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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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생각.
작품등록일 :
2020.05.1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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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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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0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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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에서 피를 봐서는 안 된다(3)

DUMMY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서너 시간 뒤였다.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자 공작은 시원하다며 좋아했고, 노기사는 유논이 한 말 때문에 긴장했다.


유논은 마정석들을 먹어치웠다.

누구나 힘든 시간을 눈앞에 두었을 때는, 배부터 든든하게 채워야 하는 법.


그리고 마침내, 처음 보는 제국주의자 친구들이 황야에 왔으니 환영인사라도 거하게 치러 주려는 것일까.

폭풍우가 도착했다.


번개가 갈라진 대지를 직격했고, 하늘은 진득한 먹구름의 연속이었다.

처음에는 시원했던 빗방울이 점차 무겁게 변했다.

금세 황야 전체를 뒤덮은 빗물이 강이 되어 흘렀고, 공작은 그 광경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확실히······비가 좀 많이 내리긴 하는군. 그래도 이 정도라면 아예 어쩌지 못할 수준은 아니겠어.”


그러나 유논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지금 내리는 비는 고작해야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에 불과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말도 안 되는······.”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날카로운 칼날비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사방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흙과 물이 섞인 탁류濁流가 소용돌이치며 대지를 휩쓸고 있었다.


유논이 일행들을 최대한 물이 범람하지 않는 곳으로 인도했기에 다행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이미 저 흙의 물결이 사람 하나쯤은 가볍게 낚아채고도 남았을 것이다.


문제는, 물을 피해가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것.

대자연의 분노 앞에서는 유논도 어디까지나 무력한 인간에 불과했다.

만약 황야 전체가 물에 잠기기라도 한다면, 그로서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쏟아지는 기세만 놓고 보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군.’


성경에서나 볼 법한 지독한 대홍수였다.

가뜩이나 지하 몬스터들의 땅굴로 약해져 있던 황야의 지반은 시간이 지날수록 물렁해졌다.

밟고 다니는 길은 흙탕물로 변한 지 오래였고, 1분 전까지만 해도 발목까지 차올랐던 빗물이 이제는 정강이를 적시고 있었다.


“모두의 머리 위에 있는 태양이시여······.”


이제 공작은 떨리는 목소리로 제국의 황제에게 바치는 기도문을 외우고 있었다.

노기사는 묵묵히, 그러나 명백히 창백한 기색으로 늪처럼 변해버린 땅을 휘저으며 앞을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유논은 그 맨 앞자리에서 길을 찾고 있었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적은 또 오랜만이었다.

사방에서 대지가 무너지고 온통 쏟아져 나오는 급류들로 가득했다.

발 하나라도 내딛었다간 금방 휩쓸려 버릴 것이 뻔했기에, 제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황야가 침몰하고 있었다.

그 거대하고 끝없던 대지가 물에 의해 무너져가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최대한 고지대로 올라가야 한다.’


이 흐물흐물한 지반 위에서 버틸 생각을 하는 것은 자살시도에 가까웠다.

그나마 딱딱한 암반지대라도 있을 고지대를 찾아야만 했다.

그곳에서 어떻게든 붙잡고 버틸 만한 바위라도 찾아야 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물벼락이 사방의 땅덩어리들을 쪼개고 뒤집어 놓는 바람에, 이전에는 고지대였던 곳이 다시 보니 움푹 꺼져 있던 경험만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그는 유논, 누구보다도 황야를 오랫동안 경험해온 마법사다.

마법적 기감을 퍼뜨려 더 높고 더 단단한 지형을 기어코 찾아내고야 말았다.


문제는 고지가 어느 쪽인지는 알아도, 정작 거기까지 가는 길이 없다는 점이었다.

질펀한 흙탕물의 늪 속을 헤치고 걸어가기에는 너무나도 먼 거리였다.


‘길이 없다면 만들어낸다.’


유논은 벌써 오늘만 해도 여러 번 신세를 지고 있는 염력 문신을 가동시켰다.

문신을 새긴 손등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심상치 않은 과열상태로 보아 아마 너무 자주 사용한 모양이었다.


문신 계열 유사 마법이 지닌 여러 단점들 중 하나였다.

원체 내구성이 떨어지는지라 오래 쓰질 못한다.

하필이면 이런 중요한 순간 그 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났으나, 유논은 당황하지 않았다.

어차피 천년만년 쓸 것도 아니고, 지금 이 순간만 제대로 발동되면 그만이었다.


유논의 오른손이 역동적으로 꿈틀대며, 푸른 마력 회로가 핏줄 위로 빛난다.

