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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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생각.
작품등록일 :
2020.05.16 10:33
최근연재일 :
2022.03.2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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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9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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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황야에서 피를 봐서는 안 된다(2)

DUMMY

균열을 부수고 튀어나온 것은 짙은 검은색의 변종 거대 땅뱀이었다.

땅속에 매복해 있다 사람이나 가축이 지나간다 싶으면 단숨에 집어삼키는 것으로 악명이 높은 괴수.

그렇기에 유논의 검을 집어넣으라는 ‘명령’에 제국주의자들은 황당한 기색이었다.


아니, 저 흉측한 몰골의 식인 괴수 앞에서 검을 집어넣으라니?

오히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서 두 동강이 나도록 베어도 모자랄 판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명령.

그래도 명령은 명령이니 노기사는 검을 집어넣었지만, 공작은 아니었다.


“이 반역자 자식! 체력이니 뭐니 핑계를 대면서 이동속도를 늦추려고 할 때부터 알아봤다! 애당초 우리를 저 뱀에게 먹이로 줄 생각이었구나!”


웅웅-

분노한 공작의 손에 쥐어진 보검이 맑은 검명을 토해냈다.

흠잡을 데 없는 자세를 취한 공작이 거대 뱀을 향해 검격을 날렸다.


“달튼 가의 보검, 황혼숨결을 받으라!”


멸망 이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금속과 드워프들의 야장실력을 통해 빚어낸 최강의 보검이었다.

불꽃처럼 날카로운 검신과 공작 본인의 뛰어난 검술실력!

그 모두를 종합해 보았을 때, 어린 공작은 단칼에 사악한 뱀의 목을 날려버릴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탁!


···호기 좋게 떨어지던 칼날이 유논의 손에 단숨에 잡혀 버리기 전까지는.

맨손으로 예리한 검신을 꽉 붙잡은 채, 유논은 귀찮다는 듯이 내뱉었다.


“검 집어넣지.”

“하지만, 저기 뱀이 오고 있다! 다 같이 죽을 셈이더냐?!”


게거품을 물고 발광하기 직전인 어린 공작의 모습에, 유논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바로 등 뒤, 척 보아도 농도 짙은 방사선을 몸에 이고 다닐 것만 같은 거대 독사가 그를 향해 쉭쉭대고 있었다.

그러나 유논은 태연했다.


“겨우 저딴 잡몹 따위한테 죽을 리가.”


이래서 요즘 젊은 것들은, 배짱이라곤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가 없다.

입버릇처럼 중얼거린 그는 오른쪽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어이, 공작 전하.”

“왜···왜? 아니, 그것보다 저 뱀부터 어떻게 좀······!”

“그 보검, 좋은 칼이긴 하지만 황야에서는 함부로 꺼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옛 제자야, 너도 마찬가지고.”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그나마 경험이 많은 편인 노기사가 애써 침착하게 묻자, 유논은 혀를 찼다.

저 녀석, 꽤 쓸 만할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영 허당이었다.


이런 기초적인 상식도 모르는 걸 보니, 저 나이 먹도록 황야 한 번을 안 와봤나 본데······.

아무래도 못 본 세월 동안 골방에서 검술만 주구장창 수련한 모양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유논은 말을 이으며 오른쪽 손으로 무언가를 잡아채는 시늉과 함께 허공을 끌어당겼다.

평범한 사람이 했다면 그저 무의미할 뿐인 행동이었겠지만, 그는 마법사였다.

그의 손등에 새겨진 푸른색 문신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황야에서는 피를 보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 말과 함께 기세등등하게 독니를 들이밀던 거대 뱀의 몸뚱이가 단숨에 뒤로 쳐지며, 무언가에 잡아당겨지듯이 끌려가기 시작했다.


“황야에서는 피를 보면 안 된다? 그건 그냥 관용어 아니었습니까?”


널리 알려진 속담이었고, 그렇기에 노기사는 당황한 듯 했으나 유논은 고개를 저었다.

단순한 속담 따위가 아니었다.

이건 황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시되는 금기禁忌였다.


황야의 괴수들은 그것이 인간의 것이건 괴수의 것이건 간에, 피와 체액의 냄새에 광적이라 불러도 될 만큼 격렬한 반응을 보인다.

