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여우 판타지 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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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색여우
작품등록일 :
2019.10.29 20:37
최근연재일 :
2019.10.31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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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29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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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쪽

마법은 위대해!

DUMMY

.


소리가 잠기언다. 아래로. 그리고 다시 아래로. 침묵이 그 뒤를 따른다. 소년이 입을 꾹 다문 것만으로도 주위는 놀랄 만큼 고요했다. 먹먹한 정적은 잠시간 이어졌다.


소년은 어째서 침묵을 선택했을까. 왠지 주위가 평소 질리도록 지나다니던 길과 묘하게 다른 분위기라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에? 아니었다.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 정도는 허용범위 내였다. 귀찮게 호기심을 해결하느니 일초라도 빨리 학교에 도착하는 게 지각 일보직전인 소년의 가까운 미래를 위해서라도 현명한 선택이었으니까. 그건 초등학생인 소년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갑자기 웬 소녀가 소년의 앞에 떡하니 나타났기 때문일까? 아니었다. 소년보다 대여섯 살쯤 많아 보이는 소녀는 왠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지만 그것이 오늘 아침에 있는 기말고사 시험보다 중요하진 않았다. 오늘 기말고사를 망치면 소년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하는 어머니가 컴퓨터를 가지고 그 옛날 갈릴레이 선생이 피사의 사탑에서 행했던 실험을 재현할지도 몰랐으니까.


혹시나, 갑자기 툭 튀어나온 소녀가 소년을 향해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나와 함께 세상을 구하러 가자.”라고 되도 않는 개소리를 지껄였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주위에 개소리를 지껄이는 사람은 서울역 반경 오백 미터를 미칠듯한 속도로 패트롤하는 사이비 전도사들로도 충분했다. 더 이상의 종교권유는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 교를 믿는 소년에게 아무런 영항을 주지 못했으니까.


사실, 소년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눈앞에 나타난 이 소녀가 소주를 한 사발 깠던지 본드를 한 사발 깠던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당장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소년은 아직 똥하고 된장을 먹어보지 않고는 구분할 줄 모르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으니까.


소년의 머리 위에 떠올라 있던 ‘Loading’ 표시가 마침내 사라졌다. 열심히 굴려서 상황을 정리한 소년이 결론을 내린 것이다. 소년은 머릿속에 떠오른 결론을 천진난만하게 내뱉었다.


“누나 그 현대 최신 유행하고는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악취미적인 모자는 뭐에요?”


소년은 순수했다. 좋게 말하면 순수하다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천지분간을 할 줄 모른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소년은 머리에 정리된 감상을 그대로 읊었다. 때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함이 가장 잔인할 때도 있다.


굳이 덧붙이자면, 사실 소녀의 모자가 좀 유행이라거나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타입이긴 했다. 독특한 모양의 볼륨 베레모에, 색은 검은 색이다. 소녀가 그 상판만으로 지중해를 가르는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라면 모를까. 저런 풍성한 모양의 베레모는 소화해내기 쉽지 않았으니까.


뭔가 대놓고 시비를 거는 듯한 물음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표정은 순수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순수한 것인지, 아니면 순수를 가장하는 것인지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말이다.


반면 소녀의 경우는 어떨까. 보통의 심상과 가치관을 지닌 소녀였다면 아마도 가슴에 큰 상처, 혹은 자잘한 스크래치라도 나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소년의 눈앞에 서 있는 소녀는 보통이 아니었다. 저런 말을 듣고도 흔들림 없는 부동심은 둘째치고서라도, 애초에 초등학교 4학년의 등굣길을 가로막고 세계를 구하러 가자는 발언을 스스럼없이 해내는 인불이다. 비범하면 비범했지 결코 평범한 소녀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차이는 바로 여기. 상대의 발언에 대한 대응에서 갈린다. 소녀는 오히려 소년의 대답을 듣고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뛰어난 인재구나. 초등학생인데도 논리정연하고 말하는 수준이 높아.”


논리정연이니 뭐니 하는 말이 나온 이유는 솔직히 잘 몰랐지만, 소년은 소녀가 자신을 칭찬하고 있다는 것 하나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야호 칭찬받았다. 초등학생의 인중이 원숭이처럼 길게 늘어났다.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그래도 누나한테 그 모자는 어울리는 것 같아요.”


