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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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생각.
작품등록일 :
2020.05.1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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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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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6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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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비정상들의 세상(1)

DUMMY

처음 이 빌어먹을 이세계에 떨어졌을 때, 나는 갓 스무 살이 된 애송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뻤고, 또 들떴다.

지구에서의 난 꿈은 없지만 그래도 ‘다들 가니까’ 라는 이유만으로 아무 학과나 골라 대학에 간 새내기였고, 공부나 취업에 큰 매력을 느끼지도 못했다.

실로 무기력한 인생이었다.

불효막심한 자식이었다.


그랬기에, 이 갑작스러운 차원이동은 마치 인생을 다시 살 두 번째 기회처럼 느껴졌다.

나는 소설, 영화, 만화 가리지 않는 판타지 덕후였고, 판타지 세계를 동경했다.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갑자기 판타지 세계로 차원이동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 대한 진지한 계획들을 세우곤 했었다.

그런 내가 검과 마법, 신비가 살아 숨 쉬는 이 판타지 세계에 떨어진 것이다.

어딘가의 신이 평생의 소원을 이뤄준 것만 같았다.

정말 날아갈 듯이 기뻤다.

마치 이 세계 전체가 나만을 위해 준비된 새로운 세상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부모님이나 다른 가족들이야 뭐···나 없이도 지구에서 알아서 잘 살겠지 싶었고.

적어도 그때의 난 그리 생각했다.


크나큰 착각이었다.

판타지 세계에서의 새로운 인생은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 그리 환상적이지 않았다.

중세의 야만과 미신, 광신으로 가득 찬 이 세계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사고방식을 지닌 평범한 현대인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세상이 아니었다.

내 검은 머리와 검은 눈, 동양인의 골격과 피부는 항상 외지인이라며 눈총을 받게 만들었다.

21세기 대한민국 사람의 도덕관념과 위생관념, 종교관, 식습관 등은 항상 중세 판타지 세계의 그것과 충돌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먹고살려면 적응해야만 했다.

나 또한 이곳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그렇게 생각했고, 나름의 성공까지 거뒀다.


평범한 판타지 세계 주민처럼 농사도 지어 보았고, 병사로 징집되어 전쟁에서 공도 세워 보았으며, 용병 짓거리를 하며 돌아다녀 보기도 했다.

그러다 출세해서 잘 나가는 기사단의 일원이 된 적도 있었고, 좋지 않은 일로 그 기사단에서 쫓겨나 보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세계에서 구르다가 우연히 마법에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어찌저찌 결국엔 마법을 배웠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마법에 재능이 있었던지,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나자 세상은 나를 대마법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지닌, 흑색의 대마법사라고.

용을 제외한 모든 종족을 통틀어서 최연소 대마법사이자, 인간 종족 유일의 대마법사였다.


난 이세계에서 성공을 거뒀다.

꿈꾸던 모든 것들을 이루었다.


돈? 금은보화가 썩어나갔다.

권력? 내 사소한 말 한마디 한마디에 대륙의 판도가 바뀌었다.

마법? 난 아홉 가지의 원을 부리는 자, 흔히들 말하는 9서클의 대마법사였다.

지상에 단 하나 남은 용을 제외하면 나와 마법으로 겨룰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수명? 난 늙지 않았다.

몸 속 기관들은 마력 회로로 둘러싸여 노화될 염려가 없었고, 얼굴이나 피부 등 겉으로 보이는 부분들도 엘프들의 숲에 다녀온 뒤로는 이십대의 그것으로 바뀌어 변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처음 이세계에 떨어졌을 때 꿈꾸던 모든 것들을 이루었는데,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다.

이상하게도 꿈꾸고 소망할 때는 그것만으로도 날 가슴 설레고 벅차게 만들었던 것들이, 막상 꿈을 이루고 나니 무감각하게 느껴졌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공허했다.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았다.

외형은 전과 그대로였지만, 내 눈에는 그가 보였다.

긴 세월 동안 완벽히 판타지 중세랜드의 일원으로 탈바꿈해 버린 한 사람.

