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완결

생각.
작품등록일 :
2020.05.16 10:33
최근연재일 :
2022.03.28 12:05
연재수 :
287 회
조회수 :
295,372
추천수 :
14,095
글자수 :
1,877,846

작성
20.05.16 20:00
조회
6,303
추천
183
글자
23쪽

비정상들의 세상(2)

DUMMY

도마뱀들은 보통 습한 곳에서 서식한다.

그 때문에 일반적인 도마뱀을 찾는 경우라면 하수도나 우물 따위의 장소를 뒤져보았겠지만, 상대는 일반적인 도마뱀이 아니었다.

변종 불꽃 샐러맨더.

습한 곳보다는 덥고 건조한, 특히 용암지대 따위의 뜨거운 장소를 좋아하는 괴수다.

그런 샐러맨더의 습성을 고려할 때, 이 불타는 도마뱀이 숨어들었을 거라고 예상되는 후보지는 몇 곳 남지 않았다.

그리고 일단 수색망을 좁히고 나면 찾는 것쯤이야 간단하다.


“내 마정석이 여기 있었군.”


유논은 불더미 위에서 기분 좋게 그르렁대며 잠자던 샐러맨더 해츨링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이윽고 화들짝 놀라 꿈틀대는 녀석을 대장간의 용광로 속에서 강제로 끄집어낸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용광로의 열기만으로도 못 견디게 뜨거울 뿐더러, 사람 팔뚝만한 도마뱀이 안간힘을 다해 몸부림치는 힘을 이겨내지 못할 테지만, 유논은 다르다.


그는 마법사였다.

그것도 도구를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아는 현명한 마법사.


그의 손을 둘러싼 은빛 장갑이 주변의 열기를 빨아들이며 빛나고 있었다.

샐러맨더가 자체적으로 생성하는 불꽃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장갑은 그것마저도 남김없이 흡수해버렸다.

그리고 열에너지를 전부 잃어버린 채 평범한 붉은색 도마뱀이 되어버린 녀석을 붙들고 있는 것은 유논의 손아귀 힘.


신체 내부의 마력 회로를 통해 강화된 악력은 샐러맨더로 하여금 도망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최후의 반항이라도 하려는 것인지, 장갑을 콱 깨무는 모습에 유논은 코웃음을 쳤다.


“아, 그래. 역시 세상에 절대란 건 없지.”


사람을 절대 안 문다고?

아무리 작아도 괴수종의 새끼인데 그럴 리가 있나.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아예 저항도 못하게 기절시킬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도마뱀 애호가 의뢰인께서는 ‘안전하게 데려오라’는 요구사항을 덧붙인 바 있었다.

서비스 정신 투철한 그로서는 아무리 진상 고객의 것이라도 요구사항을 수용할 수밖에.

물론 이 모든 서비스까지 톡톡히 계산해서 의뢰인에게서 보상을 받아낼 생각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이 은색 금속질의 장갑, 당연하게도 그가 애용하는 주무장 ‘이름 없는 지팡이’의 변형 폼 중 하나였다.


어차피 아직 성체도 되지 못한 변종 샐러맨더의 치악력으로는 흠집조차 내지 못할 재질로 만들어졌다.

그런고로 데려가는 길에 지나가는 행인한테 함부로 불꽃이라도 뿜으면 큰일이니, 차라리 순순히 물려줘서 아가리를 장갑으로 틀어막은 채 의뢰인한테 운송하는 편이 나을 듯 했다.


나름대로 영성을 지닌 지팡이인지라 웅웅대며 진동을 전하는 꼴이 이런 몹쓸 일을 시키는 제 주인을 탓하는 모양이었지만,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법사는 흥미로워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대장간 주인 드워프에게 사례금으로 드워프제 총알 몇 묶음을 던져준 후, 서둘러 대장간 밖으로 나갔다.


드워프제 총알.

