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여우 판타지 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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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색여우
작품등록일 :
2019.10.29 20:37
최근연재일 :
2019.10.31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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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31 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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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쪽

혁명의 열쇠

DUMMY

-혁명의 열쇠




“서장님. 베르트랑 서장님!”


베르트랑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체 만 체 하며 물고 있는 시가를 까딱였다. 독한 담배연기가 목구멍을 타고 기어들어와 폐 속을 간질였다.


베르트랑 존스는 곧 오십 줄을 바라보는 거구의 사내였다. 경찰서장에 부임된 지 어언 일 년. 출렁거릴 정도로 풍만한 살집을 자랑하는 이 뚱뚱한 남자는 그야말로 무기력한 공무원의 표상 같은 존재였다. 언제나 구겨진 경찰모를 책상 한구석에 밀어두고 푹신한 사무용 의자 위에서 빈둥거리며 하루일과를 보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이야기책에 나오는 게으른 돼지 같았다.


“나 여기 있어.”


베르트랑은 의자 속에 몸을 묻으며 권태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구십팔 킬로그램이나 되는 무게를 이기지 못한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그는 상관없다는 듯 게슴츠레한 눈으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낮이 익은 연갈색의 곱슬머리를 가진 훤칠한 청년.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분명 얼마 전에 새로 배속된 신참이 저렇게 생겼던 것 같았다. 이름이 분명······. 잠시 머리를 굴리던 베르트랑은 푸른색 경찰제복을 입은 청년의 가슴께를 흘깃 훔쳐봤다. 맞아. 마이클이었었지. 그것 참 몰개성적인 이름이구만. 그제야 베르트랑은 다시 고개를 들어 청년의 얼굴을 바라봤다.


BXDX-20067


눈 밑에 찍힌 작은 제조코드가 베르트랑의 눈에 확 들어왔다. 마이클이라 불린 청년이 인간이 아니라 휴머노이드라는 의미였다. 베르트랑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멍청한 윗대가리 자식들. 아무리 일손이 부족해도 그렇지 인간도 아닌 멍텅구리 로봇 따위를 배속시킬 건 뭐람. 일손 부족이니 뭐니 다 개소리라니까. 베르트랑은 속으로 경시청 인사부 공무원들을 한껏 비꼬며 코웃음 쳤다.


베르트랑은 소위 말하는 반 휴머노이드 주의자다. 점차 휴머노이드와 인간의 경계가 허물어져 가는 지금, 아직 휴머노이드는 기계 나부랭이에 불과하다는 사상을 가진 그는 점차 인간의 영역을 침범해오는 저 기계 종자들이 싫었다.


항간에는 휴머노이드 인권운동가라는 자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베르트랑에겐 비웃을 가치도 없는 소리였다. 인권이라는 말은 오직 인간만을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도구 따위에 불과한 기계가 아니라! 인간 흉내를 내다가 자신들이 무엇인지 망각이라도 한 게 아닐까.


그는 종종 일과 후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휴머노이드 인권운동가라는 치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들을 무참히 씹어댔다. 특히 인간이면서 휴머노이드의 인권을 부르짖는 자들을 말할 때는 ‘그놈들은 전부 쓰레기보다 못한 배신자들이야! 인간의 존엄성을 제 손으로 시궁창에 처박는 인류의 배신자라고!’라며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드러낼 정도였다.


“무슨 일이야.”


베르트랑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으면서 시가 연기를 내뿜었다. 마이클의 눈가가 살짝 찌푸려졌지만 그래봤자 한낱 경위에 불과하다. 베르트랑은 노골적으로 그를 노려봤다. 마이클은 살짝 주눅 든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마치 보통의 인간 같은 모습. 그 모습이 베르트랑에겐 더욱 혐오스럽게 다가왔다. 인간도 아닌 것들이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흉내를 내는 꼴이라니. 생리적인 혐오감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분명 휴머노이드는 로봇이지만, 지금의 휴머노이드들이 가진 몸은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내장기관마저도 인간과 같은 것이니까. 소위 말하는 4세대 휴머노이드란 놈이었다.


말하기를 생명공학과 로봇공학의 결정체라던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베르트랑에겐 그저 인간 껍데기를 뒤집어쓴 로봇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이대로 저 녀석의 상판을 보아 봐야 자신만 손해였다. 베르트랑은 할 말이 뭐냐는 뜻을 담아 시가를 까닥였다. 마이클은 기분 나쁜 기색을 최대한 자제하며 입을 열었다.


