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나레스의 총사(31)
히스파니아 병사들은 경기병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으로 헤카펠들을 몰아넣었다. 바닥은 진창이라 말이 힘을 못 썼고 퇴로는 총검과 단창으로 무장한 히스파니아군이 차단한 상태였다.
중장기병을 막기 위한 파이크병이 전쟁터에서는 퇴출되면서, 고참 계급을 지닌 병사들이 들기 시작한 것이 이 단창이었다. 빌랜드어로 하프 스피어라고도 하는 이 짧은 창은 총검보다 길었고, 파이크보다 사용하기도 편했다. 또한 중장기병이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대신한 경기병들을 상대하는데 대단히 유용한 무기였다.
헤카펠 기병이 아무리 무적을 자랑하는 군대라고 해도, 그들은 기본적으로 경기병이었다. 그들이 두른 흉갑과 헬멧은 총알에 너무도 무력하게 꿰뚫렸고, 단창은 무장되지 않은 말의 급소를 찔러 저항하는 기병들을 하나 둘 쓰러뜨려버렸다.
초반부터 히스파니아 병사들은 승기를 잡았다. 매복해 있는 히스파니아군의 일제 사격에, 삼분의 일이나 되는 기병이 허무하게 쓰러졌다. 이에 질 세라 기병들도 단발 권총을 뽑아 쏘았지만 권총이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기에는 전장이 너무도 불리했다. 그 벌판 속으로, 유인 역할을 맡은 세 총사들이 난입하면서, 전투는 이제 총검과 기병도가 부딪치는 난투극으로 돌변했다.
히스파니아 병사들은 신발의 능력 덕분에 벌 사이를 자유자재로 움직였고, 단창과 머스킷총을 이용하여 헤카펠 기병들을 차례차례 쓰러트렸다. 허나 아무리 일방적으로 밀어 붙인다 해도, 워낙 상대가 쟁쟁했기 때문에 히스파니아 병사들도 부상자가 속출했다. 손과 팔과 얼굴을 다치는 바람에 일부는 이미 피를 흘리고 있었다. 헤카펠 기병들도 생존본능에 필사적으로 기병도를 휘둘러댔던 것이다.
“하체를 노려라! 말부터 멱을 따!”
모두들 기병도에 의한 부상을 입어 피투성이였지만, 아틸 연대의 부사관들은 살기등등하게 외쳤다. 병사들은 순간적으로 일개 패잔병에서 정예 머스킷총 사수로 탈바꿈했고 적의 블론드종 말을 총검으로 찔러 기병들을 잇달아 낙마시켜버렸다. 부사관과 유격병들은 그렇게 낙마된 기병에게 총검을 찔러 적을 완전히 잠재워버리는 데 일조했다.
그렇게 병사들의 몸은 온통 피와 진흙 투성이가 되어갔다. 허나 그들의 열의는 결코 차가운 진흙에 식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헤카펠 기병들이 모두들 쓰러지고, 히스파니아군이 승기를 완전히 잡아갈 무렵이었다.
“기수가 도망친다!”
누군가 버럭 외쳤다. 검으로 필랜드인 기병의 목을 찔러버린 벨린 데 란테가 재빨리 뒤로 고개를 돌렸다. 낙마한 기병들을 도륙하는 틈을 타서, 헤카펠 기병의 기수가 벌을 탈출, 줄행랑을 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시대 병사들에게 있어 깃발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적의 깃발을 노획하는 쪽이 영광을 얻는 것이며 적에게 깃발을 빼앗긴 쪽이 죽음보다 더한 수모를 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헤카펠 기수의 필사적인 도망은 어떻게든 깃발을 빼앗기는 수모만은 막고자하는 그들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잡아라!”
아틸 연대의 병사들이 눈에 불을 켰다. 아틸 연대는 헤카펠 기병 연대의 제물이 되면서 이미 깃발을 노획당하는 수모를 겪은 바 있었다.
자연히 그들은 헤카펠 기병의 깃발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미 기수와의 거리는 10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다. 기수는 깃발을 사수하기 위해 혼신을 다해 말을 몰아갔고, 병사들이 벌을 빠져나와 기수를 잡으러 뛰려고 하던 중이었다.
