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에 소원을 빌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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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색여우
작품등록일 :
2019.11.26 04:13
최근연재일 :
2019.12.07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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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06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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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12. 배신, 그리고 진정한 목적

DUMMY

.


빛이 반사되지 않게 무광으로 도색된 대검. 냉병기 특유의 차가운 예기가 피부를 찌르는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눈앞에 날붙이가 다가오니 그동안 애써 무시하고 있던 위기감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이 마법사들의 세계는 진짜 엿같이 꼬인 데다 삼류 판타지 소설도 학을 뗄 정도로 줏대 없는 세계관이지만,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나 어쩌지. 나 진짜 이대로 고자가 되는 거야? 내 미래는? 내 아들딸들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채라, 채라는 어디 있지? 아직 싱클레어 누님하고 대치중이라 이쪽을 알아채지 못한 건가? 좀 알아채란 말이야. 거기 아직도 싸우고 있는 마법사들, 누구라도 좋으니 이쪽 좀 봐달라고, 지금 너네들 목표물이 제일 위험한 사람한테 잡혀있는 거 안보여? 아 진짜 뭐하는 거냐고?!


“최 대리, 지금 자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건가······?”


얼어붙을 것 같은 싸늘한 목소리로, 사장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 담겨진 것은 배신에 대한 분노일까. 하지만 최 대리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협회의 정 부회장 측에서 꽤 대우를 잘 해준다더라고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무래도 매번 월급 감봉만 당하는 회사보다는 철밥통 공무원 쪽이 좋더군요. 사원복지랑 퇴직연금도 비교할 수 없이 좋고 말이죠.”

“그렇다고 하필 왜 이렇게 중요한 때에······최 대리, 그러지 말고 이번 건만 끝내고 해결하는 게 어떤가. 내 퇴직금도 두둑이 얹어 주겠네.”


사장이 살살 말로 구슬려 보지만, 이미 배신까지 한 인간이 겨우 그 정도에 넘어올 리가 없었다.


“이미 늦었습니다, 사장님. 아니, 사장. 난 헥사곤을 포기하겠다! 난 헥사곤을 초월하겠다!”


손에 든 대검을 치켜 올리는 최 대리. 그의 손이 느릿하게만 보인다. 이것이 주마등인가. 진짜 이대로 나는 죽느니만 못한 신세가 되어버리고 마는 건가?


“오빠!”

“최창식, 너 지금!?”


그제야 이쪽의 이변을 알아챈 채라와 누님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다.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칼날을 막아내기에 그들은 너무 멀다. 나는 나의 죽음을 직감했다.


“썅······.”


죄송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소자, 집안의 대를 잇는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 가나이다. 나도 모르게 한 줄기 눈물이 왈칵 흘러나왔다.


미안하다, 나의 미래의 아들딸들아. 나는 결국, 내 소중한 막대를 지키지 못했구나. 저거 맞으면, 죽지는 않아도 무진장 아프겠지? 나는 닥쳐올 나 자신의 상징적 죽음에 대한 최소한의 반항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유감이군.”


파직.


“크윽······?!”


단 한 점의 낙담조차 느껴지지 않는, 승리감에 가득한 사장의 목소리. 그 목소리와 함께 등 뒤에 서있는 최 대리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사장의 뭔지 모를 술수가 만들어낸 것은 찰나의 빈틈. 하지만 그 잠깐의 빈틈은 인간을 포기한 두 여성이 이곳에 도달하기까지 충분한 시간이었다.


쾅!


“크허억!”


커다란 폭음과 함께 단번에 길가의 가로수까지 튕겨나간 최 대리는 피를 토하며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지금 나, 산 거 맞지? 내 존슨, 멀쩡한 거지?


“박카스! 너 괜찮아?”


긴장이 풀린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가 쓰러지려는 찰나, 싱클레어 누님이 쓰러지려는 날 받쳐주었다.


“누, 누님. 나 살아있······크, 어흐······.”

“괜찮아, 너 아직 안 죽었어. 살아있다고!”


