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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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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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12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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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인들 [친우..각자의 길]

DUMMY

탈[脫] 이라는 간판의 이름이 벗어남을 뜻한다고 말해줬을 때, 그 역시 낯선 한자어가 강렬히 와 닿았다. 하지만 뭔가 좀 꺼림칙한 건물의 내부를 들여다보고는 실망을 넘어 절망감을 맛봤다.


‘이건 씨 팔, 그냥 낡아빠진 체육관이잖아?’


음주와 폭력의 강도를 아무리 높여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절절히 깨닫고 있던 차에 들려온 희소식이라 마지막 희망을 걸었건만..


“이게 뭐야?” 울컥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새 옷을 갈아입은 형이 체육관 한편에 있는 샌드백을 치기 시작하는 게 눈에 들어왔는데, 나름 이런저런 운동을 해온 자신 앞에서 체계적이기는커녕 마구잡이로 힘을 써대고 있으니 답답해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버럭 욕설을 뱉어냈다.


“아니, 씨팔 이게 무슨 개 좆같은 짓거리야! 이딴 병신짓을 한다고 해결될 게 아니란 거 형도 잘 알잖아? 몰라? 어휴, 제발 정신 좀 차려라.”


그리곤 체육관을 나가려 돌아섰는데, 자신의 악다구니에 주먹을 멈춘 형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와 발길을 붙잡았다.


“나 요즘.. 꿈에서도 난도질당하고 있어. 이제는 눈만 감아도 그 좆 같은 눈동자가 보여.”

‘눈동자?’


자신과 같은 상황을 겪고 있다는 말에 뒤돌아섰지만, 자신이 뒷골목 양아치들을 상대로 주먹질을 해대는 거나, 샌드백을 치는 거나 다를 게 뭐 있겠는가? 그래서 한 소리 더 하려다 형의 충혈된 눈동자를 마주하고 보니 말이 심했던 것 같아서 일단 사과부터 했다.


“형, 저기.. 내가 욕하고 화내서 미안. 사실은 나도 형처럼 많이 시달렸거든. 그런데 있잖아, 형.. 이건 답이 아니야. 나도 이짓저짓 다 해봤는데..”


차마 사람을 상대로 했다고 할 수 없어 말끝을 흐릴 때, 무슨 사과냐며 미소 지은 형이 확신에 찬 눈으로 말했다.


“창수야, 이게 전부는 아니야. 이거라도 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 야, 일단은 날 믿고 여기에 한 번 다녀 봐. 어차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 그러니까, 이 형 한 번만 믿어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자 절로 한숨이 나와 고개 떨굴 때, 다시 샌드백 치는 소리가 들려서 힐끗 쳐다보다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지 뼈만 앙상하게 남아서 힘없이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이 서글프면서도 웃겼던 것이다. 혼자 낄낄대다 아예 배를 잡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아, 형.. 꼴이 그게 뭐야?” 얼마 만에 웃어본 걸까? ‘그래, 형 말이 옳아. 시작하려면 뭐라도 해야지.’


폭력과 술에 찌들어 파멸을 향해 치달아 가는 것 보다, 유일하게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과 함께 바보짓을 하다가 끝을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형, 있다가 고기나 먹자.”

“고기? 그거 좋지. 그런데 네가 사는 거냐? 알다시피 내가 백수라..”

“아, 형. 이럴 때는 없어도 있는 척 좀 해.”

“뭐, 그게 뭔 개소리야? 척하다가 훅 가는 게 인생인데.”

“뭐? 척하다가 훅이라고?”

“그래, 너도 훅 가기 싫으면,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고기나 사.”

“아, 형. 그게 왜 그렇게 되는데?”

“글쎄다, 왜 그렇게 되는 거냐?”

“여하튼 형은 정말..”


오랜만에 형과 농을 주고받으니 마음 한구석이 따스해져서 연신 웃었다. 같이 빙그레 웃던 형이 다시 샌드백을 치기 시작했는데, 그 초라한 뒷모습을 지켜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형도 많이 힘들었구나. 그렇다고 해서 나처럼 미친 짓이나 하는 게 아니라 혼자서 저렇게.. 내가 힘들다고 남한테 피해주면 안 되는 건데 나는.. 나는 아직도 양아치 근성을 버리지 못했어. 앞으로 뭐가 어떻게 되든 형이랑 함께 하자.’