“잠깐.”
벨린 데 란테의 목소리에 병사들이 걸음을 멈췄다. 그가 기수에게 총을 조준한 다음 주저 없이 쏘았다.
타앙.
총성 한 발과 함께 헤카펠 척후대의 기수는 허무하게 쓰러져버렸다. 말은 주인을 버리고 도망쳤고, 가슴에 검은 깃발을 안은 채 기수는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제야 병사들은 죽은 기수를 향해 뛰어나갔고, 그 기수가 끝까지 들고 있던 검은 군기를 빼앗아서는 두 팔을 올려 번쩍 들어올렸다.
병사들이 무기를 들어올리며 일제히 외쳤다.
“히스파니아 만세!”
무적의 헤카펠 기병을 해치운 병사들이 서로를 얼싸 안고 기뻐하기 시작했다. 비록 척후대와 싸운 비공식적인 전과였지만 그것은 엄연히 이 전투서 헤카펠 기병을 최초로 패퇴시킨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더불어 이 전과를 앞장서서 올린 이가 바로 총사대 소위 벨린 데 란테였으니, 그는 이런 영웅적인 전과를 세운 와중에도 벌에서 나와 다리를 쭉 뻗고 앉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좀 술맛이 돌아오겠군.’
하지만 벨린은 더 이상 다리를 뻗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조안과 알레한드로는 물론이고, 다른 이들까지 몽땅 몰려왔다. 모두가 진흙투성이가 된 가운데, 그들은 벨린 데 란테를 둘러싸고 그의 몸을 들어올리며 헹가래를 쳐주기 시작했으니, 이 작지만 의미 있는 복수극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자가 누구인지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것이었다.
* * *
유격병들이 헤카펠 기병의 척후대를 전멸시켰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전장으로 퍼져나갔고, 그 직후에 있은 대규모 전투에서 양측 병사들의 사기에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의 작은 승리가 더 큰 승리를 견인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바로 신교도 진영의 큰 축이었던 헤카펠 연대가 척후대의 전멸에 격분, 치명적인 실책을 하면서 비롯됐다.
까살라 전투 초기, 헤카펠 기병은 히스파니아군의 좌익을 향해 우발적인 돌격을 감행했고, 이 무리한 돌격은 작은 패배도 용납을 하지 않던 그들의 자존심을 벨린 데 란테가 건드린 덕택이었다. 그러므로 그 패배를 만회하기 그만 무리한 돌격을 감행하게 된 것이 결과적으로 큰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기병들의 움직임은 애당초 노출되어 있었고, 보병들은 충분히 대 기병용 방진을 짤 시간이 있었기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애당초 하카펠리타라고 해도 무리인 공격이었다. 이 시대의 기병은 항상 보병과 같이 움직여야 했지만,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그러지 않았다. 더구나 히스파니아군 좌익에 포진된 부대는 히스파니아 부대 가운데서도 최정예로 선발된 중보병 연대였고, 그들이 대 기병용 방진을 짜고 총검과 단창으로 방어를 한다면 어떠한 경기병도 그곳을 뚫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헤카펠 기병은 말을 어떻게든 총검이 자리 잡은 방진으로 돌격시키려고 애를 썼지만 그 일은 허사로 돌아갔다. 말이라는 동물은 앞에 장애물이 있는 순간 반사적으로 진로를 틀기 마련이었다. 방진을 뚫지 못한 기병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머스킷총 사수들에 의해 하나하나 저격당했고, 그 사이 전방과 우익에 집중된 히스파니아 보병들이 돌격을 감행하고, 정예 후사르 기병들이 신교도 군대의 뒤를 치면서 신교도들의 대열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풍문에 따르면, 헤카펠 기병들의 원래 임무는 그들의 숙적이라고 할 수 있는 구교 연합군의 후사르 기병들을 막는 것이었다. 하지만 헤카펠 기병들은 순간 명령 전달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그것은 결국 패배로 이어졌다는 거였다.