그와 동시에 염력이 그나마 단단해 보이는 지반을 부수고 그 잔해들을 집어 올렸다.


그렇게 얻은 바위들을 물 위에 떨어뜨려 발 디딜 곳을 만들고, 그 과정을 반복하길 수차례.


어느새 물의 수위가 무릎 근처까지 치솟아 올랐을 즈음, 어설픈 징검다리가 완성되었다.


“이 징검다리를 건널 거다! 발 디딜 때 조심해서 따라와라!”


고막을 뚫을 기세로 쏟아지는 빗줄기들 때문에 고래고래 소리 지르지 않고서는 대화하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유논은 뒤따르는 이들이 혹여나 넘어질까 예의주시하며 앞장서서 돌들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염력을 사용하는 손으로는 새로운 징검다리를 실시간으로 만들어내며, 두 다리로는 곳곳에 박아놓은 바위들을 건너던 도중이었다.

이제는 꽤나 높은 곳까지 올라왔기에 물살도 약해져 안심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우려하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뭐라도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환경이긴 했다. 빗물들의 선이 그야말로 온 세상을 다 덮을 듯 내려오고 있었다.

유논이 지은 징검다리 또한 그 하강하는 것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그 때문에 흠뻑 젖은 돌덩이들이 문제였다.


그들 모두가 발 한 번 디딜 때마다 모든 신중을 다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시야는 뿌옇게 물안개가 일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고, 징검다리의 표면은 더없이 미끄러웠다.

실수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누구 한 명의 발이 물기에 미끄러지고 말았다.


그게 유논이었으면 애초에 미끄러질 일도 없었을 것이요, 노기사였다면 타고난 반사 신경으로 어떻게든 똑바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끄러진 것은 가뜩이나 젖은 몸을 이끌고 징검다리를 건너느라 잔뜩 지쳐 있던 공작이었다.


그는 뭐라 비명 지르지도 못하고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 버렸다.

유논이 대처 방법을 고민하던 와중, 노기사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곧바로 물속에 뛰어들었다.

공작을 어떻게든 구해 보려는 심산이리라.

그들 사이가 이토록 끈끈할 줄은 몰랐던 터라, 잠시 벙쪄 있던 유논은 짙은 한숨과 함께 뒤따라 입수했다.


첨벙-


물살을 따라가기는 하되, 너무 빨리 휩쓸리면 위험했다.

유논은 보드를 타듯 쭉 미끄러져 내리며, 물보라를 뚫고 허공에 소환한 ‘이름 없는 지팡이’를 진흙탕에 박아 넣어 속도를 조절했다.


희뿌연 물안개와 짙은 물비린내 속에서도 은은한 광채를 발하는 은색 지팡이가 투정을 부리듯 울었으나, 방법이 이것뿐이었다.

어차피 재질이 재질인지라 겨우 이런 물살 따위에 부서질 만큼 약하지도 않다.


‘공작은 저 아래에 있고···속 썩이는 옛 제자 놈은 그 바로 위에서 떠내려가고 있군.’


유논은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입수한 것이 아니었다.

전부 철저한 계산 하에 물속에 뛰어든 것이었고, 그 계산은 맞아떨어졌다.

덕분에 물살에 무작정 휩쓸리지 않고 속도와 방향을 적절히 조절하며 내려갔기에 금방 공작과 노기사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 저 둘을 어떻게 한꺼번에 급류 속에서 끄집어내야 한다는 점인데······.


유논은 푸른 마력이 넘실거리는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타이밍이 생명이었다.

어디 공작이나 노기사가 나무뿌리 따위에 걸려서 속도가 준다거나 하는 절호의 기회라도 찾아와 주면 고맙겠으나.


‘황야에 나무뿌리 따위가 있을 리 없지.’


실현 불가능한 발상이었다.

결국 그의 힘으로 둘 다 구해내야만 하는 상황.


처음 겪어본 일도 아니었고, 마지막으로 겪을 일도 아니었다.

몹시 익숙했다.

유논이 지팡이를 쥔 팔에 힘을 더하려던 순간.


거짓말처럼 저 멀리 탁류 사이, 비집고 나온 굵은 나무뿌리에 공작의 몸이 걸려들었다.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일 리가 없다.

황야에 저런 자연적인 나무뿌리가 존재할 리가.


설사 정말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 만의 하나 꼴로 존재할지도 모르는 나무뿌리가 지금 이 기막힌 순간에 기적적으로 튀어나왔다?

말도 안 된다. 비현실적인 가정이었다.

