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바다를 향한다
247화 바다를 향한다
보국친왕 아이신기오로 예부슈.
이 말은 예부슈를 표현하는 말임과 동시에 그에게 있어 가장 본질적인 것을 역순으로 늘어놓은 말이기도 했다.
보국친왕이기 전에 아이신기오로이며, 아이신기오로 이기 전에 그는 예부슈라는 개인이다.
이는 예부슈가 아무리 그 겉을 꾸미고 친왕다움을 드러낸다고 하여도 그 본질은 만주족이며, 또한 어린아이라는 말이었다.
예부슈는 북경도 본 적이 없고 장성도 본 적이 없으며 산해관을 비롯한 명나라 북방 방어선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어린아이기에 주변에 있는 어른들이 하는 말들과 바라는 일들을 가감 없이 받아들였고, 그로 인해 그 역시 풍족한 중원과 그곳으로 가는 거대한 성들이며 장성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예부슈는 눈앞에 있는 것들을 보며 어쩌면 이것이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었다.
“굉장하구나.”
“대단히 큽니다. 명나라는 물론이고 대청에서도 보기 드물 겁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아끼는 상인 강상청이 다소 아첨을 담아서 하는 말에 예부슈는 눈을 빛내며 다시금 이 매혹적인 물체를 살폈다.
거대하며 단단하다.
처음에 느낀 것이나 여전한 감상이며 동시에 점점 커져가는 감상이기도 했다.
“이곳에 오길 잘한 거 같다.”
나직이 중얼거린 예부슈는 제물포에 들어온 후에 본 것들을 떠올렸다.
제물포를 관리한다고 하던 조선 사람 윤휴를 만났고, 이어서 일본 사람 야규 미츠요시를 만났다.
그리고 제물포 거리를 보았는데 그 거리는 실로 별천지라 할 수 있었다.
머리색이 다르며, 피부색이 다르고, 얼굴 생김새도 다르다.
거리는 조선이되 그 오가는 사람들은 조선 사람이 아니고, 먹고 마시는 것 역시 그 용기는 조선 것으로 보이나 가만히 살피면 조선 음식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여기에 더해 어떤 이들은 조선에서 쓰는 병이나 주발이 아니라 저들이 쓰는 나라에서 가져온 것인지 다소 독특한 용기를 사용하는 게 보인다.
그것만으로도 올 만하였다고 여기기도 잠시, 근처 언덕에 올라 항구를 본 예부슈는 그 후로 감탄을 금치 못하고 눈을 떼지 못했다.
항구에 즐비하게 늘어선 나무 거성, 바다를 누비는 거성들을 본 순간 예부슈는 그 마음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배라는 건 참으로 멋지구나. 저런 게 정녕 움직인다니, 실로 놀랍다.”
감탄하여 중얼거리니 그 못 믿는 마음을 불식해주겠다고 하듯 멀리서 배들이 이쪽을 향해 오는 것이 보였다.
유려하게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모습을 본 예부슈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순간 아쉬운 얼굴이 되었다.
“그래도 저것이 진짜 성에는 비하지 못하겠지. 그저 크고 단단할 뿐, 적을 치고자 하면 무엇으로 싸운단 말이냐?”
“다가가 배를 넘어가기도 하고 멀리서 활이나 조총을 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역시 가장 강하며 대단한 것은 화포지요.”
예부슈가 중얼거리는 말에 안내역으로 이들과 동행하던 벨테브레이가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 말에 예부슈는 흥미를 드러내며 물었다.
“박연이라고 했지. 그것은 그대의 살던 곳에서 하는 일인가, 아니면 조선에서 그리하는 것인가?”
“양쪽 다 방법에 차이는 있지만 이것이 주류라 알고 있습니다.”
“화포라. 화포를 쏜단 말이지.”
그 기대하며 바라는 눈빛이 실망하기 전에 비해 한층 커지니 벨테브레이는 다소 찝찝함을 느꼈다.
그러나 이내에 그 기분을 털어낸 벨테브레이는 웃으며 말을 건넸다.
