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게 도망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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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새
그림/삽화
피안새
작품등록일 :
2021.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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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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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7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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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불타는 것들

DUMMY

상공에서 본 상아도시의 한 구석에서 검은 구름이 피어올랐다. 그보다 아래에 있는 상아궁의 첨탑에서도 그런 게 보였다. 엘리자 바타니아는 아직 수리 중인 난간에 기대서 그런 걸 보았다.


“흠.”


그녀는 검은 구름을 보고 퍽 예감이 들었다. 어머니를 가뒀던 첨탑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계단에는 아직도 그을리고 황폐해진 냄새가 났다. 첨탑의 수리는 차차 진행되고 있어서 새로운 벽돌이나 회반죽들이 내려가는 층계에 쌓여있었다.


지상 층에 다다를 쯤에는 헐레벌떡 하인 하나가 올라오고 있었다.


“주, 주인님! 도시에서 폭발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미 봤느니라.”

“예, 경비병과 묵기사들은 먼저 나갔습니다. 주인님께서는 어찌 하실 런지요?”

“도시에 내려갈 것이야. 어서 말을 준비 하거라.”

“예!”


하인은 쌩하고 달려갔다. 혼자 남은 그녀는 퍽 안타까운 숨을 흘렸다. 위정자로서 다스리는 도시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썩 유쾌하진 않다. 그녀의 품 안에 들어온 것은 모두 애착이 있기 때문이다. 금세 싫증이 나더라도 흠집이 생기면 마음이 아프다.


그게 사람이든 물건이든 간에. 그리고 언젠가 돌려줄 것이라면 좋은 상태로 돌려주는 게 좋을 테니까.


허나, 그런 것 외에도 정말 안타까운 사실이 있었다. 그녀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한 벙어리를 떠올렸다.


“소녀가 썩 재밌는 구경을 놓쳤구나.”


그러면서 생각했다. 역시나 롬은 풀어놓는 쪽이 더 재미있는 것 같다고. 목줄을 채우는 것보다는 너른 땅에 풀어놓는 게 더 보기 좋았다.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낄 때 더 신나 보이니까. 정작 그 자유라는 방목의 울타리가 너무 넓은지도 모르고 있지만.


“많이 다치지나 않았으면 좋으련만.”


노파심과 함께 중얼거렸다. 엘리자는 상아궁의 마구간으로 나왔다. 거기에는 수행원들이 말에 안장을 올리고 있었다. 수행원들을 물리고 막 등자에 발 하나를 올리고 있을 때였다.


“로드!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묵기사가 하나 달려왔다. 엘리자는 말해보라는 듯 기다렸다. 그에 묵기사가 숨을 골랐다.


“둘째 마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뭐라?”

“방에 들어간 시녀가 발견했다고 합니다. 계속 토혈하고 계신다고...”


엘리자는 등자에서 발을 뗐다. 순간 허한 기분이 들었다. 자유롭지 않은 건 그녀도 마찬가지라서.


.

.

.


황금의 챔피언은 코마드라 불린다. 그 이름은 브리타니아에서 최강의 전사를 누구인가 논할 때 꼭 언급되곤 하는 이름이다. 혹자가 말했다. 과거와 현재를 아울러 이만큼 강대한 전사가 없었노라고. 이야기꾼이 말했다. 그 육체와 무력은 능히 전설을 남길 수 있으리라. 그와 동시대를 함께하는 무인들이 말했다. 벽을 느끼고 싶거든 그의 앞에 서면된다고.


능히 일체로 천을 상대하며, 기회만 있다면 용의 목을 꺾어버릴 테다. 그만한 무력을 가진 사내였다. 누군가는 안타깝다고 말했다. 지금은 저물어버린 용사의 시대가 있었다. 세상을 주름잡던 악이 물러갔으니 남은 자들이 서로의 정의를 내세우던 시대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흘러, 지금은 평화의 시대였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영웅의 핏줄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많은 말들이 있고 견해들이 있건만. 그 중에 그와 시대를 함께하는 위인이 말했다.


그러니까 브리타니아의 왕이 말했다. 적당히 좀 하라고. 그건 코마드를 가지고 떠드는 사람들에게 향하는 말이 아니었다. 왕이 챔피언을 불러다 꾸짖으면서 하는 말이었다.


코마드는 눈을 깜박였다. 목을 매만졌다. 갑자기 조인 망토에 뒷목이 뻐근했다. 그리고선 자신이 등을 대고 바닥에 누워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신을 잃었나? 아마도 그럴 거다. 그가 체감하는 시간이 조금 어긋나있었다.


쿠구구.


