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나레스의 총사(5)
돈 주스티안이 의자를 끌어 앉았다. 그가 진지한 어조로 황녀를 바라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아주 간단한 잘못이었죠. 지금 우리 제국에는 많은 은이 급속도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긴 전쟁 때문에 재화를 수입하고자 많은 양의 은이 필요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아침 처형된 자는, 그 방만해진 재정을 충족하기 위해 국내외적으로 세율을 높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문제인 겁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최근 들어 식민지와 국내의 세금의 징수에 의존한 히스파니아의 재정 상태는 갈수록 악화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만회하고자 세금을 과하게 걷으니 민심까지 흉흉해졌고 말이다.
황녀가 차가운 얼굴로 대답했다.
“너는 그 문제의 해답을 알고 있다고 했다.”
“물론 압니다, 마마.”
돈 주스티안이 미소를 보이며 말을 이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전쟁을 하지 않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재정을 보호하고, 국민들의 세금부담을 완화하는 거지요.”
황녀는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전쟁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황제 폐하께서 내전이 종식된 후 왜 곧바로 군사들을 10년 전쟁의 전쟁터로 보냈겠느냐. 북쪽의 프로테스탄트들이 이 성스러운 나라를 침공하러 움직이는 중이니라.”
“그 차선책을 알려드리고자 마마의 귀한 옥체를 감히 모시게 된 것이옵니다.”
이사벨 황녀가 속으로 흥미를 보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물론 표정 관리는 여전히 철저히 하고 있었다.
히스파니아 동방 회사의 총재가 말했다.
“국채를 발행하시옵소서.”
“국채?”
황녀가 되물었다. 돈 주스티안이 설명했다.
“국가가 보증하는 채권 증서를 발행하는 것입니다. 즉 국가가 전쟁자금을 위해 시중의 자금을 빌리는 것이옵니다.”
무슨 소리인지 깨달은 이사벨이 단번에 적개심을 드러냈다.
“지금껏 히스파니아에서는 그런 정책을 써 온 적이 없다. 황제 폐하께서 너희 상공업자들의 청을 받아들여, 이 회사를 새운 것도 대단한 모험을 하신 거라 들었다.”
“저희는 폐하의 성은을 입었습니다, 마마.”
돈 주스티안이 진심어린 어조로 말했다.
“마마도 아시겠지만, 신대륙과 동방대륙으로 무역선을 띄우는 일은 무척 위험한 사업입니다. 하지만 한번 성공하기만 하면 백배에 달하는 이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황제 폐하께서는 이 나라의 상공업자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여 이 회사를 세우도록 하신 겁니다. 그 놀라운 혜안 덕분에 우리들은 안정적이면서도 큰 부를 거머쥐었고, 그 부 덕분에 상업의 건전함이 그나마 온건히 유지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네가 하고자 하는 말이 뭐지?”
돈 주스티안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저희 회사에서 국채를 사겠다는 겁니다. 즉 신민들에게 거두는 과한 세금을 완화하면서도 안정적으로 전쟁자금을 조달하겠다는 것이죠. 저를 신임 재무대신으로 임명하신다면, 이 나라의 문제를 그런 식으로 해결해나갈 수 있습니다.”
황녀는 다 식은 차를 마셨다. 그녀는 침착하고 냉철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하긴, 북에우로파의 홀란드에서 그런 식의 정책을 썼다는 소린 들은 적 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그 정책을 쓰지 못한 것은 이 난관을 타파할 정도로 영향력을 발휘할 인재가 없기 때문이었다.
저 사내라면 충분한 인재가 될 것이다. 그는 지금껏 이 큰 회사를 경영해왔지 않은가.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저 사내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야망이 이글거리고 있다. 게다가 그 국채라는 것도 세금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세금은 나라에 대한 당연한 의무지만, 빚은 결코 의무가 아니다.
“그렇다면.”
황녀가 냉정함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이 원하는 것도 분명 있겠군. 빚이란 것은 항상 대가를 바라는 거니까.”
“저희는 나라의 부를 증대할 대가를 원할 뿐입니다, 마마.”
돈 주스티안이 열정어린 눈길로 손을 저으며 황녀에게 설명했다.
“저희는 현 폐하께서 인정하신 식민지의 치안권과 군대조직권이 유지되기를 원합니다. 가령 저 바다 건너 빌랜드인들이 세운 회사를 보십시오. 그들의 회사는 겉으로 보기에는 상인들이지만 이만이 넘는 사병과 군함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들을 따라가고 있지만, 아무래도 두 권리가 없다면 비효율적일 것입니다.”