이날의 활약으로 인하여, 이주 간에 걸친 까살라 지방 공방전은 히스파니아 측의 대승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날은 그리안력 1701년 12월이었고, 이날의 승리로 말미암아 까살라 지방을 놓고 벌어진 양측 진영의 협상은 구교측이 절대적으로 유리해졌다.
7장 - 까살라
벨린은 죽은 유격병들의 무덤에 헤카펠 기병의 군기를 덮어주었다. 비록 그들의 임무는 전투가 마무리되면서 끝이 났지만, 그는 죽은 이를 애도하지 않을 정도로 냉혈한은 아니었다.
그는 혼자서 무덤가 옆에 기대어 앉아, 제대로 된 술맛을 보았다. 신교 측 병사들이 패주하면서 상당한 전리품들이 까살라 지방에 퍼졌는데, 그 가운데서는 신교 병사들이 까살라 지방에서 노획한 거품 나는 백포도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까살라의 포도주는 맛이 일품이었다. 그는 술을 병째 들이키고는 군기가 술에 젖도록 무덤 앞에 조금 뿌렸다. 그리고는 남은 술을 마저 단번에 들이켰다.
하지만 그는 술을 마시며 연민의 감정 같은 것을 깊이 가지지 않았다.
무덤에서 일어나면 유격병도, 그가 쏴 죽인 다니치 장교도, 헤카펠 기병도 모두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그저 스스로가 떳떳해지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최소한 까살라 지방에서는 모든 전투행위가 중단되었다. 구교 군대와 신교 군대는 협상 때문에 일시적인 휴전을 맺었고, 그 동안은 까살라에서 신교도들과 싸울 필요가 없었다.
유격병을 지휘하는 그의 임무는 종결되었고, 사냥꾼들은 해산되었으며 그들에게는 일시적인 휴가가 주어졌다. 조안과 알레한드로는 각자 개인적인 일을 위하여 후일을 기약하며 헤어졌고, 벨린이 그들을 다시 만나려면 최소한 2~3주는 있어야 할 터였다.
그 동안 좀 쉬어야겠지.
망설임 없이 무덤을 내려오면서 벨린은 천천히 까살라의 큰 도시로 향했다.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수많은 전사자들의 무덤들 사이로 인구가 20만이 넘는 란툰 반도의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시로 향하는 벨린 발걸음은 점점 차분하고 떳떳해졌다. 저 도시를 지키는데 일조했으니, 그 또한 저 도시에서 여흥을 즐길 권리가 있었다.
그는 하루하루를 총사대 후보생 시절 때처럼 까살라 도시의 주점과 여관에서 보냈다. 그에게 내려진 포상금과 월급을 합치면 충분히 사치스러운 생활이 가능했다.
그는 있는 돈을 다 부어 까살라 지방의 모든 여자들을 가져볼 생각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까살라 지방의 여급이나 창녀들은 히스파니아 여자들만큼이나 예뻤고, 심지어 란툰어와 히스파니아어의 동질성 때문에 말까지 잘 통했다.
물론 그 여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오랜 전쟁으로 파탄이 난 생계 때문에 외국 군인에게 몸을 파는 것이다. 하지만 벨린은 그에 따른 동정심도 자제심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여자들에게 있어 ‘좋은 고객’이 되어주었고, 그가 점점 좋은 고객이 되어갈수록 그는 점점 더 일상적인 생활에 따분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날 무렵이었다. 벨린은 문득 자기 수중에 남은 돈을 계산해보았다. 아직 그에게는 총사대 월급을 비롯한 거금의 은화가 남아 있었다. 까살라에서는 히스파니아에서처럼 은화의 가치가 심하게 떨어진 것도 아니라서, 적절한 은화를 가지고도 좋은 물건들을 잔뜩 살 수 있었다.
그는 남은 돈을 이등분 했다. 하나는 이 생활을 계속 보내기 위한 필수적인 자금이다. 여관비와 술값, 포주에게 줄 계집질의 대가, 그녀들에게 줄 봉사비와 선물 값 등등.
이곳은 물가가 싸니까 그가 가진 돈의 반절이면 몇 달은 거뜬히 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돈의 반은 어디에다 쓸까.
벨린은 문득 그 돈으로 투자라는 것을 해볼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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