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나레스의총사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완결

Gavin
작품등록일 :
2009.04.08 21:55
최근연재일 :
2009.04.08 21:55
연재수 :
177 회
조회수 :
988,751
추천수 :
2,493
글자수 :
702,223

작성
08.03.16 19:50
조회
4,677
추천
14
글자
10쪽

베나레스의 총사(80)

DUMMY

히스파니아뿐만 아니라, 이 시대 에우로파에서 하얀 가발은 점잖은 신사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신사라 할 수 있는 장교는 체면치례를 해야할 부분이 참 많았다. 장교들은 한 여름에도 가발을 쓰고 제복 또한 옷깃이 빳빳한 모로 만든 화려한 것을 걸치고 다녔다. 병사들은 더울 때 벗을 수 있어도 장교는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신사이기 때문이다.


히스파니아 해군에서 복무하다 동방회사군으로 스카웃된 그 중위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는 언뜻 봐도 우유부단하고 체면치례를 중시할 것 같은 신사였다. 필요에 의해, 별로 신사답고 싶지 않은 벨린 데 란테에 비해 그 중위는 어떤 상황에서도 신사답게 행동하려고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세이렌의 향연'


그 술집 겸 여관 겸 향락업소는 그런 이름으로 뱃사람들을 유혹했으나, 이번에는 점잖은 척 마지못해 따라가는 젊은 동방회사군 중위와 한결 경쾌한 발걸음으로 그를 이끄는 총사대 대위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뒤를 총사의 손에 잡힌 오랏줄 때문에 죄수처럼 끌려가는 까트린 데 세비아노와 일련의 군인들이 따라왔다. 그들의 등장으로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재갈까지 물리고, 포박당한 까트린은 창피하고 민망해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대체 저 자의 속셈이 무엇인데 이런 곳으로 모두를 끌고 왔는지 그녀는 궁금하고 화가나서 미칠 것 같았다.

동방회사군 순찰대가 술집의 한가운데서 멍하니 서 있는 가운데, 벨린 데 란테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바 텐더에게 갔다. 그는 은화 주머니를 소리나도록 올려놓으며 동방회사군 장병들에게 좋은 대접을 해달라고 말하면서 작은 목소리로 몇 가지를 요구하며 웃돈을 주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바텐더는 벨린이 웃돈을 주자 작은 목소리로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평소에 손님을 맞이하듯 술잔을 여러 잔 꺼내 즉석에서 안달루시아산 적포도주를 따르기 시작했다.

벨린이 포도주 잔 하나를 들었다. 그리고는 눈을 뜨고 자신을 보고 있는 동방회사군 장교에게 말했다.

"마치 교회 예배를 보러 온 사람 같군, 중위. 나 같으면 이런 거 마다하지 않을 거야."

그러자 마지못해 동방회사군 중위가 술잔을 들었다. 이윽고 그가 벨린을 따라 술을 마시자, 그제야 병사들 또한 다가와서 한 두 명씩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오랜 순찰 끝에 마시는 이 술이 마치 하늘이 내려준 축복이라도 되는 것처럼.

까트린 데 세비아노는 아직도, 벨린의 손에 오랏줄이 잡혀 분노에 타오르는 눈동자를 이글거리며 서 있었다. 벨린이 잠시 대기하고 있던 알레한드로와 조안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두 총사도 흔쾌히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바 텐더는 잔이 비우기 무섭게 새로운 술을 따라주었기 때문에 마침내 동방회사 순찰대는 술집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와 동화되어 마음껏 술을 마실 수 있게 됐다.

벨린이 기분좋게 술을 마시고 있는 동방회사군 중위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깐만 기다리게, 중위. 내 잠시 심문 좀 하고 오지."

"원하는대로 하십시오. 세뇨르."

중위가 웃으며 말했다. 벨린은 그가 경계를 풀고 술에 취할 때까지 내버려둘 작정이었다. 이윽고, 동방회사군의 시선이 그에게서 멀어지자, 벨린은 까트린 데 세비아노를 끌고 술집 구석의 자리로 갔다. 인적이 드믄 외진 자리로, 술집의 시끌벅적함과 격리된 느낌이 드는 자리였다.

까트린은 한결 침착해진 마음으로 벨린 데 란테를 마주보고 앉았다. 벨린이 그녀의 재갈을 벗겨주기 시작했다. 그가 손수건의 매듭을 풀자마자 까트린이 입안에 물고 있던 손수건을 내뱉으며 콜록거렸다.