뭔가 칭찬할 만한 구석이 당장 떠오르지 않아서 대충 던져본 말이었지만 초등학생 치고는 제법 훌륭한 아부멘트였다.


소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소년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정상인과는 살짝 거리가 있어 보이는 소녀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리 나쁘게 들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예쁘다는 말 싫어하는 여자가 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는가. 같은 맥락이었다. 소년은 왠지 쓰다듬는 소녀의 손길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세계를 구하러 갈래, 말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뜬금없는 말에는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머리에 나사가 몇 개 빠진 게 아닐까? 소년은 일단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왜요?”


소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한 이십초 정도가 흘렀을까. 소녀가 대뜸 내뱉었다.


“어른이 하는 말을 들어야지.”

“누나는 어른이 아닌데요?”

“너 짜증나는구나.”


소년의 얼굴은 여전히 순진무구했다. 소녀의 얼굴 역시 여전히 상큼한 미소였다. 분위기는 오월의 따스한 봄바람마냥 훈훈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고 생긋 웃었다.


“자. 이젠 됐지?” 소녀가 소년의 소매를 살짝 매만지며 말했다. 배춧잎과 비슷한 색의 무언가가 흘긋 보인 것도 같았다. 소년은 잠시 팔을 위아래로 흔들어 보이더니,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렸다. 바람이 가득 들어간 소년의 양 볼은 사뭇 귀여웠다.


“누나. 너무 적은데요. 요즘 물가가 얼마인데.”


하지만 소녀는 난처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요즘 세계가 경기침체잖니. 저기 하라는 일은 안하고 패거리 만들어서 놀던 애들은 망한지 오래고, 여기저기 찔러보면서 골목대장 하던 애는 빚만 늘어간다더라.”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소년은 고개를 갸웃했다.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어린아이의 얼굴인데다 뽀얀 피부까지 있으니 그 파괴력이 사뭇 남달랐다. 허나 상대는 암만 봐도 평범함을 포기하다 못해 평범함을 초월해버린 소녀. 그녀는 눈도 깜짝 않고 소년의 소매를 다시 만지작거렸다. 어김없이 이번에도 뭔가가 살짝 스쳐지나갔다. 소녀는 미안하다는 듯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 지금은 이것밖에 없네. 한정판 AK-47 60일치 쿠폰이야.”

“고마워요 누나.”


일단 소년은 순순히 소녀를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딱히 게임 아이템 쿠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은 받은 만큼 일을 해야 한다고 엄마가 여러 번 강조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학교로 가서 기말고사를 치기가 정말로 싫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쉽게도, 눈앞의 소녀를 따라감으로서 일어나는 후폭풍-예를 들어 컴퓨터의 돌연사나 엉덩이 가죽이 너덜너덜해지는 미래 같은-을 예상하기에 초등학생의 사고는 아직 미숙했다. 아마도 그것을 예견할 수 있었다면 소년은 소녀의 손을 잡지 않았을 것이고, 소녀의 말마따나 세계가 멸망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소녀의 손을 마주잡았고, 세계가 구원될 가능성-소녀의 말에 따르면-이 아주 약간은 증가했다.


“그런데 엄마가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라고 했는데.”

“그 입 다물렴.”


그렇게 소년은 세계를 구하기 위한 여행을 떠났다.





소리가 잠기언다. 자동차의 엔진음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주변을 가득 채우지만 소년에게는 닿지 않는다. 소년 주위의 딱딱하게 잠긴 소리는 바깥으로부터의 침입을 허용치 않는다. 소년에게의 소리가 잠길 때는 어김없이, 소년이 깊은 생각에 빠질 때뿐이다.


때로 인간은 주위 사람들 모두가 옳다고 할 때 아니다라고 말해야 할 때가 온다. 커뮤니티로의 동화인가, 혹은 소신의 표출인가. 언젠가 어느 쪽이든 예스와 노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만 할 때는 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소년은 그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한 가지 단언하자면, 소년은 순수한 만큼 옳고 그름을 구별할 줄 몰랐다. 말인즉슨, 좋게 말하면 스스로에게 더없이 솔직하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눈치가 괴멸적으로 없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소년은 이미 스스로의 결론을 내린 상태다. 소년은 주위를 슥 둘러봤다. 등 뒤에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도로를 주행하는 자동차들. 그리고 자신과 소녀의 옆에 서 있는 수십 명의 정신병자들. 그리고 눈앞에는 한반도의 젖줄이었던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말해 무엇 할까. 소년은 한강대교 위에 서 있었다.