특정 괴수종의 경우에는 좁게는 수백 미터, 넓게는 수십 킬로미터 이내에서도 냄새만 맡고 쫓아올 정도.


그렇기에 황야에서는 그 아무리 흉포하고 위험한 괴수를 마주쳤다 하더라도, 그것을 향해 함부로 칼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

잘못 베었다가 검상 하나라도 입히면, 그래서 핏물 한 줌이라도 세어나간다면.

이전에 마주쳤던 괴수 따위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악몽을 마주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황야에서 무서운 것은 크고 강력한 괴수 따위가 아니다. 진짜 무서운 건 겉은 작아 보일지 몰라도, 실제론 크게 무리지은 괴수들이지.”


그리고 그런 무리지은 괴수들은 피 냄새를 귀신같이 맡고 쫓아온다.

그렇기 때문에 황야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경험이 있는 이들은, 적에게 출혈을 입힐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무기는 쉽사리 사용하지 않는다.

특별한 마법 처리가 되어 있는 무기가 아니고서야, 황야에서 날붙이는 독이었다.


유논이 손등에 박아 넣은 마력 문신을 사용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마정석을 달인 액체로 지져 넣은 타투의 글귀가 의미하는 바는, ‘염력念力.’


멸망 이전의 비전이 담겨 있는 제대로 된 마법은 아니었다.

이 염력 문신은 허술했고, 어디까지나 약식으로 된 유사 마법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런 주제에 마력도 꽤나 잡아먹었다.


전직 대마법사가 만들었다고는 믿기 힘들 수준의 하찮은 마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기능에는 충실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유논의 근력을 최대한 온전하게, 누수 없이 먼 거리에까지 전달하는 기능.


그리고 덩치만 큰 뱀 한 마리를 사냥하는 데에는 그것 하나면 충분했다.


“맙소사···.”


유논의 팔뚝에서부터 이어진 염력이 뱀 괴수의 모가지를 잡고 비틀었다.

문신에 힘을 증폭시킨다거나 하는 부가기능은 일체 존재하지 않았으나, 마력 회로를 통해 강화된 유논의 힘은 그 자체로 파괴적이었다.


미증유의 거력에 붙잡혀, 숨쉬기 힘든 듯 꿈틀대던 뱀은 허공에서 춤추듯 날뛰다가 이내 축 늘어져 버렸다.

놈의 몸에서는 더 이상의 생명 반응이 보이지 않았다.

외상 하나 없었고, 마찬가지로 핏물 하나 나지 않았다.


지하의 거대 변종 뱀이, 자기 몸의 삼분지 일도 안 되는 작은 사람의 완력에 질식사를 당하고 만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 주장하듯 부릅뜬 죽은 뱀의 눈깔 앞에서, 노기사와 공작은 얼어붙었다.


유논은 마력을 소모한 뒤에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품속에서 소형 마정석들을 꺼내 씹어 먹었다.


아그작-


언제나처럼 더럽게 맛대가리가 없었고, 인상을 찌푸린 그는 발걸음을 멈춘 제국주의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뭐 해? 빨리 안 따라오고.”


아직 갈 길이 멀었다.




* * *




‘이건······좀 이상한데.’


유논은 미간을 좁혔다.

황야를 지금껏 반나절은 걸어 다녔다.

그리고 그가 느낀 건, 평소의 황야와는 다르다는 점.


황야를 걸으며 여러 괴수들이 나타났고, 전부 유논이 해치웠다.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괴수들의 습격은 황야에서 일상이나 다름없는 것이니까.


그런데 그 많은 괴수들이 전부 지하에서 생활하는 습성을 지닌 놈들이었다.


‘전부 지하 생태계의 괴수들뿐이었다. 지상에서 생활하는 괴수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어.’


땅속에 파묻혀 있어야 할 놈들은 걸핏하면 튀어나오고, 오히려 바깥에 있어야 할 놈들이 자취를 감추고 나타나질 않았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때도 그다지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던 것 같다.

뭔가 일이 틀어지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잠깐.”


유논은 가슴팍에서 울리는 가이거 계수기의 소음에 걸음을 멈추었다.