나름 유용한 물물거래 수단이지만, 어차피 마정석 이외의 다른 대체화폐는 그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게다가 열기를 흡수하는 장갑을 보며 금방이라도 무슨 재질인지, 어디서 제작했는지 일일이 캐물을 것만 같았던 방금 그 주인장 드워프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감안했을 때······.

불을 먹어치우는 마법 장갑에 대한 이상한 헛소문이 도는 일이 없도록 돈 조금 쥐어주고 입막음하는 편이 현명해 보였다.


결국 돈이란 물질의 쓰임새는 어디까지나 소유주의 역량에 달려있는 것.

함부로 쓰면 귀찮은 일들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의 원흉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잘만 쓴다면 여러 귀찮은 문제들을 사전에 차단할 수도 있는 법이다.


유논은 손에 팔뚝만한 붉은색 도마뱀을 대롱대롱 매단 채, 행인들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성큼성큼 골목길을 올라갔다.

이윽고, 마법사는 어느 자그마한 건물의 간판 앞에서 멈춰 섰다.


[마법상점]

마법사 있음.

마법 관련, 괴수 관련, 범죄사건 관련 등등 가리지 않음.

의뢰를 주문하고 싶은 자는 오시오.


상품이 따로 있는 일반적인 상점이 아니라, 마법사에게 맡기는 의뢰가 곧 상품으로 취급되는 마법상점이었다.

유논은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얼굴로 허름한 간판을 바라보았다.


“···이참에 마법사 딱지를 확 떼버릴까.”


어차피 하는 일도 마학을 탐구하는 일반적인 마법사라기보다는 의뢰를 받고 일하는 괴물 사냥꾼이나 해결사 쪽에 가까웠다.

그러니 굳이 마법상점이 아니라, 해결사 사무소나 사냥꾼 오두막 따위의 이름을 달아도 나쁠 것 없으리라.

지금까지는 마법사로서의 정체성에 미련이 남아 그냥 남겨두었지만······.


“아무래도 마법사 딱지를 붙이고 있으니 대체로 정상적이지 않은 인사들만 꼬이는 것 같단 말이지.”


이를테면 애완용 변종 샐러맨더를 찾아 달라는 의뢰인이라던가.

유논은 꽤나 합리적인 추론이라 생각하며 진지하게 간판을 바꿔볼까 고민했다.


마법사라고 광고했더니 비정상적인 작자들만 모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친구 찾아 끼리끼리 논다고, 마법사라는 직종 자체가 지극히 비정상적인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지구와의 대전쟁 시절까지만 해도 귀족 못지않게 대우받았던 마법사들이다.

그러나 핵이 떨어진 뒤 그들이 지녔던 과거의 위상은 땅바닥을 뚫고 지저까지 추락했다.

그리 된 연유야 간단하다.

마법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대에 마법은 탐구적 측면에선 병들어 죽어가는 학문이요, 실용적 측면으론 관 속에 틀어박혀 사장된 기술이었다.


지구인들이 쏘아올린 핵탄두는 판타지 세계의 가장 큰 신비, 마법조차 죽여 버렸다.

핵이 떨어지고 방사능이 퍼지자 마력(魔力)이 오염되었다.

그 때문에 세계가 병들자 마나(Mana)는 희박해졌다.

마법을 이루는 가장 큰 두 가지 요소들이 한꺼번에 아예 못 쓰게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그게 끝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 선에서 끝났으면 그나마 다행이었을 것이다.

마법을 구성하는 것이 마나와 마력이라면, 구성이 끝난 마법을 발동시키는 것은 주문呪文이다.


그리고 그 주문은 용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종족, 출신, 능력 불문하고 세상 모든 마법사들의 주문은 세계와 계약을 맺은 드래곤의 주문에 그 원형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래, 핵 맞고 뒤진 바로 그 드래곤이다.

심지어 수많은 용들 중 하나도 아니고, 세상에 마지막 남은 최후룡最後龍이었다.

모든 마법의 근본이 되는 드래곤과 그 드래곤의 주문이 방사능에 오염된 채로 멸종했다.