막 이세계에 도착해서 꿈과 희망으로 가득했던 순수한 지구인 청년은 이제 없었다.

야만적이고 피도 눈물도 없는, 고향도 가족도 없는 불쌍한 노마법사만이 남았을 뿐이다.

늙어서 돌아갈 곳도 없는, 함께할 사람들도 없는, 그래서 더더욱 처량한 노인네 하나.

그게 바로 나였다.


나에겐 돌아갈 곳과 돌아갈 사람들이 필요했다.

내 고향 지구와 그곳에 남겨 두고 온 사람들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지구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 때늦은 향수병에, 어딘가의 신은 내 두 번째 소원마저도 들어주었다.

신이시여, 들어주지 마시지 그랬습니까.

언제나 그랬듯이 비대한 귀머거리 거인으로 남아 계시지 그랬습니까.


첫 번째 소원이 차원 이동이라면, 그것은 이루어졌다.

두 번째 소원이 차원 간의 연결이라면, 그 또한 이루어지리라.


어느 날 아주 우연히, 이쪽의 판타지 세계와 저쪽의 현대 지구를 연결하는 차원 통로가 생성되었다.

나는 그것을 게이트라 불렀다.

나는 그것을 타고 넘어가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염원해 마지않던 푸른 별에 도착했다.

그러나 판타지 세계가 그러했듯이, 지구 또한 기대했던 바와는 달랐다.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고 나서야 가슴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지구에서도, 이세계에서도 환영받을 수 없는 무연고자였다.

부모님의 묘소 앞에 서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눈에 습기조차 차지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생판 남처럼 느껴졌다.


다른 가족들도 만나보았다.

그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판타지 세계로 다시 돌아왔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저 왔던 데로 게이트를 타고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귀환하자마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차원 간 연결통로가 너무 많았다.

다시 말해 게이트가 너무 많았다.

내가 발견한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세계 각지에 수백 여 가지의 게이트들이, 벽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송송 나 있었다.

전부 다 지구와 연결된 것들이었다.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어떤 것은 사람 한 명 정도가 겨우 드나들 만큼 자그마했다.

반면 어떤 것은 군대가 진입하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 세계 각지에 생성된 초대형 게이트들을 보며 난 어떠한 종류의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리고 역시나 마법사의 예감은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실제로 군대가 게이트를 통해 이세계에 진입하는 장면을 목격하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았다.


시작은 두 차원 간의 평화적인 교류였다.

한쪽은 뛰어난 과학기술과 문명의 발전을 이룬, 그러나 걷잡을 수 없는 자원의 고갈을 눈앞에 둔 현대세계.

다른 한쪽은 아직 증기기관조차 발명되지 않았으나, 무한한 자연의 신비와 마법을 간직한 판타지 세계.

분명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결과적으론 모든 게 꼬여버렸다.


지구인들은 야만적인 중세 판타지의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마찬가지로 이쪽 사람들도 ‘외계에서 온 금속 병기의 마법사들’을 경계하고 두려워했다.

협상은 진전되지 않았고,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저마다의 이유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지구인들은 이세계의 무한한 자원과 신에너지를 탐내서.

이세계인들은 지구인들이 지네들 권력과 부를 빼앗아 갈까봐 무서워서.

엘프들은 지구의 처참한 자연환경 실태를 보고 분노해서.

드워프들은 지구의 과학기술과 신무기들에 눈이 돌아가서.

오크들은 그냥 싸움이 좋아서.

그리고 나는······.

나는 전쟁을 방관했다.


애당초 승자가 정해져 있는 전쟁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지구의 군대는 판타지 세계 전체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며 진군했다.

현대의 전략 전술, 첨단 신무기로 무장한 지구의 군인들이다.

체계도 전술도 명확히 잡혀 있지 않은 이세계의 다종족, 다국적 연합군은 지구군을 상대로 처참히 갈려 나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참전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대마법사였고, 존재만으로도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살아있는 전쟁병기였다.

그들은 나에게 저 무도한 지구인들로부터 이 세상을 지켜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내키지 않았다.

