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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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휘준
작품등록일 :
2020.05.27 22:55
최근연재일 :
2024.08.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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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3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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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글자
8쪽

고무보트 21

DUMMY

참호선에서, 눈만 내밀고 잔뜩 기다리던 북한군은, 드디어 새로운 전투가 개시됨을 눈으로 보았다. 중앙에 두 명, 그리고 양쪽에 대여섯 명씩 나뉘어 자신들을 향해 동시에 질주하고 있는 남조선 야습부대를... 그리고 또 보았다.


달려오는 적을 조준하려고 머리를 더 내밀어 가늠자를 보는 순간, 저 멀리서 작게 반짝 하더니, 한 번에 두 명씩, 푹석 푹석 참호 밑으로 흘러내리고 머리가 확 뒤로 젖혀지는 자신들 중대원들을... 컴컴한 어둠 속, 달리는 자들은 총도 쏘지 않고 아무 고함도 없이 달리기에만 주력하고 있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 다시 꿈이로다


세상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 희망가



4중대와 지역대 본부팀은 몰랐다. 북쪽(2G)과 남쪽(1G) 중간에 있던 적 해안경계 보병중대가, 남조선 야습부대에 습격을 받는 양쪽 해안포부대 어느 쪽으로 기동해 지원해야 하는지 갈등하는 순간, 1지역대 공격 2파는 그들을 아군 타격 동안 충분히 묶어두었다는 사실을...


나는 사라지고 싶다.

영원한 우주 속으로...


나는 나 자신을 받칠 준비가 되었는가. 죽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 죽어도 미련이 없는가. 죽는 순간에 또 다시 자기 본능으로 울며 서러워하는 건 아닌가.

100%란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80% 정도 내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 내 죽음이 ‘희생’이라고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죽음은 가치가 있어야 하는가? 가치란 무엇인가? 내 삶이 탄생하고 소멸하는 과정에서 찾는 실존해야만 했던 이유인가? 이유가 꼭 필요한가? 나는 남에게 그 의미를 억지로 꼭 보이면서 타당성을 인정받으려 하는 건 아닌가?


심하사와 한원사와 나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죽음으로 꼭 내 자국과 의미를 남겨야 하는가? 개나 소나 말은 의미가 필요하지 않은가? 보다 순수하고 주인을 진심으로 따르는 동물을 놓고 보면, 이러한 삶의 의미나 가치는 인간 자신들의 타 동물 대비 우월한 가치를 주장하기 위한 방편은 아닌가? 보편타당하게 살다 죽은 것은 오히려 동물이지 않은가.


내 목숨은 소중하다. 그런데 나는 그게 왜 소중한지 설명을 못하겠다. 부모님들이 보면 소중하겠지만, 내가 날 납득시키는 꾸밈없는 이유 말이다. 너무 귀중하지도 하찮지도 안지만 왜 나는 설명을 못하는가. 그걸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말을 믿어도 될까? 우리의 인생이나 철학이나 가치관이나 모두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아닐까? 우리가 남의 말과 책만 듣고 읽으면서 자신을 설명하는 게 아닐까?


난 내 욕망이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걸 안다. 그러나 난 내 안의 나를 투덜거리는 동생처럼 끌고 갈 수는 있다. 할 수 있다...의 전제는 단 하나다. ‘일단’ 일단... 일단... 결과는 인간이 모른다.


나를 지우는 것. 그건 어쩌면 내 속에 공존했던 지독한 하나의 괴물을 데리고 가, 소멸시키는 것이다. 그 괴물의 손을 잡고 지옥의 용광로로 점프하면서 놈이 진실로 얼마나 강한지 한번 지켜볼 것이다. 그 괴물을 내 손으로 지워버릴 수 있다는 것이 대단히,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히 만족스럽다.


난 나 자신을 깨끗이 지우기 위하여 가지 않는다. 무모한 짓이다. 지워지지 않는다. 무모한 것을 알기에 그 기억을 지우지 못한다. 나는 메모리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CPU 자체를 다운시키는 것일 뿐이다. 메모리 자체를 과압으로 물리적으로 불태우는 것이다. 포맷은 회로가 살아 있을 때나 가능하다. 나는 죽은 메모리가 될 것이다.


나는 문을 연다. 천국의 문을 연다. 이것이 왜 천국이냐고? 천국은 누가 만들었는가? 모른다. 사람들이 보기에 이것이 지옥의 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천국은 지금 내가 직접 만들고 있다. 명칭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천국과 지옥이 그렇게 구분되는가? 그저 우리를 무섭게 하거나 행복하게 하는 단어일 뿐이다. 천국에 가서 고려시대 조상부터 인사하고 사는 거야?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와서 인사하면 어쩌냐? 웃기군. 내 이런 생각들이. 천국이란 단어는 듣기에 좋으니까. 그래, 이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는 거야.


