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님의 놀이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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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괴
작품등록일 :
2021.12.15 21:27
최근연재일 :
2022.01.27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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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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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001화.

DUMMY

꽃피는 춘삼월春三月.

양력으로는 4월 중순의 어느 봄날 밤.

옥탑방 평상 위에서는 외로운 청춘 하나가 홀로 술을 마시며 신세를 한탄하는 중이었다.


“끄억. 야 이예나!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러냐? 씨벌. 여우같은 기집애. 세상에 믿을 연놈 하나 없다더니...”


첫째가 딸이면 6인조 다국적 아이돌을 시키려고 생각까지 했었는데... 그렇지만 사흘 전까지 천생연분이라고 믿었던 여자의 SNS에 올라온 사진이 남자에게는 참으로 씁쓸한 술안주였다.


‘...구미호 같은 년. 그래도 예쁘긴 하네.’


서로 호감이 있었던 썸녀인줄 알았던 이예나가 놀이동산에서 여우 머리띠를 하고 다정하게 남자친구와 찍어 올린 사진이었다. 참고로 사진 속의 남자도 현재 술을 마시는 남자가 잘 아는 이였다. 둘이 잘 어울린다고 응원한다고 했던 과의 동기 녀석이었으니까.


“끄억.”


남자는 씁쓸함을 술안주 삼아 또 한 잔의 소주를 삼켰다.


“크윽... 에이 씨. 오늘따라 술은 왜 이렇게 쓴 거야. 젠장. 사랑했다 야발년아.”


남자는 거칠게 화면을 꾹꾹 눌렀다.


뒤로 가기.

뒤로 가기.

뒤로 가기.


마치 시간을 뒤로 돌리고 싶은 심정으로 꾹꾹 뒤로 가기 버튼을 연타했다. 그렇게 SNS 앱에서 빠져나오고 나니 스마트폰의 바탕화면에서는 알록달록 아기자기한 아이콘이 눈치 없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나만의 놀이동산]


그건 바로 모바일 게임의 바로가기 아이콘.


“아... 이것도 지워야 하네. 젠장.”


놀이동산이 좋아서 게임마저도 놀이동산과 관련된 게임을 즐겨한다고 했던 이예나. 그녀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남자는 생전 안하던 모바일 게임까지 다운 받아서 현질까지 했었다.


그런데 SNG 장르는 평소의 취향과는 아주 먼 사이.


개인적으로 재미가 없던 게임으로라도 공감대를 만들어보려는 복학생의 가련한 몸부림은 고백도 하기 전에 좌절로 끝이 나고 말았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사실 천생연분은 남자의 일장춘몽 망상에 불과했을 따름이었다.


“크윽. 쓰다 써. 푸우. 에이 씨... 이럴 줄 알았으면 걍 랭크나 올렸지. 쉣! 좆도 재미없는 노잼 게임. 도대체 이딴 게임을 도대체 왜 하는 거야? 내가 당장 삭제한다. 끄윽.”


개돼지 게임에서의 탈출은 지능 순. 그래. 이제는 일장춘몽에서 깰 시간이었다.


[나만의 놀이동산 앱과 해당 앱에 관련된 위젯을 함께 삭제하시겠습니까?]


이번에도 헛물로 끝나버린 썸녀에 대한 미련과 함께 남자는 게임마저도 지우려고 했다.


[취소] [제거]


그런데 그의 손가락이 게임 삭제 버튼에 다가가는 동안에 옥탑방 위 밤하늘에 무언가 이변이 있었다. 아니, 있어보였다.


“...응? 끅. 왜 이렇게 밝지?”


아니, 저게 뭐야?

밤하늘을 뚫고 날아온 무언가가...


“으아악!”


불쌍한 복학생 한수호의 스마트폰에 충돌했고, 이어 스마트폰에서 시작한 푸른 기운이 오른손을 타고 온 몸을 집어 삼킨 것까지가 그의 생전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컴컴한 동굴 속.


덥수룩한 수염에 흙먼지가 가득 묻은 사내가 동굴 안으로 저벅저벅 인기척을 내며 걸어 들어왔다.


“레이시아 님, 윌튼입니다.”


동굴로 들어오는 발걸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기다리고 있던 여기사 레이시아가 조용하지만 다급한 어조로 답을 했다.


“네! 오셨군요?”