그렇게 머릿속을 정리하곤 진짜 운동이 뭔지 보여주겠다 큰소리치며 윗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곤 벤치프레스로 향하던 중.. 그를 만났다.


“두 놈이나 살아남았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관장이 나타나는 순간 왠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불현듯 찾아온 그 평온이, 형이 “관장님.”하며 고개 숙인 저 섬뜩한 인간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비릿한 혈향을 품어 꺼림칙하기는 했지만, 그냥 봐도 자신보다 강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형과 함께라서 그런 거겠지.’


자신을 아래위로 힐끗 쳐다본 관장은 별다른 말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 형이 그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해줬지만,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그리곤 정신없이 운동을 하다 보니까, 어느새 자신이 형편없는 명진이 형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형, 아령을 들 때도 호흡이 중요해.”

“그래? 그러면 가르쳐주라.”

“형, 벤치프레스는 가슴보다 허리가 중요하다니까? 자세를 바로잡지 않으면 그냥 나가거든.”

“아, 나도 군대에 있을 때 다 해봤는데, 다 까먹네.”

“형, 샌드백은 그렇게 때리는 게 아니야.”

“그래? 좆도, 어쩐지 느는 것 같지가 않더라.”

“그런데 여기서는 이런 기초도 안 가르쳐줘?

“어, 그냥 뭐..”


손을 멈춘 채 멋쩍은 지 미소 짓는 형을 보며, 저 관장이라는 양반이 사짜는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뭐, 어쨌든 내가 있으니까.’


그리곤 형의 자세를 잡아주면서 다시금 이 허름한 체육관에 다닐 생각을 굳혔다.


‘내가 형을 도와줘야지.’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을 때 알았어야 했다. 친우의 약함으로 자위하는 자신이 더 안쓰럽고 비참하다는 것을. 이제 와서 되돌아보면..


‘내가 아니라, 형이 나를 도와준 거였어. 형이 이곳으로 불러주지 않았다면 나는 벌써..'


공포에 허물어져 가던 이성을 잡아주던 그릇된 믿음, 그 누구보다 강인할 거라 여겼던 육체, 심지어 공포의 근원인 그를 다시 만나면 부숴버릴 수 있다는 허황된 자신감이 관장의 한 수에 무너지고 말았으니.. 그의 냉소 어린 질책이 비수가 되어 꽂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나는,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다시 명진을 보며 눈물을 흘리던 창수는 그의 한쪽 눈이 없다는 걸 인지하는 순간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절망감에 짓눌려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나는 그냥, 나약하고 겁에 질린 쓰레기에 불과했어. 나 때문에 형이, 내가 싸움만 걸지 않았어도..'


그렇게 안으로.. 안으로 붕괴되어 가는 창수를 가만히 주시하던 관장은 작게 고개 젓곤 살기를 뿌리며 움직여갔다.


"네놈은 정녕 쓸모가 없구나."


이미 모든 의지를 상실한 채, 형 하나만 보고 있는 동생의 육신은 순식간에 부서지리라. 하지만 그때..


“창..수.” 미동도 없이 서 있던 명진의 몸이 관장의 살기에 반응하며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죽음을 앞둔 자의 몸부림일까? 아니면 동생을 보호하려는 치열한 발버둥일까? 확실한 건 그가 놀랍게도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었다. 삼도천에서 발을 빼는 건 평범한 의지로 할 수 없는 일이라 관장마저도 놀랐지만, 그런 명진의 모습은 너무나도 처참했다.


“창..수..야.”


팔은 본래의 형상을 잃어 뒤틀렸고 손가락은 모조리 짓이겨졌다. 반쯤 감긴 눈 사이로 보이는 검붉은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핏물이 코와 입을 적시고 상의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망가진 다리는 말할 것도 없었고, 오른쪽 늑골 부분의 피부가 시커멓게 괴사한 걸 보니 갈비뼈가 적어도 서너 대는 나간 것 같았다.