그녀가 바닥을 내려보며 여러번 헛구역질을 했다. 벨린이 말했다.

"이제 좀 정신이 들어?"

까트린이 고개를 올리고서는 그런 총사를 노려보았다.

"나쁜 놈. 너 따위는 지옥에 떨어질 거야!"

"미안하지만, 까발리스(cavalress) 데 세비아노, 나는 이미 지옥에 떨어진지 오래야."

벨린이 소리없이 웃으며 말했다.

"내 지옥에 네가 빠져든 건, 전적으로 네 책임이라구."

"나한테 원하는 게 뭐지? 날 어떻게 할 셈이야?"

그녀가 날카롭게 물었다. 벨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이미 너에게 빌랜드인들을 같이 잡을 공적을 주겠다고 제안했어. 근데 네가 그 제안을 거절하고 검을 들고 설쳤지."

그녀가 꽁꽁 묶인 몸으로 앙칼게지 대꾸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떻게 믿으라고?! 처음부터 나를 잡으려고 이렇게 함정을 판 거잖아!"

"내 말이 거짓이었다고 생각하나? 세뇨리타."

벨린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벨린의 진지하면서도 깊은 갈색눈과 마주치자, 잔뜩 화가 나 있던 까트린 데 세비아노는 순간 감을 잃어버린 듯한 얼굴을 했다. 그게 정말 진심으로 했던 소리란 말이야? 이렇게 자문이라도 하는 듯했다.

"그럼... 지금이라도 그 제안을..."

오랫 동안 묶여 있자니, 울화통이 치밀기도 하고 창피스럽기도 해서 그녀는 매우 어려운 선택을 하는 것처럼 말투를 흐렸다. 그러나 갈색머리 총사는 잔인하게도 그녀의 희망을 산산조각내어버렸다.

벨린이 말했다.

"그것은 너와 내가 대등했던 때의 제안이지, 데 세비아노.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봐도 너와 나의 입장이 대등해보이지 않는군."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야?"

까트린이 몸을 꿈틀거리며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벨린이 대답했다.

"너를 풀어주는 댓가로 새로운 제안을 해야겠어. 카발리스."

"그게 뭔데?"

벨린이 한마디로 말했다.

"너를 가지겠어."

"뭐?"

까트린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내뱉었다. 벨린이 설명했다.

"너를 풀어주는 댓가로 넌 앞으로 내 소유고 내 명령을 들어야 한다는 소리야. 네게도 체면이 있으니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는 좀 봐줄 의향도 있어. 물론 내 말을 잘 들어야겠지. 안 그러면 또 봉변을 당할 테니까."

까트린은 기가막힌 얼굴이었다.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나보고 받아들이란 말이야?"

그녀가 분노에 몸을 떨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의 말소리는 술에 취해 소란을 떠는 동방회사군 순찰대의 말소리에 파뭍히고 말았다.

벨린이 말했다.

"그건 전적으로 네 마음이야. 그리고 이건 너의 마지막 기회가 될 거야."

"싫어!"

그녀가 단호히 거절했다. 벨린 데 란테는 두 번 다시 제안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손수건을 들며 말했다.

"그래, 그럼 안 됐군. 카발리스."

벨린이 손을 뻗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까트린의 입을 잡고, 그녀가 두 손으로 그녀의 턱을 벌렸다. 고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린 까트린의 입 속으로 그가 손수건을 쑤셔넣었다. 그리고는 그녀가 손수건을 내뱉지 못하도록 손바닥으로 입을 막은 다음, 다시금 손수건으로 입을 감싸 꽁꽁 묶었다.

그녀가 읖읖거리며 벨린에게 욕을 퍼부었다. 벨린은 까트린의 오랏줄을 기둥에 단단히 묶어놓고, 조안과 알레한드로에게 다가갔다. 두 총사는 동방회사군 병사들과 말을 터놓으며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취하지는 않았다. 반면 동방회사군 병사들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금세 만취한 듯했다.

조안이 말했다.

"저 아가씨가 아직도 고집을 부리는 모양이네. 우리 편이 되기 그렇게 싫대?"

벨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은 그것보다 더 한 제안을 했으니 자존심 센 그녀가 거절하는 것도 당연했다. 알레한드로가 한마디 했다.