이제 와서 손에 피 묻히는 것이 꺼려진다거나, 전쟁에 환멸을 느낀다거나 하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새삼스레 정체성의 혼란을 느꼈다.

나는 지구 출신의 판타지 세계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나고 자란 지구의 편을 들어야 하는가, 아니면 현재 소속되어 있는 판타지 세계의 편을 들어야 하는가?


지구 쪽에 서자니 판타지 세계에서 보낸 수많은 세월들이 마음에 걸렸고, 또 과연 지구인들을 믿을 수 있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그렇다고 판타지 세계 쪽에 서자니···질 것이 뻔한 게임에 판돈을 거는 격이었다.


나는 끝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세상은 내 결정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전쟁 발발 후 어느 날의 일이었다.

지구군이 내 은신처를 습격했다.

내게 총을 겨누는 탐욕스러운 고향 사람들 앞에서, 나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판타지 세계 사람이기를 선택했다.

내 안에 남아 있던 지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버렸다.


그렇게 지구에서 온 대마법사의 판타지 진영 참전이 확정되었다.

물론 내 참전 여부와는 별개로 전황은 암울했다.

소드마스터와 징집병, 마법사 수습생과 대마법사 가릴 것 없이 총알은 공평했다.

누구나 박히면 죽었다.

게다가 전차나 자주포, 전투기, 미사일 같은 경우는 그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였다.


하지만 기술과 지식은 언젠가는 전파되기 마련이다.

화약 기반 무기의 개념조차 잡지 못하던 이들, 전차나 전투기를 보고 쇳덩어리 괴물이라 부르며 두려워하던 판타지 세계 주민들은 이제 없었다.

지구인들이 그들의 순수를 쏘아 죽였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은 좋든 싫든 지구인들의 방식에 적응한 이들뿐이었다.


엘프 특수부대들은 활과 석궁, 자동소총과 수류탄을 들고 게릴라전을 벌였다.

드워프 공방들은 발 빠르게 지구의 열병기 개념과 판타지의 마력 에너지를 결합한 신무기들을 만들었다.

검사들은 총알을 튕겨내는 방법과 폭격 속에서도 살아남는 방법을 배웠다.

마법사들은 화약 무기를 방어하고 전투기, 전차들을 요격하는 법을 배웠다.

여태껏 감춰져 있던 수많은 신비한 종족들, 세력들이 새로이 나타나 지구와의 전쟁을 도왔다.


지구 측에서 전력을 다했더라면 그마저도 상대가 되지 않았겠지만, 상황이 조금 복잡했다.

판타지 세계는 세상을 지키겠다는 일념 아래 하나로 똘똘 뭉친 반면, 지구는 아니었다.

학창시절 세계사 시간에 어렴풋이 배웠듯이, 그들은 자기들끼리 아주 잘 싸우는 족속들이었다.


19세기의 식민지 경쟁이 다시 발발한 것처럼, 판타지 세계의 어느 땅을 어느 국가에서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내분이 일었다.

그 밖에도 몇몇 국가들이 게이트를 부당하게 독점하고 있다, 이계 자원은 모두의 것이다, 이세계인들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 등등···.


지구군은 약해졌고, 판타지 연합은 강해졌다.

소드마스터들은 적진에 침투해 지휘관을 암살했고, 대마법사들은 게이트를 봉쇄해 지구군의 퇴로와 보급로를 막았다.

이전까지는 전혀 승산 없는 싸움이었다면, 언젠가부터는 꽤나 해볼 법한 싸움이 되었다.

그리고 승리의 희망 앞에 전쟁은 어느 때보다도 치열해졌다.


지구군은 미사일과 전투기를 아끼지 않고 폭격을 쏟아 부었고, 판타지 연합군은 게이트 너머 지구에까지 잠입해 파괴공작과 테러를 자행했다.

폭격과 군홧발에 무너진 도시가 있는가 하면, 소드마스터가 난동을 부려 쑥대밭이 된 도시도 있었다.