사실, 이런 상처들을 하나하나 볼 것도 없이 바닥에 고인 핏물의 양만 해도 회생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건만, 그는 한 걸음, 또다시 한 걸음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아..직..” 오른쪽 다리가 절뚝이며 움직이자 무릎부터 옆으로 꺾인 왼쪽 다리가 바닥에 끌리며 따라온다.


앞으로 저 다리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리라. 하나 또 무언가를 말하며 다시 한 걸음 더 걸었으니.. 그가 보인 의지는 그야말로 비참하고 보잘것없는 한 걸음에 불과했지만, 조소와 경멸만 서린 관장의 눈동자에 수많은 감정을 스치게 했다.


‘남명진.’ 살기에서 놀람, 희열, 슬픔, 안타까움과 미안함에 이어 어떤 기대와 새파란 광기까지..


관장은 두어 걸음 더 걸어온 명진에게 그답지 않은 질문을, 마치 변명 같은 의문을 던졌다.


“천애고아를 택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그를 대신하겠다는 게냐?”


명진의 외눈이 번뜩이자 관장은 다시 물었다.


“내 언약에 묶여 모든 걸 말하지 못한다. 하나 생존의 대가는 크고 영원하며 참혹하다. 네놈의 그 얕은 의기가 하늘을 무너뜨린다 하여도 후회하지 않을 테냐?”


명진은 그만 물어보라는 듯 신음하며 미약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가를 받는 날, 나를 원망하고 오늘을 후회하고 세상을 저주해도 변하는 게 없을 거라는 사실을.. 그 분노는 인력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너는 명심해야 할 게다. 이 모든 게.. 네 선택임을 기억해라.”


놀랍게도 입을 벌려서 관장에게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명진은 울컥 흘러나오는 핏물에 목이 막혀 끝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어떻게든 쓰러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의 미세한 경련은 삼도천에 닿았음을 알리는 마지막 몸부림 정도로 보일 뿐이었다.


그는 어디를 향해 걸었고, 무엇을 말하려 했던 걸까?

포식자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까?

아니면 부정을 위한 의지의 발현이었을까?

그리고 관장은 왜 저리도 슬픈 눈으로 그를 보는 걸까?


힘없이 쓰러지는 자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관장의 시선에 다시금 수만 가지 감정이 뒤얽혀 든다 싶더니 현재가 아닌 과거의 장면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한때 동료라고 칭했던 자들이 떠올라서 끊임없이 맴돌며 그에게 속삭이고 소리치고 악다구니 써 원망하며 절규하고 있었다.


“그래, 자네들의 말이 옳을지도 모르지. 하나 언제나 그랬듯 선택과 책임은 나의 몫이다. 너희 빌어먹을 놈들보다 더 재능이 없고 가진 바 능력은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아이가, 꼭 같은 상처를 입었음에도 정해진 운명을 따르지 않고 그를 부정하려는데, 어찌 감히 그런 말을 하느냐? 다름을 탓하고 부족함에 지레 겁먹은 채 무너졌던 너희와 달리, 자신을 깨트려서 미래로 나아가려고 저토록 생을 불태우는데, 어찌 감히 억울하다 주절대는가? 그대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


오롯이 홀로 서 있음에도 누군가에게 말하듯, 마치 대화하듯 읊조리던 목소리가 서서히 커지더니 어느새 사자후로 화해서 건물 전체를 뒤흔들었다.


“인정받지 못한 계절에 떠나고 숨은 그대들의 한과 사명을 다음 세대의 전승자에게 전할 만한 재목이 나에게 왔음은 필연이요 숙명이리라. 보라, 나는 그대들과 다르다. 이 송광극은 못다한 사명을 반드시 이루어낸 후에, 내가 선택한 전장 위에서 스러지리라.”


그가 미치광이처럼 웃음을 터트리며 광기를 흘릴 때, 체력과 심력을 모조리 소진해버린 창수 역시 의식의 끈을 놓았다. 광극은 그들이 이면에 발 들였음을 선포했다.