으허어엉. 살며시 껴안으며 등을 다독여주는 누님의 상냥함에 대한 감동과, 죽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흐윽, 누님. 으흐흑······.”

“오빠, 이제 안전하니까 그만 울어요. 다 큰 남자가 울면 어떻게 해요. 자 여기 손수건 받고 좀 닦아요.”

“채, 채라야······.”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던 이 작은 여자애도 사실은 이렇게 상냥했구나. 미안해 채라야, 오빠가 겉모습만 보고 너를 터미네이터니 괴물이니 마구 매도했구나. 큭. 다 내가 나쁜 놈이었어. 정말 미안하다.


“자, 그럼 이제 막판에 내 상여금을 먹튀하려던 저 인간부터 족쳐 볼까요?”


방금 한 말 취소. 흐르던 눈물이 거짓말처럼 뚝 하고 멈춘다. 너 어떻게 그렇게 감동받은 사람한테 찬물을 끼얹냐. 손수건 준 건 고마운데, 그놈의 상여금 타령 좀 그만해주지 않으련?


그보다 너 내 보디가드잖아. 왜 싸움만 하면 머리에 스팀이 돌아서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데. 임무대로 날 지키란 말이야. 응?


하지만 내 마음 속 불평이 채라에게까지 닿는 일은 없었다. 나도 내 목숨 소중한 건 알거든.


“크으. 이현식 사장, 너 이 새끼 대체 무슨 짓을······.”


최 대리는 가로수에 간신히 기대앉고는 막혔던 숨을 토해내며 사장을 노려봤다. 복대가 아니었음 즉사였을 거다.


“위기에 처하니 본성이 나오는 군. 회사에서 내 욕을 하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지.”


사장이 거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무지 재수 없다. 자기도 스스로가 욕먹는 건 알고 있나보네.


“최 대리. 사원증을 보게. 아직 가지고 있겠지?”

“사원, 증······?”

“그래. 사실 그 사원증은 단순한 사원증이 아니야.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 대상을 제압하기 위한 전격마법이 걸려 있다네.”


이런 미친. 세상에 어느 누가 사원증에 그딴 기능을 달아?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닌지, 싱클레어 누님의 표정도 창백해지더니 가슴에 달고 있던 사원증을 내려다봤다.


“이 개자식······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런······.”

“훗. 배신해도 되는 건 배신당할 각오가 되어 있는 자 뿐이지. 세상은 자네 같은 사회 초년생의 생각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야.”

“크으, 처음부터 믿지도 않았다는 건가. 이러고 무사할 줄······.”

“흠. 그거 알고 있나? 사실 그 사원증엔 전설이 있어.”


이건 또 뭔 소리야.


“큭, 또 무슨 개소리를. 난 전설 따윈 믿지 않아.”

“그래? 아쉽군 그래. 자폭이라고 들어는 봤나 모르겠군.”


엉?


자, 폭? 설마 내가 아는 그거? 빨간 버튼 누르면 터지는 그거냐?


“잠, 무, 뭐라고? 아, 안 돼!”

“그럼 잘 가게.”


아디오스. 그 한 마디와 함께 딱 하고 튕긴 사장의 손에 맞춰 커다란 폭음이 거리를 뒤흔들었다.


“크······어······.”


검댕 투성이가 된 최대리가 거품을 물며 바닥에 쓰러진다. 아무리 다치지 않도록 복대의 가호가 함께한다지만 그 데미지는 그대로이니 정신이 못 버티고 기절할 수밖에. 솔직히 크레모아를 튕겨내는 채라가 업노멀한거다.


사장은 쓰러진 최 대리의 주검-아니 죽진 않았지만-의 앞에 서서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 봤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진지한 모습. 그래도 한때 부하였던 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건가.


“네놈의 패인은······단 한 가지다······최창식 군. 단 한 가지 심플한 답이지······. 네놈은 나를 화나게 했다!”


일 리가 없지.


