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게 도망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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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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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새
작품등록일 :
2021.03.24 00:00
최근연재일 :
2024.09.18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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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2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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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배웅

DUMMY

숙취가 무겁다. 롬은 뒷덜미를 매만졌다. 숨을 내뱉으면 싫어도 전날에 뭘 먹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 것들을 견디면서 감옥을 찾았다.


몇 번 들락날락거리다보니 이젠 위병이 아는 체했다. 그러다가 위병은 롬이 가슴팍에 달고 있는 사자 문장을 보더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권위에 대고 하는 인사에 롬은 멋쩍게 마주 인사했다.


“들어가십시오.”


음유시인이 갇힌 감방은 바뀐 게 없어보였다. 심지어 그 안에 있는 사람마저 그랬다. 롬은 창살을 등지고 누워있는 음유시인을 불렀다.


“야.”

“...끙”


비척비척 음유시인은 허리를 세웠다. 그 모습에 롬은 눈썹을 찌푸렸다. 감옥 생활로 멜의 몸이 점차 피폐해지는 게 눈으로 보였다. 창백해진 안색과 점점 말라가는 몸 같은 게 보였다. 정보를 위해, 또 대의를 위해서 치료와 고문을 반복하는 일이야 흔하다. 하지만, 당하는 사람과 가하는 입장 사이에서 롬은 입맛이 썼다.


[괜찮냐.]

“미안한데. 뭐라 적었는지 안 보여.”


연이은 행사 덕에 멜의 시력은 손상을 입었다. 롬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멜은 무릎걸음으로 다가와서 창살에 붙었다. 그러자 글씨가 조금 보였다.


“뭐, 대충 그렇게 적을 거 같긴 했다.”


음유시인은 침침한 눈을 비볐다. 롬은 생각에 잠겼다. 벙어리에서 반쪽자리가 된 그는 뭔가를 웅얼거렸다. 솔직한 말로 기분이 좋진 않았다. 그건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았다. 계속 이런 기분이 들면서까지 찾아와야 할까?


롬은 그래도 뭔가를 적어내기로 했다. 분필 끝이 갈라지고 칠판이 소리를 냈다.


[위니아는 네가 빼낸 거냐.]

“뭐야, 눈치 챈 거야?”


멜은 의외다 싶었다. 누군가가 알게 된다 할지라도 지금일 줄은 몰랐다. 게다가 롬이라면 더 그랬다. 뭔가 실수가 있었던 걸까. 가용할 수 있는 소체도 시기도 완벽했다. 죽음을 위장하는 방법은 숱한 죽음들 위에 쌓는 게 가장 좋았다. 심지어 물증을 남길 증인도 없게 되었다. 순전한 호기심으로 음유시인은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다.


[알고자시고 내 앞에 나타났어.]

“...그래?”


음유시인은 신음했다. 여러 의미로 말문이 막혔다. 판을 까는 건 음유시인의 전문이지만, 예상외의 전개는 답습할 시간이 필요했다. 머리를 굴리려다가도 멜은 그만뒀다. 무대에서 빠져나온 배역은 쓸모없다.


“그건 좀 의외네.”


롬은 고개를 갸웃했다. 솔직하게 답변한 멜의 속내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런 티를 내기도 전에 음유시인이 말했다.


“그녀는 생존을 원했고, 난 원하는 대로 해줬어. 난 약속은 지키는 편이거든.”


그게 자신에게 한 약속이든, 타인에게 한 약속이든 간에. 멜은 귀찮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다야.”

“...”


더는 모른다는 투였다. 롬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에 다른 걸 말하기로 했다. 일주일 남짓한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이란 건 이렇듯 쓸데없이 시간을 쓰는 걸 의미했다. 가령 삶을 포기한 음유시인에게 쓸데없는 문답 같은 걸 하는 시간 말이다.


그러고 있을 때 멜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안력을 돋우려 애쓰다가 터지는 웃음소리를 참듯 말했다.


“목에 그 자국은 또 물린 거냐?”

“...”

“아하, 이번에는 기억하는 모양이네.”


롬은 말이 없었다. 새삼 음유시인의 몰골이 의심스러웠다. 눈이 삐어버린 주제에 그런 건 잘 보이는 걸까.


