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게 도망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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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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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새
작품등록일 :
2021.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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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7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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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인

DUMMY

[며칠 만에 온 편지에 안부는커녕, 어떻게 지낸다는 소식조차 안 적어? 네 손은 입처럼 굳어버리기라도 한 모양이지?]


휘갈긴 필체에는 사뭇 분노가 담겨있었다. 롬은 눈을 문질렀다. 이상하다. 보냈던 편지에는 케일의 행방이 주된 내용이긴 했다만, 짤막하게나마 인사 같은 걸 적긴 했다. 주로 롤랑이나 그 측근들에 대한 인사로 그랬다.


그 다음에는 엘리스도 약간. 물론 그건... 엘리스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 그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전할 편지라 그랬다. 적어도 엘리스가 아닌 사람이 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리고선 한다는 말이, 타고 다니는 말이 어디 있냐고? 그 여자가 애착하는 애마라도 찾아줘서 환심이라도 사려는 셈일까?]


“헤에...”


롬은 새삼 비올렛이 왜 자리를 떴는지 알겠다. 생각보다 농도가 있는 편지 내용은 당사자도 질겁하게 만들었다. 손바닥이 축축해져서 이불보에 문질렀다. 편지지가 더 이어진다. 그 내용이 롬을 매도하는 내용이 반이다. 나머지 반은 엘리스의 자포자기 같은 말들이 적혀있었다. 역시나 제 팔자가 그렇다느니. 잘해줘서 다 소용없다느니.


원망과 자포자기가 어우러져서 무겁다. 롬은 더 읽어야하나 고민했다. 그러고 있으면 조금 정갈하진 필체와 내용이 이어졌다.


[...그 여자가 너한테 뭔가 해코지 하지는 않았어? 챙겨주는 척 부리는 음습한 괴롭힘 같은 건? 그쪽 상황을 모르겠으니까. 다음에 편지 보낼 때는 짧게라도 적어 보내기라도 해.]


사실 엘리스가 이 다음의 내용을 적을 때는 잠시 고민했다. 그녀는 한차례 머리를 감싸고는 떨쳐내듯, 펜으로 검은 점을 쿡 찔러 넣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내가 도와줄 테니까. 알겠어? 걱정 되서 하는 말이야.]


예로부터 가장 오래된 필담이란 건 편지일 거다. 하고 싶은 말, 못할 말을 적거나 덜어내고. 거리와 시간을 견디면서 전하는 말 같은 거. 롬은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뒷배가 이런 느낌일까. 앞의 내용은 빼고서라도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그년이랑 붙어먹었다간... 죽여 버릴 거야. 다른 사람은 되도 그 여자는 절대 안 돼.]


“오.”


묘한 소리를 내면서 롬은 생각했다. 엘리자를 향한 적개심 잘 접수했다. 롬은 편지지의 다음 장을 넘겼다. 그러자 쓰는 사람이 바뀌었단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집사 롤랑의 단아한 글씨체로 변했다.


[안녕하세요. 롬. 잘 지내시리라 생각합니다. 물어봤던 백마에 대해서입니다만.]


롬은 편지지를 뒤집어보았다. 엘리스의 말은 그걸로 끝이었나보다. 지금부터는 롤랑의 편지다. 내용은 간결하게 정돈되어있었다.


롬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됐나. 씁쓸한 기분이었다. 롤랑의 편지는 간결하게 맺어졌다. 허나, 마지막 추신이 눈에 밟혔다.


[아가씨께서 많이 걱정하십니다. 간략하게 안부 편지라도 써주십시오. 다만, 너무 극적인 내용은 지양해주시길. 너무 걱정하시면 상아도시에 쳐들어가실 기세랍니다.]


롬은 눈을 부릅떴다. 그건 안 된다. 피바람과 방화가 어우러진 현장은 이제까지 족하다. 엘리스의 염려가 무겁다 못해 너무 부담스러웠다.


[아가씨와 마님을 잘 부탁합니다.]

‘아니, 이 양반이. 왜 매번 부탁한다고 하는 거야?’