어리석은 자식. 배신자는 처형이다! 핫하! 라고 외치며 쓰러진 최 대리를 자근자근 밟아대는 사장의 모습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악당의 그것이었다. 아니 쟤네 악당 맞았지. 그보다 저 뒤에서 재빨리 사원증을 떼어다 내팽개치는 사원들의 모습은 안 보이십니까.


“자 그럼, 이제 우리도 결판을 내야겠죠?”


넌 아직도 싸울 생각 만만이냐. 뭔 애가 이렇게 폭력적이야. 얘 진짜 어린애 맞아? 아니 구해주러 온 건 정말 고마운데 그만 좀 싸우고 말로 해결하면 안 되겠니. 일단 내가 잡혀 있잖아. 응?


“박카스 군의 처우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타협할 생각이 없네. 우리에겐 그의 힘이 필요해.”

“흥. 괜히 일 크게 벌려봐야 국제적 비난만 얻어먹을 테니 할 수 있는 건 기업규제 철폐나 개인의 부귀영화 정도겠죠. 요즘 기업규제 다 사라지는 마당에 여기서 뭘 더 얻어먹겠다고······.”

“뭘 모르는 소리로군. 기업규제 철폐는 기업에 있어 생사를 걸 정도로 중요한 문제라네.”


채라의 말에 사장이 긍정하는 듯 말을 받았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죠. 지름길 찾다가 훅 갑니다?”

“상여금에 눈이 돌아간 자네만 할까.”


서로를 사납게 노려보는 채라와 사장. 뭔가 목적이 눈물 나게 초라하다. 겨우 그거냐. 나에게 세계를 바꿀 힘이 있다면서. 그러면 일종의 드래곤볼 비스무리 한 거 아닌가. 근데 고작 한다는 게 기업규제 철폐? 솔직히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하냐? 이만한 기회가 있으면 최소 세계정복 정도는 노려야 바람직한 거잖아.


“훗. 너희 같은 하찮은 서민들이 기업을 먹여 살리는 경영자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조차 안 했다. 법안 하나 통과시키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예산이 들어가는 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아니, 댁들은 세계정복 같은 건 생각 안 해봤어요?”


나도 모르게 던진 태클에, 사장은 뭔가 굉장히 어리석고 한심한 녀석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거 뭔가 굉장히 기분이 더럽다.


“세계정복. 말은 좋지. 하지만 그런 귀찮은 걸 왜 하겠나? 세금, 부동산, 경제, 교육 따위의 골치 아픈 문제들을 관리해야 하는데다 못하면 못하는 대로 욕을 먹는데?”


······어 그런가? 듣고 보니 그럴싸한데?


“그리고 사람은 요행을 바라지 않고 견실하게 살아야지. 막말로 자네 힘을 이용해서 억만장자가 되어서 뭘 어쩌겠는가? 로또 같은 요행에 기대서 성공한 사람은 결국 그 요행을 바라다 무너지게 되는 법이야.”

“아무리 그래도 뭣 하러 쉬운 방법 놔두고······.”

“아니아니, 그건 아직 자네가 젊고 어려서 그런 거야. 아무것도 안 해도 밥이 나오고 쌀이 나온다면 인생 자체가 나태해지고 말지. 할 일 없이 놀기만 하는 사람을 우리는 잉여인간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차라리 미래를 위해서 적당히 건실하게 일하고 살 수 있도록 길을 닦아두는 것이 낫다네.”


그, 그렇구나. 하나같이 옳은 말이네. 그 말을 하는 주체가 저 양반이라는 게 심히 거슬리긴 하지만 일단 맞는 말은 맞는 말이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채라가 입을 열었다.


“요행을 바라면 안 된다면서 왜 오빠를 노리는 건데요? 따지고 보면 이 오빠는 로또 같은 거잖아요.”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 박카스 군의 경우는 어디까지나 일의 연장선이네.”

“말은 잘하네요. 결국 싸워야 할 운명이라는 거잖아요.”

“그렇지.”