부르르.


롬은 몸을 떨었다. 새삼 물려버린 자국을 쓰다듬었다. 그리고선 글씨를 적어내면서 물었다.


[...장수종이란 건 다 이런 거냐?]

“설마.”


음유시인은 미소를 지었다.


“나 네 복이란 거지.”


사실 멜도 멍 자국이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다. 성애 혹은 집착. 소유욕 혹은 정복욕. 식욕과 성욕. 자기애, 타애. 열등감. 사실 그 모든 것일 수도 있었다. 결국에는 그들이 어떻게 의미를 만드느냐의 문제였다. 여기까지 오니 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지금 우리 주인공은 어떤 심정일까.


“알게 되니 어때?”

“...”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냐.”


롬은 무의식적으로 적어냈다. 하지만, 음유시인에게 결국 내보이진 않았다. 롬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낸 것을 지워냈다. 각자가 속에 지닌 심정이나 사정이 있었다. 섣불리 내보여서 좋을 게 없었다. 그럼에도 롬은 음유시인에게 묻고 싶었다.


[여기 찾아오는 것도 마지막이야. 며칠 있다가 난 탈리아로 간다. 그 이후에는 왕도로.]

“그래서?”

[나중에 살아서 볼 수 있는 거냐?]


그런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난처해진 멜은 반대로 물었다.


“그게 될 거 같아?”

[네가 어떤 수작을 부리려는지 그냥 궁금해서.]

“아하.”


롬은 한숨을 쉬었다. 싱겁게도 그게 다였다. 남아버린 이야기들과 의문은 뒤에 남겨두기로 했다. 그 모든 걸 알아낸다고 한들 달라질 게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롬은 자기 안에 있는 목소리를 전했다.


[네 바보짓에 어울리는 거 썩 나쁘진 않았다.]


뒤통수 맞고 수작질 당했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진짜 바보들만 할 수 있는 거다. 목적을 위해, 자신을 위해, 그리고 남을 위해. 서로 돕거나 배신하거나 오해하거나. 이해하거나. 음유시인이 잘못을 하긴 했어도 도움 받은 건 있었다.


그 시간들이 있고나니, 롬은 멜을 질 나쁜 친구쯤으로 여기고 물러나기로 했다. 음유시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창살 너머로 손을 내밀었다. 멜은 헛웃음을 내고는 그 손을 맞잡았다. 비틀비틀 일어난 음유시인이 말했다.


“이래서 내가 널 좋아하는 거야.”

“으.”


롬은 질린 투로 끄덕였다. 그래, 내가 좀 매력적이긴 하다. 두어 번 맞잡은 손이 흔들렸다. 훗날 만나거나 말거나.


“잘 가라.”

“응.”


.

.

.


남은 시간은 많을 때보다, 적을 때 더 빨리 흘렀다. 사람들의 마음과 상관없이 그랬다.


끼릭. 끼릭.


롬은 오랫동안 손질 못한 모래전사의 나침반을 매만졌다. 흙이나 먼지 때가 끼기 쉬운 곳은 불어내고 기름을 쳤다. 롬이 가지고 있는 마장(아티팩트) 중에서도 꽤나 유용한 도구였다.


“음!”


끄덕인 롬은 나침반을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그런 느낌으로 그가 가진 장비들은 차곡차곡 가방 안에 쌓여 있었다. 그 중에서 에레시아의 지인이 부탁한 편지는 가장 안쪽에 밀어 넣었다. 나중에 왕도로 가게 되면 겸사겸사 전해야했다.


‘근데... 생각보다 짐이 많이 늘었네.’


그가 쓰던 장비들, 그러니까 전투를 위한 도구뿐만 아니라 생필품 같은 것들도 늘어났다. 원래 가지고 있던 사슬 갑옷이라든가. 검도 있었지만. 여벌로 가지고 있는 옷들이나 모포 같은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 엘리스가 주문한 것들로 바뀌어 있었다.


척 보기에도 좋은 재질의 가죽 부츠라든가. 언젠가 그에게 지어주었던 옷들은 새로 주문해서 다른 가방에 꽉꽉 눌러 담았다. 심지어 그 가방마저도 살에다가 풀 먹인 천을 두른 형태의 고급 가방이다. 가지고 온 짐보다 갈 때 생긴 짐이 더 많아졌다.


