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지 못한 왕은 주나라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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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시계
작품등록일 :
2022.10.28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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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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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4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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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3화 맞는 않는 자리

DUMMY

503화 맞는 않는 자리


양(涼)나라 시(柴)왕.


이것이 현재 손전정의 지위이자 그가 표명한 나라며 왕작이었다.


“시(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라면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여겼다만.”


그리고 그 의미는 감추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가림이 없이 드러나 있다고 하는 게 더 옳았으니, 손세서 역시 그 의미 자체는 알고 있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라 그렇습니다.”

“뜻은 깊이 새기는 것이 마땅하다.”


양(涼)이라는 국명은 한 번도 천하를 쥔 적이 없는, 아니 조금 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천하 중심에 발도 제대로 붙인 역사가 없는 이름이었다.


또한 왕으로서 불릴 칭호 또한 같은 궤에서 그는 시(柴)라는 글자를 골랐다.


송나라 조씨에게 양위하고 남송의 최후까지 같이 했던 시씨의 글자를 말이다.


“우리는, 손가는 명나라의 신하다. 비록 새로이 왕작을 받아서 후에는 새 나라의 시조가 될 것이나 근본을 잊고 싶지는 않다.”

“그 뜻은 매우 훌륭하며 존경하기 마지 않습니다.”


국명이며 왕작을 이렇게 받은 일에 대해서는 솔직히 상관없었다.


그러나 조금 더 지나고 보니 손세서는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건 후일에 반드시 족쇄가 될 것입니다.”

“족쇄?”


아비가 묻는 말에 손세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드높여 무언가를 찾을 때는 그것을 갈구하는 때입니다. 그리고 갈구한다고 함은 지금은 없거나 부족함을 뜻하지요.”

“나중에 충성을 그저 외치기만 할 것을 걱정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양나라도 좋고 시왕도 좋다.


천자라는 위명은 생각하여 본 적도 없는 손세서다.


아니, 그건 고사하고 이런 왕작조차 생각지 않았으니 그가 보기에 이 일은 돌연 주어진 어색한 옷에 불과했다.


한편으로는 입지 않을 수 없는 옷이기도 하니, 손세서는 아마 아버지인 손전정은 물론이고 그 역시 그것에서 만족하여 일생을 보내리라고 여겼다.


이제 전투가 잠시 멎고 여유가 생기니 슬그머니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피어오리기 시작했다.


후일이나 후대라는 단어를 달고서 말이다.


“뿐만 아니라 야욕을 가진 후손이 달리 생각하여 저버리면 어떻겠습니까. 혹은 야욕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명칭을 남경에서도 눈여겨 볼 것이니 나중에 과한 일을 요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괜한 걱정이라고 일축하고 싶었지만 당장 손전정 본인부터가 정쟁에서 밀려서 한직을 떠돌다가 급한 위기에 다시 발탁되어 이곳까지 이르렀다.


본인의 인생부터가 이러할진대 후일의 일을 속단하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일이니 손전정은 아들의 우려에 쉬이 이렇다 저렇다 대답할 수 없었다.


“······당장은 이것이 최선이다.”

“정말 그렇습니까? 후일의 책임을 면하기 위함은 아니십니까?”


손세서가 묻는 말에 손전정은 잠시 고민하더니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앞이니 솔직하게 말하마. 나는 두렵다. 이 끝이 어떻게 될지, 명나라는 과연 다시 대명이 될지, 나는 무어라 사람들이 평할지 모두가 다 두렵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르는 것들 투성이며 단언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니 손세서 역시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런 손세서의 귀에 손전정이 말이 다시금 들렸다.


“족쇄가 된다면 후손에게는 미안한 일이다. 아니, 당장 세대가 지나 네가 다스릴 무렵에 나타날 일일 수도 있다. 허나 미안함은 별개로 돌릴 생각은 없으니, 이것이 내가 고른 길이다.”

“그러면 이것만 묻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아버님께 더는 어떠한 원망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이 일로는 말입니다.”


다소 무례하다고 언동이나 이해하지 못할 일이 아니니 손전정은 아들의 말에 화를 내기보다는 안쓰러움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라.”

“그렇게 정한 것,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후회하느냐는 물음에 손전정은 제가 정한 일들을 하나하나 반추해 보았다.


이윽고 모든 걸 돌아본 그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하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사는 방법이다. 새 나라의 시조보다는 명나라의 충신, 그것이 바라는 모습이다.”

“알겠습니다. 저 역시 뜻에 따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반드시 이 말을 후손에게 남기고자 하니, 부디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남기고자 하는 말이 있다는 말에 손전정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리 말하는 것을 들으니 자신이 바라는 것과 방향성이 다른 것이 분명한데, 그러한 말들은 적지 않아 쉬이 짐작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태로 그저 그러라고 하기는 어려우니 손전정의 입은 질문을 담아냈다.


“무슨 말을 남길 생각이냐?”