빠끔 열린 문에서 여러 소음들이 범벅이 되어 울린다. 조휘준 원사라는 인간의 여단, 대대, 1지역대가 저기 있다는 증거. 뽀드를 밀었던 아들 같은 놈들이 벽에 등을 대고 거친 숨을 쉬는 저 곳. 내가 갈만한 곳.


귀를 기울인다. 안은 혼전상황으로 같다. 이제 들어가면 움직이는 모든 것을 내가 식별하고 판단하고 처리해야 한다. 논리 간단하다. 내게 적이라 규정된 모든 것을 쓰러트리고 내 전우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돕는다. 전우가 죽을 것이면 최대한 내가 대타가 되겠다.


이건 용기가 아니다.


뇌를 제거해도 나올 수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보편타당한 이성 중 하나다. 누구나 하찮은 세뇌로 살아가니까. 그게 하찮은 세뇌이건 아니건, 그 이상을 뛰어넘는 게 뭐가 있던가. 안되면 되게 하라...가 뭐가 이상한가. 뭐가 대단한가. 그냥 맞는 말이다. 그냥 아들 같으니까 그럴 수 있는 거다.


갑자기 비교할 수 없는 가장 높은 전율을 느낀다. 역시, 최고의 카타르시스는 내 목숨 걸고 하는 것. 그래 이거야. 갑자기 내 삶의 사소한 가치가 부각된다.


이놈이 살아 있구나. 아직 죽지 않았구나. 야 이놈아. 하하. 정말 웃겨. 멋있게 보거나 공경하지 마라. 나는 뭣도 아니다. 잊어라. 난 충분히 잊혀져도 된다. 전사 싫다. 실종으로 기록되어라. 전사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고 싶지 않다. 기억하고 미화하면 쪽팔리다.


“깔꾸리 셋. 조. 진입한다!”

“......”


잠시 후,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 무시기 소리네?”


그래 알았어, 기다려. 조준경 제거. 저기 던져둬. 여기서 나올 수 있겠어?... 흐흐. 탄창 실탄 확인. 만땅으로 교체! 세잔의 그림보다 아름다운 주황색 총알들. 총구 45도 아래로. .... 그래. 여기서 담배 하나......


후~~~~! 좋구나. 담배 안 피우는 놈은 긴장하다 뒈진다 이거야.


나에게, 염을 당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끔찍한 거야. 이미 디지털 픽셀 수의를 입었다. 내 쓰라린 사건을 제외하면, 난 그 어떤 잘못도 행운도 보람도 사랑도 드라마틱한 사건도 없이 50을 먹었다.


솔직히 말해 난 소년에서 쉰으로 툭 내던져 졌다. 그 중간은 너무도 짧게 느껴져 대체 뭐가 지나간 건지 모르겠다. 이제 좀비처럼 누워서 초로의 노인이 되길 기다리라고? No! 발버둥 쳐봤자 죽으면 썩을 삭신! 난 지금 군인이야!!!


후, 아들아, 애비 아직 건재하다. 넌 거서 해라. 난 여서 한다. 저 구름 위 높은 곳에서 눈에 띠면 뒤지게 맞을 줄 알아. 나 때문에 죽은 두 하사야. 사과는 너희들에게 직접 가서 하겠다. 질질 끌어서 창피하다.


심호흡. 수류탄 안전핀 뽑아. spoon fly. spoon의 고상한 공중제비. 하나 둘 셋... 투척. 밑으로 굴러라. 폭발 후 들어가면서 검지는 방아쇠 울로...


문 옆에 등을 대고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

저 바다에서 함포 포성이 울린다.

오, 좋아. 점입가경이야. 더욱 만족스러워지는 걸. 잔치에 수저를 들자구.


간다.


따라와 조휘준.


작가의말

물을 먹고 정신이 혼미해진다. 누가 날 보트 위로 끌어올린다.

정신을 차리기 싫다. 차리면 바로 오리발로 때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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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고무보트 9 +1 20.07.14 1,151 29 10쪽
26 고무보트 8 +1 20.07.13 1,207 29 9쪽
25 고무보트 7 +1 20.07.10 1,260 3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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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고무보트 5 +3 20.07.08 1,309 28 8쪽
22 고무보트 4 +3 20.07.07 1,406 35 10쪽
21 고무보트 3 +2 20.07.06 1,384 32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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