어느 왕국의 원수가 정밀한 저격에 유명을 달리했는가 하면, 은신 마법과 함께 잠입한 암살자들에게 한 현대 국가의 수뇌부가 몰살당하기도 했다.

실로 참혹한 대전쟁The Great War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지구인들은 더 이상 판타지 주민들을 경시하지 않았다.

검 한 자루 들고 넘어온 소드마스터에게 멱이 따인 국가 수상들의 숫자가 몇이며, 대마법사의 파괴공작으로 잃은 기지, 시설, 공장 등의 손실이 얼마던가.


지구인들은 마침내 그들이 지닌 전력을 보이기로 결심했다.

판타지 주민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지구인들 또한 그들이 지닌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어떤 비인도적인 수단이라 할지라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지구군 대다수가 지구로 복귀했다.

썰물 빠지듯 신속한 전면 철수였다.

지구인들은 그렇게 되돌아갔다.

염원했던 바대로, 판타지 세계에는 원주민들이 남게 되었다.


승리를 쟁취했다며 기뻐하는 성급한 이들이 있었다.

지구로의 역습을 원하는 호전적인 이들이 있었다.

너무 많은 이들이 죽었다며 슬퍼하는 이들이 있었다.


나는 불안에 떨었다.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이 갔기에.

처음 차원 간 연결통로를 발견했을 때부터 염두에 두고 두려워했던 바로 그 가능성이었다.


그리고 어느 화창한 맑은 날에-

핵이 떨어졌다.


지구와의 대전쟁이 끝나자마자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핵과의 전쟁, 방사능과의 전쟁.

그리고 이번 전쟁은 시작과 동시에 패배로 끝나 버렸다.

싸워볼 기회도 없었다.


각국에 떨어진 핵탄두 다발에 도시와 문명이 무너졌다.

방사능은 마력과 결합되어 비정상적인 속도로 퍼져 나갔다.

핵을 발포한 지구인들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치명적인 방사능•마력 낙진이 세상을 휩쓸었다.


농토는 황야가 되었고, 강도 황야가 되었다. 도시나 늪지, 숲은 그보다도 더 심각한 괴물 둥지가 되었다.

사람들이 죽었다.

성급한 이들도, 호전적인 이들도, 슬퍼하는 이들도.

인간, 엘프, 오크, 악마, 늑대인간과 뱀파이어 가릴 것 없이 전부 죽었다.


용?

지상에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드래곤은 물론 이 끔찍한 핵전쟁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명실상부 판타지 세계의 유서 깊은 수호자이자 지상 최강의 존재가 출동했고,

최후의 드래곤은 무려 핵미사일 다섯 발을 막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여섯 발 째 미사일에서 그만 기력이 다하고 말았는지, 그 거대한 몸뚱이로 막아서서 어떻게든 폭발을 막아 보려다 그대로 추락했다.

마지막 용은 그렇게 날개 꺾인 채 방사능에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


나는 살아남았다.

핵탄두 앞에 기꺼이 몸을 바친 드래곤처럼 강렬한 희생정신에 휩싸여 있지도 않았을 뿐더러, 방사능으로부터 제 한 몸 지킬 정도의 실력도 있었던 덕분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죽어갔다.

나무와 숲은 말라 비틀어졌고, 온 세상의 삼분지 이는 끝없는 황야로 변했다.

방사능의 영향으로 괴물들은 더 흉포해졌다.

괴물 아닌 이들도 흉포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방사능에 피폭되어 죽어가는 이들, 제정신 아닌 이들이 속출했고, 돌연변이들이 나타났다.


그 속에서 악착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멸망 이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무리를 지었다.

요새(Fort)를 만들었고, 도시(City)를 만들었으며, 세력(Force)을 만들었다.

핵을 창조한 지구를 숭배하는 세력, 방사능 그 자체를 숭배하는 세력, 방사능을 피해 땅으로 숨어버린 이들 등등······.


광기와 죽음, 방사능과 괴물들이 뒤섞인 혼탁한 세상이었다.