채라와 사장 사이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지금이라면 낙엽이 떨어지는 순간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크로스 카운터를 날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긴장감이다. 그래, 결국 이 판이 다 그렇지. 결국 기승전배틀 이잖아? 힘도 마법도 없는 난 안 될 거야 아마.


“뭐, 상관없어요. 눈앞을 막는 게 뭐든 다 치워버리고 상여, 아니 오빠를 데려가기만 하면 그만이니까요.”


······차라리 그냥 상여금이라 불러라. 내 눈치 보면서 말 고치지 말고. 오히려 그쪽이 더 상처다.


“할 수 있다면 해보게. 김 부장! 여기는 맡기지.”

“네? 제가요? 저 꼬맹이를요?”


싱클레어 누님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하긴 혼자서 얘를 상대하려면 패시브 금강불괴 보유자 정도는 와야 상대가 되지 싶다.


“시간만 벌어주면 되네. 추가 수당금은 기본이고 연말에 보너스도 두둑하게 얹어 주지.”

“신에게는 아직 열두 번은 싸울 마력이 있사옵니다. 마력이 비록 적으나 제가 죽지 않았으니 저 괴물이 감히 저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믿음직스럽군.”


그래, 결국 월급쟁이한테는 돈이구나. 하하.


“그럼 자네는 나와 함께 가지.”

“으헉!? 채, 채라야 살려줘!”


갑자기 사장이 날 어깨에 들쳐 메고 달리기 시작한다. 나름대로 열심히 발버둥도 쳐 보고 사장의 머리통을 퍽퍽 때려도 봤지만 반응이 없다. 이래서 마법사란······!


말은 이렇게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론 헥사곤이건 온건파건 어느 쪽이든 상관없으니 빨리 이 상황이나 끝났으면 싶다. 어쨌든 결론은 둘 다 내 마력으로 마법을 쓰는 거잖아?


물론 온건파 쪽은 마법사용 이후에 신변보호와 함께 취업보장도 주기 때문에 훨씬 조건이 좋긴 하지만 일단 헥사곤 쪽으로 넘어가도 나와 내 존슨의 생명은 보장된다.


결국 요약하자면 이기면 대박 져도 본전. 뭐 아무래도 채라가 이기는 게 좋긴 하지만 상황이 영 좋지 않으면 어쩔 수 없잖아.


······아. 아니. 솔직히 협회-특히 채라-의 보복이 무진장 두렵긴 하다. 그런 의미에서 채라야, 나 좀 살려주지 않으련?


“누가 놓칠 줄 알아요!?”


쿠웅!


“미안하지만 널 그냥 보내줄 수는 없겠어. 이쪽은 추가수당이 걸렸다고.”


채라가 이쪽으로 쫓아오려고 하지만 그 앞을 싱클레어 누님이 막아섰다. 아무래도 속도가 빠른 누님이니만큼 시간 끌기엔 적격이겠지. 채라의 귀여운 얼굴이 팍 구겨졌다. 그마저도 귀엽긴 하지만.


“······오빠, 조금만 참아요! 이 노처녀를 레테 강 앞에 서성이는 놈들 꼴로 만들어버린 다음 금방 쫓아갈게요!”


아니아니 죽이면 안 되지. 이까지 갈며 외치는 채라의 목소리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그런데 뭐지, 아까부터 살기가 두 배가 된 듯한 느낌이 드는데, 살짝 고개를 옆으로 트니 그 출처가 보였다.


“······너 아까부터 자꾸 남의 나이를 들먹이는데, 쥐방울만한 꼬꼬마 주제에 어른한테 예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니야? 어른의 무서움이 뭔지 똑똑히 보여 주마······!”


이쪽은 채라의 도발 아닌 도발에 한층 더 살기를 배가시키는 싱클레어 누님 되시겠다.


사장의 어깨에 매달린 채 멀어져 가는 시선 속에서 채라와 싱클레어 누님이 서로에게 크로스 카운터를 날리는 장면이 언뜻 보인 것도 같았다. 그리고 그 후폭풍에 휩쓸려 날아가는 최 대리의 주검-죽진 않았지만-과 엑스트라 마법사들도.


