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나레스의 총사(117)
"내일밤 그녀가 비수를 겨눌 테니까."
히스파니아 주재 빌랜드 대사 위즈워스가 히죽 웃어보였다.
무표정한 얼굴을 하던 돈 주스티안이 술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그녀라. 비어든 박사가 직접 나서지 않고?"
대사가 히스파니아 신사의 눈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박사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소. 그는 위에서 모든 걸 관장하길 좋아하지요."
"박사는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고 약속했소."
돈 주스티안이 어긋난 계획에 대한 반발감에 긴박한 어조로 내뱉었다.
"그렇지 않으면 오렌지공 마우리체호 때처럼 그 벨린 데 란테를 저지할 수 없을 거요."
"벨린 데 란테라."
능글맞은 얼굴을 한 빌랜드 대사가 다시 한번 냉소를 지어보였다.
"오렌지공 마우리체호의 일을 토대로 박사는 그에 대해 철저히 분석했지요. 그러다 아주 놀라운 우연의 일치로 그 자의 약점을 발견한 거요. 그래서 그녀가 나서게 됐지요. 노스트윈드 말이오."
계속 넉살좋게 웃던 빌랜드 대사가 무언가를 목표삼는 식으로 날카로운 눈매를 지어보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돈 주스티안이 되내었다.
"노스트윈드라..."
"우리는 그녀를 노스트윈드라고 부르지요." 빌랜드 대사가 키득 웃으며 말했다. "왜 벨린 데 란테가 노스트윈드에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지 궁금하지 않소?"
"그런 일 따위는 내 관심 밖이지."
돈 주스티안이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가 몸을 돌려 삼각모를 다시 썼다.
"다만 그 노스트윈드인가 하는 자가 일을 확실히 처리했으면 좋겠군."
돈 주스티안이 문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대사의 비서관이 문을 열자,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던 빌랜드 대사가 질문을 던졌다.
"무슨 목적으로 비어든 박사의 제안을 수락한 거요?"
돈 주스티안이 멈춰섰다. 대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이어갔다.
"실패하면 반역죄로 처형당할 수도 있는 일이오. 단지 돈이나, 권력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일 수는 없지. 당신은 이미 충분한 권력과 재력을 갖추었는데 무엇이 아쉬운 거요?"
그 말에 돈 주스티안 소리내어 웃었다. 음산한 웃음소리였다. 그 히스파니아 신사가 뒤를 힐끔 바라보며 대답했다.
"히스파니아인에게 벤데타(복수)는 복수 그 이상의 것. 당신네 빌랜드인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겠지. 우리는 오래 전부터 고귀한 여인의 피를 마시고 모든 걸 되갚기로 작정했어."
그 말을 끝으로 돈 주스티안은 대사의 방을 나가버렸다. 대사는 잠시 가만히 서 있다 위스키 잔에 위스키를 부었다. 그리고는 오랫 동안 조국의 숙적이었던 이 제국의 멸망을 기원하며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켰다.
* * *
그날 하루는 히스파니아 제국의 국상일이었다. 모든 교회는 밤 늦게까지 종을 울려댔고 아스티아노의 헌병군은 시민들의 모임과 집회를 철저히 통제하려고 했다. 추기경의 명으로 통행금지령이 내려졌고 이는 비상시국에 따른 새 황제의 계엄령 때문이었지만, 황제의 서거로 민심이 깨지면서 아스티아노의 치안은 급속도로 불안해져갔다.
오후 내내 아스틴 궁에서는 수많은 정치적 조치가 단행되었고, 그 조치는 새 황제 이사벨 2세의 칙령으로 이루어졌다. 히스파니아 의회는 그녀의 명령을 그대로 공표했고, 다음 날 날이 밝는대로 식민지를 포함한 제국 전역에 그 명령이 이행될 터였다.
이사벨 여제가 제국에 공포한 긴급 칙령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축약되었다.
하나, 이틀 후 톨레도의 성 콘스탄티나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룰 것.
둘, 그 이전까지는 모든 신민들의 집회와 결사를 금지하며 소요사태와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자를 즉결처분할 것.
셋, 제국의 모든 육군과 해군은 현 위치를 고수, 외침과 국가 비상사태에 대비할 것.
당분간 이 위대한 제국의 수도는 제국 의회의 통제하에 남은 총사대와 헌병군이 치안을 유지할 터였다. 곧 이어 톨레도로 향할 여행 준비가 시작되었다. 수십대의 마차와 새 여제를 호위할 근위용기병대와 근위총사들, 예식에 사용할 자금을 실은 마차들과 임원들이 아침 일찍 이루어질 출발에 대비하여 밤새 움직였다.
출발에 앞서 벨린 데 란테는 밤늦게 산 루첸가의 아지트로 돌아왔다. 아리엘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아지트의 문은 평소처럼 잠겨있지 않았고 벨린이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자연스레 열리는 것이었다.
그는 무언가 수상찮은 낌새를 느끼며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 구석 소파 옆에 갈색머리 여인이 엎드린 채로 벌벌 떨고 있었다. 마치 숨을 곳을 참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그곳에 웅크린 것처럼.
"아리엘."
벨린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다.
"주, 주인님..." 아리엘이 주인을 올려보며 자그맣게 말을 흐렸다. 벨린 데 란테는 그녀의 모습을 재빨리 살폈다. 그녀는 마치 몸살이라도 걸려 두려움에 떠는 듯했다. 무언가에 쫒겼다 간신히 살아난 것처럼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가슴부분을 두 팔로 감싸쥐고 있었다.
그때 방문의 문이 열렸다. 벨린 데 란테는 열린 문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소년처럼 앳된 금발머리 청년이 비틀거리며 문간을 잡은 채 서 있었다. 머리와 허벅지, 가슴 부분에 붕대를 맨 채였고 표정은 온통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베... 벨린."
조안이 힘겹게 말했다. 벨린 데 란테가 그를 바라보았다.
"조안, 드디어 깨어났군."
벨린 데 란테가 반가운 어조로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다가가서 힘껏 포옹했다.
조안이 얼굴을 찡그렸다.
"아파죽겠어, 벨린. 가슴이 아직도 욱신거려. 그, 그런데..."
조안 데 아스티아노가 눈을 돌렸다. 멀치감치 떨어져 두 총사를 바라보고 있는 아리엘 때문이었다.
"이봐요. 세뇨리타."
조안이 아리엘에게 말했다. 아리엘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벨린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조안이 힘겹게 한마디 더 했다.
"저기, 오해를 샀다면 미안합니다. 나는 그저 악몽을 꿈꾸다 깨어나서..."
그 말에 아리엘은 현관을 향해 뛰쳐가기 시작했다. 벨린이 뭐라고 채 하기도 전이었다. 그러나 아리엘은 집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때마침 현관문이 열리면서 머스킷총을 든 덩치 큰 총사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알레한드로 바레스였다.
결과적으로 그 거인 총사가 아리엘의 도주를 막은 꼴이 됐다.
"이게 무슨 일이지?"
알레한드로가 방안의 상황을 파악하기에는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아리엘은 큰 눈망울을 깜빡거리더니 주인을 바라보았다. 벨린 데 란테는 그녀에게 재빨리 다가갔고, 주인과 눈을 마주친 아리엘은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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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군요.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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