롬은 툴툴댔다. 그렇게 편지를 반으로 접었다. 한동안 집중하고 있어서였을까. 치료실에 들어온 사람이 있음에도 알아채지 못했다. 심지어 그 인영이 곁에 와있었는데도.


“후욱.”


귀에 바람을 집어넣는 입술이 있었다.


“끼악!?”


그 비명이 꽤나 재밌긴 하지만 제법 격한 반응이었다. 화들짝 놀란 롬은 파르르 떨다가 손을 내질렀다. 신경쇠약, 트라우마, 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는 자에겐 꽤나 정석적인 반응이었다. 상대방도 알고 있었다. 롬이 내지른 손을 가볍게 비끼고선 그를 밀어뜨렸다.


“그거 참 격한 문병이로다.”


침대 한구석에 롬을 밀치고선 그 옆에 푹 몸을 올렸다. 하얗게 흩어진 머리카락들이 침대 가에서 폭포처럼 내렸다. 엘리자였다. 그녀는 편지에 집중하고 있던 롬이 재밌어서 구경하고 있던 참이었다.


“에리?”

“소녀를 그리 부르느냐.”


순간 착란이 들어 뱉은 이름이었다. 엘리스의 편지를 읽다가 너무나 닮은 사람이 곁에 다가와서. 엘리자는 제 손등을 베게 삼아 옆으로 누워있었다. 비스듬히 바라보는 그 시선이 정말로 푸르다. 파란 눈알은 다른 의미로 빨강과 달랐다. 붉음과는 다른 외로움을 내포한 것 같았다.


“아니면 내 동생을 그리 부르는지.”


엘리자는 놀란 표정의 벙어리를 구경하다가 살풋 웃었다. 보고 있으면 재밌다. 대리만족이 된다. 이 얼마나 자유롭고 탐나는 영혼인지.


“어느 쪽이든 탐나느니라. 닫힌 입조차 열게 만드는 이름이라니.”


서로를 부른다는 건 그런 건가 보다. 서로를 부르는 힘이란 건. 엘리자는 동생을 생각했다. 그 아이가 자신을 어떻게 부르게 됐더라. 그녀의 상념과는 별개로 여기에는 남녀가 있었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비좁은 침대가 삐걱거린다. 두 명 분의 무게 때문에 그랬다.


롬은 정신을 차렸다. 엘리자가 자기 옆에 누워있는 걸 보고선 당황스러웠다.


“조금 비좁구나.”


꾸물꾸물 엘리자는 자세를 고쳐 누우려했다. 조금 더 롬에게로 붙으려 들었다. 그가 어버버하는 사이, 치료실의 입구에서는 더 어버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주, 주인님?”

“어머!”

“세상에.”


시녀들이 입이나 눈을 가렸다. 손 틈새로 다 보이는 장면에 꺅꺅거리기 직전인 듯했다. 엘리자는 은근히 그 시선을 즐기면서 말했다.


“다들 일들 보거라. 소녀가 오늘 꽤 피로하여 잠깐 누워있는 것이니라.”

“네, 넵!”


그들은 문에서 몇 발자국 떨어졌다. 동시에 침대가 출렁였다. 한명분의 움직임이 꿀렁댄다. 그에 엘리자는 롬을 돌아보았다. 그는 어느새 침대에서 굴러 나와서 반대편 바닥으로 안착해있었다.


“그래 이제 좀 넓구나.”


엘리자는 편하게 누웠다. 롬이 누워있던 자리에서 그을음과 땀 냄새가 조금 나는 것 같았다. 묘하게 불쾌하진 않았다. 그러고 있으면 롬이 벌떡 일어나서 뭔가를 적어냈다.


[왜 그렇게 놀리시는 겁니까?]

“놀리다니? 소녀는 그대와 놀고 있는 것이니라.”


그게 놀리는 거 아닌가? 롬이 토로하려는 데 엘리자가 말했다.


“논다고 하니 생각났느니라. 소녀를 떼어놓고는 그런 일을 벌이다니. 괘심하도다.”