선한 자들과 영웅들은 모두 죽었고, 미친놈들과 비열한 협잡꾼들만 남았다.

환상은 현실에 짓밟혔고, 남은 것은 잿더미뿐이었다.


그리고 그 잿더미 위에.


이 모든 것들을 경험한 마법사가 있었다.



* * *



때는 핵전쟁 종료 15년 후.

장소는 자유도시 갈란Gallan.


드넓은 황야 가운데서도 몹시 희귀한 방사능, 괴수 안전지대에 위치해 있는데다가, 어떠한 거대 세력의 압박도 받지 않는 곳.

말 그대로 자유로운 도시다.


문제는, 그 자유분방함이 조금 지나칠 때가 있다는 점.

사설탐정, 해결사, 사냥꾼, 그리고 마법사를 겸업하고 있는 사내-유논(有惀)은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자네에게 의뢰를 맡기겠다고 말했네.”

“그러니까 그 의뢰가······.”


의뢰인은 이런 혼탁한 세상 속에서도 나름 좋은 재질의 옷을 갖춰 입은, 후덕한 인상의 중년인이다.

척 봐도 돈깨나 있어 보이는 외관.

그래서 옳다구니 하고 어떤 의뢰나 다 받는다고 말을 꺼낸 것이 실수였다.


“내 애완동물을 잃어버렸다네. 찾아 줄 수 있겠지? 이름은 나비, 종은 변종 불꽃 샐러맨더. 아직은 어린 해츨링일세.”


유논은 그가 아는 ‘변종 불꽃 샐러맨더’라는 종에 대한 정보를 되새기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변종 불꽃 샐러맨더.

화산 혹은 매우 무더운 황야지대에 서식하는 대형 도마뱀류의 ‘괴수’종.

선공형 괴수이며, 매우 난폭하고 방사능이 섞인 불을 뿜음.

상대할 때 큰 주의를 요함.


“애완동물이라고. 혹시 내가 아는 그 샐러맨더와는 다른 종인가?”

“아마 자네가 아는 그 종이 맞을 걸세. 덩치 크고, 불 뿜고 하는 그 도마뱀 맞네.”

“······.”

“혹시나 걱정할까봐 말해주지만, 우리 나비는 시청에서 하는 애완동물 적합성 여부 테스트를 전부 다 받았다네.”

“그걸 통과했다고?”

“암. 우리 나비는 착해서 사람도 절대 안 물고, 검사에서 방사능 수치도 기준치 이하로 나왔다네. 절대적으로 안전한 애완동물이지.”

“···내가 세상 좀 살다 보니 느낀 건데, 절대란 건 없더라고.”


‘네가 살면 얼마나 살았다고?’ 라고 말하는 듯한 의뭉스러운 눈길에, 20대의 외관을 한 노마법사는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피곤함을 느꼈다.


‘이래서 요즘 젊은 것들이란······.’


맙소사, 애완동물 변종 샐러맨더라니.

이래서 자유도시에 오지 않으려 했었다.


자유도시라는 명칭의 이름값을 한다고 봐야 할까.

지금 이 작자처럼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한, 나쁘게 말하면 정신 나간 인간들이 너무 많다.

포트 시라센이 무너지지만 않았어도 한동안은 들르지 않았을 텐데.

한숨을 푹 내쉬고선 의뢰를 거절하려던 순간이었다.


“물론! 이 넓은 자유도시에서 우리 작고 귀여운 나비를 찾는 게 쉽지 않은 일인 줄은 아네. 아무리 순하다고는 해도, 품종이 품종이다 보니 자네 입장에선 꺼려질 수도 있을 테고.”

“그렇다면?”

“보수를 두둑하게 주지.”


유논은 이번에야말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짙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난 보수를 마정석으로만 받아. 그 사실은 알고 왔나?”

“몰랐지.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저 돈 많은 괴짜 도마뱀 애호가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말을 이었다.


“마정석이건, 정화코인이건, 드워프제 총알이건, 지구 달러건. 나한테 돈은 썩어 넘치도록 있다네. 마정석? 나비를 찾아서 안전하게 데려와 주기만 한다면 내 만족할 만큼 지급하지.”