풍덩. 언뜻 뭔가 떨어지는 환청이 들린 것도 같았다.


“음. 누나.”

“왜 그러니?”

“이건 별로 좋은 생각 같지는 않은데요.”


소녀는 상큼한 미소를 지우지 않고 소년을 바라봤다. 소녀의 미소 띈 얼굴 뒤로 한 남자가 다리 난간을 넘어 갈릴레이의 자유낙하 실험을 몸소 증명하는 광경이 보였다. 물속에 뛰어들 때 나는 소리는 때마침 지나간 자동차의 굉음에 묻혀 소년에게까지 닿지 않았다. 어쩌면 소년의 귀에만 들리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아마도 소녀의 머리에선 생각보다 좀 더 많은 나사가 빠졌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중요한 부품이 빠졌다던가. 하지만 소년은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마법 세계로 가기 위한 통로가 여기뿐이니 어쩔 수 없잖아?”


아마도 TV에 가끔 나오는, ‘약하는 사람’ 같았다. 소년은 몰래 주머니에 들어 있는 핸드폰을 켜고 112를 눌렀다. 지금만큼은 남들처럼 최신 스마트폰이 아니라 구형 피쳐폰인 핸드폰이 고마워졌다.


“제가 아무리 어려도 한강에 뛰어들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줄 아세요?”


소년의 입이 비쭉 내밀어졌다. 너무 귀여워서 콱 깨물어주고 싶은 소년의 얼굴 뒤로 어떤 여자가 장애물 달리기를 하듯 잽싸게 다리 난간을 뛰어넘는 모습이 보였다.


“얘, 뭘 모르는구나, 한강 다리가 괜히 차원이동의 명소가 된 게 아니란다.”


그리고 마치 소녀의 말에 화답하듯이-풍덩. 이번엔 제대로 들렸다. 소년이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소년은 기회를 보고 있었다. 이 정신나간 집단으로부터 도망칠 기회. 불쌍한 어린이가 위험에 처해 있는데 경찰은 뭐하는 거야. 헬리콥터 같은 걸 보내주나? 순진한 소년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 혹시 고소공포증이 있다면 이건 어때? 빈도로 따지면 이쪽도 만만치 않거든.”


소녀가 뒤를 가리켰다.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다. 소년은 의미를 알 수 없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모습을 본 소녀는 옆에 서 있던 한 남자에게 말했다.


“체스터 씨, 보여주세요.”

“음. 알았으이.”


구수한 사투리. 저 아저씨 암만 봐도 토종 한국인인데 왜 이름이 서구권일까. 소년의 의문을 뒤로하고 체스터란 이름의 남자는 뚜벅뚜벅 힘찬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어 거기는.”


트럭이 오고 있는데. 소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쾅! 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몸이 저 멀리 튕겨져 나갔다. 그 순간만큼은 허공을 유영하는 남자의 몸이 슬로우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그의 주위를 날아다니는 붉은 것까지도. 어쩌면 소년에게만 느리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저 멀리 난간에 처박힌 체스터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밑으로 흐르는 붉은 물은 물감이라기엔 좀 많이 진해 보였다. 소년은 소녀를 돌아봤다. 소녀의 싱그러운 미소가 살짝 옅어진 것 같았다.


“교통사고도 상당히 성공률이 높은 방법이란다. 특히 트럭이 그렇지. 아, 방법이 좀 잔인한가?”


소년은 다시 고개를 돌려 체스터를 돌아봤다. 여전히 체스터는 움직이지 않았다. 생기 없는 눈동자가 소년의 눈동자를 노려봤다. 소년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쏘우보다는 양호한데요.”

“그럼 저쪽으로 갈래?”


얘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걸까. 소년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단호한 부정을 나타냈다.


“이건 미친 짓이에요. 저 그냥 집에 갈래요.”

“어머. 선금 받고 내빼라고 너희 엄마가 그렇게 가르치던?”


소녀의 얼굴이 천천히 가까워졌다. 소년의 육감이 위험하다고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었다. 소년은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엄마라면 이 정신병자 누나의 머리통을 후려갈겨줬을 텐데. 지금 이 순간에도 옆 사람이 한강물로 뛰어들고 있었다.