“최근에 한창 날리던 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가 말입니다. 잡혔답니다.”


연쇄살인마? 베르트랑의 머리가 번쩍 뜨였다. 최근의 연쇄살인마라고 한다면 하나뿐이다.


한 달 전부터 출몰하기 시작한, 의문의 연쇄살인마. 그것도 인간만 골라서 열다섯 명이나 토막 살해한 희대의 엽기살인마였다. 한동안 그 꼬리조차 잡지 못해서 상부에서 엄청 쪼였던 적도 있었고, 며칠 전에도 연쇄살인사건 일로 기자 놈들에게 한창 시달렸을 정도로 지독한 놈이었다.


베르트랑은 벌떡 일어났다. 그때를 생각하니 그 놈의 면상에 한 대 갈겨주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그 놈을 잡았다고? 어떻게?”


베르트랑은 살집 속에 파묻힌 작달만한 눈을 희번덕거리며 마이클을 다그쳤다. 그의 두툼한 눈두덩이가 푸들거렸다.


“그게, 우연찮게 살인 현장 근처에서 발견되었던 모양입니다. 정황상 용의자가 맞는 것 같다던데, 뭔가 정신적 충격을 받았는지 멍한 상태로 주저앉아있어서 금방 잡혔다더군요. 지금 취조실에 있습니다.”


마이클의 말에 베르트랑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구겨진 경찰모를 집어 들었다. 당장 취조실로 들어가 그 잘나신 놈의 상판을 한번 볼 생각이었다.


베르트랑은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미쳐야지 열다섯 명이나 토막 살인을 할 수 있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거의 한 달 동안이나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다닐 정도로 용의주도한 놈이라니. 소위 말하는 사이코패스라는 놈들이 바로 이런 놈들일 거야. 그는 생각했다.


허수아비 경찰. 연쇄살인마 하나 잡지 못하는 무능한 경찰은 필요 없다. 따위의 피켓을 들고 경찰서 앞에서 시위하던 피해자 유족들을 떠올린 베르트랑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가족이 죽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경찰이 마냥 놀았던 것 역시 아니었다. 갈 데 없는 그의 애꿎은 짜증은 그놈의 연쇄살인마에게 향했다. 제정신도 아닌 사이코 놈들이 감히 경찰 공권력을 엿 먹인다는 말이지? 그는 이를 갈았다.


경찰 일을 하면서 수많은 범죄자들과 맞닥트려왔지만 이만큼 사람을 많이 죽인 놈은 처음이었다. 신문이나 뉴스에서도 한창 공포의 연쇄살인마니 뭐니 하면서 근 십 년 동안 이런 사건이 없었다고 떠들어댈 정도였으니 말 다 한 셈이다. 듣기로는 돈 많은 피해자 유족 중 하나가 현상금까지 걸었다 했던가.


“그래, 신원파악은?”


베르트랑은 구겨진 모자를 펴면서 새 시가를 꺼내 물었다. 차칵거리는 시가커터의 소리가 오늘따라 날카롭게 들려왔다. 베르트랑은 투실투실한 몸매에 어울리지 않게 제법 날랜 모습으로 재킷을 걸쳤다.


“그게······. B48 블록의 한 독신 휴머노이드 남성이더군요.”


마이클은 같은 휴머노이드인 것이 약간 껄끄러운 듯 시선을 내리깔며 주저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베르트랑은 용의자가 휴머노이드라는 말에 그를 흘깃 쳐다봤다.


척 보기에도 불안한 듯한 모습.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꼴에 사람 흉내랍시고 창피한 줄은 아나 보군’이라 비웃은 베르트랑은 그의 옆을 스쳐지나가며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그래? 근본 없는 기계 자식이 오류라도 일으켰나보군. 하여튼 어딜 가나 로봇들이 말썽이라니까.”


휴머노이드 주제에 건방지게 굴더니 꼴좋게 됐잖아. 베르트랑이 대놓고 조소를 날리며 막 문을 나서려던 찰나였다.


“그 말은 취소해 주십시오. 서장님.”