“만족할 만큼이라.”


유논은 턱을 매만졌다.


‘이런 시대에도, 애완동물에 돈을 쏟아 붓는 부자들이 여전히 존재하는군.’


오히려 이런 시대이기에, 부자들은 멸망한 세계에서의 사치를 마음껏 즐기곤 한다.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오늘만을 사는 것이다. 어리석기 그지없는 짓이지만, 그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도리어 이번에는 그 자신이 이런 사치의 뜻하지 않은 수혜자가 되었으니,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일이었다.


만족할 만큼의 마정석이라.

솔직히 말해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다.


“그 약속, 끝까지 지키는 게 좋을 거야.”

“물론. 기대해도 좋네, 젊은 마법사 친구.”


유논은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중년인과 악수를 나누며 골치가 아파져 오는 것을 느꼈다.


‘이제 그 불 뿜는 새끼 괴수 도마뱀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봐야 할지 고민해야 될 때로군.’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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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51

  • 답글
    작성자
    Lv.67 생각.
    작성일
    20.06.08 13:51
    No. 31

    그렇게 느끼셨군요. 제가 실력이 미숙해서 그런가 봅니다. 좋은 의견과 댓글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1 wi******..
    작성일
    20.06.16 00:08
    No. 32

    이해가 안가서 그러는대... 도대체 핵미사일을 어떻게 유도해서 대도시로 보낸거죠?? 판타지 세계에 위성이 있나요?? 레이더관제탑이나 항모에서 좌표 유도 해줄수 있나요?? 아니면 특수부대가 진입해서 유도해주나요?? 미사일이 요이땅하면 가서 터지는게 아닙니다!

    찬성: 2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67 생각.
    작성일
    20.06.16 08:28
    No. 33

    그건 저도 아는데요...어떤 점이 이해가 안 가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전쟁 시절 지구군은 이미 판타지 세계에서의 핵전쟁을 위한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67 생각.
    작성일
    20.06.16 08:28
    No. 34

    말씀하신 유도 과정에 대한 준비를 포함해서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6 마크폐인
    작성일
    20.06.16 19:30
    No. 35

    폴아웃 판타지 인가..?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67 생각.
    작성일
    20.06.16 19:44
    No. 36

    그런 느낌입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2 가시올빼미
    작성일
    20.06.25 00:36
    No. 37

    지구놈들.. 지들도.당해봐야함.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67 생각.
    작성일
    20.06.25 12:31
    No. 38

    동감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RangmanA
    작성일
    20.07.08 19:43
    No. 39

    비대칭 전력에 당했네요
    근데 보통 삐라같은걸 뿌린다음에 한개만 터지게 해서 제압할걸 왜 완전히 초토화를 시켰나요?
    그리고 게이트로 미사일이 넘어가는게 가능한건가요 아니면 이세계에서 미사일을 쏜건가요?

    찬성: 2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67 생각.
    작성일
    20.07.11 14:03
    No. 40

    1. 기존 전략은 주요 도시나 시설물들만 핵폭탄으로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일정 농도 이상의 방사능이 마력과 결합하면서 기현상이 발생하는 바람에 의도한 것 이상의 '초토화'가 일어나게 된 것이죠.
    2. 지구인들은 이세계에서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독자777
    작성일
    20.08.12 22:48
    No. 41

    잘 보고 갑니다.
    게이트 넘어가서 지구의 원자력발전소만 노려도 게임 끝이었을텐데...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30 김아현
    작성일
    20.10.19 20:38
    No. 42

    와 이거 존나재밌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1 부카튀베
    작성일
    21.02.09 16:05
    No. 43

    설정에 구멍이 너무많음. 게이트 타고 넘어간 판타지 세계의 비대칭 전력이라 할수있는 대마법사나 소드마스터들이 날뛰는데 지구는 멀쩡하고 판타지세계만 핵으로 엉망진창 애초에 지구에 넘어가서 날뛸때부터 지구는 가망이 없었을건데 국가 수반들 다 조지고나면 현대의 지휘체계상 엉망진창일건데 여튼 설정 구멍이 너무많은데다