"그냥 버리고 우리 갈 길을 가는 게 어때? 저 아가씨 덕분에 저 치들을 저렇게 허송세월하도록 놔둘 수 있게 됐으니 말이야."

"아직 할 게 남아 있어."

벨린이 말했다. 그가 병사들과 어울려 술에 취한 동방회사군 장교에게 다가갔다.

동방회사군 중위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세뇨르 데 란테. 덕분에 좋은 시간을 갖게 되어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술이 입에 맞는지 모르겠군."

"이렇게 질이 좋은 포도주는 처음 마십니다. 허공에 뜬 기분이군요."

그러면서 중위가 바에 기대고 있던 몸을 비틀거렸다. 벨린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 뭐 하나만 물어보지."

"기꺼이 대답해드리지요."

벨린이 말했다.

"우리는 D자와 M자로 이니셜이 되어 있는 홀란드인의 배를 찾고 있소. 듣자하니 히스파니아 동방회사와 제휴를 맺은 홀란드 무역상사의 평저선이라더군."

"아, 오렌지공 마우리체 호 말이군요."

중위가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배라면 38번 도크에 있을 겁니다. 순찰일지를 기록하면서 이름을 외웠지요. 그 배는 1달 가까이 이 항구에 정박해있거든요."

"으음."

벨린이 장난기 어린 투로 물었다.

"내가 그 배를 습격한다면 어쩔 거지?"

"치외법권을 어겼으니 아마 체포하려고 하겠지요. 그 배 선원들이 가만히 있다면 말입니다."

"좋아, 그렇다면 내 귀관에게 좋은 선물을 하나 주지."

벨린이 그렇게 말하며 구석에 묶여 성을 내고 있는 까트린 데 세비아노를 가리켰다. 중위가 까트린에게 눈을 고정했다. 이윽고 각성제를 탄 술에 정신이 취한 동방회사군 중위는 벨린의 귓속말에 표정이 찬찬히 묘해지기 시작했다.


---------------------------------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8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베나레스의총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87 베나레스의 총사(85) +23 08.04.05 4,666 11 11쪽
86 베나레스의 총사(84) +28 08.04.04 4,406 14 7쪽
85 베나레스의 총사(83) +19 08.03.29 4,781 14 10쪽
84 베나레스의 총사(82) +23 08.03.23 4,996 14 10쪽
83 베나레스의 총사(81) +30 08.03.21 4,619 14 8쪽
» 베나레스의 총사(80) +28 08.03.16 4,678 14 10쪽
81 베나레스의 총사(79) +21 08.03.13 4,588 14 7쪽
80 베나레스의 총사(78) +28 08.03.09 4,578 14 8쪽
79 베나레스의 총사(77) +21 08.03.05 4,900 14 12쪽
78 베나레스의 총사(76) +20 08.03.03 4,734 15 8쪽
77 베나레스의 총사(75) +28 08.03.01 5,188 17 10쪽
76 베나레스의 총사(74) +35 08.02.24 4,920 16 8쪽
75 베나레스의 총사(73) +24 08.02.17 5,039 14 7쪽
74 베나레스의 총사(72) +29 08.02.15 5,022 14 9쪽
73 베나레스의 총사(71) +33 08.02.08 5,658 12 9쪽
72 베나레스의 총사(70) +22 08.02.06 5,094 15 7쪽
71 베나레스의 총사(69) +14 08.02.02 5,252 14 10쪽
70 베나레스의 총사(68) +19 08.01.29 5,244 16 11쪽
69 베나레스의 총사(67) +23 08.01.27 5,209 14 8쪽
68 베나레스의 총사(66) +21 08.01.26 5,203 14 8쪽
67 베나레스의 총사(65) +20 08.01.24 5,400 13 13쪽
66 베나레스의 총사(64) +32 08.01.21 5,489 13 7쪽
65 베나레스의 총사(63) +26 08.01.19 5,553 16 9쪽
64 베나레스의 총사(62) +23 08.01.17 5,587 13 11쪽
63 베나레스의 총사(61) +22 08.01.14 5,680 14 7쪽
62 베나레스의 총사(60) +24 08.01.12 5,724 13 10쪽
61 베나레스의 총사(59) +22 08.01.09 5,883 14 7쪽
60 베나레스의 총사(58) +24 08.01.07 5,986 13 9쪽
59 베나레스의 총사(57) +27 08.01.05 6,527 13 11쪽
58 베나레스의 총사(56) +33 07.12.30 6,214 13 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