 위협.

그리고 살해당한다. 그렇게 꿈에서 깨어난다.

어린 시절의 자신이 이유도 모르고 죽임당하는 내용의 꿈이라면, 이 세상의 모든 악몽 중에 1위를 다툴 만할 것이다.

그런 악몽을 편재는 꾸어왔다.

무려 십 수 년 동안이나.




1.

편재는 흐릿해진 눈을 굴려 코앞의 것을 바라보았다.

살집이 오르다 못해 퉁퉁 불은 손목이 보인다.

“허……누구 것인지 참 통통하기도 하구나.”

검증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자신의 것이었다. 편재는 두툼한 손을 들어 이마에 올렸다.

꿈속에서 집중적으로 두들겨 맞은 탓인지 머리가 욱신거린다.

두들기고 내리친다.

두들기고 내리친다.

반복되는 단조로운 패턴은, 심장의 맥동과도 닮아 있었다.

그래서일까. 꿈에서 깬 지금도 여전히 누군가, 머리를 샌드백처럼 두들겨대는 것만 같다.

정말로 누군가 때려대는 것은 아니나, 이 고통은 진짜.

편재는 베개를 구겨 머리에 덮어씌웠다.

단순한 혈류속도의 이상일 뿐이다. 그건 편재도 알고 있다.

목 위쪽에 붙어 있는, 이제까지 머리라고 알고 있던 게 사실은 단단한 볼링공 같은 게 아닐까.

편재는 뒷목을 주물렀다. 조금은 괜찮아진 것도 같다. 누가 머리통을 볼링공으로 바꿔놓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두통이 조금 가시자 편재는 팔다리를 쭉 뻗으며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효과는 굉장하지……않았다.

“에구구.”

중늙은이의 것처럼 녹이 슬어 삐걱거리는 몸 때문에 절로 신음이 튀어나온다.

스물둘이라는 이상적인 나이의 청년은 밤을 새며 술을 마셔도 끄떡없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몸뚱이는 전혀 상식을 따르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규격 외인 몸집이니 이미 많은 상식들이 무시되긴 했었다.

남들은 찬장 위에 물건을 꺼낼 때 의자부터 가져다 놓지만, 편재는 그럴 이유가 없다. 그냥 편히 서서 슥 꺼내면 되는 것이다. 괜히 규격 외가 아니다.

사람들로 가득 찬 엘리베이터를 보면 보통사람들은 달려가 빈틈을 찾아 몸을 비집고 들어가려하지만, 마찬가지로 이쪽엔 해당사항이 없음이다. 그저 한숨을 한번 푹 내쉬고 다음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뿐. 이것이 규격 외의 비애다.

그렇지만 납득할 게 있고 납득하지 않을 게 있다. 충분한 영양 섭취와 적절한 수면. 그리고 노동을 통한 일상생활의 영위까지 모든 게 완벽하건만, 왜 ‘만성피로’라는 이름의 짐짝은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는가.

“짜증나.”

뒷목을 주무르는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꾹꾹 눌러보았지만 신통찮았다. 결국 한 장 있는 파스를 가져와 붙이는 선에서 타협을 끝마쳤다. 편재는 살살 몸을 달래며 눈을 감았다.

밤새 잠을 설쳤다. 악몽 때문에 기분도 안 좋다.

그냥 오늘은 마냥 늘어지게 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강한 방해로 이루어지 못했다.

“으으으…….”

쪼르륵 물소리 같기고 하고, 방귀소리 같기도 한 작은 소음이 울렸다. 뒤이어 한없는 공복감이 위장을 비틀었다. 편재는 배를 슥 문지르며 생각했다. 설마 어제 저녁을 걸렀나? 분명 먹었을 테지만, 위장이 텅 비어버린 듯한 감각은 절대 아니라고 외치고 있다. 편재는 싱크대로 가서 그릇을 살펴보았다. 자동세척기가 고장 난 건 바로 어제. 그러니 제대로 식사를 했다면 세 개의 그릇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싱크대에는 지금 딱 한 개의 접시가 기름기를 머금은 채 놓여 있다.

“그렇다면 내가 한 끼만으로 하루를 버텼다고?”

편재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꿈에서라도 그럴 리 없다.