“조씨가 모두 죽은 후라면 시씨도 그 자리를 찾고자 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들은 순간 여러 말들이 사그라들며 하나만 남으니, 손전정은 마저 듣지 않았음에도 손세서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얼추 짐작이 갔다.


그러나 어렴풋이 아는 것과 직접 듣는 것은 다르니 그는 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확실하게 듣고자 했다.


“천자를 넘보고자 하느냐? 네가 한 말은 있지 않던 일이며 그저 가정에 불과하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리고 저는 천자를 넘볼 생각은 없습니다.”


대답이 돌아왔으나 그 말에 담긴 미미한 열망은 작은 게 아니라 거대한 열망의 편린에 불과하다는 게 손전정에게는 보였다.


그것을 부정하고 싶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고 여기나 손전정은 차마 그러한 말을 입에 담지 못했다.


그를 대신하여 나온 것은 지금까지 서로에게 그러했듯 묻는 말이었다.


“······언제부터더냐.”

“아마도 양나라와 시왕이라는 명칭이 정식으로 결정되었을 무렵이라고 생각합니다.”

“허.”


숨기지 않고 이르는 말에 손전정은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정녕 그러하다면 손세서가 이른 말, 족쇄가 될 것이라는 말은 후대로 가기도 전에 사실이자 현실이 되었다는 것이니 그는 어두운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모르는 일이다.”


짧지만 깊은 고민 끝에 손전정의 입에서 나온 말은 힘없는 항변이었다.


그에 손세서는 천천히 입을 열어서 수긍했다.


“예, 모르는 일이지요. 그렇지만 생각은 변화가 없으니, 여기서는 구태여 강하고 직설적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이후에 남길 말을 말입니다.”

“······.”


듣고자 하는 대답은 없으나 시선은 대답을 요구하니 그 시선에 따라 손세서는 각오를 다지고 말을 이었다.


“주씨가 모두 죽은 후에 라면 좋다.”


예상은 하였으나 생각보다 적나라한 말에 손전정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감았다.


그렇게 스스로 말없이 감정을 다스리며 생각에 골몰하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손전정은 천천히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만의 이야기다. 그리고 내가 죽은 후의 이야기다.”


이렇게 말한 손전정은 더 논할 것이 없다고 하듯 손을 저었다.


“밤이 너무 늦었구나. 환송하는 일이 남았으니 일찍 쉬거라.”

“예, 전하.”


손세서가 공적인 태도를 취하고 물러나니 홀로 남은 손전정은 그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보고 있던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속으로 중얼거렸다.


“후우.”

‘맞지 않는 자리란 참으로 버겁고 무겁구나. 누가 내 이런 기분을 알아줄까.’



***



같은 시각 성도.


손전정은 알지 못하였으나 그와 비슷한 고민을 품은 이가 달밤 아래에 홀로 누각에 앉아 술잔을 매만지고 있었다.


“전하, 여기에 계셨습니까?”


자신을 찾는 소리에 고민하는 이, 전 사천 총독이자 현 대리국왕 임경업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대학사. 밤이 늦었는데 어인 일이시오?”


임경업이 묻는 말에 대리국 내각 대학사 자리에 앉은 송헌책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전령이 왔습니다. 순나라와 정왕은 책봉을 마쳤습니다. 이제 책봉사들은 장안으로 향했으니, 아마도 오래지 않아 이리로 올 것입니다.”


책봉사가 올 거라는 말에 임경업은 이렇다저렇다 말하지 않고 술잔을 기울였다.


그렇게 세 번 정도 잔을 비워낸 후에야 임경업의 입이 열렸다.


“대학사, 아니 선생.”

“예, 대인.”


호칭을 지금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옛것을 서로 입에 담으니 임경업은 한결 마음이 풀리는 걸 느끼며 미미하게 웃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아니면 술기운 때문일까.


이어지는 임경업의 말은 제법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나는 본디 조선 출신으로, 그곳에서 부윤이었습니다.”

“예.”

“그 시절, 그리고 이후에도 나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여 때때로 더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건 자리를 가리지 않았지요. 명나라행 또한 그러한 면모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임경업은 이렇게 말하며 옛일을, 조선에서 임금과 대면하여 말을 나누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세월이 제법 흘러 오래전이라는 말이 어울리게 되었지만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오간 말이며 당시 상황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을 보던 평안도 병마절도사 유림의 얼굴도 아직 생각하고자 하면 또렷하게 기억할 정도로 말이다.


-나는 명이나 청의 제후이기 전에 조선의 임금이다.


그 가운데 지금 가장 강렬하게 그를 때리는 것은 이 말이니, 임경업은 스스로를 조소했다.


‘달라진 것은 없거늘.’


달라진 것은 없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두 가지 장면이 임경업의 뇌리를 채웠다.


-중화의 중심이 쓰러져서 얻은 번영과 안정이라니, 고을 하나가 무사하고 풍족하다 하여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재해나 사고를 모른 척함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머리가 잘리면 죽으나 팔다리가 잘리면 처치에 따라 목숨을 부지합니다.