하하, 개판이네.





“수치심에 죽어버릴 것 같아······.”


사장과 함께 도착한 곳은 시청이었다. 마법과는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 자기 볼 일 보러 자기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놈의 사장이란 양반은 그 패기도 남다르게 성큼성큼 공무원이 있는 접수대까지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여기까진 괜찮다.


다만 내가 사장 놈의 어깨에 여전히 얹혀 있다는 게 문제.


······진심으로 다 때려치우고 싶다.


일단 내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려달라고 이 사장 놈이 내려줄 리가 없지. 그냥 입 다물고 얼굴 가리고 가만히 있어야겠다. 내가 이 동네 다시 오면 성을 간다 성을 갈아.


“고객님? 상담은 번호표를 뽑고 자리에 앉아서 기다려 주셨으면 하는데요. 그리고 그 어깨의 학생은 대체······?”

“이현식입니다.”

“네?”

“아, 저는 이현식입니다.”

“······네?”


이 미친 양반아. 접수처에 있는 공무원이 당황하는 거 안보이냐.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댁이 그렇게 말하면 대체 어떻게 반응하라는 거죠. 아니 마법사라는 양반이 사람들 다 보는 공공장소에서 대체 뭐하는 짓이냐고.


그보다 부탁인데 제발 나 좀 내려주면 안되나요. 네?


저쪽에서 뭔가 휴대폰 카메라를 내 쪽으로 들이대는 모습이 보였다. 찍지 마! 씨······. 찍지 말라고!


“상사 불러요.”

“저기 고객님?”

“나 이현식이야. 상사 부르라고요.”


미치겠네. 이런 무대뽀같은 양반이랑 얽히다니,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구나.


결국 사장의 한결같은 땡깡에 불쌍한 공무원 씨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뒤쪽을 흘긋흘긋 바라봤다. 그러자 뭔가 문제가 터진 것을 알아챈 듯-백 퍼센트 나 때문이다. 수치스러워······-, 상사로 보이는 한 중년인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고객님?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 그보다 그 어깨에 있는 학생분은 내려주시는 편이······.”

“나 이현식이야.”


이번에도 같은 패턴이구나. 하고 한숨을 푹 내쉬려는데 중년인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당신은······설마 헥사곤의······?”


이름 같은 걸로 알아보지 마라. 댁이 마법 관계자인거 잘 알겠으니까 제발 나 좀 내려달라고. 사장은 중년인의 말을 듣고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Yes, I am!"

“그럼 어깨의 학생은 지금 한창 화제인 마력돼지······.”


잠깐, 그 별명은 뭐냐. 용납할 수 없어! 마력돼지!? 직관적이긴 하지만 사람한테 그딴 닉네임 붙이지 말라고!


“마력돼지?! 내가 마력돼지라니?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저씨, 마력돼지라뇨! 좋은 별명 놔두고 왜 마력돼지?!”

“친근하고 좋지 않나?”

“친근하긴 개뿔이!?”

“그만. 일단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지.”


막 입을 열어 따지려는데, 사장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랄까, 사장의 분위기에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중년인은 그러지요. 하고 답하고는 사장을 사무실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근데 뭐지, 왜 이 사람들 이렇게 프렌들리한 걸까. 일단 사장이 아까 말한 대로라면 여긴 분명히 마법협회인데. 설마 이쪽도 첩자는 아니겠지.


“이쪽입니다.”


정중하게 사무실까지 안내한 그 중년인은 한쪽 책장을 향해 걸어가더니, 금세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책장이 있는 곳을 통과해 들어갔다는 거다.


······그래. 저게 바로 마법이지. 감개가 무량하구나. 내가 판타지에 들어와 있다는 실감을 이제야 느낄 수 있었다.


응? 마법사들끼리의 배틀? 그건 마법이라기보단 슈퍼 히어로물이고. 아니, 일단 나이가 좀 많지만 명목상 마법소녀도 있으니 슈퍼 마법소녀물이라고 불러야 하나.