이제는 공작과 노기사도 익숙해진 터라, 심드렁한 기색으로 제자리에서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역시나, 이번에도 지하 괴수였다.


유논은 심란한 기색으로 땅바닥을 두들겼다.

평소에는 한두 번 정도 나타날까 말까 한, 땅굴을 파고 생활하는 괴수들이 우후죽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견문이 넓은 그로서도 그 이유를 쉽사리 짐작하기 어려웠고, 그 점이 신경에 거슬렸다.


황야에서는 모르는 것이 언제나 가장 위험한 법이었다.


우드드득-!


이내 자극받고 지상으로 튀어나온 것은 몸체만 10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절지류의 괴수.

변종 거대 지네였다.

맹독이 묻은 수십 쌍의 다리들로 무장한 지하세계의 흉측한 괴물과 마주하며, 유논은 고민했다.


‘저건 염력으로 질식사시키긴 어려울 것 같은데.’


겉보기에는 무척 튼튼해 보이지만, 의외로 갑각의 내구성이 떨어지는 종이다.

목을 졸라보겠답시고 함부로 염력 문신을 사용했다가는 도리어 녀석의 몸을 터뜨려 버릴 위험이 컸다.

그리고 그랬다가는 지네의 체액이 사방팔방으로 튀어 그 즉시 괴수 무리의 추격을 받게 될 것이다.


꽤나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유논은 내색하지 않았다.

괴수의 몸이 너무 약해서 도리어 어떻게 죽일지 고민을 해야 하는 판국이라니.

그야말로 코미디가 따로 없었고, 유논은 삶에서 코미디라면 지긋지긋하리만치 겪어 본 사내였다.

어차피 그가 지닌 황야에서 쓸 만한 무기가 염력 문신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다.


유논은 허공을 열고 ‘이름 없는 지팡이’를 꺼냈다.


그의 손에 들린 은색 금속질의 지팡이가 액체금속의 형태로 흐물흐물해지더니, 이윽고 눈에 익은 장검의 모습으로 변했다.


목을 조를 수 없다면, 베면 그만이었다.


유논은 여름철 모기를 향해 손바닥을 휘두르듯이 대강 검을 움직였고, 공작은 그런 유논을 향해 비명 지르듯 소리쳤다.


“이 반역자 자식! 아까는 피 때문에 검을 꺼내지 말라면서! 정말 우릴 다 죽일 셈이냐! 피가······!”


그리고 곧 이어진 광경에 입을 다물었다.


“피가···안 났네?”


절단음 하나 없이, 부드럽게 두 동강이 난 지네의 몸뚱이.

더 이상 살아있다곤 할 수 없으되, 신경이 죽지 않은 탓에 여전히 꿈틀대는 그것들의 절단면은 고온으로 지져져 있었다.

외상 부위가 열기로 강제 봉합되었으니, 지네의 체액이 바깥으로 튀어나오지 않았음은 당연하다.


유논은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채 말끔한 장검을 검집에 집어넣듯이, 허공에 밀어 넣으며 입을 열었다.


“마법 처리가 된 검이다. 고온의 열기가 흐르고 있어 외상을 만드는 동시에 지져서 없애지.”


그런고로 이 검에 당하는 적들은, 적어도 출혈의 위험은 없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야말로 무혈無血의 무기.


황야에서 날붙이는 독이지만, 어디까지나 마법 처리가 되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서다.

유논의 지팡이는 어떤 형태로 모습을 바꾸든 고온의 부가 효과를 가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검을 휘두르든 총을 쏘든 피가 흐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피가 흐르는 동시에 증발하고 또 멎어 버리니, 제아무리 후각이 예민한 괴수라 할지라도 냄새를 쫓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다만 마력이 많이 드는 잔재주인 데다가, 흔하지는 않지만 피 비린내 대신 타는 냄새를 좋아하는 괴수종도 존재하기에 여태껏 아껴왔을 뿐이다.


“아니, 그런 게 있으면 진즉에 말했어야지······.”


허탈한 듯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리는 공작을 뒤로 한 채, 유논은 창공을 바라보았다.

방금 지네가 움트듯 땅에서 솟아오르는 장면을 보고, 무언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영감이 있었다.


“······!”