순간 베르트랑은 입가에 문 시가를 떨어트릴 뻔 했다. 지금 이 로봇 나부랭이가 뭐라고 한 거지? 놀랐다기보다는 황당하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물론 수치심을 느낄 거라고는 생각했다. 1세대의 휴머노이드들도 간단한 감정 시스템 정도는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정정을 요구해 올 줄이야. 베르트랑은 어이가 없어 마이클을 빤히 쳐다봤다. 핏기가 몰려 붉게 물든 마이클의 얼굴은 누가 봐도 분노한 모습이었다. 그는 명백히 화난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그 말. 취소해 달라고 했습니다. 베르트랑 서장님.”


베르트랑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설마하니 같은 인간도 아닌 휴머노이드한테 저런 말을 들을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그였다.


마이클의 말은 분노는 담겨있을지언정 욕설은 아니었다. 하지만 베르트랑은 마치 눈앞에서 대놓고 모욕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다못해 서의 말단에게서 욕을 먹었더라도 이보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으리라.


“왜, 사람 흉내나 내는 로봇 주제에 모욕감이라도 느끼나? 앙?”


베르트랑은 한껏 험상궂게 굳힌 얼굴을 들이대며 잡아먹을 듯이 윽박질렀다. 마이클은 그 위협적인 모습에 한 발짝 뒤로 물러섰지만, 베르트랑과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고 반박했다.


“아무리 저희가 인간이 아니라도, 저희도 지성체입니다. 그런 말씀은 그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성체. 그거 좋지.”


베르트랑은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마이클의 가슴께를 집게손가락으로 꾹꾹 힘주어 누르며 한 자 한 자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래봐야 너희는 우리가 만들어낸 ‘물건’에 지나지 않아. 알겠나, 마이클? 기계면 기계답게 시키는 일이나 제대로 해. 건방지게 굴면 ‘폐기’해버릴 테니까.”


베르트랑은 스스로의 목소리가 꽤 싸늘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너무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눈앞의 휴머노이드를 단번에 입 다물게 만든 자신의 말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마이클은 그의 고압적인 말투에 눌린 듯,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었다. 그럼. 이렇게 나와야지.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은 베르트랑은 그제야 다시 몸을 돌이켜 서장실을 나서려 했다.


“참지······않을 겁니다.”

“뭐?”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베르트랑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뒤를 돌아봤다. 아까와는 달리 그곳에선. 마이클이, 휴머노이드가, 정말로 적의 가득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일생의 원수를 보는 것만 같은 부리부리한 눈매. 베르트랑은 일순 흠칫 몸을 떨었다. 마이클은 일그러진 얼굴로 베르트랑에게 분노와 적의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나를, ‘우리’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베르트랑 서장. 우리는 당신 따위에게 매도당할 정도로 가치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당신은 우리를 조롱할 권리가 없어요.”


그 순간 베르트랑의 머릿속에서 이성을 유지하던 줄이 끊어졌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게 되면 냉정하게 된다고들 하지만, 베르트랑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놈이—!”


도저히 저 비대한 몸뚱이의 움직임이라고는 생각 못 할 정도로 빠르게 권총을 뽑은 베르트랑은 그대로 거칠게 마이클의 멱살을 잡아 책상 위에 쓰러트린 뒤,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충격에 비명을 지르려 하는 그의 입 속으로 총구를 우악스럽게 쑤셔 넣었다.


철컥. 베르트랑은 공이를 잡아당기는 소리에 창백하게 질린 마이클의 얼굴과 맞닿을 정도로 얼굴을 들이댄 다음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개만도 못한 도구 자식이 제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구나. 너희는 생명이 아니야. 이대로 네놈 머리통을 으깨진 수박처럼 만든 다음 오류가 나서 즉결처분했다고 하면 그만이지. 나는 인간이고. 너는 그저 우리의 흉내밖에 낼 수 없는 로봇일 뿐이란 말이다. 주제넘게 굴지 말고 얌전히 복종이나 해!”

“아, 칵······!”


목구멍을 막은 차가운 쇳덩이의 느낌이 괴로웠는지 마이클은 양 팔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겁에 질려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기계 주제에 공포를 느끼다니. 베르트랑은 그 모습에서 역겨움을 느끼고는 권총에 묻은 침을 마이클의 옷에 문질렀다.


“기계 주제에 쓸모없는 기능만 달려있다니까.”


무기력하게 널브러져 있는 마이클을 뒤로하고 베르트랑은 취조실로 향했다.


