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나레스의 총사(26)
검은 제복을 입은 병사들이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검은 독수리 깃발을 들고 있는 다니치 연맹의 군인들이었다.
다니치군의 측면의 부대는 뒤쳐져 있었다. 다니치군의 중앙 부대가 최전방에서 전투중인 보병들을 지원하기 위해 바짝 나와 있는 상태였다. 최전방에서는 이미 백병전이 벌어지고 있다. 군기들이 어지러이 흔들리는 가운데 병사들이 총검과 검을 가지고 피를 튀기는 접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벨린은 바닥에 무릎쏴 자세로 앉아 강선총을 들었다. 최전선에서 싸우는 아군 병사들을 직접적으로 도울 방법은 없었다. 그들은 견장 달린 녀석을 죽이러 왔지, 말단 병사를 사살하러 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간접적으로 아군을 도우면서도 임무를 완수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벨린은 목표물을 찾아냈다. 그의 눈에 전투지역으로 증강되는 적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깃털 장식 투구를 쓴 다니치군 장교들이 호령을 치며 병사들을 전장으로 보내려고 하고 있었다. 그들은 번쩍거리는 코트에 은빛 흉갑을 차려입었고 멋있는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중대와 소대를 지휘하는, 융커라 불리는 귀족 장교들이었다. 보통 오십 명에서 백여 명의 보병부대를 지휘했다.
다니치군은 족히 다섯 개 소대, 칠백여명 정도 되는 보병들을 최전선에 증강하려고 하고 있었다. 반면 히스파니아군은 갑작스러운 기동에 동선이 길게 늘어져 지원부대가 늦어지는 판국이었다.
그렇다면 목표는 분명해 보였다.
벨린이 어깨에 멘 총을 풀어서는 양 손으로 잡았다.
“조안, 알레한드로, 기도를 드릴 시간이다.”
벨린이 목표를 가리켰다. 세 총사가 무릎쏴 자세를 취하며 강선총의 격철을 뒤로 당겼다. 장전되어있는 총이었다. 약실에 장약을 재어 넣고 쏘기만 하면 되었다.
두 총사는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벨린 데 란테가 신을 믿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럼에도 그가 기도를 드릴 시간이라고 말한 이유는 전적으로 두 총사와 나머지 유격병들을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누구나 이런 상황에서는 기도를 하고 싶을 테니 말이다.
시력이 좋은 총사들의 눈에는 여전히 병사들을 전장으로 끌어내려고 보채는 장교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총을 든 수백여 명의 병사들이 열을 맞추며 전진하고 있었다. 드럼 소리와 장교의 호령에 맞춰 두 팔과 두 다리를 박자에 맞추며 뻣뻣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자동인형을 보는 것 같군.”
벨린이 농담 삼아 말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가 총사들의 뒤에서 자세를 낮추고 있는 유격병들에게 지시했다.
“너희들의 실력을 한번 보겠다. 사냥감은 많으니 깜냥것 잡도록. 그리고 호라시오 소위. 자네에게는 이게 필요할 것 같은데.”
벨린 데 란테가 그에게 망원경을 던졌다. 언덕 아래의 수많은 다니치군에 겁이 질린 소위는 간신히 망원경을 받아들었다.
벨린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총을 겨누며 말했다.
“백 삼십 미터야. 적의 선두 지원부대를 주시하게.”
이윽고 사냥이 시작되었다.
그들이 언덕 위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간단했다. 병사들의 대열 뒤에 숨어 있는 장교들을 저격하려면 보다 높은 지형에서 쏴야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어떤 장교들은 이열 횡대로 전진할 때는 병사들 대열의 왼쪽에서 몸소 부대를 움직이고는 했다.
벨린 데 란테가 먼저 총을 쏘았다. 표적은 백 삼십 미터에서 앞장서서 전진하는 장교였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완전 무적의 용사처럼 보였다. 건장한 체격에 깃털장식이 달린 투구를 썼고 검은 제복의 앞가슴에 단 훈장들이 휘황찬란하게 번쩍거렸다.