당연히 그 진전을 이어받은 마법사들의 주문이라고 해서 멀쩡할 리 없다.

드래곤의 멸종에 이어서 마법의 멸종, 그리고 마법사들의 멸종이었다.


그가 일반적인 마법사처럼 일하지 않는 이유?

일반적인 마법사는 이 시대에서 결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판타지 세계 하면 떠오르는 일반적인 부류의 마법사들은 이미 다 죽고 없다.

지금까지 남아 마법사임을 자처하는 이들은 오직 두 가지 부류만이 남았을 뿐이다.


첫째, 마법이 뭔지도 모르면서 마법사랍시고 설치고 다니는 어중이떠중이 사기꾼들.

둘째, 이미 죽은 마법에 인공호흡기라도 붙이겠답시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연명하는 비정상적인 마법사들.


그는 명백히 후자의 분류에 속하는 마법사였다.

죽은 자식 불알 붙잡는 거나 다를 바 없이 미련한 짓이지만, 어쩌겠는가.

마법이 없어진 세계에서의 마법사가 하는 짓이 원래 이렇다.


검사들은 마력이 없어져도 오러 못 뿜고 신체 강화 못하는 것 정도가 전부고 검술실력은 여전히 남아있는데 비해, 마법사들만 이 모양 이 꼴이다.


마법의 3요소인 마나, 마력, 주문 중 뭐 하나라도 제대로 남아있는 것이 없으니, 대마법사가 아니라 대마법사 할아버지가 와도 1서클 마법조차 제대로 다룰 수 없다.


마법상점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이상, 비정상적인 의뢰인들만 찾아올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이미 마법사들이라곤 전부 사지 잘린 마법고자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마법사랍시고 광고하고 다니니 믿음직스럽게 보일 리 있나.


이를테면 지구 모리셔스 섬의 도도새와 비슷한 이미지라고나 할까.

멸종됨이 확실한, 그래서 그런 바보(Dodo)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이들까지 함께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였다.


정상적인 의뢰인들은 당연히 자칭 마법사라 주장하는 우스꽝스러운 자들을 기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그의 마법상점은 우스꽝스러운 마법사에게 기꺼이 의뢰를 맡기는, 정신 나간 작자들만 찾아오는 곳.

다시 말해 비정상들의 회담장이 되어 버렸다.


“······.”


유논은 씁쓸하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포트 시라센에서는 이렇지 않았었다.


요새 특성상 못 미더운 마법사 손까지 빌려야 할 정도로 일손이 부족하기도 했고, 요새 방어전에도 여러 번 참가했던지라 그곳 사람들과 신뢰를 어느 정도 쌓아두었었다.

그 때문에 제대로 된 의뢰들이 들어올 만한 탄탄한 기반이 있었으나, 자유도시의 경우에는 마지막으로 들렸던 것만 해도 꽤나 오래 전의 일인지라 딱히 그런 게 없었다.


이래서 요새가 무너졌을 때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별 수 없는 일이지.”


아쉬운 대로 자유도시에서 천천히 기반을 쌓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의뢰인들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문제도, 능력이야 있으니 시간만 지나면 입소문을 타고 자연히 해결될 터였다.


시간이 지나도 끝내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해보아도 늦지 않을 문제일 테고.


정 안되면 예전 자유도시에 마지막으로 들렀을 때에 만들어두었던 굵직한 인맥들을 동원하면 된다.

그는 오래 살아온 마법사였고, 그만큼 세계 각지에 이런저런 인연들을 여럿 만들어 두었다.


자유도시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문제는 인연뿐 아니라 악연의 경우에도 그건 마찬가지라는 점이겠지만······.

아무튼 아직까지는 마법사 간판을 아예 떼어내 버릴 필요까지는 없을 듯 했다.


그는 이러니저러니 고민해 보아도 결국은 마법사로 회귀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마법사식 협상을 할 차례겠지.”


유논은 여전히 손끝에 샐러맨더를 매단 채, 발로 마법상점의 문을 열어 재끼고 들어섰다.