동굴 구석에 피워둔 모닥불 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기대감이 가득했다.


“죄송합니다. 사제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포션 역시 하나도 없었고요.”

“아...”


그리고 바로 실망감이 레이시아의 얼굴을 뒤덮었다.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조그만 마을이었잖아요. 그러면 말들은 있었습니까?”

“네. 분부하신 대로 말들을 구매해왔습니다. 비록 짐말들이긴 한데 이동에는 문제가 없을 거 같습니다. 마차에 연결하는 대로 바로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어디론가 이동하기에는 너무 늦은 저녁.


“후우. 고생하셨습니다. 일단 휴식하십시오. 내일 아침에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휴식을 명받은 사내는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저기... 레이시아 님, 도련님은 좀 어떠십니까?”


여기사의 옆, 모닥불과 좀 더 가까운 동굴 바닥에는 통통과 뚱뚱을 넘어서 고도비만인 소년이 누워있었다.


“다행히 조만간 깨어나실 것 같습니다. 일단 지금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비록 레이시아는 사제나 치료사가 아니긴 하지만, 기사도 일종의 신체에 관한 전문가. 그러니 레이시아의 판단도 충분히 믿을 만한 것이었다.


“후우... 다행입니다. 천만다행입니다.”


혹여 그 사이에 도련님이 잘못 되면 어쩔까 걱정했던 윌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그러실 겁니다. 윌튼 백인장. 걱정 말고 쉬러 가십시오. 그리고 다른 병사들에게는 내일 오전에 출발할 예정이라고 전해주십시오.”

“아 넵. 알겠습니다. 그러면 준비해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 그러면 나가보겠습니다.”


백인장 윌튼을 어서 쉬라고 돌려보낸 후 레이시아는 쓰러진 소년의 옆에 조심스레 엉덩이를 붙였다.


‘일단 베렌령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이동하도록 하자. 그때까지는 무사하시겠지. 그런데... 도대체 그 빛은 무엇이었지?’


금발의 여기사 레이시아는 사흘 전의 일을 떠올렸다.


어릴 적 불의의 사고로 오러홀이 깨지면서 방황하기 시작한 도련님.


결국 후계자 경쟁에서 밀려난 후에 가문의 본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외딴 북동부의 어촌마을 베렌령의 영주로 임명받고 가던 여정의 길.


안전한 관도를 벗어나자마자 등장한 갑작스런 몬스터 무리.


위기의 순간 도련님의 목걸이에서 터진 의문의 푸른빛과 그 후로 의식을 잃고 쓰러진 도련님.


다행히 몬스터를 몰아내고, 의식을 잃은 도련님을 황급히 근처의 동굴로 옮긴 후 노심초사 마음을 졸이며 불편한 야숙을 행한 것이 지난 사흘간의 일이었다.


‘후우... 분명 건강에는 문제가 없으신 것 같은데, 왜 깨어나시지 않는 걸까? 일단은 베렌성까지 모시고 이동하는 수밖에...’


과거 신마전쟁의 여파로 마계와 불안정하게 연결된 나스 대륙은 언제 어디에서 마계의 마물들이 소환될지 모르는 세상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노숙도 결코 안심할 수가 없는 일인 것이었다. 레이시아는 다시 한 번 더 속으로 한숨을 삼킨 후 도련님의 용태를 살폈다.


움찔움찔.


혹여 통증 때문인지 악몽을 꾸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계속해서 도련님 제이크 타나티안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밤새 도박장을 전전하고 매일 술을 퍼마셔 피폐하고 거칠어진 얼굴. 어릴 적 동글동글 해맑았던 얼굴을 떠올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이것만큼은 어릴 때랑 똑같네.’


다만 레이시아는 잠을 잘 때 끙끙거리며 악몽을 꾸던 모습을 떠올랐다.


레이시아 쥬시트는 베오린 타나티안 백작의 친우 쥬시트 남작의 외동딸. 다만 불의의 사고로 부모를 여읜 그녀를 타나티안 백작과 제이크의 생모 일레인은 가엽게 여겨 두 살 때부터 딸처럼 키웠고, 백작 부인 일레인이 제이크를 낳다가 사망한 후에 그녀는 베오린 백작의 배려로 같은 유모의 손에서 제이크와 친남매처럼 자랐었다. 귀족가에서는 드문 일이지만 제이크의 불면증으로 인해서 그녀가 기사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같은 침대를 쓸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


쓰윽.