유논은 그보다는 더 그럴듯하고 현실적인 가정을 하나 알고 있었다.


‘몬스터다!’


몬스터가 숨어있다 습격을 가한 것이다.

그것도 평범한 나무뿌리의 모습을 가장한 식물형 몬스터가.

최악의 상황이었다.


날카로운 식인 뿌리의 끝자락이 공작의 몸을 에워싸고 여러 조각으로 잘라내려던 찰나였다.


“크아아아아!”


물결마저 떨리며 물러서게 만드는 강렬한 기합과 함께, 노기사가 달려들었다.


그런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는 물살을 박치고 뛰어올라 공작을 나무뿌리의 마수 속에서 끄집어내고는 사방에서 옥죄여오는 식물의 줄기들과 사투를 벌였다.

검을 뽑을 새도 없이 맨손으로 식물형 괴수를 찢어발기는 그 기세에는 유논조차 할 말을 잃고 감탄했을 정도였다.


유논의 도움 없이도 혼자 힘으로 식물 괴수를 녹색 즙이 될 때까지 갈아죽이고도 남을 듯한 모습이었으나, 그렇다고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유논은 괴수를 단숨에 뿌리째 뽑아서 내던진 뒤, 혼절하기 직전인 공작과 여전히 힘이 넘치는 노기사를 끌어올렸다.

그나마 근처 단단한 바위더미 위, 두 사람 정도는 건져놓을 자리가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유논은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콜록대는 공작의 등을 두들겨 주며, 유난히 창백해 보이는 노기사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기야, 물에 잔뜩 젖은 채 그리 많은 힘을 썼으니 나이든 몸에 무리가 갈 법도 하겠지만······뭔가 달랐다.


“너···괜찮은 거냐.”


유논의 시선을 눈치 챈 노기사는 쓰게 웃으며 힘준 채 움켜쥐고 있던 양손을 펼쳐 보았다.


“······!”


유논은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식물형 괴수의 날카로운 뿌리를 통째로 쥐어뜯으며 날뛰던 노기사의 양손은···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마법사는 황야에서의 금기를 떠올렸다.


‘황야에서 피를 봐서는 안 된다.’


피비린내 저릿한 두 손을 들어 올린 채 떨고 있는 노기사의 모습을 보아, 그 또한 일찍이 알아차렸던 모양이다.

그의 손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이 지독한 폭풍우가 그 냄새를 얼마나 가려 줄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는 이로써 황야의 금기를 어기게 되었다.


“···스승님. 강한 열기가 흐르는 마법 무기를 가지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거로 제 손을 어떻게 지져서라도······.”

“아니, 안 된다.”


유논은 단호히 말했다.

그의 옛 제자가 얼마나 참혹한 심정으로, 얼마나 절박한 마음가짐으로 저런 이야기를 꺼내는지는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있겠나, 저리 핏발 선 눈으로 괴로워하고 있는데.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유논은 약식 치료 마법으로 기사의 손에 난 상처들을 고쳐 준 뒤 입을 열었다.


“이미 늦었다.”


노기사의 청력으로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논의 귀에는 들렸다.


굶주린 것들의 소리가.


무언가 거대한 무리가 달려오는, 혹은 헤엄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서부터, 괴수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황야 전체가 대홍수에 잠기더라도 상관하지 않을, 동족이 물에 빠져 익사하면 그 시체를 밟고 뛰어오고도 남을 피에 굶주린 존재들.


황야의 가장 위험한 때에,

가장 끔찍한 것들이 오고 있었다.


유논은 지팡이를 잡으며 말했다.


“검을 들어라.”


아직 소나기는 끝나지 않았다.


작가의말

이 글은 얼마 전 비가 많이 내리던 날에 썼습니다. 재밌게 읽으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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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Man Meets Girl(1) +12 20.05.23 3,530 157 14쪽
10 황야에서 피를 봐서는 안 된다(5) +19 20.05.22 3,580 160 14쪽
9 황야에서 피를 봐서는 안 된다(4) +16 20.05.21 3,646 135 19쪽
» 황야에서 피를 봐서는 안 된다(3) +4 20.05.20 3,703 138 12쪽
7 황야에서 피를 봐서는 안 된다(2) +6 20.05.19 3,908 143 17쪽
6 황야에서 피를 봐서는 안 된다(1) +5 20.05.18 4,258 144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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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국주의자들(1) +22 20.05.17 5,320 181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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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비정상들의 세상(1) +51 20.05.16 7,831 218 19쪽
1 프롤로그-멸망한 세계의 마법사 +29 20.05.16 13,148 29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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