이 덩치가 하루아침에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만큼 먹는 것도 좋아한다. 환장을 한다.

그런데 달랑 한 끼?

편재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시야에 번져 나가는 붉은 색이 있었다. 화악 쇠 비린내가 올라온다.

“피…….”

힘을 푼 손에서 박살난 접시가 와르르 떨어져 자기들끼리 부딪치며 작은 조각이 났다. 붉디붉은 생명의 원천 속에서 하얀 이빨을 드러낸 접시 조각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편재는 지끈거리는 뒷목을 짚었다.

“짜증나.”


◇◇◇◇◇◈◇◇◇◇◇◇◈◇◇◇◇◇◇◈◇◇◇◇◇


상처는 심하지 않았다. 수건으로 대충 손을 닦아 내고 약을 바르는 걸로 피가 멎을 정도. 설사 출혈이 계속되더라도 편재는 ‘별거 아닌 상처군’ 했을 것이다. 바보 짓하다가 다친 일은 아주 많았고, 이런 정도로 호들갑 떨 만큼 담이 작지도 않았다.

“목이 날아 가버릴 뻔 한일에 비하면, 이깟 건 간지럽지.”

스스로의 대범함에 도취된 탓인가, 편재는 손바닥을 오므렸다 폈다. 그러자 갈라진 살이 벌려지며 다시 피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래서야 치료의 의미가 없다.

“자……다쳤을 때는 알코올로 소독을 해줘야 하는 법이지.”

이미 약까지 다 발라 놓고 소독 운운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편재는 비틀비틀 냉장고로 향했다. 그리고 냉장고 속에서 6개의 황금색 캔이 하나로 묶여진, ‘그것’을 꺼냈다.

며칠 전에 사놓고는 아직까지 맛도 보지 못한 최고급 맥주.

피가 탁해져 상처에 염증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의학적 상식은 이미 머나먼 곳으로 날아 가버린 지 오래다. 매우 특별한, 한정판매되는 귀한 맥주가 달칵 소리를 내며 황금빛 신비를 드러냈다. 그것이 목구멍을 씻고 빈속을 찌르르 울릴 것이다. 그리고 극상의 만족감으로 이 공복을 잠재울 것이다. 편재는 그렇게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편재는 캔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뿜었다.

“뭐냐! 이 보리차는!”

황급히 캔에 적힌 문구를 확인해보니 『최고급맥주-골든비어(Golden Beer)』라는 제품명 밑에 작은 글씨로, ‘음주는 건강에 해롭단다. 그냥 시원한 보리차 한잔 원 샷 어때? 캬아 생각만 해도 좋구나아~!’ 라고 적혀 있었다. 편재는 부들거리며 몸을 떨었다.

“좋기는 개뿔이 좋냐!”

뱃속에서부터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분노에 몸을 맡기자 맥주 캔, 아니 보리차 캔은 작은 경단 크기로 뭉개졌다. 범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느 틈에 바꿔놓았는지는 모르나,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정해져있다.

즉시 방문을 열어젖힌 편재는 복도에 놓인 큼직한 도자기를 집어 들어 어깨에 걸쳤다.

원색계열의 도료를 발라 구운 도자기는 당삼채 특유의 화려함을 뽐내었다. 크기도 어마어마해서 성인 남성도 조심해서 들어야 할 정도였다. 딱 봐도 비싼 물건이다.

그렇지만 편재의 어깨에 올라가니, 작은 술 단지처럼 보인다.

편재는 힘주어 바닥을 꿍 찍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후닥닥 사람들이 튀어나와 앞을 막아섰다. 편재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비켜!”

우렁우렁한 일갈에도 찔끔한 기색이 없자, 편재는 어깨에 올린 당삼채를 번쩍 들어 뒤로 내던졌다. 그러자 앞을 막아선 자들 중 몇몇이 몸을 날려 당삼채를 받아들었다.

몸을 쿠션처럼 이용하면서까지 그것을 지켜내는 모습을 본 편재는 싱긋 웃었다.

“당신들이 아주 성실한 자들이어서 난 기뻐요.”

험악한 얼굴이 금세 헤벌쭉하게 되어 웃음이 걸리자,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노련한 경험으로 단련된 그들의 ‘편재 센서’가 경고하고 있었다.