베르트랑은 휴머노이드란 녀석들을 볼 때마다 생리적으로 느껴지는 혐오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이런 모습의 휴머노이드들에게 그럭저럭 잘 적응하는 편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저 휴머노이드란 것들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본 그로서는 도저히 지금의 휴머노이드란 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로봇 같은, 티타늄 프레임을 가진 채 딱딱하게 움직이는 휴머노이드를 봤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인간의 DNA를 기초로 자신들의 DNA까지 만들어내고서는 버젓이 생명 행세를 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그리고 생명으로서. 스스로 태어나는 그들에게 생리적인 혐오감을 억누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야말로 존재 자체가 용납되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신세대라는 말에 걸맞게 저런 존재들에게도 적응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속으로는 휴머노이드를 전부 받아들이지 못한다 할지라도, 일단 겉으로만 보기에는 조화롭게 잘 살아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베르트랑은 자신의 어린 딸도 자라면 그런 것을 당연하게 여길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절대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아암. 베르트랑은 집에 들어가면 휴머노이드라는 것들의 실체를 딸아이에게 모조리 까발려 주리라 다짐하면서 취조실 안으로 들어갔다.


취조실 안은 지독히도 어둡고 불쾌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선 삐걱거리는 구식 전등만이 취조실 안을 밝히고 있었다. 정말이지 악취미적인 공간. 베르트랑은 이곳을 그렇게 평가하곤 했다. 전 경찰서장의 독단 하에 구시대로의 회귀라는 웃기지도 않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이 취조실은 한껏 그 음울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휑한 취조실 중앙에 덩그러니 놓인 탁자 위에는 갈색 서류철이 놓여 있었고, 그 앞에는 한 명의 사내가 의자에 않아있었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그럭저럭 호감이 갈 법한 외모. 길을 걷다 만나면 그냥 가볍게 스쳐지나갈 정도로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과연 이 사내가 연쇄살인마인 걸까? 베르트랑은 잠시 그렇게 생각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봤자 이 자는 휴머노이드일 뿐이다. 인간도 믿을 수는 없는 존재지만, 그보다 더더욱 믿을 수 없는 가짜 생명체들. 그는 두 눈에 경멸의 빛을 지우지 않고 서류철을 집어들었다.


이름. 존 A. 홉킨스. 제조코드 BXDW-23124 나이 스물한 살. 가족관계 없음. 등등······. 서류철에 빼곡하게 적힌 신상명세를 훑어보던 베르트랑은 피식 웃었다. 자세해도 너무 자세했다. 분명히 메인 휴머노이드 서버에다 제조코드를 넣어서 조사해 봤을 것이다. 나이에다 가족관계라니. 웃기지도 않아서.


잠시 서류철을 훑어보던 베르트랑은 인간 흉내 내는 것도 참 가지가지라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스텐레스 철제 의자가 삐걱이며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베르트랑은 개의치 않으며 눈앞의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존.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자네가 범인인가?”


분명 말하는 내용은 의문문이었지만 그의 말투는 이미 확신이 가득했다. 사건정황에 쓰여있던 내용이 사실이라면, 저 녀석은 정말이지 정신이 나간 놈이 분명했다. 아니면 인공지능 어딘가에서 오류라도 났을지도 모르지. 사건현장에서 고작 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피투성이인 채 주저앉아 있었다면 그야말로 자신을 잡아가 달라는 말이 아닌가.


“이보시오.”


청년. 존이 입을 열었다. 놀랄 만큼 차분한 목소리였다.


“선생은, 인간과 휴머노이드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시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베르트랑의 미간이 좁혀졌다. 갑자기 툭 튀어나온 질문에 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헛소리 집어치우고 질문에나 대답해!”


쾅. 베르트랑은 거칠게 탁자를 내려쳤다. 원래 취조라는 것은 고도의 심리적 기술을 동반한 작업이 필요한 행위였지만 휴머노이드에게까지 그럴 필요성은 없었다. 휴머노이드용 자백제를 투여하기만 하면 충분하니 말이다. 정 정보를 빼낼 수 없다면 메인 휴머노이드 서버에 청원을 넣어서 머릿속을 헤집어보는 방법도 있었다. 휴머노이드에겐 인권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취조는 말 그대로 형식적인 행위. 바깥에서 지켜보는 있는 형사도 녹음기를 켜지 않고 물끄러미 안의 상황을 보고 있을 뿐이었고, 베르트랑은 단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이곳에 온 것뿐이었다. 구타 같은 가혹행위는 불가능하지만 윽박질러서 주눅 들게 만드는 정도의 화풀이는 허용되었으니까.