마법사는 두 눈을 부릅뜬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왜 괴수들이 그리 비정상적으로 행동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황야에서는 언제나 모르는 것이 이미 아는 것보다 위험하다지만, 이번 건은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험하기가 짝이 없었다.


‘하필이면 저게 지금···재수도 더럽게 없지.’


그때였다.


“···역시 검술 실력은 하나도 녹슬지 않으셨군요.”


그가 가만히 선 채 지평선 너머만 노려보고 있자, 노기사가 다가와 건넨 말이었다.


“녹슬지만 않았을 뿐, 그 때 그 당시에 비교해서 더 나아진 것도 없지.”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저는 나이를 거듭할수록 실력이 계속 죽어가기만 하는지라······.”


유논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옛 제자의 얼굴에서, 숨기지 못하는 나이와 노화에 대한 설움을 읽을 수 있었다.

늙지 않는 그로서는 평생 느낄 수가 없는, 그러므로 감히 위로하거나 공감할 수도 없는 그 참혹한 심정.

언제나 느끼지만, 불로장생은 축복이 아니다.


노기사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여러모로 늙은 몸이지만, 검을 쥐었을 때만큼은 여전히 그럭저럭 쓸 만합니다. 스승님께 모든 전투를 다 맡기는 것 같아 죄송스러운 마음을 금치 못하겠군요. 어떻게 도울 방법이 없겠습니까?”


다른 때였으면 완곡하게 거절했을 것이다.


아무리 옛 제자라고는 하나 지금은 엄연히 다른 세력에 몸담고 있는 남이다.

한순간의 인정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는 없는 일이고, 가뜩이나 노기사에게는 특별히 마법 처리가 가미된 무기도 없었다.


실력 발휘를 하기는커녕 맨손으로 싸워야 할 처지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논의 마법무구를 빌려주는 것은 더더욱 안 될 말이었고.


그러나···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보챌 필요 없다. 지금이야 좀이 쑤셔서 못 견딜 지경이겠지만, 곧 네가 죽을힘까지 다 끌어다 써야 할 상황이 올 거다.”


여전히 하늘 저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유논의 모습에, 노기사 또한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시선을 좇았지만 보이는 것이 없었다.


“네 시력으로는 보이지 않을 거다.”

“저기에 도대체 뭐가 있기에 그러십니까?”

“황야에서 가장 보기 싫은 것.”


선문답식으로 내뱉는 유논의 말에 노기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황야에서 가장 보기 싫은 것.

황야에서는 모르는 것이 가장 위험하지만, 가끔 그 법칙을 깨는 위험요소들이 존재한다.

가령, 알아도 피하지 못하는 종류의 자연재해들이 그렇다.

그런 재앙들이야말로 진정 꼴 보기 싫은 것들이다.


지금 유논이 보고 있는 것 또한 그 일종이었다.


“본디 땅굴을 파고 그 속에서 지내야 했을 괴수들이 단체로 지상에 튀어나왔다.”

“그렇군요. 어쩐지 땅속에서 나오는 괴수들이 유난히 많다 싶었습니다. 황야는 원래 다 그런가 싶었으나······.”

“원래 다 그럴 리가 없지. 평소에는 땅 위를 다니는 괴수들이 훨씬 많다. 그렇다면, 지하 괴수들이 이렇게 갑자기 땅 속 아늑한 굴을 내버려두고 뛰쳐나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를 가르치듯 하는 어투를 사용하는 유논의 모습에 노기사는 곰곰이 생각했다.


“괴수들의 땅굴에 포식자가 등장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니,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다. 저 많은 괴수들의 땅굴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아니 곧 일어날 예정인 문제.”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는 노기사에게 유논이 무어라 단서를 던져주려던 찰나, 뒤에서 심드렁히 지켜보던 어린 공작이 내뱉었다.


“비라도 내리려나 보다! 땅 속 지렁이들도 비 내리면 바깥으로 튀어나오는데, 괴수라고 다를까. 마침 더웠는데 딱 잘 됐군.”

“······!”


그렇다, 비였다.

비가 내리면 땅 속 괴수들의 굴은 물에 잠기고, 산소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비가 내릴 것을 미리 눈치 챈 지하의 괴수들은 지표면까지 올라왔으며, 지상의 괴수들 또한 마찬가지로 비를 피하기 위해 움직여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 비다.”