“이제 너희는 두 번 다시 되돌아갈 수 없으리라.”


미래를 보며 과거를 향해 대소를 터트리는 광인, 마옥[魔獄]을 품어 사지[邪地]로 화한 대지의 주인으로서 세상 그 누구보다 짙은 광기를 머금은 자.


이면의 대칭점에 선 괴물들에 의해 심신이 부서지며 미쳐버린 광인, 타고난 재능도 가진 바 능력도 미천하여 버려질 재목으로도 선택받지 못했으나, 하나의 굳은 의기와 더 단단한 의지로서 삼도천을 되건너 온 자.


자신의 약함을 깨닫고 비겁함을 욕하며 속으로 붕괴되어버린 광인, 친우의 도움으로 죽음을 피하였으나, 이미 뒤틀려 버린 인과율 속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자.

그들의 삶이 그리던 선과 선이 뒤엉켜 이어지니 우연과 우연의 만남을 필연이요, 결국 걷게 될 길을 숙명이라고 하더라.


그 거역할 수 없는 이름 아래 뒤엉킨 광인들의 삶을 누가 있어 짐작할 수 있으리오. 친우는 곧 다가올 작별을 아쉬워하는 듯, 서로의 길이 갈리고 말았음을 서러워하듯 마주보며 피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고귀하고 위대한 자여, 고금 아래 홀로 선 무적자여, 그대의 유산이 그렇게 서글피 전해지는구려.

-서[書]-


작가의말

제 2장의 첫번째 챕터, 친우가 끝이 났습니다. 재미있게 보셨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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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엽인들 [친우..동생] 17.01.12 429 7 9쪽
91 엽인들 [친우..형] 17.01.11 425 11 10쪽
90 엽인들 [친우..파인(破人)] 17.01.10 507 11 12쪽
89 엽인들 [친우..간섭 ] 17.01.10 424 9 11쪽
88 엽인들 [친우..鬼 2] 17.01.09 365 12 9쪽
87 엽인들 [친우..鬼 1] 17.01.09 396 9 12쪽
86 엽인들 [친우..숙명] +1 17.01.09 414 11 9쪽
85 엽인들 [친우..脫] +2 17.01.06 346 10 11쪽
84 엽인들 [친우..남명진] 17.01.06 374 11 13쪽
83 엽인들 [친우..징조] 17.01.04 421 10 12쪽
82 엽인들 [친우..이수진, 정미혜] +1 17.01.04 555 12 11쪽
81 엽인들 [친우..김창수] 17.01.03 364 11 12쪽
80 엽인들 [친우..필연] 17.01.03 401 11 9쪽
79 엽인들 [친우..2] 16.12.30 450 15 11쪽
78 엽인들 [친우..1] 16.12.30 586 12 11쪽
77 엽인들 [최동민..어떤 죽음] 16.12.29 515 12 8쪽
76 엽인들 [최동민..어떤 삶] 16.12.29 592 13 11쪽
75 엽인들 [학살조장..귀향] +2 16.12.28 708 15 10쪽
74 엽인들 [학살조장..2] 16.12.28 517 11 12쪽
73 엽인들 [학살조장..1] 16.12.28 603 11 11쪽
72 엽인들 [다프네..사명] 16.12.27 423 13 13쪽
71 엽인들 [다프네..3] 16.12.27 518 11 13쪽
70 엽인들 [다프네..2] +2 16.12.26 523 14 13쪽
69 엽인들 [다프네..1] +2 16.12.26 580 12 12쪽
68 아프가니스탄 [Episode..5] 인연 +1 16.12.23 520 16 10쪽
67 아프가니스탄 [Episode..4] 인연 16.12.23 485 13 11쪽
66 아프가니스탄 [Episode..3] 예지자 16.12.22 710 12 9쪽
65 아프가니스탄 [Episode..2] 예지자 +1 16.12.22 578 12 12쪽
64 아프가니스탄 [Episode..1] 예지자 16.12.22 556 1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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