    주인공이 너무 무책임한데다 나이를 똥구멍으로 먹은거 같음. 게다가 대마법사가 지 거처에다 아무런 방비도 안해놨다는거에서부터 그냥 영 아니거같음

    찬성: 2 | 반대: 0

  • 작성자
    Lv.43 혓바늘
    작성일
    21.02.09 19:03
    No. 44

    탄탄한 설정이 맘에드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옳은말
    작성일
    21.02.11 09:51
    No. 45

    애초에 전쟁에 참여한 순간부터 핵에 대한 위험을 알고 있지 않나요? 그렇다면 어느정도 판타지 세상에서 적을 막을 수 있으면 지구로 넘어가서 동맹세력을 만들거나 핵기지를 선제공격하는 식이 되어야지, '핵에 의해 파괴된 판타지 세상' 이라는 설정을 만들기 위한 제반 설정이 너무 이상하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2 레식
    작성일
    21.02.12 02:47
    No. 46

    통신체계나 gps가 있는것도 아닌데 미개한 판타지의 소드마스터들이 이계로넘어가서 어딨는지도 모르는 수뇌부를 발로 뛰어서 찾아낸다는 암살한다는 발상은 어디서 나온건지는 몰라도
    솔직히 판타지 상대할꺼면 핵까지 갈필요도없음. 딱 북한 정도 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화학무기나 각국의 연구소가 비밀리에 연구하는 바이러스 몇종만 주요도시에 퍼트려도 반이상은 죽을듯.
    그리고 판타지세계의 대기권에 군사위성좀 띄운다음 주요전력있는 위치에 미사일만 날려도 게임끝.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10 Qeq
    작성일
    21.02.12 03:36
    No. 47

    따지고 보면 주인공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고 학살이 벌어졌네 ㅋ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9 허무십일홍
    작성일
    21.02.13 17:38
    No. 48

    대마법사와 소드마스터의 전력묘사에 비해 지구의 피해는 납득이 어려울 만큼 낮은 것 같습니다. 물론 아포칼립스 이후가 메인인 만큼 이 부분은 그냥 그렇다라고 넘어가셔도 되지만, 밑의 분들처럼 원자력 발전소라던가 핵시설 등에 대한 대처가 일부 독자분들이 개연성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것 같네요.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43 lOC
    작성일
    21.02.15 05:10
    No. 49

    소재 좋아서 엥간하면 계속 보고싶은데 주인공 행동이랑 지구측, 판타지측 행동이 이해가 전혀 안감. 빡대가리들만 있는것도 아니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6 Tinahan
    작성일
    21.07.04 01:54
    No. 50

    이 부분 없이 그냥 바로 방사선 아포칼립스로 넘어간게 훨씬 좋았겠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2 열피카츄
    작성일
    21.07.05 01:31
    No. 51

    너무 재밌어요! 앞으로가 기대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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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거대 세력(Great Force)(2) +2 20.05.30 3,002 109 17쪽
17 거대 세력(Great Force)(1) +8 20.05.29 3,221 119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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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Man Meets Girl(3) +8 20.05.25 3,439 135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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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Man Meets Girl(1) +12 20.05.23 3,531 157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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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황야에서 피를 봐서는 안 된다(4) +16 20.05.21 3,646 135 19쪽
8 황야에서 피를 봐서는 안 된다(3) +4 20.05.20 3,703 138 12쪽
7 황야에서 피를 봐서는 안 된다(2) +6 20.05.19 3,909 143 17쪽
6 황야에서 피를 봐서는 안 된다(1) +5 20.05.18 4,258 144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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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국주의자들(1) +22 20.05.17 5,320 181 20쪽
3 비정상들의 세상(2) +18 20.05.16 6,305 183 23쪽
» 비정상들의 세상(1) +51 20.05.16 7,832 218 19쪽
1 프롤로그-멸망한 세계의 마법사 +29 20.05.16 13,148 29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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