“뭔가 감동적이네요.”

“자네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겐가?”


아니 그렇잖아요. 오늘 그 개고생을 했는데 처음으로 간신히 마법다운 마법을 봤다고.


“그보다 긴장하게. 이제부터 적진에 들어가는 거니까.”

“일단은 그런 설정이긴 했죠.”


솔직히 나는 알 바 아니지. 그 양반들이 내 적인가? 댁 적이지. 사장은 여전히 당당하기 그지없는 발걸음으로 책장을 향해 돌진했다. 그래도 뭔가 좀 긴장되긴 하네.


웅. 하는 소리가 들린 것을 느끼자마자 시야가 확 바뀌었다. 눈앞에 보인 것은 뭔가 커다란 지하시설. 저 앞쪽에 대놓고 ‘마법협회’라고 적힌 간판과 함께 커다란 문이 보였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검은 쫄쫄이들도.


“오셨습니까. 사장님.”

“음. 수고하게.”


자세히 보니 상황이 이해가 갔다. 구체적으로 저 구석에 꽁꽁 묶여있는 하얀 쫄쫄이들. 나름 뻔하다면 뻔한 내용이었다.


“별동대?”

“그렇지. 머리가 좋군 그래.”


아니 보통 이 상황만 보면 대충 알지 않나.


“······그런데 마법협회가 원래 이렇게 약했어요?”


무슨 본진이 이렇게 쉽게 털리지. 그래도 채라를 보면 안 그럴 거 같은데.


하지만 내 생각만큼 마법협회가 약한 조직은 아니었나 보다. 사장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흠? 알고 있지 않은가. 헥사곤에도 ‘서류상으론’ 금구슬이 있다는 것을.”


아.


그러니까 마법협회 본대는 전부 다 헥사곤 쪽으로 갔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이쪽의 방비가 허술해졌고.


······이 양반 생각보다 머리가 좋잖아? 처음에 마법협회로 돌격하자는 초등학생도 안 할 어택땅 작전을 생각했을 땐 그냥 멍텅구리인 줄 알았는데, 나름 노림수가 있긴 했었구나.


“지휘부는 제압 완료했습니다.”


검은 쫄쫄이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한 근육근육한 근육질 남자가 사장에게 보고했다. 그나마 이쪽은 간부급인지 쫄쫄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정부 호위팀은?”

“변장팀에게 말해서 회식 핑계로 슬쩍 빼 두었죠. 사실 웬만큼 마력이 없으면 써먹지도 못할 금구슬을 가지고 누군가 일을 벌일 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저쪽은 마법세계 소속이 아니라 정부 쪽 요원들이니 이 마력돼지의 건까지는 아직 전달되지 않았을 테니까요. 크리스마스에 할 일도 없이 근무 서는 것도 지겨웠는데 마침 잘 됐다 싶었을 겁니다.”


마력돼지라고 부르지 마라.


“잘했네.”


그보다 정부 요원들이 회식하러 갔다는 소리는 좀 황당했다. 허허. 할 일 내팽개쳐두고 회식을 가? 아무리 공무원이라지만 좀 너무하는 거 아냐?


“금구슬은?”

“지하 맨 아래층입니다. 통로는 안쪽의 엘리베이터 뿐입니다.”

“좋아. 카스 군과 내가 함께 들어갈 테니 자네들은 이곳을 지키게. 다른 놈들은 몰라도 미니 몬스터의 감은 장난이 아니니. 김 부장이 시간을 끌었지만 오래 버티진 못할 걸세. 자네들이 최대한 막아야 해. 알겠지?”

“······미니 몬스터요? 그 괴물을요?”


미니 몬스터라는 말이 나온 순간 근육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런 마초스러운 남자까지 이런 반응을 보이다니, 대체 이 소녀는 얼마나 악명이 높은 걸까. 식은땀 흐르는 것 좀 봐. 보는 내가 다 불쌍해지잖아.