엘리자의 표정에는 정말로 실망이라는 게 섞였다. 그걸 보는 당사자로서는 그 표현의 스펙트럼에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이 여자의 가치관은 어딘가 어긋나있다. 롬은 뭔가를 적다가 말았다. 차마 왜 그렇게 생겨먹은 거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러고 있으면 엘리자가 말했다.


“뭐, 거기에 대해선 나중에 말하겠느니라.”


지금은 다른 일이다. 우선순위를 매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롬, 네게 약을 짓는 재주가 있지 않더냐.”

“?”

“아론도 네 약 덕에 목숨을 부지했다고 들었느니라. 마찬가지로 흑기사도 어느 정도 덕을 봤다지?”


엘리자도 한번 겪은 적이 있었다. 아니, 당했다고 해야 하나. 그녀는 롬과 처음 만났을 당시를 떠올렸다. 그가 제안한 결투재판 같은 촌극에 어울렸다가 섬광탄을 맞은 기억이 있었다. 일개 용병이 지니기엔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었다. 이 경우에는 약학이라기 보단 화학에 가까운 재주지만.


[롤랑 님은 제가 치료한 게 아닌데요.]

“과정이 있었잖느냐. 일지를 통해 읽었고 사람들에게 들었느니라.”

[사람들요?]

“아미츠에 있는 내 사람들이지.”


지금 세작(스파이)이 있다고 시인한 건가? 하긴 있을 법하긴 하다. 롬이 상대하고 그를 괴롭힌 자들과는 별개로 부리는 사람이 있겠지. 그녀의 담담한 말에 롬은 끄덕였다. 그러나 그 다음 이어진 말에는 고개를 저을까 싶었다.


“어쨌든 소녀의 어머니께도 그 재주가 필요할 거 같구나.”

[만약 귀부인께서 아프시다면, 사제나 용한 의사를 찾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미 그랬느니라.”


그나저나 귀부인이라. 그거 참 고상한 표현이구나. 침대에 누워있는 엘리자가 말했다. 누워서 얘기하는 통에 나른한 기운이 돌았다. 그녀는 벙어리의 얼굴을 보고선 말했다.


“부담가지지 말라. 그저 소녀가 쓸데없는 희망을 부려보는 것이니라.”


.

.

.


베아트리스의 병실은 곧 따로 격리된 방을 말했다. 상아궁 내부에서도 어딘가 외딴 곳. 낡지는 않았으나 자주 사람이 드나드는 공간은 아닌 것 같았다. 세월이 묻은 가구들, 화장대, 꽃병이나 테이블. 천장과 바닥에 달라붙은 흔적들이 꽤 오래됐다. 그런 방에 들어서자마자 묘한 냄새가 났다. 어딘가 달콤한 냄새. 롬은 이게 무슨 냄새일까 싶었다.


“둘만 있고 싶으니라.”


먼저 들어간 엘리자는 방 안의 시녀들과 치료사에게 일렀다. 롬의 옆으로 시녀들이 먼저 빠져나갔다. 치료사는 방을 나가기 전, 약을 드신 마님께서 겨우 잠드셨다고 말했다.


그렇게 이 공간에 둘이 남았다. 아니,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까지 셋이다. 롬은 엘리자를 따라서 그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누워있는 사람의 행색이 바로 보였다.


베아트리스. 그런 이름이었다. 탑에 갇혀있던 귀부인. 새삼 제대로 보지 못했던 이목구비가 보였다. 흰머리 섞인 검은 머리카락. 세월이 조금씩 앗아간 젊음이 지고 있었다. 게다가 부쩍 창백해진 피부는 활력이 없다.


‘자매들이랑 닮긴 한 건가?’


잘 모르겠다. 배다른 자매끼리는 서로 닮았는데도. 롬은 쥐죽은 듯 누워있는 여자에게서 자매들의 흔적을 찾았다. 빤히 보고, 그러면서 알게 됐다. 확실히 닮았구나.


“곤히 주무시네. 이 모습은 옛날이나 다름없어.”