롬은 그걸 보면서 엘리스의 씀씀이에 고마워해야 할지. 난처해야 할지 모르게 됐다.


‘좀 덜어내는 게 좋을까.’


그는 정말로 고민했다. 그리고선 가방에 손을 넣고 뒤적였다.


똑똑.


“롬 님. 이제 가셔야해요.”


그쯤에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아로아였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가라앉아 있었다. 내심 아로아는 시중들던 손님이 가신다고 하니 괜스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원래 당연한 일일 텐데도 그랬다. 아마도 그건 상냥한 손님이 퍽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리라.


롬은 아로아에게 끄덕였다. 가죽 가방을 둘러맨다. 그가 애용하는 철검은 허리춤에 찼다. 그리고 그는 올 때와 비슷한 모습이 되었다. 다만 망토와 흉부를 보호하는 경갑옷이 달랐다.


이것들도 역시 엘리스가 내린 갑옷과 망토였다. 견고한 마수의 가죽을 엮은 갑옷과 검은색을 기조로 한 망토가 퍽 잘 어울렸다. 하녀 아로아도 그리 생각했다.


“끙!”


망토가 펄럭이는 통에 어색했다. 롬은 부피가 커진 짐들을 주렁주렁 달고 뒤뚱거렸다. 그러고 있으면 아로아가 당황해서 말했다.


“어, 짐은 사람을 시켜서 가져갈 건데요?”


툭.


어깨 끈이 미끄러져서 바닥에 가방이 안착했다. 하긴 그렇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엘리스가 준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쿡쿡. 아, 죄송해요.”


그 모습에 아로아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곤 바로 사과했다. 롬은 개의치 않았다. 아로아에게는 여러 모로 신세를 졌다.


[고마워요.]


롬은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숙여보였다. 작별 인사였다. 마찬가지로 아로아는 치마 끝을 잡고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아니요. 미숙한 저야말로 감사했습니다.”


화창한 날이다. 구름조차 없는 햇볕이 내렸다. 조금이지만 롬은 신이 났다. 실상은 팔려가면서도 그랬다. 그는 아미츠 성의 내벽의 공터로 나왔다. 거기에는 일단의 사람들이 있었다.


롬을 전송하기 위한 행렬이었다. 롬을 태우고 갈 마차도 있었다. 실제로 같이 행군할 무리들과 배웅할 무리들이 섞여 있었다. 청기사들과 병사들보다는 아는 사람들에게 눈길이 갔다. 바로 롤랑이나 레이첼 같은 사람들이었다.


“여.”


사건 이후에 처음 본 레이첼이 반가웠다. 그녀를 보자마자 롬은 인사했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말할 수 있게 됐군요.”

“응.”


조금은 말이다. 이젠 벙어리보단 그냥 모자라 바보로 불려도 될 듯했다. 롬은 씨익 웃었다.


“건강하게 지낸 거 같아서 다행이군요.”


정말로. 레이첼은 부드럽게 웃었다. 이 딱딱한 여기사에겐 잘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기사들과 병사들은 힐끔힐끔 그런 걸 보았다. 그들의 상사는 미인임에 분명했다.


그는 칠판을 꺼내서 하고 싶은 말을 적어냈다.


[고마웠어요.]

“아니요. 제가 고맙습니다.”


순간 레이첼이 깊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그녀는 뭔가 마음의 짐을 덜은 듯했다.


“정말로요. 아이들에 관한 것도. 사람들도. 그리고...”


사실 그런 일이 있었다. 며칠 사이, 자신의 거취를 정리하면서 돌아다니던 롬은 롤랑에게 그런 부탁을 했다. 폐쇄된 보육원 같은 곳에서 쏟아진 아이들을 받아줄만한 곳이 없냐고 말이다. 조금 시간을 투자해서라도 도시로 내려간 아이들을 잡아다가 넣을 생각이었다.


그 과한 오지랖 덕에 여러 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덕분에 결국 그 이야기는 엘리스의 귀에 들어갔고, 그녀는 심드렁하게 롬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그 외에도 감사할 일들이 있었다. 레이첼은 다 말하지 않았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롬은 다른 걸 물었다.


