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2차대전 후 앙뚜완과 피크의 이야기 2
2차대전 종전 이후 앙뚜완은 대학을 졸업한 다음 포르쉐 사에서 기술자로 취직해서 몇 달간 열심히 일했다. 앙뚜완은 피크와 자신의 딸 아나이스를 다시 못 보게 되었다는 것도 잊고, 자신의 새로운 직업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해졌다.
그렇게 한참을 일하다가, 앙뚜완은 휴가를 얻어서 선물을 들고는 자신이 자랐던 수녀원을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수녀원장님은 잘 계시겠지?'
수녀원의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앙뚜완은 정원에서 무언가를 보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저..저 여자가 왜?'
피크는 아나이스와 함께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앙뚜완은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친 다음 수녀원 안으로 들어갔다. 앙뚜완은 창문으로 몰래 피크와 아나이스를 바라보았다.
'일자리 구하고 다른 곳으로 떠난거 아니었나? 어떻게 된 거지?'
피크는 놀랍게도 아나이스를 보며 살며시 웃고 있었다. 앙뚜완은 피크의 웨이브진 검은 머릿결을 바라보았다. 약간 몽롱해보이는 검은 눈의 피크는 여전히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 때, 수녀원장이 앙뚜완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앙뚜완! 오랜만이구나!"
앙뚜완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가..감사 인사를 하러..."
앙뚜완은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수녀원장이 웃으며 말했다.
"언제나 고맙구나."
하지만 앙뚜완의 시선은 다시 창가로 향했다. 수녀원장이 말했다.
"몇 달간 공장에서 일자리를 구했는데, 임금을 전혀 받지 못해서 이 곳으로 돌아왔단다."
"네...넵?"
수녀원장이 한숨을 쉬었다.
"외국인이라고 공장에서 부려먹기만 하고 임금을 계속해서 주지 않았다고 하더구나..결국 소송해서 받아내기는 했는데..."
앙뚜완은 애써 관심 없는 척 했다.
"아,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수녀원장이 말했다.
"앙뚜완, 혹시 네가 다니는 공장에 여공을 위한 일자리가 있으면 소개시켜줄 수 있니?"
앙뚜완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수녀원장님이 부탁하신다면 제가 알아봐드리겠습니다. 여공들을 위한 기숙사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젠 괜찮아진 것 같네..'
대충 봤지만 피크는 눈에 띄게 상태가 좋아진 것 같았다. 그렇게 앙뚜완은 긴장한 상태로 수녀원장 방에서 기다렸다.
'또 소리지르는 것은 아니겠지?'
잠시 뒤, 문을 열고 수녀원장이 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오랫동안 머리 속으로 그렸던 피크가, 앙뚜완 바로 앞에 나타났다. 검은 눈동자가 앙뚜완을 바라보았다. 앙뚜완이 속으로 생각했다.
'이..이젠 괜찮은 건가?'
앙뚜완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안녕하십니까?"
피크가 앙뚜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미친듯이 비명을 질렀다.
"꺄악!!! 꺄아악!!!!"
그렇게 피크는 방을 나가서 미친듯이 반대편으로 달려나갔다. 수녀원장이 헐레벌떡 피크를 따라갔고, 앙뚜완은 망연자실했다.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앙뚜완은 그렇게 수녀원장의 방 안에서 한 시간을 기다렸다. 어릴 때 이 곳에서 꾸중도 듣고 좋은 이야기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가끔 돈만 부치고 다시는 돌아오지 말자..'
그 때, 수녀원장이 들어왔고, 앙뚜완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죄...죄송합니다."
"괜찮단다. 일하기로 했단다."
"넵?"
앙뚜완의 눈이 커졌다.
"하..하지만 아까 전에는.."
그 때 창 밖으로 아나이스가 혼자서 전차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모습이 보였다.
'아나이스 때문인가? 아니다..집으로 돌아갈 돈이 필요한 거겠지?'
수녀원장이 웃으며 말했다.
"앙뚜완, 정말 고맙구나. 저 여자가 돈을 벌게 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렇게 피크는 포르쉐 공장에서 여공으로 일하게 되었다. 공장이 워낙 넓었기 때문에 앙뚜완은 피크와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동료 발터가 앙뚜완에게 말했다.