이 인간 열 받았다!

“잠깐! 편재님! 스톱!”

그들이 애가 타서 소리 지르거나 말거나, 편재는 그 긴 손을 뻗어 작은 화병과 유리장식으로 꾸며진 공예품을 쥐었다. 그리고 여기보라는 듯이 둘을 마주 부딪치려고 했다.

“안 됍니다아!”

그걸 말리려는 듯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자들 때문에, 편재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자꾸만 바지가 끌려 내려가 곤란한 탓이다.

“놓지 못해! 바지가 벗겨지잖아!”

엉겨 붙은 자들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바짓단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기까지 한다.

노골적으로 바지를 벗기려는 자들에게 편재는 질려버렸다.

할 수 없이 손에 쥔 것들을 아무렇게나 내던지자, 사람들이 떨어져나가며 바닥을 굴렀다. 그들의 품에는 화병과 유리공예품이 안겨져 있었다. 갓난아기를 안듯 조심스레 그것을 안고서 물러서는 모습을 보며 편재는 코웃음을 쳤다.

“부술 건 정말 많아!”

편재는 벽에 걸린 장식물을 눈여겨보며 팔짱을 꼈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사람들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장식물의 정체는 거무튀튀한 클레이모어였다.

실제 사용되던 물건은 아니고, 그냥 일반 강철로 주조되어 장식품으로 팔리는……날조차 세우지 않은 ‘블런트’. 하지만 날이 무디다 하여도 풀스윙으로 휘두르면 충분히 사람을 격살시키는 무기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굵은 프레임에 끼워 나사로 고정시킨 상태였지만, 달리 말해 꺼낼 수만 있다면 위력은 보증한다는 뜻도 된다.

그런 물건에 눈독을 들이는 사람은, 다름 아닌 편재.

사람들은 애써 침착함을 회복했다.

“공구도 없이 짧은 시간에 저 많은 나사를 풀 수 있겠습니까?”

“공구? 그딴 게 왜 필요한데?”

편재는 벽에 돌출된 도어락의 패널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힘을 쓰자 그것은 전선다발을 주렁주렁 매단 채 뽑혀져 나왔다.

“벽에 매립된 것도 이렇게 쉽게 뽑히는데, 고작 나사로 고정시킨 걸 내가 못 꺼낼 것 같아?”

“아아…….”

사람들은 절망에 몸부림쳤다. ‘편재 센서’의 바늘은 이미 임계점을 넘어섰다. 무엇이 저 인간을 화나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앞을 막고도 몸이 성할 리 없다.

진짜 클레이모어라도 들고 날뛰면, 골절 정도는 행운으로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안막자니 후환이 두렵다.

그들의 고용주 역시 무서운 사람이었다.

특히 손가락을 까딱거릴 때가 더 그렇다.

동료들이 고용주와 함께 지하실로 사라지면, 한 달 뒤 동료는 평범한 일상의 중요함을 깨달았다느니, 세상은 아름답다느니 하는 소리를 해대며 성자로 탈바꿈되었다. 머리 주변에 휘광이 어리는 착각이 일어날 만큼 사람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 건물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지하실을 이렇게 불렀다. ‘마(魔)의 개조실’이라고.

“마루타가 되느니 깨끗이 죽자!”

쥐도 궁지에 몰리면 쥐를 문다고 했던가. 순식간에 겁을 상실한 인간들이 윗옷에 가려진 곤봉을 움켜쥐었다. 그 기백에 편재 쪽이 질려 물러설 정도였다.

“제길. 진짜 해보자는 거야?”

편재는 갑작스레 투지를 불태우는 사람들을 보며 머리를 긁었다.

진짜 겁만 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진지하게 나오면 다치는 쪽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냥 모르는 척 길을 터주면 좋을 텐데 어째서 저리도 몸을 사리지 않는 것일까.

그 정도로 ‘무장경비’가 꿈의 직장이었을까?

진짜 싸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얌전히 물러서면 꼴이 우습다.

가장 좋은 방법은 제3자가 끼어들어 중재하는 방법.

그러면 못이기는 척 물러날 수 있다. 이 얼마나 세련된 방법인가.