황녀는 다시 한 번 생각에 잠겼다. 그럼 그렇지. 이들은 자신들의 효과적인 돈벌이를 더욱 증대하고자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들의 권력이 신교도 같은 녀석들에 의해 역모에 쓰인다면? 무척 위험한 일이었다. 그 권력을 철저히 식민지에서만 한정되도록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황녀는 구미가 당겼다. 국가의 부는 이런 식으로 쓰이라고 있는 것이다. 저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식민지의 부를 증대하는 데만 신경 쓴다면, 저들의 수완이 제국의 난관을 타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저들은 자신들의 자금으로 군대를 창설하고 식민지를 유지할 것이 아닌가. 나라에서는 돈을 한 푼도 쓰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황실에게도 이득이 될 테고 말이다.
“좋다.”
이사벨 황녀가 대답했다. 돈 주스티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각료들과 의논하여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 너희들의 충정과 수완이 국가와 나의 옥체를 지키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황공하옵니다. 마마.”
돈 주스티안이 달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의자에 앉은 황녀의 뒤쪽에 있었고, 황녀가 입은 붉은색 드레스의 등 뒤로 천천히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이런 말을 감히 아뢴다고, 저의 국가에 다한 충성심을 의심하지는 말아주십시오, 마마. 소인과 우리 회사는 마마께서 공고히 구축하고자 하는 이 성스러운 동맹에 합류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돈 주스티안이 황녀의 어깨로 천천히 손을 올리더니 천천히 그녀의 하체를 더듬어나가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께서 위중하신 이 때에, 마마의 옥체는 제국의 권력과 동일하지 않겠습니까. 소인은 이미 알고 있습죠. 황녀 마마께서 귀족들에게 은밀하게 권력의 일부를 연합하여 나누어주시는 영광을 베푼다는 것을요. 즉 마마와 저희의 진정한 동맹을 위해서라면, 제국의 권력과 동일시되는, 마마의 옥체를 일정부분 차지할 수 있도록….”
이사벨 황녀가 팔을 움직였다. 그녀는 돈 주스티안의 손을 천천히 밀어내고서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돈 주스티안은 약간 당황한 듯이 웃어보였다. 문가로 걸어가는 황녀의 표정은 여전히 냉랑했다.
이사벨이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육체적인 동맹관계라. 그것 좋지. 하지만 남자들이란 쟁취하고나면 금방 실증을 내며 헌신짝 버리듯 하는 자들이다. 야망을 지닌 사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그러니 내 옥체의 일부를 가지고 싶다면….”
이사벨 황녀가 장갑과 반지를 낀 손을 주스티안의 얼굴로 내밀었다. 그녀의 손이 손끝으로 천천히 그의 코와 입술, 목 언저리를 타내려가서는 가슴과 배 부분을 거쳐, 그의 바지와 사타구니 부분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황녀는 그의 사타구니 부분에서 단호하게 손을 거뒀다.
그녀가 야릇한 어조로 말을 마쳤다.
“지금부터 충성과 성의를 보이는 게 좋을 것이다. 돈 주스티안. 그렇다면 누가 알까. 제국의 일부를 거머쥐는 영광을 얻을지.”
히스파니아 동방 회사의 총재가 무릎을 꿇었다. 이사벨이 그의 얼굴에 손을 내밀었다. 총재는 황녀의 손을 잡으면서 그녀가 낀 반지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그러자 황녀는 다소 거칠게 손을 거뒀고, 단번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회사의 임직원들이 출입문까지 그녀를 배웅했다. 하지만 돈 주스티안은 마중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뒤도 보지 않고 마차로 올랐고, 마차는 즉각 다른 일정을 위해 출발했다.
2층 사무실 창문을 통해, 돈 주스티안은 떠나는 마차를 쳐다보았다. 문이 열리더니 하얀 가발을 쓴 신사가 황녀가 떠났다고 보고했다.
“역시 심금을 잡는 뭔가가 있군. 참 아쉬워. 좀만 비위를 맞추면 넘어올 것도 같은데 말이야.”
가발을 쓴 신사의 가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녀는 줄타기에 매우 능하다는 소문입니다.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 줄 알면서 말입니다.”
주스티안은 천천히 몸을 뒤로 돌렸다. 검은 주스트로 코트 차림을 한 신사가 절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드디어 이사벨 황녀의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돈 주스티안이 사무적으로 말했다.
“추기경에게 소식을 전하러 가도록. 이사벨 데 아라고른이 혹해서 넘어갔다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검은 코트를 입은 신사가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돈 주스티안은 잠시 동안 창문을 계속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생각이 정리되자, 히죽 웃으며 도로 데스크로 가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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