코마드는 폭발한 건물과 땅에서 불이 솟아난 걸 보았다. 주변에서 요란한 소리들과 고함이 잇따랐다.


“불, 불이야!”

“안에 사람 있는 거 아냐?”

“경비대에 알려! 아니, 자경단이나 길드에도 알려!”


땡땡!


저 멀리서 교회의 종소리가 울렸다. 신에게 기도드릴 때말고도 화재가 생기면 교회는 일을 하는 편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물 좀 길어 와라. 좀 구경하지 말고 나와라. 부서진 건물에 사람이 있다. 그 외 기타 등등.


코마드는 허리를 세웠다. 그러자 파괴의 현장이 더 잘 보였다. 그에 코마드는 입을 헤벌리고 말했다.


“음, 또 혼나겠는데?”


파괴의 규모가 상당히 컸다. 골목을 폭원지로 건물 서너 채가 반파 당했다. 불길은 그보다 넓게 번졌다. 코마드는 어떻게 할까 싶었다. 이래저래 시끄러운 왕의 잔소리와 주변의 눈치를 받는 건 사양이다. 그러면 하루가 피곤하다. 싸움보다 지친다.


적당히 자리를 뜨든가. 아니라면 뭐라도 하는 게 좋겠지. 어떻게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그의 옆을 홱 지나가는 인영이 있었다.


“따흐흑!”


요상한 소리에 코마드는 움찔했다. 뭔가 싶었는데 예의 검은 머리가 앞으로 튀어나가고 있었다. 우는지 웃는지 모를 표정으로 그랬다. 헐레벌떡 앞으로 뛰어나가다니 잠깐 동안 망설이는 듯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코마드는 그 표정이나 모습이 퍽 웃겼다. 아니, 조금 호감이라고 할까.


검은 머리는 이내 주변에서 물을 길어온 사람의 양동이를 뺏어들었다. 덩치도 큰 외국인이 그러고 있으니 행인이 깜짝 놀랐다. 그보다 더 놀란 건 검은머리가 자신의 몸에 물을 끼얹었다. 주변에 몰려든 구경꾼들은 검은 재앙이 뭘 하려나 싶었다.


머리부터 발끝가지 쫄딱 젖은 롬은 울 것 같은 눈으로 불이 난 건물을 바라보았다. 안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검은 재앙은 공성추가 되었다. 불구덩이의 잔해를 헤집고 진입하는 공성추.


“저, 저거!?”


불구덩이 안으로 사라진 검은 재앙을 보면서 사람들은 멍해졌다. 그리고 안에서 여러 차례 무너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잇따랐다. 외벽을 따라 난 숨구멍을 통해 불이 내뿜고 들이마시기를 반복했다.


코마드는 흥미진진해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상아도시는 상업적으로 부유한 곳이다. 건축물 높이는 그만큼 높아진다. 덕분에 자주 3층이나 4층 건물이 보기이도 한다. 그러니까 롬이 뛰어 들어간 건물은 3층이었다. 그리고 그 꼭대기 쪽의 창문에서 롬이 얼굴을 내밀고 소리쳤다.


“아오오오!”

‘씨팔!’


뒤에 후끈한 후광을 비추곤 양팔에 우는 꼬마 둘을 안고 있는 야만인이었다. 훗날 사람들이 말하길 그건 졸라 영웅적이기도 하고, 악마 같아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코마드는 그 모습에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그러고 보면 놈한테 넘어진 거였나. 그는 히죽였다. 그쯤에 롬은 건물에서 뛰어내릴까 말까했다. 롬은 괜찮을지 몰라도 아이들이 버틸지 의문이었다. 그때 코마드가 손을 흔들면서 소리쳤다.


“이봐 친구! 여기야! 여기로 애들 던져!”


큰 덩치에 고귀하게 생긴 코마드는 척 봐도 보통내기는 아니게 보였다.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롬은 그보다 깊게 고민했다. 저 미쳐버린 괴물에게 아이들을 던져도 될까 싶어서.


“던지라고!”

롬의 관자놀이에 사거리가 질끈 그어졌다. 그는 뒤로 물러났다. 도움닫기를 위한 공간의 확보. 롬은 기합을 내질렀다. 양팔에 안은 꼬마들을 제 품 안으로 끌어 모았다. 그리고선 제 자신을 던졌다.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눈을 크게 떴다. 우는 아이가 허우적대는 게 허공에 보이는 것 같았다.


찰나 모든 게 느린 영상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거기에서 코마드가 중얼거렸다.


“하, 참 말을 못 알아듣는 친군가?”


코마드는 롬이 떨어지는 지점에서 양팔을 내밀었다. 그에 이번에는 롬이 당황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코마드는 자신이 있었다. 그의 힘은 정말로 압도적이었으니까. 롬이 그걸 위협으로 간주하고 다리를 내질러도 마찬가지였다.