그 생각은 편재를 가로막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분위기에 휩쓸려 장비까지 손에 쥐었지만, 편재는 보호할 대상이지 공격할 대상이 아니다. 이제 와서 ‘장난이었어요. 아하하.’ 웃고 넘어갈 수 있겠는가.

곤란한 상황에서 도움을 바라는 건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

누가 이 상황을 해결해준다면 그를 평생 은인으로 삼겠다.

편재를 비롯한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이럴 때 복도 끝에서 걸어오는 사람을 발견했으니 만세를 부르고 싶어지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가까워지면서 그게 누군가 깨닫는 순간, 실룩거리던 입들은 하나같이 꾹 다물어졌다.

구겨진 면바지를 입고 후드티를 깊게 눌러쓴 인물은 마치 스포츠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섀도복싱을 하는지 허공에 날리는 가벼운 주먹질, 그리고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하체.

게다가 맨발이었다.

그는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지? 어째서 모여 있는 건가?”

“아…그러니까…단장님?”

누군가 말을 얼버무리려 하자, 그는 후드를 걷었다.

짧게 깎은 머리 아래로 시원한 이마가 드러났다.

전체적으로 하얀 피부가 선량한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 하지만 그가 눈을 뜨자 분위기는 180도 바뀌었다.

갈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사람을 잘 갈구는, 한마디로 누굴 괴롭히는 사람 특유의 섬뜩함. 실제로도 그런 인물이었다.

그 눈빛이 모두를 샅샅이 훑다가 편재에게 머물렀다.

“네가 설명해봐.”

“손을 다쳐서 치료하려는데 약이 떨어져서 이분들에게 구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임기응변으로 생각해낸 변명치고는 그럴싸했다. 고개를 휙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에는 감탄마저 어려 있다. 하지만 상대는 의심병 말기 환자였다.

“그 약이라는 게 몽둥이냐?”

“예?”

“하긴, 미친놈 정신 돌아오게 하는데 몽둥이 찜질만한 게 없지.”

그러고 보니 다들 손에 쥐고 있는 게 무엇인고. 곤봉이렷다.

경비단 전원은 찬물을 끼얹은 기분이었다. 고용주의 가족을 때려눕힌다고 곤봉을 들다니,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경비업계에서 매장당하기 이전에…….

마(魔)의 개조실로 직행.

회장이 뒷짐을 지며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으아…아닙니다. 이건 장비 점검을!”

“소, 손목운동을!”

되도 않는 변명들이 쏟아져 나와 소란스러운 복도를 차가운 음성이 갈랐다.

“새끼들……빠져가지고. 내가 호구로 보이냐? 하루 종일 굴려줄까?”

냉기 서린 목소리 앞에 모두는 자라목이 되었다.

여기서 살려달라느니, 한번만 봐달라느니 하는 소리를 주워섬겼다간 심신이 더욱 괴로워질 뿐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을 싫어한다. 당장 속여 넘긴다 해도, 미심쩍어서 조사를 해볼 것이고 거짓은 간단히 탄로 나겠지. 그땐 진짜 죽일 기세로 달려들 것이다.

편재는 바짝 타들어가는 목구멍을 쥐어짜내며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니다.

벽에 기대어 차분하게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회장님이 너무 했군.”

“그렇다니까요. 그러니까……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편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회장님이 잘못했다. 자기인생 자기 뜻대로 살게 둬야지. 무엇보다도 성인을 그런 식으로 대하는 것은 안 될 일이다.”

“마, 맞습니다. 그래서 내 집이지만 꼬박꼬박 방세도 내고 있다고요.”

“그래. 스스로 한 사람분의 역할을 하는 것. 그것이 현대사회의 바람직한 시민이지. 회장님의 발상은 시대에 역행하고 있다.”

“오오! 단장님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회장님 나빠요.”

사람들이 맞장구를 쳤다. 이런 분위기에 슬쩍 묻어가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 가죽을 씌운 얼음덩어리에게 그런 건 안 통했다.

“시끄럽다. 네놈들은 자리로 돌아가라.”

슬금슬금 물러가는 부하들을 지켜보던 그가 편재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네?”

“마침 나도 회장님께 용건이 있던 참이다. 어디 계신지는 알고 있어.”

떡본 김에 제사지낸다고는 해도, 너무 갑작스러워서 편재는 어리둥절했다.