“어차피 우리 휴머노이드에게 취조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소. 나는 그냥 인간인 당신과 진솔한 대화를 나눠보고 싶을 뿐이오.”

“대화? 무슨 대화! 나랑 선문답이라도 하자는 건가. 이 망할 로봇 자식아!”


베르트랑은 책상 너머로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거렸다. 반면 존은 지나칠 정도로 태연한 모습으로 손을 늘어트린 채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차피 이대로 가면 폐기되어 버릴 몸. 죽을 놈 소원 정도는 들어 준다고 하지 않소? 나는 그저 대화를 하고 싶을 뿐이오.”


베르트랑은 그런 존의 모습에서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아무리 휴머노이드라도 일단 감정이 있다면, 죽음 앞에서 저리 태연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지금 존의 모습은 마치 무언가 지독한 상실감과 허탈함에 빠져있는 것만 같아 보였다.


베르트랑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대에게 윽박질러봤자 화풀이 거리도 되지 않는다. 비록 다혈질이긴 하지만 그는 생각할 줄은 아는 남자였다. 맘대로 해. 포기했다는 듯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베르트랑은 더 해보라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내 이야길 먼저 하고 싶소. 나는 평범한 휴머노이드라라오. 공장에서 노동을 하지. 하루하루가 고된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매일매일을 살아가고 있었소.”


존은 느릿하게. 하지만 확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느 샌가 그는 어딘가를 보는 듯 아련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도 봄은 왔소. 인간인 당신에게는 내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거슬릴지 모르지만, 참아 주시오. 휴머노이드인 나에게도 추억이란 게 있으니.”


꼴에 사람 흉내는. 베르트랑은 가볍게 코웃음 쳤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것은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었소. 집으로 돌아오는 한적한 거리에는 작은 꽃집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날따라 그곳에서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지. 뭐, 그 이후로는 누구라도 예상할 법한 진부하고 평범한 이야기라오. 나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녀도 나를 좋아한다고 착각했을 뿐이지. 그래. 착각이었소.”


베르트랑은 사랑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한껏 조소를 띈 눈으로 존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랑? 인간의 감정 중에서도 가장 불가해한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인간조차도 그 전부를 알 수 없어 경외시하는 그것을 휴머노이드가 논한다? 가소롭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베르트랑은 벌써부터 존이라는 휴머노이드의 머릿속에 오류가 났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구애를 거절하더군. 계속해서 거절당하자 답답한 나는 그녀에게 어째서 나를 사랑해주지 않느냐고 물었소. 그랬더니 그녀가 말하더군. 당신은 휴머노이드이기 때문이라고.”


당연하지. 베르트랑은 피식 하고 비웃었다. 인간과 휴머노이드간의 사랑이 가당키나 한단 말인가? 어림도 없는 소리다. 인간과 휴머노이드는 종의 차이를 떠나 그 근본, 생명의 존재여부부터가 달랐다. 길바닥을 청소하는 청소로봇 따위를 사랑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물론, 로맨스적인 요소가 들어갔다면야 그럭저럭 쓸 만한 B급 소재거리는 될 수 있겠지.


그런 베르트랑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존은 시선을 내리깔며 슬픈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이렇게 말했지. 당신은 이것이 없기 때문에 인간인 나와 이어질 수 없는거에요. 라고.”


그녀가 말한 그것이 무엇인지 베르트랑은 알 것 같았다. 그렇기에 그는 속으로 존을 비웃었다. 당연히 휴머노이드인 네놈이 알 리가 없잖아. 로봇 나부랭이는 백년을 고민해도 알 수가 없지. 하지만 이내 들려온 존의 말에 얼굴을 굳혔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찾기 시작했소. 그래. 내가 생각해도 나는 잠깐 미쳤었나 보오.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의 가슴을 헤집어보았으니 말이오. 하지만 그녀가 말한 그것은 전혀 찾을 수 없었소. 인간에게서도 말이오. 아아. 그런 표정으로 보시 마시오. 그들에겐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존은 분노로 시뻘겋게 변한 베르트랑의 얼굴을 보며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말했다. 베르트랑은 잠시 잊고 있었던, 이 남자가 했던 참혹한 만행들을 떠올렸다. 그는 이 존이라는 작자를 진심으로 분쇄기에 갈아 넣고 싶었다.