그 먼지 쌓인 마법사의 처소 안, 중년의 도마뱀 애호가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만사가 태평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유논은 장갑을 꽉 문 채 도무지 놔주질 않는 적색 도마뱀을 그의 눈앞에서 대롱대롱 흔들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정말 훈련이 잘 된 도마뱀이더군. 그쪽이 말한 대로 사람을 절대 안 물어. 시청 애완동물 적합성 테스트를 통과할 만 해.”


그 명백히 비아냥대는 어투에 중년인은 억지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 빨리 찾아와 줬군 그래. 우리 나비도 다친 곳이 없는 것 같고. 아주 일처리가 빨라. 그리고 그 시청 테스트에 관해선 말이지······.”

“통과 비결은 역시 뛰어난 도마뱀 훈련법인가?”

“···크흠, 그저 시청 직원에게 약간의 ‘성의’를 표시했다고만 해 두지.”


헛기침하며 돌려 말하는 모습에 마법사는 냉소했다.


“뇌물을 바쳤단 얘기로군. 물론 그 ‘성의’를 받은 시청 직원은 나와 달리 샐러맨더 새끼한테 손을 물리는 경험은 안 해봤겠지.”

“잠깐, 진정하게. 자네에게도 그에 합당한 성의를 표시할 테니. 내 말했지 않았나, 만족스러울 만큼 지급하겠다고.”

“물론 그래야겠지. 내 손가락이 짓이겨진 만큼은 돈을 줘야 할 거야.”


사실 손은 전혀 아프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에 통증을 느낄 거면 일 때려치워야지.

일부러 엄살을 부린 것은 그만큼 의뢰인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진땀을 흘리는 도마뱀 애호가의 모습에 유논은 억지로 꾸민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줄 테니 보수는 두둑하게 주라는 일종의 압박이었다.

의뢰인 입장에서야 정보를 잘못 전달해서 의뢰에 지장이 가게 만든 것은 사실이니, 뭐라 거부의사를 표하지도 못할 것이고.


기실 여태까지의 모든 공격적인 어투와 제스쳐는 곧 다음 단계를 위한 포석이었다.

의뢰 보수 협상.


“소형 열 개 정도면 어떻겠는가?”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도마뱀 애호가의 모습에 유논은 입가를 매만졌다.

확실히 돈이 썩어 넘치도록 있다는 양반답게, 통이 큰 편이었다.


마정석, 바깥세상에서 더는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마력을 함유하고 있는 광석.

자그마한 소형 마정석 하나라도 방사능이 닿지 않는 지저까지 시추해서 채취해야하기 때문에 그 값어치가 상당하다.

소형 열 개 정도면 들인 노력에 비해 크게 이득 보는 장사였다.


하지만······.


‘아직 협상의 여지가 남아 있어 보이는데.’


심란한 표정으로 콧수염을 쓰다듬고 있는 중년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유논은 결정했다.


“중형 두 개.”

“끙······. 중형 둘이라.”


중년인은 침음을 흘렸다.

상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오직 마정석만을 보수로 받는 마법사였고, 마정석은 소형보다는 중형이, 중형보다는 대형이 훨씬 값어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중형 마정석 둘이면 부자인 그로서도 애완동물 구조비용치고는 꽤나 부담이 가는 금액이었으나······.


‘이미 제대로 코가 꿰였으니, 별 수 없다.’


그는 마법사의 손 아래 시계추처럼 흔들리고 있는 인질-샐러맨더를 보며 마음을 정했다.

도마뱀과 파충류를 사랑하는 사나이로서 감수할 수밖에 없는 금액이었다.


“이거 내가 손해 보는 장사지만, 알겠네. 중형 두 개로 하지.”

“그리고 또.”

“···또?”

“추가비용으로 소형 두 개까지.”

“추가비용? 그건 또 왜?”


유논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의 의뢰인에게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대장간 주인 입막음 비용. 그쪽 샐러맨더께서 용광로 속에서 주무시고 계시더군.”

