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나레스의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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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Gavin
작품등록일 :
2009.04.08 21:55
최근연재일 :
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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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1.11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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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나레스의 총사(45)

DUMMY

벨린은 협박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잠시 공작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그리고는 깃발로 팔을 뻗었고, 그와 동시에 공작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총사대 대위는 깃발 앞에서 멈칫했다. 그는 적의 깃발을 잡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새벽의 어둠 속에 소름끼치는 적막이 감돌았다. 마치 전투 중의 아우성이 요새의 꼭대기를 감싼 듯이 두 사람은 침묵에 빠졌다.

총소리가 분명 들렸다.

과연 어떻게 된 것인가.

란츠베르크 공작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그가 연기가 나는 권총을 놓치고서는 천천히 허물어지듯 쓰러져 내렸다. 공작의 턱 밑 부분에는 총상의 흔적이 역력했다. 자살을 한 거였다.

벨린은 멀쩡한 오른팔로 란츠베르크 가문기를 내렸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고, 미간은 총탄에 으스러진 왼팔 때문에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히스파니아군의 깃발이 란츠베르크 요새의 성벽에 내걸렸다. 벨린은 피가 흐르는 왼팔을 지압하며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갔다. 수비군과 히스파니아군 간에는 여전히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아무도 벨린 데 란테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저들도 조만간 알게 될 터였다. 이미 히스파니아군이 승리했다는 것을 해가 뜨는 대로 요새 꼭대기에 걸린 깃발을 통해 온 군대가 눈치 챌 것이었다.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벨린은 자신의 왼팔을 내려보았다. 그가 움켜 쥔 적의 깃발이 왼팔에 흐르는 피 때문에 붉게 물들었다.

그는 새벽녘의 어슴푸레한 새벽빛으로 자신의 부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온 몸은 피로 물들었지만 생각보다 부상이 깊지는 않은 것 같았다. 어쩌면 팔을 잘라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았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모든 업보를 씻어 내린 듯한 기분으로 성문을 향해 느릿느릿 걸어갔다. 하지만 그가 성문을 넘어 아군의 진영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서쪽의 성벽에서 짧은 총성이 울렸다.

벨린은 움찔했다. 그의 몸이 한 차례 가벼이 떨렸다. 그는 자기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었다. 총탄이 명중한 옆구리 부분에서 붉은 선혈이 솟아났다. 목이 무척 말랐다. 죽음의 공포가 점차 그의 뇌리에 엄습하기 시작했다.

벨린은 아군의 진형을 향해 기어갔지만 금세 그만두고 말았다. 의식은 가물가물했고, 소름이 돋는 것처럼 온 몸이 추워졌다. 온몸의 피가 모조리 빠져나온 것처럼,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잠시 자신을 지금 이 자리까지 움직인 본질이 무엇인지 떠올렸고, 그러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전투를 끝내고 맞이하는 죽음도 그럴싸했다.

나름대로 어울리는 최후가 아닌가.

벨린은 이렇게 생각하며 서서히 의식을 잃었다.


9장 - 자유민과 노예


그것이 꿈인지 환각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허나 벨린 데 란테의 환영 속에서, 청년은 어느 산 속 눈밭에 있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이었고, 전방에는 란테 지방의 웅장한 산맥들이 병풍을 두르고 있었다.

사냥꾼은 곰털가죽 옷을 입은 차림새로 사냥총을 멘 채 뛰었다. 그는 앳된 얼굴을 지니고 있었고, 기껏해야 열일곱 살 밖에 안 되는 청년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갈색 눈에는 그 앳된 얼굴에 걸맞지 않는 무시무시한 분노의 감정이 서려 있었다.

그는 사냥감을 쫒는 중이었다. 눈밭에는 피로 물든 발자국이 숲 언저리까지 나 있었다. 벨린은 그 흔적을 따라 뛰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냥감을 발견했다.

그녀는 나무 앞에 서 있었다. 갈색 머리 소녀였다. 가죽 옷과 바지차림으로 사내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다 자란 짙은 갈색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벨린이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녀가 벨린을 알아보고는 넋이 나간 어조로 말했다.

“벨린 데 란테.”

벨린 데 란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차가운 얼굴로 갈색 머리 여자에게 총을 겨눴다.

소년이 분노가 사무친 목소리로 말했다.

“쭈가 죽었어. 너는 내게 그 이상의 것을 가지고 갔어.”

그녀가 독기어린 눈빛으로 청년을 노려보았다.

벨린이 말을 이었다.

“너는 날 배신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 모두를 배신했어. 이 더러운 빌랜드 년!”

“헛소리 하지 마!”

그녀가 앙칼지게 대들었다.

“나는 아무런 잘못도 안 했어. 그들은 날 죽이려 했어. 그들이 날 죽이기 전에 먼저 그들을 죽인 건데, 그게 어떻게 잘못이 될 수 있지?”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야!”

벨린이 분개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안젤라, 너를 위해서라도 그러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너는….”

“너는 나 따위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그녀가 말했다.

“내가 어떤 꼴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든 간에, 네 마음에는 그들과 그 빌어먹을 늑대 새끼만 있었던 거야."

벨린은 얼어붙은 듯이 서 있었다.

타앙.

총 소리가 그녀의 말을 막았다. 벨린이 쏜 총탄은 애꿎은 눈 바닥을 맞췄고, 그녀는 얼어붙은 듯이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꺼져.”

벨린이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자, 그가 버럭 소리쳤다.

“내 앞에서 당장 꺼져버려!”

그녀가 마지못해 눈밭을 걷기 시작했다. 벨린은 지옥에서 돌아온 듯한 표정을 지으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간혹 그녀는 뒤를 돌아봤지만, 벨린은 그녀를 불러 세우지도, 그렇다고 총탄을 장전하여 총으로 쏘지도 않았다.

벨린이 또 한번 소리쳤다.

"다음에 네 얼굴을 보면 반드시 죽여버리겠어!"

그녀는 눈보라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벨린의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괴여 뺨으로 타흐르기 시작했다.


허나 울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벌써부터 냉랑함의 징조가 서리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성인이 되면서 그가 평생 동안 지니게 될 냉소의 근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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