그 다니치군 장교가 사브레를 뽑아 어깨 위에 걸친 채로 보무당당하게 전진하던 차였다. 대포가 작렬하는 큰 소음과 동시에, 별안간 그의 투구에서 불꽃이 일었다. 순간 그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멈춰 섰고, 이 삼 초 후에는 힘없이 쓰리지고 말았다.
자그마치 백 삼십 미터였다. 앞장서서 가던 장교가 쓰러지자, 그 장교가 인솔하던 병사들이 허둥거렸다. 하사관들이 보채봤자 소용없었다. 전투에 돌입하기도 전에 대장이 쓰러진 것이다.
편견은 스스로를 곤란에 빠트리는 법이었다. 그들 가운데 아무도 그 총탄이 백 삼십 미터 거리의 언덕 숲에서 날아왔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럴 만도 했다. 칠십 미터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 총탄에 맞는 병사는 지독히도 운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곤 했던 것이다.
대포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총탄 두 발이 다니치군의 대열을 파고들었다. 그 총탄은 경사진 각도로 병사들의 키를 넘겨 맨 뒤에서 걸어오던 하급 장교 두 명의 가슴에 박혔다.
다니치군 병사들은 전우가 총에 맞아 쓰러지더라도 대열을 유지하도록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명령을 받을 상관이 쓰러지면 속수무책이었다. 전방에서 대열을 형성하던 병사들이 허둥거렸다. 낌새를 느낀 것이다. 하지만 어디서 공격을 받는 건지, 그 공격이 우발적인 것인지 극도로 의도된 것인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세 총사가 동시에 장전을 끝냈다. 10여 초만이었다. 그들은 장전하기 수월한 팽창 탄환을 가지고 왔고 이 탄환은 재장전이 빨라 값이 비싼 대신 값어치를 톡톡히 했다.
뒤에서는 유격병들이 총알에 헝겊을 감아 탄환이 총강 안에 꽉 맞물리도록 밀대로 집어넣는 중이었다. 이 방법은 팽창 탄환처럼 총알의 정확도를 향상시켜주지만 재장전이 무척 더디고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다.
세 총사가 장전을 끝내고 개머리판을 어깨에 붙였다. 그들은 이미 장교를 아홉 명이나 저격했다. 하지만 150미터 떨어진 다니치군 병사들은 그 총탄이 어디서 날아오는 것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총구의 화염은 수풀 속에 가려졌고, 세 총사는 대포의 포성에 맞춰 강선총을 발사했기에 은폐가 된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 공격이었다. 유격병들이 장전을 다 끝낸 모양이었다. 그들 가운데 하나가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희는 언제 쏩니까?”
“지금.”
벨린이 대답과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총사들 뒤에서 수그리고 있던 유격병들이 일어나서는 전방으로 일제사격을 가했다. 이번에는 대놓고 쏜 것이었다. 마지막 공격이니만큼 포성에 맞춰 쏠 필요가 없었다.
유격병들이 쏜 총탄이 맨 앞 대열에 있는 다니치군 하사관과 병사들에게 명중했다. 삼분의 일은 빗나간 모양이었지만, 나머지 삼분의 이는 보기 좋게 명중했다.
다니치 군인들이 영문도 모른 채 쓰러졌다. 총성이 다니치군의 대열까지 울려 퍼졌다. 그제야 적병들은 저 언덕 위에서 총탄이 날아왔다는 것을 눈치 챘고 뒤늦게 고함을 지르며 서둘러 손가락질을 해댔다. 일부는 맞지도 않을 총을 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히스파니아 총사들과 유격병들은 임무를 완수하자마자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용케도 살아남은 다니치군 장교가 기병대를 찾았지만, 기병대는 후방에 자리 잡고 있었고 보병 장교가 함부로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니치 병사들은 전장을 향해 진격할 기회를 놓쳤고, 그 틈을 타서 전력이 보강된 히스파니아군은 일제사격을 거쳐 적들을 제압했다. 곧이어 총검이 난무하는 치열한 백병전이 전개되었고, 일선 지휘관을 잃어 사기가 추락한 다니치 보병부대는 급속히 무너져 내렸다.
Comment '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