“우리 좋게 말로 해결하죠. 누나가 준 거 다시 돌려줄게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이상 한번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단다. 그리고 그건 열역학 제2법칙에 위배되지. 다음에 태어나면 타임머신이라도 만들어보렴.”


말이 통하지 않는 것 같다. 역시 미친 사람을 설득하는 건 무리였나 보다. 소년은 생각했다. 천천히 뒷걸음질 치던 소년의 등에 싸늘한 것이 닿았다. 난간이었다. 소년은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검푸른 빛의 한강물이 소년을 기다리듯 스믈스믈 일렁였다. 빨려들 것만 같은 한강물에 소년은 순간적으로 시선을 빼앗겼다. 그리고 등 뒤로 다가오는 소녀의 모습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이곳은 바로. 마법세계란다.”


생긋 미소를 지으며 소녀는 소년의 엉덩이를 뻥 하고 걷어찼다.


소년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하늘이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소년의 시야에 넓고 푸른 들판이 보였다. 어쩐지 엉덩이가 욱신거렸다. 다시 시야가 반전했다. 이번엔 한쪽 발을 든 채 싱글싱글 웃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에 쓴 검은색 볼륨 베레모는 어쩐지 그 미소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 모습도 잠시. 다시 하늘이 보이고, 푸른 들판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들판이 아니라 강이었다. ‘아.’ 그제야 소년은 깨달았다. 자신은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무도 강물 밖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수면은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소년은 눈을 감았다. 물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귓가가 먹먹했다.





소리가 떠오른다. 소년의 세계에서 소리는 아마도 영원히 잠겨 있을 것만 같았다. 소년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귓가에 들리는 따뜻한 목소리가 소년의 의식을 깨웠다.


“일어나렴.”


소년은 눈을 떴다. 소년의 눈앞에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예의 그 소녀가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한 소년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아까 다리 위에 같이 서 있던 정신병자들이었다. 한강 밑으로 뛰어내린 사람들마저 그곳에 있었다. 심지어, 트럭에 치여 곤죽이 되다시피 한 체스터라는 남자마저 말이다.


“깨어났구나.” 소녀가 말했다. “이제 마법을 믿니?”


소년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소년은 차가운 강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먹먹한 침묵 속에서 소년은 의식을 잃었었는데, 정작 소년은 어딘지도 모를 곳에 누워있었다. 끔찍하게 죽었던 사람들까지 모두 살아있었다. 마법이 아니면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할까.


“정신병자가 아니었군요.”


소녀가 살풋 웃었다. “너 오래 살 체질은 아니구나.”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소년은 소녀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생각했다. 아마도 진짜 마법의 세계에 온 것 같았다. 그 말은 곧 눈앞의 소녀가 정신병자가 아니라 진짜 마법세계의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주위를 돌아봤다. 그리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마법의 세계라는 것을.


그들은 어느 절벽 위에 있었다. 세 사람이 나란히 서면 가득 찰 정도로 좁은 절벽은 저 멀리까지 이어져 있었고, 그 끝에는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 있었다. 마치 신전처럼 생긴 그 건물은 온통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다른 것은 모조리 하늘이었으므로.


온통 하늘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땅은 오직 그들이 서 있는 좁디좁은 절벽뿐이었다.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고 깊은 절벽 아래조차도 모두 하늘로 가득했다. 그건 소년이 봐왔던 그 어느 광경보다도 초현실적인 모습이었다. 세상을 가득 채운 하늘은 그것만으로도 괴상하고 신비했다.


하늘은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어느 부분은 푸르고 맑은 하늘이었고, 다른 부분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어떤 하늘은 비바람이 몰아쳤으며, 검게 물들어버린 하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결코 있을 수 없는 하늘. 그러니까 무지개 색으로 빛나거나 녹색으로 물든 하늘마저 그곳엔 있었다.


이리저리 물든 하늘들은 서로 만나서 부서지고, 합쳐지기도 하며 어지러이 움직였다. 푸른 하늘 사이로 검은 하늘이 스며들어갔고, 그 옆에선 회색 하늘과 노을빛 하늘이 서로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소년은 녹색 하늘에 반짝반짝 빛나는 하늘이 삼켜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정신 차려. 이제 네 차례거든.” 소년은 소녀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소녀는 자신을 향해 세상을 구하러 가자고 했었다. 소녀가 한 말이 진실인 이상, 그 정신나간 것 같던 소리도 사실이라는 말이었다. 소년은 소녀를 향해 물었다.