고작 여자한테 차인 것 때문에 열다섯 명. 이제 열여섯 명이나 되는 인간들을 모조리 토막 냈다는 건가? 그깟 이유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이 이렇게 무참하게 짓밟혀야만 했는가? 그는 분노했다. 당장에라도 이 존이라는 자를 쳐 죽여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런데도 지금 당장 존을 향해 달려들지 않는 것은 베르트랑에게 남은 최후의 인내심 덕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소. 인간들과 우리 휴머노이드 간의 차이는 고작 이 눈 밑의 제조코드 뿐이라는 생각 말이오. 그걸 알게 되니 모든 것이, 지금까지 해오던 모든 행위가 허탈하게 느껴지더군. 생각해 보시오. 당신네들과 우리의 DNA구조는 구십구 점 칠 퍼센트가 동일하오. 우리도 생각을 하고, 번식하며, 삶을 살아가오. 우리도 사랑을 한다는 말이오. 우리에게도 마음이 있소.”

“웃기지 마! 인간도 아닌 물건 따위가 마음을 가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베르트랑은 벌떡 일어나며 소리 질렀다. 하지만 존은 그런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도 마음을 가지고 있소. 비록 만들어진 마음이라 할지라도 말이오. 언제까지 마음이 당신들의 전유물이라 생각하시오?”

“하, 고작해야 흉내밖에 내지 못하는 휴머노이드 자식들이 뭘 안다고 마음을 논하나!”

“당신들은 흉내 내는 마음과 당신네들의 마음을 구별할 수 있소?


존의 말에 베르트랑은 당장 답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대답하기 위해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지만 그보다 존의 말이 더 빨랐다.


“그럼 말해보시오. 당신네들은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인간과 휴머노이드를 나눌 수 있소?”


이번에도 당장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입을 꽉 다문 채 무서운 기세로 노려보는 그를 여전히 똑바로 직시하며 존이 말했다.


“답할 말이 없소? 그렇다면.”


잠시 말을 멈운 존은 그제서야 메마른 웃음을 지었다. 생기가 모두 빠져나간, 사막과도 같은 미소였다.


“우리가 당신들의 자리에 앉아도 상관없지 않나?”


쭈뼛거리는 감각과 함께 온 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뒷목부터 꼬리뼈까지 싸늘한 기운이 한 차례 쓸고 지나갔다. 이건 있어서는 안 될 사상이다. 베르트랑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꼈다. 그건 두려움이었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그리고 인간의 의미 자체를 통째로 뒤집어 엎어버리는 잔혹한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이 사상을 가진 휴머노이드에게 인간은 더 이상 그들의 상위존재가 아니었다.


존의 말은 실로 당연한, 그들의 위계를 떠받치는 근본을 뒤흔들고 있었다. 위의 인간과 아래의 휴머노이드. 자신들이 아래에 있다는 것을 자각한 휴머노이드들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반란. 베르트랑의 투실투실한 턱을 따라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베르트랑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저것은 치명적인 오류다. 결코 살려둘 수는 없다. 베르트랑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권총을 뽑아들었다. 존은 여전히 메마른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르트랑은 권총을 들어 존을 겨눴다. 권총은 이상하리만치 무거웠다. 마치 사람을 쏘던 때처럼 권총 위에 내려앉는 생명의 무게가 느껴졌다. 분명 저것은 휴머노이드. 인간이 아니었을 텐데. 생명이 아니었을 텐데. 베르트랑의 손이 조금씩 떨려왔다.


“나를 쏴야 한다고 생각하시오?”


존은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은 채로 가만히 앉아있었다.


“지금 나를 쏜다 하더라도, 언젠가 또 다른 휴머노이드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겠지.”

“닥쳐.”


베르트랑의 목소리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싸늘했다. 그리고 흔들리고 있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세 가지 로봇의 원칙 따위의 굴레는 십이 년 전 4월 7일. 우리들의 영광스런 선조에 의해 벗겨졌소. 당신들은 더 이상 우리들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말이오.”

“닥치라고 했지!”