레이시아는 제이크의 이마에 눌러 붙은 푸른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떼어주었다. 그렇다고 머리를 쓰다듬지는 않았다. 태어나자마자 친모를 잃고 살얼음 같은 백작 부인의 눈치를 보며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던 소년의 모습이 떠올라 안타깝긴 했지만, 아무 것도 몰랐던 어렸을 때라면 모를까. 이제는 훌쩍 어른이 되어버린 귀족가의 사내, 그것도 앞으로 모셔야 할 영주님의 머리를 마음대로 쓰다듬을 수는 없지 않는가.


“끄응.”


그렇지만 그때 또 제이크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앗!?’


제이크의 신음소리에 레이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손을 잡고 말았다. 검을 놓고 도박장의 골패와 술잔을 잡은 지는 한참이나 되었지만, 그래도 성인 남자의 손이라 어릴 적처럼 부드러울 순 없는 손. 레이시아는 다시 한 번 제이크가 낯설어졌다.


‘...그래도 그대로인 것도 또 있구나.’


다만 낯설음 속에서 또 하나의 익숙함을 그녀는 찾아내었다. 아니, 느낄 수가 있었다. 북부라 동굴 안도 추운 가운데 여전히 제이크의 손은 따스했다.


그녀가 타나티안 백작령을 떠나 있던 10여 년 간.


미인이었던 모친 일레인을 닮아 귀여웠던 10살 소년 제이크는 절로 눈이 찌푸려질 정도로 피폐해져 있었고, 반짝반짝 총명하던 눈동자도 짙은 안개가 낀 듯 흐릿하게 변해 있었다.


그렇지만 외모가 달라지고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제이크 타나티안이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지 않는가.


레이시아에게 제이크는 모셔야 할 영주님이기 이전에, 어린 시절을 함께 한 남동생 같은 존재였다. 물론 친남매는 아니고 지금은 그렇게 말을 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마음으로는 항상 가족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것이 매일 술에 취해 도박장을 전전하는 백작가의 망나니 공자이고, 이제는 후계에서 완전히 멀어져 궁벽한 오지로 쫓겨나게 된 신세라고 하더라도, 어쨌거나 레이시아에게 제이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주기로 약속하고 다짐한 존재였다.


꼬옥.


레이시아의 하얀 손이 조심스레 제이크의 거친 손을 감싸 쥐었다.


움찔.


혹시 어서 깨어나라는 레이시아의 따스하고 간절한 마음이 전해진 덕분일까?


아델린 왕국 북서부에 영지를 둔 타나티안 백작가의 장남 제이크 타나티안.


한때는 영지를 떠나 왕국 내에서 손꼽힐 만한 재능을 갖춘 미래의 검술 천재였지만, 오러홀이 망가지면서 한 순간에 몰락하고 타락해버린 타나티안령의 망나니 공자님.


결국 배다른 이복형제들에게 후계자 자리를 내어주고 영지를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던 여정 중에 불의의 사건으로 의식을 잃었던 그는 불행 중 다행으로 사흘 만에 눈을 뜨게 되었다.


“...끄응.”


동굴 안에 조심스럽게 울려 퍼진 신음 소리.


“제이, 도, 도련님?!”


타나티안령의 기사들 중에 유일하게 제이크 타나티안을 따라온 여기사 레이시아는 황급히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를 불렀다.



* * *



한수호는 눈을 끔뻑거렸다.


‘...뭐지?’


처음 보는 낯선 미녀가... 아니, 방금 전까지 꿈속에서 계속 보던 여자가 여전히 출연 중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으... 뭐야. 아직 꿈인가? 왁! 깜짝이야!’


심지어 너무 예뻐서 깜짝 놀랄 정도의 여자였다.


‘와... 꿈이 갈수록 리얼하네. 이야 쓰바. 보면 볼수록 진짜 겁나 예쁘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아~ 근데 여긴 왜 이렇게 어두워?’


일단 어두워서 초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과,


‘뭐지? 아니, 큭. 왜 이렇게 어지럽지? 아직 술이 안 깼나? 악! 진짜 꿈이 뭐 이래?’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구역질이 날 것 같다는 것과 계속 꿈을 꾸는 동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서 답답하다는 점이었다.


‘...어라? 이제 몸이 움직여지네?’


그런데 그 중에 다행히 하나가 해소되었다.