“제가 뭘 하면 되죠?” 말없이 싱긋 웃은 소녀는 다른 이들과 함께 절벽을 따라 걸어가며 소년을 향해 손짓했다. 소년은 소녀가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절벽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지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어지러이 움직이는 하늘들을 흘긋흘긋 바라보며 소년은 재빨리 그들을 따라 신전같이 생긴 건물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대략 오 분쯤 걸었을까. 이것저것 물어오는 소년에게 조용한 미소와 ‘알 거 없어.’라는 말로 응수하던 소녀가 우뚝 멈춰 섰다. 딱히 소년의 물음에 답해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목적지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그들의 앞에는 거대한 신전이 그 새하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단순히 새하얀 모습이 아니라, 하늘의 움직임에 맞춰 반짝반짝 빛나고 있던 것이다. 소년이 소녀를 바라봤다. 소녀는 소년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저건 다이아몬드란다. 비싼 거지.”


소년의 입이 벌어졌다. 저 큰 게 전부 다이아몬드란다. 초등학생인 소년은 그게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일단 무지무지 비싸다는 것 하나만은 알고 있었다. 아마 20강 무기 백만 개는 살 수 있지 않을까. 소년의 머릿속이 핑핑 돌아갔다. 그리고 머릿속에 떠오른 감상을 여과 없이 표현했다.


“역시 인생은 부동산이구나.”


부동산이 무슨 말인지는 몰랐지만 이럴 때 쓰는 말인 것 같았다. 아빠가 TV를 보면서 자주 하던 말이었다. 소년은 입가에 고인 침을 꼴까닥 삼켰다.


“이거 가져가도 돼요?”

“네가 세상을 구하기만 한다면 조금 정도는.”

“그러니까 뭘 해야 하는데요?”

“가서 말해줄게.”


소녀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소년의 손을 잡고 신전의 계단을 올랐다. 소년은 세상도 구하고 보석도 얻는다는 생각에 히죽히죽 웃으며 소녀를 쫓아갔다. 계단은 얼핏 보기에도 굉장히 많았지만 다이아몬드에 대한 기대로 가득한 소년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신전 안에서 소년은 쇠사슬에 묶여 있는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소년의 팔뚝만큼 굵은 쇠사슬에 꽁꽁 묶인 남자의 바로 아래서는 장작이 타고 있었고, 남자는 연신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욕설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실로 잔혹해 보이면서도 비현실적이었는데,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도 남자의 몸은 전혀 불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그 광경을 보고 대뜸 내뱉었다.


“아저씨. 아픈 거 좋아해요?”

“끄아아악! 누굴. 으아악! 변태로 아냐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남자는 소년을 향해 역정을 냈다. 하지만 비현실을 접해 한껏 부푼 소년의 간덩이는 쇠사슬에 묶인 남자 따위에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소년은 계속 비명을 지르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옆에 서 있는 소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녀는 금세 소년이 뭘 말하고 싶은지 알았다.


“저 남자는 벌을 받고 있는 거란다.” “무슨 벌요?” “사실 너를 찾기 이전에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던 게 바로 저 남자였단다. 하지만 저 사람은 강력한 마법의 힘으로 아주 나쁜 짓을 저질렀거든.” “크아아아! 마법으로 여자친구를아아악! 만든게 죄냐아으아아악!”소녀의 말에 남자가 발작적으로 소리치며 뭔가를 호소했지만 소년에겐 들리지 않았다. 소녀는 갸웃갸웃 머리를 기울이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린애는 아직 몰라도 돼요.”


소녀는 쪼그려 앉아 소년과 시선을 맞추고 싱글싱글 미소를 지우지 않고 말했다.


“알겠니? 마법의 힘은 마구 쓸 수 있는 게 아니란다. 특히 너처럼 운명으로 정해진 힘을 가진 아이는 딱 한번밖에 쓸 수 없어요. 너의 힘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있는 거야. 그 힘을 다른 곳에 쓰면 저렇게 된단다.” 어쩐지 소녀의 곱게 휘어진 눈이 싸늘하게 빛나는 것 같았지만 소년은 알아채지 못했다. “끄아으으악! 한번이라도, 끄윽. 한번이라도 애인을 갖고싶었어! 용, 용서으아아악!” 남자를 흘긋 바라본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과 소녀는 비명을 지르는 남자를 지나 다음 방으로 들어섰다.


