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나레스의 총사(41)
술에 취한 벨린의 표정은 지극히 몽롱해보였다. 어떻게 보면 무슨 꿈을 꾸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그렇게 아리엘을 내려 보며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아리엘은 그런 주인이 너무도 무서웠다.
그녀가 그대로 누운 채, 자신의 잘못이 뭔지도 모르고 빌었다.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조용히 있어.”
그가 말했다. 그 말에 아리엘이 입을 꾹 다물었다. 길을 잘 들였군. 그가 이렇게 중얼거리며 마치 기분 좋은 환영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몸을 옆으로 돌려서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겨 천천히 붙였다.
그는 천천히 아리엘의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두려운 나머지 눈만 질끈 감고 있었다. 잘 길들여져 있다는 증거였다. 그 어떤 짓을 한다 해도 그녀는 감히 저항하지 못할 것이었다.
벨린은 눈을 감고 마지막에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가 그녀의 입술을 향해 자신의 입술을 부드럽게 포갰다.
“으읍….”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술에 잔뜩 취했다고는 해도 주인님이 원하는 것이니 기꺼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벨린은 그의 물건을 아주 조심스레 다루기 시작했다. 술에 취한 사람이 아니라 연민에 취한 사람 같았다. 그의 키스 솜씨는 만취했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10여분 동안 그녀의 혀를 맛보면서 입을 맞췄고, 그의 노예는 점차 꼭 쥐고 있던 주먹을 자연스레 펼쳤다.
키스를 그렇게 오래하면 기진맥진해지기 마련이었다. 마침내 벨린이 입을 때고, 마치 이제는 귀찮다는 반응으로 그녀의 이불을 뺏어 눕자, 침이 턱까지 흘러나온 아리엘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보며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녀는 지금껏 키스 한 번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와 몸을 섞어 욕정을 풀던 전 주인도 키스는 하지 않았다. 그녀의 술 취한 주인은 그렇게 그녀의 마지막 순결을 빼앗아가 버린 셈이 되었다.
하지만 아리엘은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입에서 술 냄새가 나는 것 같았지만, 도리어 술기운이 흡수됐는지 기분이 묘했다. 술에 취한 주인이 그녀의 잠자리 옆에 있었다. 벨린은 그녀의 체취가 좋았는지 눈을 감고 잠든 채, 그녀의 이불에 코를 대고 있었다.
아리엘은 멍하니 그냥 계속 누워 있었다. 그렇게 가만히 있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그녀의 주인이 몸을 그녀 쪽으로 돌린 채 이불을 덮으면서 술에 취한 어조로 나지막이 한마디 했다.
그 말은 보통의 히스파니아어가 아니었기에 아리엘은 뜻을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란테 지방의 사투리라고 할 수 있는 말이었고, 그녀가 그 말에서 이해할 수 있는 단어는 오직 복수라는 뜻을 의미하는 ‘벤데타’라는 단어뿐이었다.
이윽고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아리엘이 몸을 일으켜 주인을 몰래 바라보았다. 잠이 들어 있었다. 그는 일평생 가장 즐거운 표정으로 깊은 잠에 빠진 뒤였다.
“주인님….”
아리엘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태연히 코를 골며 잠이 들어있는 주인을 쳐다보았다. 이상하게도 그가 오늘은 무섭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등잔불을 껐다. 그리고는 잠자리의 반을 차지한 주인 옆에 누워서는 나머지 이불 반쪽을 덮었다.
벨린이 자는 도중 그녀에게 몸을 기댔지만 그녀는 편안히 잠이 들 수 있었다.
* * *
최후의 전투가 머지않았다. 마지막 휴일이 지나가자, 펠리페 총사연대는 전장으로 나아가기 위해 최후의 준비를 마쳤다. 총사들은 마지막으로 군기와 군악기와 머스킷총을 점검했고, 말을 탄 전령들은 후방의 본진부대로 쉴 틈 없이 명령서를 주고받았다.
근위총사연대 옆에는 또 다른 최정예라고 할 수 있는 히스파니아군 탈레스 척탄병연대가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예군이면서도 총사연대와는 정 반대의 전투교리를 지니고 있었다. 근위총사연대가 기동 및 유격에 적격인 망치 부대라면, 척탄병연대는 맷집과 강력한 일제사격을 바탕으로 대열을 갖추는 모루 부대였다. 그들은 정교하지는 않지만 견고한 머스킷총과 긴 총검으로 무장했고, 수류탄을 휴대하고 있었는데, 간단히 이들을 정의하자면 머스킷총 사수를 강화한 중보병이라 할 수 있었다.