회장이 바쁘다는 건 잘 알고 있는 일이고, 이 건물에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끌려가는 방향은 회장의 개인 서재가 아닌가?

이 시간에 일도 안하고 농땡이란 말인가?

“회장님. 저 민영희입니다.”

“푸흡!”

손으로 틀어막았지만 콧물까지 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얼음덩이는 발뒤꿈치로 편재의 발가락을 짓이기며 극저음의 목소리를 흘렸다.

“내 이름이 웃기냐?”

“아닙, 아닙니다.”

이를 꽉 다물고 잔뜩 억제하다 못해 짓이겨진 목소리가 살벌하다. 편재는 도리질을 쳤다. 깜빡 잊고 있었다. 그의 콤플렉스를.

이 남자 이름은 영희. 철수도 아니고 영희.

영유아들이 국어교육으로 접하는 최초의 ‘여자이름’이다. 그런 사실을 영희 본인이 달가워할 리 없다.

하지만 그가 자기소개를 할 때면 편재는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그리고 영희는 그때마다 눈에 지옥의 불길을 두른 채 노려보는 것이다.

“나는 네놈이 알고도 그런다는 게 더 기분 나빠. 차라리 크게 웃던가.”

“정말 그래도 돼요?”

“그래주면 고맙지. 사표 쓸 각오하고 네놈을 떡이 되도록 패버릴 테니까.”

“윽.”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도록 무서운 상상이다. 자신이 쳐 맞고 있어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영희는 경호대 단장이기 이전에, 나라별로 몇 없는 강자였다.

그 주먹질로 친히 떡을 만들어 준다니 소름이 다 돋는다.

“그런데……어째서 회장님은 답변이 없으시지?”

다시 평소 때의 단장으로 돌아온 영희의 중얼거림에, 편재도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까지 둘이서 노닥거리던 시간이면, 들어 오라던가 나중에 오라던가 뭐라고 말이 들려와야 정상이다. 영희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이 방은 비어 있는 게 맞다.

“그 사이 어딜 가신 거 아니에요? 원래 바쁘신 양반이다 보니까.”

“그럴 리 없다. 애초에 여기서 볼일을…….”

영희는 입을 다물고 왼팔을 들어 올렸다. 겉보기에도 단단해 보이는 금속 고리가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암릿으로 직통 전화? 누구지?”

입체 영상으로 띄우게 하자 허공에 홀로그램창이 생기며 중년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편재와 영희는 물론 이 건물의 모두가 모를 수 없는 얼굴이었다.

“회장님. 지금 서재 앞입니다만, 부재중이시더군요. 지금 어디 계십니까?”

- 프런트일세. 편재 그 녀석이 지랄발광을 한다면서? 그래서 일단 자리를 피하기로 했네. 자네도 함께 갈 거지?

“제가 수행하는 건 당연한 일. 지금 곧 프런트로 가겠습니다.”

- 기다리지. 그런데 자네 뒤의 그 오렌지색은 무엇인가?

영희는 자신의 뒤에 바싹 붙어 통화를 엿듣는 편재를 슬쩍 바라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둘러댔다.

“커튼입니다.”

- 커튼을 새로 갈려고? 그렇게 안 봤는데 자네 패션 감각이 꽝이군. 츄리닝 색깔이라니. 쯧쯧. 구려.

뚝.

“푸흡!”

편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끅끅거렸다.

“구리다고?”

영희가 몸을 휙 돌리는 순간 편재의 육중한 체구는 구석에 처박혀버렸다.

띵한 뒷골을 어루만지며 편재는 이를 악물었다. 목의 뻐근함이 더 심해진 것 같다.

이래서야 파스 붙인 보람이고 뭐고 없다. 정신을 못 차리는 편재를 내려다보며 영희는 갈고리처럼 구부린 발을 내렸다.

“또 웃으면 장식으로 벽에 박아버리겠다.”

저 살벌한 말이 허튼 소리가 아님은 이미 지랄 맞은 성격으로 증명했다.

모름지기 강자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하는 법.

편재는 어깨를 움츠렸다.

“네…….”

짜증나는 하루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작가의말


[2014.12.14 수정 (8,321자 -> 9,466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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