방안에는 또 다른 남자가 있었다. 똑같이 쇠사슬에 묶인 그 남자는 소년과 소녀가 들어오자마자 쇠사슬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왔구나. 그 애가 날 죽일 운명의 아이였어. 안 돼. 나는 죽을 수 없어!”


“제가요?” 소년이 물었다. “그래.” 하지만 대답은 눈앞에서 몸부림치는 남자가 아닌 옆의 소녀에게서 나왔다. 소녀는 실처럼 가는 미소와 함께 그녀가 들고 있던 것을 소년의 손에 쥐어주었다.


“너는 두 가지 운명을 가지고 있어. 하나는 세계정복을 하려던 저 나쁜 사람을 죽이는 거고, 또 하나는 이 세상을 구원하는 거야. 그게 바로 네 운명이란다.”


소년은 아직 어려서 운명이 뭔지 잘 몰랐다. 하지만 소녀가 하는 말은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소년은 손에 들린 물건을 들고 꼼지락거렸다. 묵직한 무게에 싸늘한 금속의 감촉. 소년은 이게 뭔지 알고 있었다. 권총.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던 그것이었다.


“우리들은 저 남자를 죽일 수 없어. 오직 운명의 아이만 저 남자를 죽일 수 있거든. 그리고 네가 그 운명의 아이야.”


소녀는 소년의 손에 들린 권총을 바로잡아 주고 남자를 향하게 한 다음,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쳐주었다. “이대로 당기면 돼.” 소년은 서바이벌 놀이를 할 때처럼 권총을 남자에게 겨눴다. “안돼! 그 여자의 말에 속지 마!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 탕! 소년의 손에 들린 총구에서 커다란 소리와 함께 불꽃이 뿜어졌다. 소년은 난생 처음으로 느껴본 권총을 강한 반동에 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뒤에서 소녀가 잡아주지 않았다면 뒤로 넘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금세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있는, 축 늘어진 남자의 머리는 피범벅이 되어있었다. 단번에 이마를 꿰뚫은 것이다. 소녀는 남자를 보고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소년을 돌아봤다.


“망설이지도 않고 쏘다니······. 그것도 바로 머리를. 대단하네.”


“헤헤. 이래보여도 대령이에요. 클랜전 랭킹 3위죠.” 소년이 자랑스럽다는 듯 가슴을 펴보였다.


“과연. 장래가 유망한 아이구나.” 통하는 게 있었던 걸까? 소녀와 소년은 서로를 향해 미소지었다. 그 모습을 보고 머리에 총 맞은 남자가 중얼거렸다. “지랄하네.”


“살아있네요?” 소년은 남자가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왜. 죽은 사람이 말하는 거 처음 보냐?” 남자는 이마에서 줄줄 피를 흘리며 소년을 향해 틱틱댔다. 소녀는 그런 남자를 흘긋 보고 소년에게 속삭였다.


“괜찮아. 저런 건 무시하렴. 말 밖에 못하니까.” 소년은 죽었는데도 말을 한다는 게 정말로 신기했지만 금세 마법의 세계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스스로 납득했다.


“그럼 이제 마법으로 세상을 구하기만 하면 되겠구나.”

“어떻게요? 전 마법 쓸 줄 모르는데.”


소년은 마법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이곳에 와서 신기한 것을 많이 보긴 했지만 직접 마법을 쓰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소녀는 그런 소년을 보고 걱정 말라는 듯이 손짓했다.


“마법은 말이지. 뭔가 하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기만 하면 된단다. 우리들 마법사는 그렇게만 하면 마법을 쓸 수 있단다. 그게 바로 신비로운 마법의 힘이지. 그냥 세상이 구원되기를 간절히 빌어 보렴.”


뭔가 대충대충이다. 소년은 속으로 미심쩍어 했지만 딱히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기말고사 시험범위를 외우는 것만 해도 지긋지긋했는데 마법까지 공부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누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하지만 소년은 바로 마법을 쓰지 않고 소녀를 향해 물었다. 초등학생 특유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소녀는 뭔가 묘하게 불안했지만 그래도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가 왜 위험해요?”


결국 이 질문이 나왔구나. 소녀는 탄식하며 이마를 짚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딱히 설명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단지 고작 초등학교 4학년인 소년에게 그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문제였다. 소녀는 눈앞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그래도, 어쩌면 소년이 천재라서 바로 알아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 소녀는 일단 혹시나 하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입을 열었다.