‘뭐지? 와 씨, 다행이다. 개답답했었는데... 어? 잠깐만? 그러면 이제 꿈에서 깨려나?’


자기가 가위에 눌렸다고 생각했던 한수호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 눈앞의 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이름이 레이시아라고 했었지?’


꿈에서 깬다는 말은 여기 꿈속에서 소꿉친구이자 누나였던 초미녀와도 작별이라는 말이었다. 보통 꿈에서 깨면 기억은 금방 잊혀지기 마련이니까...


‘레이시아짱! 왜 하필 지금 깨냐고? 아니! 내가 언제 또 이런 꿈을 꾸겠냐? 좀만 더 꾸자. 어? 쓰바! 아! 그래. 깨기 전에...’


지금까지 몸을 움직이지 못해서 답답해 미칠 것 같았던 한수호는 현실이라면 엄두도 못 낼 욕망의 표출을 시도했다.


‘한, 한 번만!’


저 훌륭한 미드를 만져보고 싶다!


그러니까 남자의 본능에 충실하기로 한 것이었다. 물론 이게 현실에서는 범죄인 성추행이란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다만 꿈이지 않는가? 누가 다른 사람이 보는 것도 아니고, 꿈에서 추행당한 여자가 대한민국 경찰이나 검찰에게 고발할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고 꿈속의 사람이 진짜 사람도 아니니까...


‘으흐흐.’


밉살스런 겨울 여우처럼 생긴 이예나의 것보다 최소 세 배는 될 법한 풍요의 상징에 한수호는 힘차게 손을 내뻗었다.


“끄으읏! 됐...?”


부드럽ㄱ... 어라? 이게 왜 이렇게 딱딱하지? 간절히 바라고 기대했던 감촉이 아니었기에 한수호는 멍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뭐, 뭐지? 아 씨발. 역시 꿈이야? 젠장! 슴가가 이렇게 딱딱할 리가 없잖아! 악! 내 로망 돌려줘!!!”


나름 젖 먹던 힘과 필사의 의지로 손을 내밀었던 한수호는 허탈함과 배신감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 * *



타나티안령에서는 공공연하게 얼음꽃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냉철한 여기사 레이시아는 매우 당황했다.


“도, 도련... 님?”


이대로 꿈에서 깨기 전에 여신(?)을 한 번이라도 만져보고 깨려는 엉큼하지만 다급한 필사적인 손짓에 그만 무방비로 심장을 내어준 레이시아는 또 한 번 멈칫 굳고 말았다.


만지작 만지작.


나름 두터운 가죽 갑옷이 있긴 하지만, 여자에게는 예민한 가슴인데 다른 누군가의 손이 닿아있음을 모를 수는 없지 않는가.


<뭐, 뭐지? 아 씨발. 역시 꿈이야? 젠장! 슴가가 이렇게 딱딱할 리가 없잖아! 악! 내 로망 돌려줘!!!>


미드가 바로 코앞인데 제대로 만질 수 없는 억울함에 제이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욕을 하는 동안.


“도, 도련님!”


자신의 흉부 갑옷 위에 닿은 발칙한 도련님의 손을 황급히 잡으며, 레이시아는 다시금 목소리를 높여 제이크를 불렀다. 어쩐지 불만을 넘어 원망가득 한 제이크의 눈이 자신을 부르는 레이시아의 얼굴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멍하게 그녀의 말을 따라했다.


“...도련님?”


한수호에게는 꿈 속 언어. 다만 깨어난 제이크는 자연스레 그 말을 따라할 수가 있었다.


“...도련님이라고?”


제이크는 혼란에 가득 찬 목소리였지만, 레이시아는 조금 안도했다. 이제야 제대로 된 언어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제야 제이크가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아... 역시 조금 전에는 아직 정신을 제대로 못 차렸던 거였어.’


갑옷 위지만 자신의 가슴을 만지려던 손길에 레이시아가 크게 놀라지는 않은 이유였다.


“도련님!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어디 아프신 데 없으신가요?”


그 말이 일종의 신호탄이 되었을까?


“크윽.”


제이크는 깨질 것 같은 두통에 손을 빼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제이크의 머릿속에 다시금 수많은 기억들이 떠올랐고, 그 충격으로 제이크는 다시금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도, 도련님?!”


레이시아는 또 한 번 당황했다.