“···정말 비 때문입니까?”


정말 비 때문이었다.

유논은 하늘 저편, 그 정도 되는 시력의 소유자가 아니고서야 감히 보기도 힘들 거대한 잿빛의 먹구름을 보며 입을 열었다.


“다만 네가 생각하던 황야 바깥에서의 비를 생각하다간 큰 코 다칠 거다.”


체고가 수 미터를 넘나드는 거대 괴수들이 비가 올 예정일뿐인데 저리들 혼비백산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워낙 드문 현상이기도 하고, 경험해 본 적도 한두 번밖에 되지 않아 생각해내는 것이 조금 늦었지만.

황야는 비가 내릴 때 가장 위험하다.


애초에 황야는 비가 잘 내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황야, 황량한 들판이라 불린다.


그러나 그런 황야에도 가끔씩, 아주 드물게 비가 쏟아질 때가 있다.

1년에 한두 번 정도, 아주 무섭고 아주 사정없이 폭풍우가 몰아칠 때.

그럴 때의 황야는 장소 자체만으로도 끔찍한 자연재해나 다름없다.


그냥 그렇다니 고개를 끄덕일 뿐, 그다지 황야의 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기색은 없는 제국주의자들의 모습에 유논은 쓰게 웃었다.

황야의 비는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야 알 수 없는 재앙이다.


지금 말로 백 마디 설명해봐야 직접 한 번 느껴 보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일 터였다.

물론 최선은 애초에 저 먹구름을 마주칠 일도 없이 피해가는 것이겠지만······.

지금 처지에서는 사실상 힘들었다.


혼자서 황야를 지나는 것이었다면, 두 다리에 마력을 불어넣어서라도 최대한 빨리 달려 먹구름을 아예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나 노기사라면 몰라도, 체력 부실한 공작까지 달고 있는 마당에 그럴 수는 없었다.


‘결국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수밖에 없겠군.’


먹구름이 지나칠 때까지 꿋꿋이 버텨서 뚫고 나가보는 수밖에.

유논은 스스로에게 자문했다.


노기사와 공작이 버틸 수 있을까?

모른다.


비가 얼마나 오래 내리게 될까.

그것 또한 몰랐다.

한두 시간? 반나절? 혹은 하루 종일?

일찍 끝나면 일찍 끝날수록 좋았다.


이 모든 것들이 마법사인 유논으로서도 예측할 수 없는 천재지변의 영역이었으나.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비는 세상에서 가장 길고 끔찍한 소나기가 될 터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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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Lv.58 청죽옹
    작성일
    20.06.07 01:53
    No. 1

    처음 시작할때 잡은 오크들 황야에서 잡은거 아난가?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67 생각.
    작성일
    20.06.07 09:53
    No. 2

    프롤로그에서도 유논의 검과 총에는 고온 마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피가 나오지 않았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3 lOC
    작성일
    20.06.15 05:03
    No. 3

    지네를 고온으로 지져버리면, 어쨌건 지네도 단백질, 지방으로 구성되어 있을텐데 고기굽는 냄새는 안나나요?
    고온으로 지지는게 다른 괴수들이 피, 체액냄새 맡고 오는거 방지한다는 목적 같은데, 고기냄새 나면 도로묵같은데. 차라리 얼리는 거면 모를까.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67 생각.
    작성일
    20.06.15 14:11
    No. 4

    피나 체액의 냄새는 웬만한 변종 괴수들이 전부 반응해서 알아차리는 반면, 고기굽는 냄새는 특정 괴수들만 반응합니다! 댓글 감사드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독자777
    작성일
    20.08.12 23:42
    No. 5

    잘 보고 갑니다.
    저 짐덩이들을 데리고 가느니 차라리 의뢰를 거절하는 편이 맞을 것 같은데...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9 옳은말
    작성일
    21.02.11 10:24
    No. 6

    귀족의 인물설정 때문에 더 못보고 밑으로 내렸다. 모든 설정은 글을 '그럴 듯 하게' 만들어 줘야 한다. 저렇게 배경과 맞지 않는 인물은 글의 몰입을 방해하고 재미를 떨어뜨린다. 하차

    찬성: 0 | 반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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