"이보게! 뭐하냐?"
전차 부대에 있을 때도 앙뚜완의 동료였던 발터 또한 종전 이후 대학을 다니고 포르쉐 사에 취직한 것 이었다. 발터는 프랑스 여인, 프랑소아즈가 1차 대전 한스를 납치하고 모욕을 주었던 날 만들어진, 앙뚜완의 배 다른 형제였다. 물론 발터도 앙뚜완도 그건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앙뚜완이 중얼거렸다.
"그..그냥 머리 좀 식히려고."
발터가 앙뚜완을 보며 말했다.
"맘에 드는 여공이라도 있나?"
발터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재미는 봐도 임신은 안 시키도록 조심하라고!"
발터가 담배를 피우다가 말했다.
"아, 자네 그거 아나? 오토 파이퍼 그 인간 말이야!"
"어? 그 새끼 왜?"
"그 새끼 전쟁 끝나고 대학에서 기계 공학 공부해서 조만간 여기서 일할 거래!"
"뭐라고????"
앙뚜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피..피크가 그 작자를 보면!!'
"그 새끼 왜 하필 여기 취직하는 거래!"
발터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한스 파이퍼가 헨셀 사에서 일하는데 아버지랑 사이가 안 좋잖아! 그래서 일부러 여기 취직했다는 말이 있네! 아, 자네랑은 사이가 안 좋았지?"
앙뚜완의 얼굴이 새하얗게 되었다.
'서..설마 전쟁도 끝났는데 피크한테 허튼짓 하는 것은 아니겠지?'
점심 시간이 되었고 공장에서 여공들이 우르르 나오고 있었다. 피크는 한 유대인 여공과 함께 밥을 먹으러 가고 있었다. 앙뚜완은 창 밖으로 이 광경을 몰래 바라보았다.
'아나이스는 늘 혼자 있을텐데...'
앙뚜완은 공장 식당에서 혼자 점심을 먹었다.
'근데 공장 숙식은 일하는 사람만 제공받을 수 있는거 아니었나?'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저기"
앙뚜완은 고개를 들었다.
"우왓!!!"
피크가 앙뚜완 앞에 서 있었다.
"으아앗!! 죄..죄송합니다!"
피크는 증오심과 경멸을 애써 억누르는 듯한 표정으로 앙뚜완을 바라보았다.
"일자리를 소개시켜주신 것은 감사합니다."
앙뚜완이 버벅거리며 말했다.
"아..그...그것은...수녀원장님 부탁으로..."
"이번주까지는 제 딸 아나이스가 여성 근로자 숙소에 머무를 수 있었는데 조만간 방을 구해야 합니다."
앙뚜완은 식은 땀을 흘리며 피크의 말을 들었다.
"그..그렇습니까?"
피크는 사실 미혼모라는 눈초리를 받고 나이 든 공장 여공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었던 것 이다. 피크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가능하다면 제 딸이 머무를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앙뚜완은 고개를 들어 피크의 큰 검은 눈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제..제가 머무르는 집이 방이 두 개 입니다."
그 날 저녁, 앙뚜완은 근무를 끝나고 피크, 아나이스와 함께 공장 정문 앞에서 만났다. 아나이스가 앙뚜완에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나..나를 기억하나?'
앙뚜완은 어색하게 아나이스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이 든 여공들이 이 광경을 보고 수근거렸다.
"저 더러운 슬라브 계집이 순진한 기술자 하나 꼬드겼네!"
"진짜 추접하다니까!"
"애도 있는 여자가 일터에서까지 남자를 꼬시다니! 추접해!"
"분명 돈이 목적일거야!"
그렇게 앙뚜완은 자신의 집으로 피크를 데려왔다.
"이 큰 방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저는 작은 방 쇼파에서 자겠습니다!"
사실 그 작은 방은 앙뚜완이 자신이 공부하고 집에서 잔업을 할 때 이용하려고 서재로 만들어 둔 공간이었다. 아나이스가 기뻐했다.
"와아!!침대다!!"