[이제 징계는 끝난 건가요?]

“아니요. 아직 남았습니다. 이건 제가 개인적으로 부탁해서 나온 거예요.”


왜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늘 하는 안부처럼 말했다.


“죽지마세요.”

[매번 생각했지만 그거 굉장히 불길하게 들리는 거 아십니까?]

“그런가요?”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딘가 맹한 구석이 있는 그녀는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이길.


“전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죽길 바라지 않아요. 그건 슬프니까요. 눈물이 멈추질 않아서 곤란하거든요.”

“오.”


레이첼의 부하들이 심장을 부여잡았다. 비슷한 심정으로 롬은 탄식했다. 조금 낫네. 크게 끄덕였다. 그렇게 레이첼은 그를 배웅했다.


“롬. 아가씨들을 부탁합니다.”

“어...”


다짜고짜 그렇게 말하는 노집사에 어떻게 말해야할지 모르게 됐다. 그러다가 알게 됐다. 롤랑은 아가씨‘들’이라고 지칭했다. 그 곤란하고 난처한 부탁에 롬은 어설프게나마 끄덕였다. 순간 아차 싶었다. 훅 치고 들어온 탓에 얼버무릴 기회가 없었다.


그러자 노집사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내심 롬은 롤랑처럼 늙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멋있는 영감이었다.


순간 롬은 주위를 둘러봤다. 나올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롤랑을 돌아보고서 롬은 빠르게 적어냈다.


[엘리스는요?]

“글쎄요.”


노집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순간 롤랑의 말투에서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고 있는데 행렬의 기수가 깃발을 쳐들었다. 하얀 깃발과 사자 깃발이 같이 나부꼈다. 그러자마자 병사들이 오와 열을 맞추기 시작했다.


“...슬슬 가셔야할 것 같습니다.”


롤랑이 말했다. 때가 왔다. 이렇게나 빠른가. 롬은 당황했다. 전하고 싶어서 따로 빼내두었던 물건이 있었다. 롤랑에게 그 뜻을 전하자 노집사는 부드럽게 웃고는 말했다.


“직접 전하시지요.”


그때 그의 앞에선 마차의 문이 벌컥 열렸다. 순간 롬은 당황했다. 마차에서 고개를 내민 사람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얼른 타. 그만 노닥거리고.”


엘리스였다. 백작이 떠돌이를 배웅하기위해서 밖으로 나왔다.


.

.

.


달그락. 달그락.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둘은 말이 없었다. 뭔가 말을 꺼내기 힘든 기묘한 공기가 번졌다. 롬은 답답해서 목덜미를 끌었다. 뭔가 말이라도 하면 좋겠지만, 엘리스의 기분은 꽤나 저기압처럼 보였다.


이대로 목적지까지 갈 셈인가. 힐끗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차에 딸린 창문으로 요새도시 아미츠의 내벽을 하나 둘씩 통과해가는 풍경이 보였다. 성에서 아래도시로. 점점 갈수록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영지민들이었다. 하나, 둘 점차 늘어난 인파는 마차가 지나가는 행렬을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봤다.


그러다가 소문이 났는지, 벙어리를 송환하는 마차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검은 밧줄. 검은 재앙, 검은 천사가 떠나간다.


사람들이 손을 흔들었다. 어디선가 가져온 깃발과 꽃들이 하나둘씩 마차가 지나가는 자리에 깔렸다. 상인조합은 눈치 빠르게도 이미 조그만 깃발이나 꽃 같은 것들을 가판에 내놓았다.


전송하는 행렬은 자그만 페스티벌로 변했다.


“쯧, 요란하게 굴긴.”


엘리스의 신소리에도 롬은 감탄사를 뱉었다.


“오.”


롬은 무거운 공기도 잊고서 창문에 달라붙었다. 큰 덩치 덕에 마차가 한차례 삐걱댔다. 그게 엘리스의 주의를 끌었다. 롬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가 피식댔다. 복잡한 감정이 솟았지만, 그녀도 지금은 이 풍경을 즐기기로 했다.