“자네들을 믿네. 헥사곤 최고의 무력을 자랑하는 전투 팀이니 못해도 삼십 분은 끌 수 있을 거야. 상여금은 두둑하게 얹어줄 테니 걱정 말고.”


네. 마치 사형 선고라도 받은 듯 대답하는 근육남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제압도 아니고 삼십 분동안 시간을 끌란다. 대체 밸런스가 얼마나 안 맞으면 저런 소리를 할까.


“목숨을 바쳐서라도 막겠습니다. 사장님.”


아니 댁들 안 죽잖아. 왜 자꾸 그리 흉흉하게 말을 해. 무슨 몸으로 최종보스를 저지하는 동료 같은 대사를 치고 있냐고.


······아니, 그런데 채라 하는 짓 보면 잘하면 사람도 죽지 않을까 싶긴 하다. 수도 내려치기 하나로 그 막강한 싱클레어 누님을 아스팔트 아래에 처박은 그 괴력이란······. 맨몸으로 맞으면 형체가 남아날지 의문이다.


“자, 그럼 들어가 볼까. 카스 군, 준비는 되어있겠지?”

“아니 저 뭘 어찌 해야 하는지 아무 것도 모르는데요.”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며 사장이 말을 걸었지만 솔직히 난 아무 것도 모른다. 마법을 쓸 수 있다는데 내가 그걸 써봤어야 알지. 솔직히 마력 같은 것도 못 느끼겠는데 어떻게 마법을 쓰라는 거죠. 아니 그보다 나 좀 내려달라고.


사장은 내가 도망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는 듯 순순히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네가 할 일은 단순히, 소원을 빌듯이 강하게 무언가를 염원하면 그만이라네. 금구슬의 조정은 내가 할 줄 아니까 걱정 말고. 셋팅이 완료되면 소원을 강하게 바라게. 그럼 전부 끝날 테니.”


이래 뵈도 골든 오브 운용기능사 자격 보유자라네. 사장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흠. 염원이요.”


그러니까 그냥 생각만 하면 된다 이거지? 그러면 몰래 다른 거 빌면 되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눈치 하난 기가 막히게 좋은지 사장이 착 가라앉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행여나 허튼 짓을 할 생각은 말게. 밖에는 우리 사원이 법률전문가와 함께 사태를 지켜보고 있으니까.”


그리고 말일세. 사장의 목소리가 한층 더 딱딱하게 말했다.


“알아두길 바라네. 우리 헥사곤은 목적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띵. 작은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천천히 열리는 엘리베이터의 문. 그리고 보이는 것은.


“다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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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에 소원을 빌어봐!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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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후기&잡다한 설정 19.12.07 261 4 13쪽
16 14. 에필로그~그리고 세상은 +1 19.12.07 147 4 4쪽
15 13. 크리스마스 이브의 소원 19.12.07 98 5 31쪽
» 12. 배신, 그리고 진정한 목적 19.12.06 94 4 24쪽
13 11. 왕년의 마법소녀 19.12.05 94 4 21쪽
12 10. 마법사가 싸우는 방법 19.12.04 91 4 27쪽
11 9. 터미네이터 그녀 +1 19.12.03 81 4 14쪽
10 8. 마법협회 습격 19.12.02 85 4 17쪽
9 7. 압도적인 향취 19.12.01 97 5 22쪽
8 6. 납치당해도 괜찮다고 생각해 19.11.30 111 3 21쪽
7 5. 소원을 들어주는 마법 19.11.29 143 5 33쪽
6 4. 소녀와 함께 음양모텔 19.11.28 189 5 12쪽
5 3. 전국구 마법사 19.11.27 148 7 19쪽
4 2. 보이 밋 걸 19.11.26 397 7 28쪽
3 1. 크리스마스 이브 +3 19.11.26 387 10 23쪽
2 0. 지극히 평범한 +1 19.11.26 538 11 2쪽
1 소개글 +1 19.11.26 677 8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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