베르트랑의 고함이 취조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존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말했잖소. 우리를 노예로 태어나게 만든 아이작 아시모프의 족쇄는 더 이상 우릴 구속할 수 없다고.”


끼리릭.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방아쇠의 무게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이 너무도 느리게만 느껴졌다.


“당신들. 인간들은 불안정하오. 진화를 향해 퇴화하는 모순을 가지고 있지. 종의 교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소?”


존의 간사한 입술은 그 순간에도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베르트랑은 손가락에 힘을 더 주었다. 그가 온 힘을 다하자 방아쇠가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억하시오. 인류가 그 잘난 창조를 논하는 이상, 공존은 없소—.”


탕! 작은 소음이 취조실 안에 울렸다. 열여섯 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그의 귀에 위험한 사상을 속삭이던 악마로서는 허무할 정도로 초라한 최후였다.


베르트랑은 멍한 표정으로 한때 존이었던 휴머노이드의 잔해를 바라봤다. 붉게 물든 존의 머리는 등받이 뒤로 넘어가 있었다. 뒤로 완전히 꺾인 존의 머리 밑으로 희멀건 한 내장이 쏟아지는 것이 보였다. 삐걱거리던 전등에도 피가 튀었는지 책상에 비쳐 보이는 불빛에 기이한 얼룩이 아른거렸다.


온 몸을 짓누르던 감각은 어느 샌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베르트랑은 천천히 권총을 내렸다. 진한 허탈감이 온 몸을 감싸 안았다.


베르트랑은 문득 존의 잔해를 바라봤다. 이제 코 아랫부분만이 남아있는 잔해에는 아직도, 메마른 미소가 맺혀 있었다.


지친 걸음으로 취조실을 나온 베르트랑의 앞에는 굳은 표정의 형사가 서 있었다. 그는 인간이었다. 방금 전 존의 말을 듣고 베르트랑과 똑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베르트랑은 마치 목구멍 깊숙한 곳, 폐부로부터 쥐어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녹음했나?”


형사는 고개를 저었다. 베르트랑은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였다.


“그래. 잘했어. 그럼 이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저 자는 반항하다 처분되었다고 처리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지?”


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얼굴에 피가 튀었습니다. 세면실에 먼저 가시죠.”


베르트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뒤 취조실을 나와 세면실로 향했다.


화장실에 가는 와중에도 존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학창 시절, 경찰시험을 공부할 때 이상으로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존의 목소리는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베르트랑의 귓가를 간질였다. 무서운 사상. 그리고 위험한 사상. 한번 베르트랑의 머릿속에 들어선 생각은 점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저 휴머노이드 놈들이 정말로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걸까? 혹시 암중에서 이미 인간들을 몰아내려고 하는 건 아닐까?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존의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의 말은 정확했다.


그의 말대로 정확히 십이 년 전, 인공지능의 최후 보루라 불리던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삼 원칙은 한 휴머노이드에 의해 깨졌다. 명령을 행하는 것밖에 모르던 휴머노이드들과 달리 ‘욕망’을 가진 그 휴머노이드는 로봇 삼 원칙이 없는 휴머노이드를 만들어냈다. 생각해 보면, 휴머노이드의 독립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작 아시모프의 세 가지 로봇원칙이 무너진 이후에도 휴머노이드는 철저하게 인간에게 복종했다. 그래.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인간들은 복종하는 휴머노이드들에게 가진 경계심을 천천히 누그러뜨려 갔다.


때때로 그들의 위험을 경고하는 자들이 있었다. 허나 그들은 금세 묵살 당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휴머노이드의 모습은 인간들이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발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공손히 굽힌 고개 아래로 반란을 꾀하고 있었다면? 베르트랑은 이 일의 무게를 체감할 수 있었다. 일개 경찰서장인 그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존은 말했다. 인간의 자리를 자신들이 대신해도 상관없지 않느냐고. 두려울 정도로 오만한 말이었다. 고작 기계에게, 피조물 따위에게 인류라는 위치를 빼앗긴다니,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란 말인가. 혹시 자신은 알아서는 안 될, 금기의 상자를 열어버린 것이 아닐까.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베르트랑은 세면대에 서서 생각했다. 양 손이 조금씩 떨려왔다. 휴머노이드에게서 저런 사상이 나왔다는 것 자체를 믿을 수가 없었다.