창밖에는 꼬질꼬질한 아이들이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언젠가 롬이 음식들을 나눠주던 꼬마들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롬은 고개를 돌렸다. 마차의 맞은편에 엘리스가 앉아있었다. 롬은 그녀를 불렀다.


“에리.”


붉은 눈알이 그를 바라보았다. 롬은 주섬주섬 품에 있던 것을 건넸다.


“...이건?”


엘리스가 되물었다. 물을 찾는 나침반이 엘리스의 손 안에 있었다.


[나도 뭔가 주고 싶어서.]


그가 지닌 것들 중에서 그래도 가치 있는 보물이었다. 그리고선 롬은 이것저것 자신에게 건넨 것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옷, 신발, 망토. 하물며 새롭게 받은 검까지. 심지어 엘리스는 노자로 쓰라고 어마어마한 양의 은화도 쥐어 주었다. 그러고 있었다.


그걸 빤히 보던 엘리스는 파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언젠가 봤던 웃음이었다. 짐도 책임도 덜어낸 그 표정은 정말로 홀가분한 종류의 것이었다.


인정하기 싫어도 정말 예쁘기까지 했다. 롬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롬이 건넨 나침반을 들여다보았다. 사실 그녀가 탐을 냈던 물건이었다. 롬을 붙잡았을 때부터 그랬다. 비루한 자가 가지고 있던 것 중에 그나마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엘리스는 조심스럽게 나침을 돌리면서 말했다.


“이것도 그렇고.”


그녀는 롬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은 어딘가 부족한 듯했다. 그 눈빛을 롬은 눈치 채지 못했다.


“...아. 보내기 싫은데.”


그녀의 깨물음이나, 중얼거림은 아미츠의 대로를 따라 이어진 민중들에 의해 흩어졌다. 순간 롬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순간을 축제인 것 마냥 즐기고 있었다.


“와아!”


엘리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 역시나 뜸을 들이지 못하는 건 그녀의 나쁜 버릇인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자랐다. 트라우마에 가까운 트리거다. 그녀는 창문의 커튼을 쳐버렸다.


촤악.


밖과 안의 시선을 차단해버린다. 순간 뭔가 깨달은 롬이 엘리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파악!


그 찰나에 롬은 옷깃을 잡혔다. 멱살을 틀어쥔 엘리스의 얼굴이 다가왔다. 위기감, 당황, 그런 것들이 한데 버무려져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을 때다.


덜컹!


“윽!?”

“읍!?”


마차가 대로 위에 깔린 꽃과 깃발들의 요철에 덜컹였다. 순간 엘리스의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그에 그치지 않고서 앞니까지 같이 충돌했다. 순간 입안에 말캉한 것이 닿았다. 혈액인지 입술인지 모를. 아픔과 함께 둘은 아파서 제 얼굴들을 매만졌다.


“하아, 되는 일이 없어.”


엘리스가 탄식했다. 어딘가 모양이 빠졌지만 어떠랴.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피가 맺힌 입술을 핥아내고서 그녀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롬은 주춤주춤 마차 한구석으로 물러났다. 엄습하는 기운이 실로 굉장했다. 두렵기까지 했다. 순간 롬은 비명을 지르려는데 엘리스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ㄲㅣ..”

“닥쳐.”


.

.

.


엘리스는 도시의 최외곽에서 먼저 내렸다. 사실 전송하는 장소까지 끝까지 타고가려고 했지만 마차 안의 열기가 그걸 견디기 힘들게 만들었다.


마차 문을 쾅 닫아버리고선 대열을 이탈했다. 이상하게 바라보면서 따라붙으려는 수행원들에게 꺼지라고 말했다. 잠시 그녀는 그렇게 도시를 거닐었다. 얼굴의 열기가 빠질 때까지 그리했다.


“아오, 내가 미쳤지.”


그러다가 바닥에 주저앉아서 머리를 감싸기도 했다. 그렇게 한숨을 내쉬고서 그녀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리지도 비가 올 것 같지도 않은 좋은 날씨였다. 엘리스는 이런 날이 좋았다. 비 오는 날은 정말 싫으니까.


그런데도 문득 느끼길...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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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산책 24.05.27 13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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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웅 24.05.22 14 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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