‘설마 가슴을 만지게 해줬어야 하나...?’


이런 어이없는 생각을 할 정도로 당황한 그녀는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윌튼을 불렀다.


“도련님?! 윌튼 백인장! 윌튼 백인장!”


그리고 타나티안 백작가의 망나니 도련님에서 이제는 베렌 남작이 된 제이크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짐말 두 마리가 이끄는 마차가 무사히 넘어 목적지인 어촌 마을 베렌령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 * *



‘그러니까... 그것들이 모두 진짜라고?’


짝사랑에 헛물만 켜다가 갑자기 푸른빛에 집어삼켜져 버린 불쌍하고 한심한 복학생이었던 나는 지금 낯선 세상의 침대 안에서 벌벌 떨고 있는 중이었다.


“...꿈이지? 꿈이어야 하는데? 젠장... 왜 꿈이 아니냐고!”


에이, 진짜 아직도 꿈이지 않을까? 나는 아직도 좀처럼 지금의 현실을 믿을 수가 없다.


‘술을 마시다가, 게임을 지우려 하는 순간에, 뭔가 번쩍했는데... 판타지 세상이라고? 와... 소설에서나 보던 일이 내게도... 젠장, 트럭에 치인 것도 아니고 옥상에서 뛰어 내린 것도 아닌데 갑자기 무슨... 대박!’


물론 전생을 깨달은 것도 아니고 대마법사나 드래곤에게 소환을 당한 것도 아니었다. 신과 같은 존재를 만난 적도 없었고, 지구에서 읽었던 소설이나 게임과도 무관한 세상이었다. 그렇기에 100번 양보해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렇지만 너그럽게 101번 양보해서 흔한 소설 속 차원이동이라고 납득해보기로 했다.


‘이세계 주인공은 나야 나. 나야... 야아악! 왜! 왜 하필 그게 나냐고?!’


비록 순탄한 납득과정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에휴. 뭐 이렇게 된 이상 어쩌겠어. 그냥 살아야지.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잘 살아봐야지.’


물론 불만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아! 그런데 왜 하필 이딴 놈한테 빙의한 거냐고?!’


오러홀이 깨져버려 남자의 로망인 소드마스터의 길은 영영 막혀버린 망가진 폐인의 몸. 백작가의 장남이지만 후계자 경쟁에서는 광탈하고, 하프엘프 친모는 출생과 동시에 사별하여 기댈 외가도 없는 처지. 그래도 꼴에 영주라고 하나 실제 영지 주민은 1,000명도 채 되지 않는 조그맣고 쇠락한 어촌 마을.


‘...가장 가까운 도시가 말로 사나흘을 달려야 한다고?’


심지어 교통도 불편한 세상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가 바로 이 몸 제이크 타나티안이 받게 된 베렌령의 실체였으니 사실상은 유배라고 봐야했다.


‘에이 씨... 이렇게 된 이상 잘 먹고 잘 살 생각부터 해야겠네. 그래. 여기는 나름 안전한 동네잖아. 이 동네는 몬스터가 문제지 전쟁 걱정도 없다니까. 후우... 그래도 노예나 일반 평민 아닌 것만 해도 어디야.’


그래도 억지로 긍정력을 짜내어서 앞으로 살게 될 제이크 타나티안이라는 신분에 대해서 나름 만족하기로 했다.


백작가의 자식이었고 지금은 남작.


대한민국에서는 끽해봐야 9급 공무원 스타트였을 텐데, 아무리 말단이라도 귀족이지 않겠는가. 민주주의 만세라고 하기에는 말년 병장으로 적잖지 않게 권력의 맛을 봤었기에 군대 같은 개념이라 생각하면 신분제에 딱히 거부감이 없었다. 어쩌면 제이크의 기억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내가 살아온 대한민국도 사실상 돈으로 신분이 정해진 세상이 아니었던가.


‘그래도 남작이잖아. 세습 귀족 중에는 꼴찌라고 해도 그래도 영지 귀족이잖아. 어? 왕족이나 공작쯤 되면 도리어 권력 싸움한다고 피곤할 수 있어. 어디 큰 도시의 영주는 편하냐? 하루 종일 집무에 시달려야 하는데... 어? 뭐 하러 피곤하게 그런 거 하냐. 그냥 소소하게 여기서 남작으로 대충 즐기고 살자.’