“열역학 2법칙이란 것이 있어. 별로 중요한 건 아니고, 엔트로피라는 게 있는데, 그게 계속 올라가면 언젠가는 세상이 멸망하게 되거든. 너의 힘은 전 우주의 엔트로피를 역전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고. 알겠니?”

“모르겠는데요.”


당연히 이럴 줄 알았지. 하긴, 초등학생에게 뭘 바래. 소녀는 한숨을 쉬었다.


“누나. 누나.”


소년이 소녀의 옷을 살짝 잡아당겼다. 초등학생도 알기 쉽게 설명할 방법을 찾아 고심하던 소녀는 다시 소년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근데 세상이 언제 망하는데요?”

“글쎄? 한 수백억 년 뒤쯤 될까?”


멍. 소년의 얼굴이 멍해졌다. “백만 보다 큰 거에요?” “응. 훨씬 많지.” 소년의 물음에 소녀가 답했다.


“에이. 뭐야.” 소년이 김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백만년 보다 크단다. 소년은 큰 숫자는 셀 줄 몰랐지만 계산은 빨랐다. “그러면 상관없지 않아요?” “어째서?” “그때까지 살지도 못할텐데 꼭 마법 쓸 필요는 없지 않아요?” 소년이 한심하다는 듯이 소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소녀는 곰곰이 생각했다. 소녀는 좀 맛이 가 있긴 했지만 계산을 할 줄 모르지는 않았다. 소녀는 금세 결론을 내렸다. “네 말이 맞네?” “그렇죠?” “그렇구나.”


싱거운 결말이었다. 소년은 생각했다. 마법사들 완전 쓸모없네.


“그럼 제 마법의 힘으로 다른 마법을 써도 되나요?” 소년은 기대를 담아 물었다. 마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소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야호!”


소년은 환성을 지르더니 눈을 감고 생각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과연 어떤 마법을 쓸까? 소녀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소년을 바라봤다. 한 십여 초 정도 집중하던 소년이 마침내 번득 하고 눈을 떴다. 그리고는 엄숙한 표정으로, 양 손으로 박수를 치고 땅바닥에 가져다 대며 외쳤다.


“Trace On-!”


“만화를 너무 많이 봤구만.” 총 맞은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덧붙였다. 저것들 작품도 다르잖아.


순간, 밝은 빛이 소년의 손 가운데서 뿜어져 나왔다. 총 맞은 남자와 소녀는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와······성공했다.” 소년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제서야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한 시체는 볼 수 있었다.


“저건······.” “맞아요.” 소년이 씩 웃었다. 소녀는 저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이 모습, 이 향기, 그리고 이 혼을 자극하는 존재감!


“치킨을 만들었어요.” 소년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산더미 같은 치킨의 산이 눈앞에 실존하고 있었다!


소녀와 총 맞은 남자는 그 압도적인 모습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이었다.


“중요한 걸 알려드릴까요?” 소년의 말에 그들의 시선이 다시 소년을 향해 돌아갔다. 하지만 그 코끝은 치킨의 냄새를 쫓아 연신 움찔거렸다. 정말로 먹음직스러운 향기였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끝이 아니었다. 소년은 이 세상에 충격과 공포를 가져다 줄 역사적인 사실을 밝히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 마법의 치킨은, 마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결코 살이 찌지 않습니다.”


두둥. 소녀의 가슴이 거세게 요동쳤다. 소녀는 검은색 볼륨 베레모를 벗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이 그녀의 온 몸을 꿰뚫었다.


그 모습을 보며 총 맞은 남자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건······혁명이야.





소리가 풀려간다. 잠들었던 소년의 의식이 천천히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소년의 주변에 감져 있던 소리들이 부드럽게 풀리기 시작한다. 소년은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익숙한 방의 천장이었다. 눈을 슬쩍 돌려보니 초등학교 4학년의 방 풍경이 보였다. 어떻게 된 걸까. 소년의 머리가 이리저리 굴려졌다.


“개꿈 꿨다.” 소년은 금세 판단을 내렸다.