척탄병들은 180센티미터 이상의 키에 70킬로그램 이상의 몸무게를 지닌 기골이 장대한 군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전쟁터에서 이들의 위압감은 상당했고 웬만한 경기병들조차도 대열을 무너뜨리기 쉽지 않았으며, 백병전이 벌어질 경우 당해낼 부대가 없었다.
총사들이 빠른 기동력과 날카로운 사격으로 기동적인 압박을 펼친다면, 척탄병들은 위력적인 일제사격과 진중한 돌격으로 정면적인 압박을 가하는 부대였다. 전쟁 동안 히스파니아군은 이 두 부대를 이용하여 적의 요새와 진지를 공략하는 전술을 갖추었고, 이 색이 다른 두 부대는 유기적으로 조합되어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월요일. 데 피사로 원수가 이끄는 히스파니아와 구교도 연합군은 전 군에게 신교도가 주둔한 서부 다니치의 란츠베르크 영지를 공략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란츠베르크는 신교도들이 까살라로 병력을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요충지로, 이곳을 신교도들이 상실하면 사실상 전쟁은 끝나게 되어 있었다.
그들이 세운 계획은 이러했다. 일단 주둔지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란츠베르크 평야 앞에 주둔한 대규모의 적군을 유인한 다음, 기병대와 보병연대를 동원하여 각개 격파하는 것이었다. 그 사이 척탄병연대와 총사연대로 구성된 숨겨진 정예군이 우회하여 란츠베르크의 요새를 신속히 공격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전투에서 구교 연합군에게 가장 위협적인 것이 바로 저 란츠베르크 요새의 성벽에 거치된 거대한 중포였다. 50파운드 짜리 포탄을 쏘아올리는 이 대포는 북에우로파 마법사들과 연금술사들이 최신 주조기술을 이용하여 주조한 걸작품이었다. 란츠베르크 요새에는 이 중포가 20여기 가까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이것의 사거리와 정확도 및 위력은 상당한 수준이라서, 요새에서 5킬로미터까지만 접근해도 적의 강력한 포화에 위축될 판국이었다. 그러므로 이번 전투의 승기는 이 히스파니아 정예군이 적의 요새를 신속히 무력화시킬 수 있느냐에 달렸고, 그것만 성공한다면 4만 명이 되는 구교 연합군의 병력은 신교도 병력을 포위하여 단번에 섬멸해버릴 수 있을 터였다.
1702년 1월, 둘째 주 월요일 오후, 완전무장한 총사연대와 척탄병연대는 출동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근처에서 포성이 들려왔고, 서쪽에 있는 평야에서는 소규모의 아군이 적을 유인하기 위해 기만전술을 펼치고 있는 장면이 포착되고 있었다. 아군의 입장에서는 들판에 도열한 적을 상대하는데 힘을 써야 했고, 신교도들의 입장에서는 요새의 힘을 빌려 증원군이 올 때까지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포성이 점점 가까이 들렸다. 데 피사로 원수가 거느린 본진이 중포로 포격을 가하는 모양이었다. 총사연대와 척탄병연대가 출동을 대기하는 장소는 이 본진의 왼쪽 날개 부근이었다.
벨린은 자신의 소대원을 이열 종대로 대기시키고 미려한 곡선의 사브레를 뽑아 어깨에 걸쳐놓고 있었다. 연대 기수는 깃발을 펼쳐 올렸고 군악대는 드럼을 가볍게 두드리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아리엘은 공식 부인들과 함께 벨린의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벨린을 바라봤다. 행군이 시작되면 그녀는 다른 공식 부인들과 함께 히스파니아군의 2진을 따라 오게 된다. 그곳에서 2차진지를 구축하고 후송되는 부상자들을 돌볼 것이었다.
총사들은 각자의 공식 부인들과 짤막하게 안부 인사를 하였다. 어느 부부는 키스를 했고, 무운을 비는 기도를 드리는 부인들도 있었다.
아리엘이 벨린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벨린이 넌저시 말했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나는 죽지 않을 테니까.”
“주인님….”
그녀가 말을 흐렸다. 노예 주제에 지금 주인을 걱정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벨린은 술에 취했던 지난 밤과는 달리 평소처럼 냉랑한 주인이 되어 있었다. 전방으로 눈을 돌린 주인을 바라보며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주인의 키스는 단지 술김에 일어난 일이었던 걸까.
그때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군신호였다. 행진곡이 울려 퍼지면서 부대가 정해진 진로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벨린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물건을 바라보고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적진을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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