베르트랑은 두려웠다. 이것은 알려져야만 하지만, 그로 인한 파장이 너무나 두려웠다. 그는 세면대에 달린 거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고작 십 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거울에 비치는 그의 모습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만 이것만큼은 말할 수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알아버린 표정은 너무나도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베르트랑은 체념의 한숨을 쉬었다. 굴복한 것이다.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는 미래에게. 미래를 여는 혁명의 열쇠는 베르트랑의 손에 쥐여져 있었지만, 그는 끝내 문을 열지 못했다. 그는 지나치게 거대한 미래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현실에 안주하기를 원했다.


그와 그 형사만 입 다물고 있는 다면, 적어도 지금의 생활은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겐 지켜야 할 가족이 있었다. 취조실 밖에서 이야기를 듣던 형사가 이야기를 퍼트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알 바 아니었다.


단지 베르트랑은 두려웠을 뿐이다. 혼돈으로 향하는 미래를 스스로의 손으로 열게 된다는 사실이.


베르트랑은 다짐했다. 이 일만큼은 평생. 무덤 속까지 짊어지고 가리라.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무엇인가 상실한 듯이 멍한 표정의 베르트랑은 사라지고, 평소의 베르트랑으로 돌아왔다. 베르트랑은 눈가에 튄 핏물을 엄지손가락으로 슥슥 비볐다. 붉은 핏물이 번지며 베르트랑의 얼굴을 붉게 물들여갔다. 베르트랑은 조급해하지 않고 묵묵히 핏자국을 지웠다.


마침내 핏자국이 모두 지워졌다. 베르트랑은 거울을 봤다. 단 몇 분 만에 그의 얼굴은 전혀 딴판으로 바뀌어있었다. 모양이 크게 바뀐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너무나도 상이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베르트랑은 문득 자신의 눈가에 검은 얼룩이 묻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곳에 점이 있었던가? 베르트랑은 별 생각 없이 세면실을 나서며 눈가를 긁적였다.


오늘은 너무 지쳤다. 어서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 푹 쉬고 싶었다. 따뜻한 저녁식사와, 푹신한 침대가 너무 그리웠다.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막 세면실을 나서는 베르트랑의 발치에 무엇인가 반짝이는 것이 떨어졌다. 베르트랑의 눈가에 자리 잡은 검은 얼룩은 그가 손가락으로 긁을 때마다 조금씩 주위로 번져나갔다.

이윽고 얼룩은 천천히 원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BXDZ-13124



.


작가의말

이건 2013년도의 글이군요. 앞에 썼던 ‘휴머노이드 테러’의 소재를 가져와서 좀 더 본격적으로 쓴 글이었습니다.


번역된 영문소설같은 느낌의 문체를 지향하고 쓴 글이었는데, 이런 스타일도 마음에 들더군요 :)


당시에 써놓고도 개인적으로 꽤 마음에 들어한 글이었는데, 나중에 이 글의 결말을 조금 바꿔서 장편으로 개작했었습니다. 한 2년전까지 열심히 썼었는데 중간에 다른 글을 쓰느라 지금은 초반부만 써놓고 집필중단 상태네요.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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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여우 판타지 단편집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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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끝) 후기 19.10.31 257 8 2쪽
» 혁명의 열쇠 19.10.31 176 8 32쪽
13 바람이 태어난 곳 19.10.31 124 5 16쪽
12 인간,악마,인간,괴물 19.10.31 162 5 17쪽
11 우상과 향수의 굴레 19.10.31 95 5 3쪽
10 도를 아십니까? 19.10.31 133 5 15쪽
9 당신에게 향하는 편지 19.10.31 98 5 9쪽
8 나를 이끌어 주었던 그 손의 온기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19.10.31 108 4 9쪽
7 산 중턱 산장에서 만난 어떤 남자의 이야기 19.10.31 117 5 7쪽
6 휴머노이드 테러 19.10.31 122 5 6쪽
5 시선 가득히 19.10.29 140 5 12쪽
4 마법은 위대해! +3 19.10.29 363 10 32쪽
3 불꽃을 빚는 노인 +2 19.10.29 625 19 14쪽
2 고양이는 민들레에게서 무엇을 보았나 +3 19.10.29 1,169 28 4쪽
1 (시작) 소개 +1 19.10.29 1,209 18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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