“···돈 계산 한 번 철저해서 좋겠군. 알겠네. 전부 보수로 지급하도록 하지.”

“철저함이 곧 생명이지.”


유논은 피식 웃으며 의뢰인과 악수를 나누곤 마정석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건네받았다.

마정석 전부를 일일이 살펴보고 개수와 순도 모두 문제없다는 것이 확인되고 나서야, 샐러맨더는 제 주인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이고,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항상 화끈하게 불타던 녀석이 이렇게 시무룩해졌을꼬!”


눈물겨운 상봉을 하고 있는 그들을 뒤로 한 채, 유논은 소형 마정석 두 알은 따로 꺼내든 뒤 주머니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추가비용까지 잘 받았다. 수확이 썩 괜찮은 편이군.’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돈 계산을 해야 하는가 싶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야만 한다.


마정석은 그에게 있어 그만큼 중요하다.

순도 높은 마력을 지닌 마정석은 마력이 오염된 이 세상에서 그 자체로 귀한 대체화폐 역할을 수행하지만, 유논에게 있어서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는 마정석이 없으면 죽는다.

마정석이라 불리는 정기적 마력 충전의 수단이 없으면 그는 얼마 못 가 사망한다.


이는 그의 몸이 마력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과거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대마법사라 불리던 그다.

그의 전신은 대전쟁 시절 자기 몸속에 직접 박아 넣은, 모세혈관처럼 곳곳에 뻗어 있는 마력 회로들로 뒤덮여 있다.


이 마력 회로라는 것들은 참 까다로워서, 한 번 몸에 박아 넣은 이상 이전의 마법적 능력을 되찾지 않고서는 다시 제거할 수도 없다.

뿐만 아니라 이것들 때문에 단순히 몸을 움직이기만 해도 귀한 자원인 마력이 소모된다.

격하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많은 마력이 소모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덕분에 그는 초인적인 수준의 근력과 반사 신경을 가지게 되었고, 숨을 쉬지 않거나 먹고 마시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게 되었다.

영양분을 마력으로 대신 섭취하기 때문이다.


신체에 노화가 오지 않는 것 또한 비슷한 연유에서였다. 상시 가동 중인 마력 회로가 노화 혹은 부상으로 인한 신체의 결손부분을 빠르게 수복해 주기 때문.

마력 보충만 제때 이루어진다면, 그는 죽지 않고 영생할 수 있는 몸을 지니고 있다.

어디까지나 마력 보충이 제때 이루어진다는 전제 하에.


세상 천지에 순수한 마력이 차고 넘치던 핵전쟁 이전의 시절이었다면 문제 될 일 없을 조건이요, 완벽한 육체였겠지만.

안타깝게도 오염된 마력으로 가득한 이 시대에는 문제가 된다.


방사능의 마수가 뻗지 않은 정순한 마력을 정기적으로 공급하지 않으면, 그의 신체 기능은 정지할 것이다.


유논이 마정석을 갈망하는 이유였다.

남들에게는 돈이지만, 그에게는 수명이나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회로에 비축된 마력이 실시간으로 깎여 나가는 중이기에, 마정석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렇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아그작.


유논은 장갑 낀 손 그대로 자그마한 마정석 두 알을 짓이기며 입 속에 밀어 넣었다.

고농도의 마력 결정체, 고체와 액체의 중간 어딘가에 있는 무언가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감각이 선명했다.

정신 제대로 박힌 사람이 할 짓은 아니었다.

그 예시로 의뢰인이 샐러맨더와 함께 별 해괴한 것을 다 본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유논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비정상들의 세상을 살아가는 마법사였고, 이런 세상이기에 마정석을 갈아 마시는 미친놈들 쯤이야 널려 있었다.

이 정도 수준의 미친 짓은 가벼운 애교쯤으로 봐줄 법 한 것이다.

구강으로 직접 섭취하는 쪽이 마력 낭비 없이 가장 효율적인 것을 어떡하겠는가.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을 노릇이지.’