세계는 멸망한단다. 그러니까 수백악······아니 억이던가? 어쨌든 백만 년보다 많이 지난 뒤에 말이다. 소년은 백만 년 후의 미래를 상상해 봤다. 거대 로봇이 있다는 것 빼면 딱히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기억이 희미하다. 검은색 볼륨 베레모를 쓴 정신 나간 누나. 한강다리. 이상한 하늘로 덮인 마법세계. 다이아몬드 신전. 헤드샷. 세계멸망. 에너지파의 역전. 잘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마치 머릿속에 뿌연 안개가 낀 것 같았다. 소년은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소년의 기억은 무의식 저편의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어갈 뿐이었다.


“아들. 학교 가야지! 오늘 기말고사잖아.” “네!” 방 밖에서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에 소년은 퍼뜩 대답했다. 소년의 머릿속에선 이미 대부분의 기억이 사라져 있었다. 소년은 오늘이 기말고사라는 걸 기억해냈다. 소년은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학교 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엄마 나 오늘 이상한 꿈 꿨어.” 밥을 먹으며 소년이 말했다.


“무슨 꿈?” “기억 안 나.” “싱거운 소리 그만하고 빨리 밥 먹으렴.” “네.” 소년은 엄마의 말에 대답하며 바쁘게 젓가락을 놀렸다. 소년의 머릿속엔 먹을 것 생각이 가득이었다.


소년은 문득, 기억 속에서 한 사람을 떠올렸다.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여자였던 것 같았다. 소년의 기억 속에서, 검은색 볼륨 베레모가 잘 어울리는 그녀는 행복하게 치킨을 먹으며 소년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소년은 그 소녀가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이내 잊어버렸다. 오늘은 기말고사 날이었으니까.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시험 잘 보고~.” 소년은 엄마에게 한 차례 손을 흔들고 현관을 나섰다. 집안엔 소년의 엄마가 설거지 하는 소리와 TV에서 나오는 뉴스 소리가 전부였다.


-오늘 한강대교에서 집단 자살 사건이 있었습니다. 수십 명의 목격자들이 한강을 향해 차례로 뛰어내리는 사람들을 봤다고 증언했고, 유서가 없던 점으로 보아 경찰은 이 사건을······.


TV의 뉴스 속보에, 한강대교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리고 천천히 클로즈업 되는 화면. 화면 속에서 한강의 검푸른 수면이 보였다.


그곳에는 소년이 있었고, 검은색 볼륨 베레모가 어울리는 그녀가 있었다.


작가의말

이것이...어디보자, 2012~3년의 글이네요.

개인적으로 제가 쓴 단편글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글 중 하나입니다 :) 이런 분위기 정말 좋아요.

주제는 뒤죽박죽/스토리는 산으로/개연성은 무시한다/분위기는 지멋대로 라는 컨셉의 글이었죠. 수많은 개드립과 패러디, 블랙유머 등을 마구 섞었던 글입니다. 


당시에 몇몇 지인들과  작품별로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이어지게 해서 연작을 하는 글을 썼었는데, 그때 썼던 글이죠.

첫 문장은 ‘소리가 잠기언다’ 였고, 마지막 문장은 ‘그곳에는 소년이 있었고, 검은색 볼륨 베레모가 어울리는 그녀가 있었다.’였네요.

‘잠기언다’라는 단어를 ‘물 아래로 잠긴다.’의 잠긴다와 ‘문이 잠긴다’의 잠긴다로 쓴 언어유희가 포인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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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여우 판타지 단편집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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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끝) 후기 19.10.31 257 8 2쪽
14 혁명의 열쇠 19.10.31 174 8 32쪽
13 바람이 태어난 곳 19.10.31 123 5 16쪽
12 인간,악마,인간,괴물 19.10.31 162 5 17쪽
11 우상과 향수의 굴레 19.10.31 95 5 3쪽
10 도를 아십니까? 19.10.31 131 5 15쪽
9 당신에게 향하는 편지 19.10.31 98 5 9쪽
8 나를 이끌어 주었던 그 손의 온기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19.10.31 108 4 9쪽
7 산 중턱 산장에서 만난 어떤 남자의 이야기 19.10.31 117 5 7쪽
6 휴머노이드 테러 19.10.31 122 5 6쪽
5 시선 가득히 19.10.29 140 5 12쪽
» 마법은 위대해! +3 19.10.29 363 10 32쪽
3 불꽃을 빚는 노인 +2 19.10.29 624 19 14쪽
2 고양이는 민들레에게서 무엇을 보았나 +3 19.10.29 1,168 28 4쪽
1 (시작) 소개 +1 19.10.29 1,209 18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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