전자는 조선에서 임금 앞에서 말한 것이오, 후자는 명나라에서 황제에게 말한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임경업의 생각은 여전하다.


그는 지금도 그때 한 말들을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마치 그를 비웃듯 흘러갔다.


조선은 혼란에서 안정을 얻는 정도가 아니라 혼란을 멈출 힘을 품게 되었다.


그가 살리고자 했던 머리는 이미 잘렸으나 명나라는 여전히 살아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


믿음은 여전하니 의심은 없으나 뻔히 보이는 현실을 부정할 정도로 임경업은 몰염치하지 않았다.


하여 그는 자연히 의문을 품게 되었다.


과연 임경업이라는 사람이 전에 제대로 사물을 구별하여 보았는지 말이다.


“나는 천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명의 안정과 그 주변으로 향하는 왕화라고 여겼습니다.”

“정론이군요.”

“정론이지요. 하여 자를 것과 자르지 말 것을 구분하였는데, 이제 보니 그 구분이 틀렸던 모양입니다.”


구분이 틀렸다고 말한 임경업은 한탄하듯 말을 이었다.


“우스운 일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옛 생각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니, 결국 잘못된 것은 눈이며 머리라고 하겠습니다.”


생각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그렇다면 무언가는 잘못된 것이 분명하니, 임경업은 그것을 제가 내렸던 판단의 근간에서 찾고자 했다.


“머리가 북경이며 황상이라고 여겨 살리고자 했습니다. 다른 곳은 손발이라고 여겼지요. 물론 살릴 수 있다면 살리고자 했습니다. 헌데 이제 보니 살린 곳이 손발이나 손발이 아니고, 살리지 못한 곳은 머리인 줄 알았으나 머리가 아니었습니다.”


임경업은 이렇게 말하고는 술잔을 매만지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픈 사람이 의원에게 갔는데 의원이 아픈 팔은 보지도 않고 애꿎은 다리만 매만지고 있다면 그건 돌팔이라는 말이 어울리겠지요. 나는 내가 그러한 어리석고 부족한 사람이라고, 돌팔이와 다름이 없다고 여깁니다.”


이 말을 한 후에 임경업은 분봉 이야기가 나온 이래 계속 품고 있던 걱정을 입 밖으로 냈다.


“그런 놈이 번국의 왕이라니. 어울리지 않습니다. 맞지 않아요.”


작가의말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바얀티무르님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후원하여 주신 기대에 응해 더욱 좋은 글을 쓰도록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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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 511화 민감한 일 +2 24.03.03 191 14 12쪽
511 510화 노인의 일 +3 24.03.02 198 18 13쪽
510 509화 고귀한 이름 +4 24.03.01 175 16 13쪽
509 508화 부모의 마음 +3 24.02.29 173 16 12쪽
508 507화 파멸이 기다린다고 하여도 +5 24.02.28 186 16 15쪽
507 506화 정사와 부사 +4 24.02.27 183 18 14쪽
506 505화 또 다른 자신 +1 24.02.26 180 14 12쪽
505 504화 천하의 사지(四肢) +3 24.02.25 186 19 15쪽
» 503화 맞는 않는 자리 +2 24.02.24 177 16 12쪽
503 502화 시왕 +2 24.02.23 182 13 14쪽
502 501화 불변 +4 24.02.22 179 17 13쪽
501 500화 살아있는 말 +4 24.02.21 183 22 13쪽
500 499화 삼국분봉 +7 24.02.20 202 15 12쪽
499 498화 귀국한담 +3 24.02.19 185 16 13쪽
498 497화 서방견문 +6 24.02.18 195 16 13쪽
497 496화 유종의 미 +1 24.02.17 190 15 13쪽
496 495화 불빛이 하나라면 아무리 작아도 중요하다 +2 24.02.16 194 15 12쪽
495 494화 포기할 수 없는 일 +2 24.02.15 208 14 12쪽
494 493화 여기에 조선이 있다 +4 24.02.14 230 17 15쪽
493 492화 경험 +3 24.02.13 191 13 13쪽
492 491화 충과 효는 일방향이 아니다 +4 24.02.12 208 15 15쪽
491 490화 예외는 없다 +2 24.02.11 201 14 14쪽
490 489화 고래의 움직임 +1 24.02.10 204 13 12쪽
489 488화 대신할 사람 +2 24.02.09 200 13 14쪽
488 487화 적임자 +3 24.02.08 208 13 13쪽
487 486화 바다를 향하여 +3 24.02.07 199 15 13쪽
486 485화 경쟁자 +4 24.02.06 198 14 12쪽
485 484화 정화의 꿈 +2 24.02.05 191 19 14쪽
484 483화 풍요로운 땅 24.02.04 207 14 14쪽
483 482화 산둥 아문 +1 24.02.03 210 1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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