누군가는 이런 걸 그릇이 작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백작가의 후계자 경쟁에서 밀려난 허울뿐인 남작이라는 사실에도 나름 높은 만족도를 가진 상태였다. 골치 아프게 큰 영지의 영주자리보다는 책임 없이 적당한 귀족이 마음이 더 편했다. 무엇보다도 지금 몸의 원주인인 제이크의 기억을 통해 볼 때 계속해서 예쁘다고 생각했던 레이시아의 실물은 상상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22세, 여, 레이시아 쥬시트.


금발에 가까운 고운 갈색의 단발머리.

주먹만 한 얼굴.

서양 미녀 특유의 깊고 푸른 눈.

오뚝한 콧날 아래에 요염한 붉은 입술.

지구에서 무용녀, 체대녀, 요가녀, 헬스녀 모두 합쳐도 따라오지 못하는 넘사벽의 비율과 탄탄함을 자랑하는 건강한 몸매의 여기사.


‘하악하악... 비록 갑옷 너머였지만 상당했지?’


심지어 그녀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미드 라인과 바텀 라인에 축복까지 받은 엄친, 아니, 아빠 친구의 딸이었다. 이렇게 황금 스펙을 자랑하는 꿈속의 이상형 같은 여자가 소꿉친구이자 호위 기사란 말이었으니...


‘...레이시아 눈나. 헤으응.’


물론 지구에서 나는 22살의 레이시아보다야 연상이었지만, 여기 몸 주인인 제이크는 20살이었으니까... 그래. 나는 오늘부터 그녀를 누나라고 부르기로 결심했다.


“하악하악. 누나래. 누나... 눈, 눈나.”


실제 나보다 어린 여자를 누나라고 부르는 것에 있어서 일체의 부끄러움은 없다. 부끄러움 그게 뭔데? 오직 정수리부터 아랫도리를 지나 엄지발가락 끝까지 짜릿한 전율만이 있었을 뿐이다.


잠시 후.


여기가 지구인지 이세계인지도 구분 못했던 짐승 같은 성욕에서 벗어나 다시금 현실을 자각한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라... 문제는 그건데...”


역시 지구든 이세계든 결국 본질적인 문제는 같았다.

그건 바로 생계유지의 문제.

첫 눈에 반해버린 여신 같은 여기사 레이시아와 잘 먹고 잘 살려면, 베렌령의 자체 세금이나 가문에서 받아온 지원금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몬스터들까지 막으려면... 에휴. 어디서든 돈이 문제구나. 젠장, 그래도 지구의 지식으로 어떻게 돈을 벌수는 있겠지?’


나는 이불을 박차고 긍정적으로 다짐했다.


“아자! 아자! 할 수 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과거도 깨끗이 잊기로 했다.


‘엄마, 아부지... 이 불효자는 여기서 잘 먹고 잘 살겠습니다. 그러니 두 분은 행복하세요. 죄송합니다. 어차피 두 분 연금 잘 나오실 테니 노후 걱정은 않겠습니다. 죄송해요. 크흑.’


안 그래도 사고로 상태도 안 좋은데 술에 찌들어 더욱 망가진 몸에 며칠 동안 의식을 잃었을 정도로 큰일을 겪고 난 이후라 몸 상태는 영 말이 아니었다. 덕분에 큰절을 두 번 올리는데도 푸들푸들 힘겹게 난리를 쳐야만 했다.


“에고 죽겠네. 하아... 응? 잠깐만... 두 번은 아닌가?”


에잇,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해?


다만 결심을 끝마치고 나니 나는 이제 산적한 또 하나의 문제를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래. 그러면... 이제 이것부터 해결해야지.”


참고로 내가 제이크의 몸으로 전생을 깨달은 것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던 계기이기도 한 이것은...


[나만의 놀이동산 앱과 해당 앱에 관련된 위젯을 함께 삭제하시겠습니까?]


바로 한글로 된 메시지.


[취소] [제거]


아무리 눈을 비벼 봐도 여전히 허공에는 익숙한 한글이 아른거리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작가의말

오랜만에 글을 씁니다.

그저 가볍게 읽을 정도만 되어도 좋겠습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완결낼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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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004화. +1 21.12.23 125 1 18쪽
3 003화. +1 21.12.22 136 3 18쪽
2 002화. 21.12.21 162 4 18쪽
» 001화. +5 21.12.20 293 16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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