코마드는 재주 좋게도 롬의 오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날 롬은 처음으로 공주님 안기를 당해보았다.


.

.

.


아론은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그리고선 드러난 모습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냈다. 보면 화가 먼저 날 줄 알았는데, 정말로 어이가 없으면 사람은 허파가 새는 모양이었다.


아론은 눈이 점이 되어서 말했다.


“진짜 미친놈인가?”


허허. 그렇게 웃다가 한달음에 달려가서 탈진해서 앉아있는 롬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감정을 담았지만 아프지는 않게. 사실 걱정이 돼서 고개를 돌리려고 손을 뻗은 거였다. 그에 거의 검댕이가 되어버린 롬의 머리에서 후둑 하고 재들이 떨어졌다.


“야, 이 임마아! 미친놈아아아!”


그에 롬은 데굴하고 고개를 돌렸다. 탈진해서 옆으로 쓰러지다시피 기댄 롬은 땀범벅과 그을려져 거의 훈제 인간이었다. 그에 아론은 화를 내야할지 칭찬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됐다. 아론은 롬의 어깨를 붙잡고 조심스레 앉혔다.


그 옆에는 사람들이 구조당한 사람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 수가 여럿이다. 마찬가지로 롬의 옆에는 탈진한 사람들이 여럿이다. 롬의 구조 활동을 돕다가 나가떨어진 사람들이었다.


개중에는 멀쩡한 코마드도 있었다. 그는 새로 나타난 아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를 적으려는 롬의 손길이 있었다. 그보다 먼저 코마드가 말했다.


“이 친구가 아까부터 뭐라고 적었네만 뭐라 하는지 모르겠더군.”

“...?”


넌 뭐냐는 아론의 눈길이 있었다. 그에 코마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론의 시선이 어떻든 그는 자기 할 말을 했다.


“한번 싸워보자고 했는데 고개만 젓는 통에 알 수가 있어야지. 자네는 이 친구가 뭐라고 하는지 아나?”


그에 아론은 롬이 파르르 떨면서 적던 칠판을 뺏었다.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집에 보내줘... 살려줘. 꺼져. 미친놈아.]


두서없이 적어낸 그것을 보면서 아론은 눈을 질끈 감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그들의 일진은 충분히 사나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수 소리와 환호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말했다.


“검은 재앙! 멋있다! 다시 봤다!”

“불내고 사람 구하는 게 특기! 미친놈이지만 너무 좋아!”

“내 집! 이 나쁜 놈아!”


개중에는 롬이 쫓다가 실패한 꼬마도 있었다. 그 꼬마아이는 빽 하고 소리쳤다.


“바보, 멋있다!”


화륵.


그들의 배경에 아직도 잔불을 남긴 건물들이 있었다. 아직도 무척이나 뜨겁다. 무덥다. 여름이었다. 아니, 그냥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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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귀부인 24.06.07 12 1 12쪽
100 귀부인 24.06.07 11 1 11쪽
99 불타는 것들 24.06.07 10 1 11쪽
» 불타는 것들 24.06.07 10 1 11쪽
97 황금의 챔피언 24.06.07 13 1 15쪽
96 도시 구경 24.05.27 10 1 16쪽
95 도시 구경 24.05.27 10 1 10쪽
94 산책 24.05.27 14 1 17쪽
93 산책 24.05.27 13 1 11쪽
92 궁전의 이방인 24.05.27 13 1 13쪽
91 궁전의 사람들 24.05.27 9 1 9쪽
90 마중 24.05.23 12 0 10쪽
89 마중 24.05.23 10 1 9쪽
88 배웅 24.05.22 13 1 18쪽
87 하찮은 내가 24.05.22 12 1 15쪽
86 하찮은 그대에게 24.05.22 12 1 16쪽
85 마녀의 부탁 24.05.22 12 1 8쪽
84 초대와 마녀 24.05.22 9 1 9쪽
83 잡담 24.05.22 13 1 9쪽
82 잡담 24.05.22 10 1 10쪽
81 불리는 자들 24.05.22 11 1 8쪽
80 부른다는 것 24.05.22 12 1 7쪽
79 방문자 24.05.22 10 1 12쪽
78 심고 뿌린 24.05.22 14 1 10쪽
77 남은 것들 24.05.22 10 1 7쪽
76 남은 것들 24.05.22 15 1 18쪽
75 쏟아냄. 24.05.22 12 1 9쪽
74 쏟아냄. 24.05.22 9 1 9쪽
73 잠시 24.05.22 12 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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