피크는 공허한 눈빛으로 앙뚜완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펴..편히 쉬십시오!"
"제가 요리라도 할까요?"
"아..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앙뚜완은 동부전선에서 직급이 낮던 시절 짬처리하던 실력으로 요리를 했다.
"편하게 드십시오!"
아나이스가 물었다.
"아저씨는 안 먹어요?"
앙뚜완은 늘 혼자서 밥을 먹었고 기껏해야 발터 정도를 초대했기에 자신이 쓸 식기가 없었던 것 이다.
"나는 다 먹었다!"
피크는 아직 포크를 들지도 않고 있었다. 앙뚜완은 피크와 아나이스가 편히 먹도록 부엌을 나와서 서재로 들어간 다음 문을 닫았다.
꼬르륵
30분 쯤 뒤, 피크와 아나이스가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아나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먹었습니다!!"
타앙!
앙뚜완은 조심스레 서재 밖으로 나와서 남은 음식을 먹었다.
'휴우...'
방 안에서는 아나이스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편한가 보네..'
앙뚜완은 저녁을 다 먹고는 조심스럽게 서재로 들어가서 쇼파 위에서 잠을 잤다. 꿈 속에서 앙뚜완은 피크와 함께 같이 잠들어 있었다. 피크가 커다란 눈으로 앙뚜완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앙뚜완!"
꿈 속에서도 피크의 좋은 향이 느껴졌다. 순간, 누군가 외쳤다.
"저기요!!"
쾅쾅쾅
"우와왁!!!"
피크가 서재 문을 두드리고 있었던 것 이다. 앙뚜완이 물었다.
"무..무슨 일입니까?"
"출근 안 하실 거에요?"
"머..먼저 가십시오!!"
'젠장!! 지각이다!!'
피크는 먼저 공장으로 갔고 앙뚜완은 헐레벌떡 옷을 입었다.
'젠장 젠장!!!'
아나이스가 앙뚜완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 잘 가!!"
그 날 앙뚜완은 집에 가기 전 먹을 거리를 사고 가서 역시나 요리를 했다. 아나이스가 외쳤다.
"아저씨 요리 맛있어!!"
"하하!! 고맙다!! 군대에서 짬처리..."
피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앙뚜완이 버벅거리며 말을 이었다.
"나..나는 일을 해야해서.."
그렇게 앙뚜완은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시발!! 그런 말 실수를!!'
잠시 뒤 부엌에서 아나이스의 목소리가 났다.
"엄마 안 먹어?"
피크가 말했다.
"엄마는 배가 불러서...너가 다 먹으렴.."
피크가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타악!!
앙뚜완은 서재에서 귀를 틀어막았다. 잊고 있었던 좆같은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이빨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기계 공학을 공부하고 포르쉐 사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다시 생생하게 떠올랐다.
'시발...시발...시발...시발...'
앙뚜완은 방 구석에 쭈그려 앉은 채로 양쪽 귀를 틀어막았다.
'지난 일이다...나만 그랬던게 아니야..'
앙뚜완은 크게 숨을 들이마쉬었다.
"후...하..."
'공부도 하고 일도 하고 그딴 좆같은 기억은 다 잊어야지...난 내가 저지른 죄를 꼭 다 속죄하고 말거야!!'
앙뚜완은 손에 식은 땀을 바지에 닦으며 생각했다.
'바..발터 녀석도 피크랑 마주치게 하면 안 된다..어쩌면 얼굴을 기억할지 몰라..점심 시간 말고는 마주칠 일이 없으니까 점심에는 녀석이랑 반대쪽 식당에서 먹자고 하면...'
다음 날, 앙뚜완은 회사로 출근해서 일에 몰두했다. 그 때, 뒤에서 발터가 외쳤다.
"이봐 앙뚜완!!"
그 곳에는 새로 포르쉐 사에 들어온 오토 파이퍼가 서 있었다. 오토 파이퍼는 아주 반갑다는 듯이 앙뚜완에게 인사했다.
"이야!! 오랜만이네!! 잘 지냈나?"
오토 파이퍼는 앙뚜완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아무튼 반갑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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