이렇게 의뢰를 수행하고, 그 보수로 받은 마정석을 바로 섭취하는 일상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어쩔 수 없는 일들이었다.


벌이가 그다지 좋은 것도 아니고, 풍족한 생활 방식도 아니다.

그 장본인이 전직의 대마법사라면 더더욱.


하지만 이런 생활방식이 충분한 양의 마정석을 ‘눈에 띄지 않고 안전하게’ 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들 중 하나였다.

가끔은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의뢰로 골머리를 앓을 때도 있지만, 일획천금을 바라고 무모한 일을 저지르다가 몇몇 거대 세력들의 관심을 사게 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는 지구와의 대전쟁 시절 가장 악랄한 테러리스트이자 학살자였다.


비록 대마법사라는 위명이 반쯤 유명무실해진 시대라고는 하나, 그가 쌓아온 악명과 업業들은 여전히 쌓여 있었다.

그는 고작해야 마법사 한 명이지만, 동시에 그의 과거는 고작 마법사 한 명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귀찮은 일들을 피하려면, 조용히 의뢰나 수행하면서 살아가는 편이 나았다.

아주 조용히, 세상으로 하여금 그의 존재여부도 제대로 알 수 없게끔.


“그나저나, 마정석에 관심이 많나 보군?”


도마뱀을 어깨에 매단 채, 감동적인 해후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선 중년인이 내뱉은 말이었다.

보수도 다 지급받았겠다, 유논은 심드렁한 어조로 답했다.


“마법사라면 관심이 없을 수가 없지.”

“그래, 자네도 마법사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러면 혹시 대형 마정석에도 관심이 있나?”

“없어서 못 구하지.”


소형과 중형 정도 수준의 마정석까지는 가격이 문제였다면, 대형 정도 되는 수준부터는 그 값어치를 따지기도 힘들 지경으로 귀해진다.

말 그대로 없어서 못 구할 지경.

당연하다는 듯이 답한 유논은 뒤이은 중년인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내가 갓난아기 정도 크기의 마정석을 지닌 사람을 하나 아는데 말이지.”

“흠···?”


꽤나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다.

보나마나 허풍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만약 정말 갓난아기 정도 크기의 마정석이 실존한다면······.


‘최소 대형 마정석. 어쩌면 소문으로만 들었던 특급 마정석일지도 모르지.’


“마침 내가 그 사람에게 자네에게 맡긴 의뢰 이야기를 해 주니 몹시 유능한 사람 같다고, 한 번쯤 만나보고 싶다고 하더군. 혹시 관심 있나?”


‘혹시 아나? 맡기고 싶은 의뢰가 있는데, 그 보수로 초대형 마정석을 내걸지도.’ 라며 과장해서 덧붙이는 중년인의 꼬드김에 유논은 손에 낀 장갑-지팡이를 매만졌다.


“관심이야 있지.”


어느새 은색 금속질의 장갑은 투명하게 변해 사라진 뒤였다.

마법사의 대답에 중년인은 만족한 듯 본 용건을 꺼내들었다.


“관심 있다니 다행이군. 마침 우연히도 내가 이 근처에서 그 자를 만나기로 했는데 말이지···말이 나온 김에, 여기로 불러와도 상관없겠지?”


우연히 마법사를 찾아와 의뢰를 맡기게 되었는데, 거기서 또 우연의 일치로 대형 마정석을 지닌 사람과 이 근처에서 만나기로 잡아놓은 약속이 있었다, 라.


설령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노련한 마법사가 아니라, 대여섯 살짜리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낄 것이다.

개연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애초에 마정석을 미끼삼아 그를 꾀어내려고 의도하고 찾아왔다고 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일이었다.


‘평범한 도마뱀 애호가는 아니었군.’


애초에 샐러맨더 구출 의뢰 자체도 그가 찾던 마법사가 맞는지 시험하려는 의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유논은 무심한 눈으로 넉살 좋게 웃고 있는 중년인을 쳐다보았다.