엘리자의 혼잣말이 들렸다. 어딘가 멀게 느껴지는 목소리는 평소의 것이 아니다. 평소 사람 놀리기 좋아하는 여자랑은 딴판인 분위기였다. 롬은 그 옆모습을 슬쩍 바라보다가 방 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물을 길은 양동이와, 피를 뱉어낸 그릇 같은 게 보였다. 말라버린 탁한 피의 색깔이 또렷하다. 롬은 코를 벌름거리다가 알았다.


이 냄새는 강한 진통제 냄새였다. 그러니까 마약이기도 한.


롬은 우두커니 서있었다. 옆에 있는 엘리자가 움직일 기색이 없었다. 손이 근질거렸다. 롬은 이 공간이 불편했다. 요상한 모녀도 그랬고.


[어디가 안 좋으신 겁니까?]


불편함이 롬을 적게 만들었다. 멍하니 있던 엘리자는 문득 눈가로 다가온 필담에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조그맣게 감정이 돌았다. 작은 파편 같은 쓴웃음을 내면서 그녀가 말했다.


“음독이니라. 어떻게 인지는 모르겠지만. 독약을 구해다 드셨지.”


롬은 그에 대해서는 더 묻지 않기로 했다. 대신 까마득해진 머리를 다잡았다. 그가 아는 지식이나 경험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알 수 있는 부분은 짚어내고, 모르는 부분은 솔직하게 인정해야했다.


[좀 보겠습니다.]


거절해도 좋을 거다. 마꾼에게 배운 배움도 엉망진창이고, 책과 어깨 너머로 배운 지식은 불완전하다. 만약, 롬이 포션이나 약을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면 지금쯤 다른 삶을 살고 있겠지. 헌데도 그는 앞으로 나섰다. 사람 한명의 목숨이란 건 앗을 때도 어렵지만, 살리기도 어렵다. 아니, 살리기가 더 어려웠다.


롬은 괜한 기대와 희망을 주진 않기로 했다. 알 수 있는 만큼만. 할 수 있는 만큼만.


엘리자는 그 옆에서 자리를 지켰다.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그 위에 한쪽 다리를 올리고 팔로 감싸 안는다. 그 위에 턱을 괴고 롬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가끔 그가 물어보면 답해주는 식으로 말했다. 나이가 어떻게 되시냐. 평소에 지병은 없으셨나. 평소 사는 환경이라든가.


그런 시시콜콜하고 중요한 걸 물어보면 알게 된다. 왜 동생이 껌벅 넘어갔는지 알만도 해서.


‘생긴 거 치곤 상냥한 편이네.’


작은 감상만이 남아서. 그런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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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도시 구경 24.05.27 10 1 16쪽
95 도시 구경 24.05.27 10 1 10쪽
94 산책 24.05.27 14 1 17쪽
93 산책 24.05.27 13 1 11쪽
92 궁전의 이방인 24.05.27 13 1 13쪽
91 궁전의 사람들 24.05.27 9 1 9쪽
90 마중 24.05.23 12 0 10쪽
89 마중 24.05.23 10 1 9쪽
88 배웅 24.05.22 13 1 18쪽
87 하찮은 내가 24.05.22 12 1 15쪽
86 하찮은 그대에게 24.05.22 12 1 16쪽
85 마녀의 부탁 24.05.22 12 1 8쪽
84 초대와 마녀 24.05.22 9 1 9쪽
83 잡담 24.05.22 13 1 9쪽
82 잡담 24.05.22 10 1 10쪽
81 불리는 자들 24.05.22 11 1 8쪽
80 부른다는 것 24.05.22 12 1 7쪽
79 방문자 24.05.22 10 1 12쪽
78 심고 뿌린 24.05.22 14 1 10쪽
77 남은 것들 24.05.22 10 1 7쪽
76 남은 것들 24.05.22 15 1 18쪽
75 쏟아냄. 24.05.22 12 1 9쪽
74 쏟아냄. 24.05.22 9 1 9쪽
73 잠시 24.05.22 12 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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