분명 그를 꾀어내서 얻어내고자 하는 목표가 있을 터.


“사람 중개상이었나?”

“엄밀히 따지면 반반이네. 사람 중개는 이따금씩 맡는 정도지. 그냥 아는 사람들끼리 서로 소개해주는 수준에 불과하네.”


글쎄. 칠칠맞게 도마뱀 괴수를 애완동물로 키우고 다니는 인물치고는······.


“그렇다고 보기에는 그 ‘아는 사람들’이 조금 많이 특이해 보이는걸.”


마법상점의 먼지 낀 창문 너머, 다가오는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유논의 그들의 인상착의를 대충이나마 훑어보았다.

경갑옷을 입고 있는 50대 초반 즈음의 나이든 기사와 화려한 예식복장의 20대 청년.

아마 귀족과 그 호위기사이리라.


이거, 골치 아프게 되었다.


‘제국주의자들인가.’


제국주의자들.

핵이 떨어진 판타지 세계에 세워진 일곱 가지 세력 중 하나였다.


신분제가 무너진 지 십 수 년.

제국도, 왕국도, 귀족가도 다 없어진 세상에서 저렇게 대놓고 ‘나 귀족이오.’, ‘나 기사요.’ 라고 외치는 듯한 복고 복장으로 다닐 만한 족속들은 오직 그들뿐이었다.

핵전쟁 이후 몰락한 제국의 망령들.

과거 찬란했던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면 목숨마저도 초개처럼 내던지는 자들이다.


‘한마디로, 비정상인들이다.’


그것도 매우 위험한 쪽으로 비정상적인 자들.

유논보다 한참 늦게 그들이 오는 것을 알아차린 중년인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아, 저기 오는군. 내가 말한 그 아는 사람들일세.”


친히 달려가서 문까지 열어준 중년인의 등 뒤로 두 인영이 걸어 들어왔다.

유논은 그들의 얼굴을 살펴보고는 침음을 흘렸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한 명,

그리고 꽤나 잘 알던 사람이 한 명.


그들 두 명 중 나이든 기사 쪽이 헛기침과 함께 유논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래간만입니다, 스승님.”


작가의말

+소형 마정석과 중형 마정석 간 시세에 대한 부분을 조정했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8

  • 작성자
    Lv.69 10억조회수
    작성일
    20.06.01 17:35
    No. 1

    늙은 제자라니 ㅜ

    찬성: 3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67 생각.
    작성일
    20.06.01 17:37
    No. 2

    참 슬픈 어휘인 것 같습니다. 먼저 늙어가는 제자를 보는 스승의 마음이란...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9 카르냑
    작성일
    20.06.03 12:23
    No. 3

    뭔가 멸세사 느낌도 좀 나네ㅋㅋ

    찬성: 4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67 생각.
    작성일
    20.06.03 12:25
    No. 4

    멸세사는 저도 재밌게 읽은 소설입니다! 실제로 작중에서 오마쥬한 부분들도 몇 있고요.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으실 법도 합니다. 댓글 감사드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8 타댜
    작성일
    20.06.03 21:02
    No. 5

    특이한 설정이 많네요 매력적입니다!

    찬성: 2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67 생각.
    작성일
    20.06.03 21:04
    No. 6

    잘 풀어가려고 노력중에 있습니다. 댓글 정말 감사드립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0 에크나트
    작성일
    20.06.04 02:26
    No. 7

    다른건 어느정도 좋은데 사는 세계이름도 모르고 몇십년이나 판타지 판타지 하는게 참...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67 냉소적순수
    작성일
    20.06.04 18:27
    No. 8

    게이트로 방사능은 못 통과해요?

    찬성: 2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67 생각.
    작성일
    20.06.04 18:43
    No. 9

    방사성 마력낙진은 게이트를 넘어갈 수 있습니다! 설정상 실제로 넘어간 적이 상당하기 때문에, 지구 측에서는 발견되는 모든 게이트들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방역시켜 놓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글장난
    작성일
    20.06.05 01:58
    No. 10

    와우 마력없는 중세 아포카립스라니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67 생각.
    작성일
    20.06.05 09:51
    No. 11

    마력없는 중세 아포칼립스..하하, 꽤나 마이너한 소재지만, 매력있지 않나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D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8 청죽옹
    작성일
    20.06.06 23:10
    No. 12

    걍 지구로 가면 안되나?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67 생각.
    작성일
    20.06.06 23:17
    No. 13

    주인공의 정체성은 이미 판타지 세계 사람인지라..댓글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9 인두리
    작성일
    20.06.13 12:45
    No. 14

    왜 굳이 대마법사로 설정해놓고 특징을 죄다 거세한거

    찬성: 2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67 생각.
    작성일
    20.06.13 13:24
    No. 15

    그래야 힘을 조금씩 되찾아가는 맛이 있지 않을까요? 소중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독자777
    작성일
    20.08.12 23:05
    No. 16

    잘 보고 갑니다.
    이쪽 세계가 이정도 피해를 봤는데 저쪽 세계는 어느정도의 피해를 본 건지도 나왔으면 좋을듯.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9 옳은말
    작성일
    21.02.11 10:04
    No. 17

    대마법사라면서 핵에 대한 방비를 전혀 안한 것, 대마법사라면서 세력을 꾸릴 생각을 안하고 요즘 유행하는 아포칼립스 세계관 배경의 용병을 직업으로 삼은 것 둘 다 이해안감. 마법을 쓰고 복잡한 과거랑 뛰어난 마법실력을 가졌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할 사정이 있는(마력오염) 주인공을 만들고 싶어서 배경설정이 너무 이상하게 되었음. 앞에서 말했듯이 대마법사라면 핵도 막았을거고, 당하더라도 이렇게 혼자 다니지는 않았겠지. 앞뒤가 안맞음.

    찬성: 1 | 반대: 1

  • 작성자
    Lv.68 풍광
    작성일
    22.03.26 03:15
    No. 18

    대마법사가 자기 은둔지 하나 안만들고 돌아다니네. ㅎㅎ 마법떡칠 해놓은 은둔지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0 방사능의 아이들(Children of Radioactivity)(2) +12 20.06.01 2,656 128 13쪽
19 방사능의 아이들(Children of Radioactivity)(1) +8 20.05.31 2,866 130 15쪽
18 거대 세력(Great Force)(2) +2 20.05.30 3,001 109 17쪽
17 거대 세력(Great Force)(1) +8 20.05.29 3,221 119 14쪽
16 막간-불사조(不死鳥, Phoenix) +18 20.05.27 3,241 127 15쪽
15 Man Meets Girl(5) +17 20.05.26 3,206 133 16쪽
14 Man Meets Girl(4) +6 20.05.25 3,285 136 21쪽
13 Man Meets Girl(3) +8 20.05.25 3,439 135 22쪽
12 Man Meets Girl(2) +9 20.05.24 3,428 152 17쪽
11 Man Meets Girl(1) +12 20.05.23 3,530 157 14쪽
10 황야에서 피를 봐서는 안 된다(5) +19 20.05.22 3,580 160 14쪽
9 황야에서 피를 봐서는 안 된다(4) +16 20.05.21 3,646 135 19쪽
8 황야에서 피를 봐서는 안 된다(3) +4 20.05.20 3,702 138 12쪽
7 황야에서 피를 봐서는 안 된다(2) +6 20.05.19 3,907 143 17쪽
6 황야에서 피를 봐서는 안 된다(1) +5 20.05.18 4,258 144 15쪽
5 제국주의자들(2) +13 20.05.17 4,630 159 16쪽
4 제국주의자들(1) +22 20.05.17 5,320 181 20쪽
» 비정상들의 세상(2) +18 20.05.16 6,304 183 23쪽
2 비정상들의 세상(1) +51 20.05.16 7,830 218 19쪽
1 프롤로그-멸망한 세계의 마법사 +29 20.05.16 13,148 292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