“친왕 전하, 이곳에서 조금 더 지켜보시겠습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이제 곧 해가 집니다.”
벨테브레이가 하는 말에 예부슈는 두 눈을 껌벅거리며 그를 보다가 설마 하는 생각에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아직은 훤하게 밝으니 그 기울기가 상당하여 허락된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리는 해가 보였다.
“볼 것이 하도 많고 신기하여 시간 가는 줄도 몰랐구나. 철원으로 돌아가자면 슬슬 가야겠다.”
“아니면 이곳에서 식사를 하고 하루 쉬었다가 가셔도 됩니다. 성상께서 이르시길, 며칠 정도는 편히 구경하여도 상관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혹하는 기분이 든 예부슈는 동하는 얼굴로 입맛을 다시나 이내에 그럴 수 없음을 알고 고개를 흔들었다.
“조선왕께서 신경 써 주시는 것은 실로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이 이상 머물며 그대들을 방해하면 양국의 화의를 도모하라고 날 보내신 한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니 그럴 수 없다.”
“허면 가시면서 가볍게 드실 수 있다록 가벼운 요깃거리를 준비하라 이르곘습니다.”
“음, 부탁하마.”
먹을 것을 따로 챙겨준다는 말까지 거절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예부슈는 몸을 돌려서 두어걸음 내딛더니 아위움을 담아서 배들을 한번 보고는 몸을 움직였다.
***
“누구였을까?”
“무슨 말이냐?”
배에서 멀리 언덕에서 내려가는 예부슈 일행을 본 시로타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그에 화물 검사를 마치고 배로 돌아온 바스쿠가 물으니 시로타는 이제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언덕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바스쿠 역시 시선을 돌려서 언덕을 보았으나 아무리 보아도 그곳에는 딱히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뭐가, 아니 누가 있었는데?”
“그 홀란드 군관이 어리게 보이는 사람을 데리고 저 언덕에 있었습니다. 머리 모양을 보니 아마도 청나라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청나라 사람? 아, 타타르?”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던 바스쿠는 금세 흥미를 잃은 듯 언덕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 나라가 이 나라 조선이며 그들에게 마카오를 빌려준 나라 명나라와 관계가 여럿 있음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인에게 있어서 관심을 두는 기준은 오로지 하나, 이득이 되는가 아닌가였다.
그러니 배 타고 장사하러 가지도 못할 나라 따위, 그게 옛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타타르라고 한들 흥미가 없었다.
“어디 높으신 분이 구경이나 왔나 보지. 나도 예전에는 그런 거 많이 봤어.”
“그렇습니까?”
바스쿠가 툭 하고 던진 말에 시로타는 무슨 생각인지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바스쿠 선장, 선장이 살던 곳에서도 높은 사람들은 제멋대로에 욕심이 많았습니까?”
“말이라고 하냐? 대부분 그렇지.”
“대부분이 아닌 사람들도 있었습니까?”
“있었지. 아, 미리 말하는 데 그거 좋은 거 아니다.”
학을 떼듯 고개를 빠르게 흔든 바스쿠는 징글징글하다는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그런 놈들이 더 까다로우니까. 그냥 돈 좀 던져주고 너무 과하면 빼면 되는 것들하고는 달라. 이득은 큰데 빠지기 어렵고 맞출 것도 많고 말이야.”
이 말을 시작으로 바스쿠는 돌연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올라왔는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젠장, 기름칠이 좀 먹히나 싶더니 연고에 밀릴 거 같아서 안절부절못했지. 그런데 갑자기 그간 하던 건 또 하게 해준다고 하고 더 주려고 하니 싫어하고. 그러면서 또 바라는 건 독특해서 들어주기는 까다롭고. 아, 배가 무슨 심고 한 계절이면 솟는 감자냐?”
“하하.”
무슨 말인지 알 거 같은 말들에 시로타는 어색하게 웃었다.
“설탕이며 그런 걸 줄 때는 좋아하더니 또 더 준다니까 그런 싫대. 그냥 사가는 게 낫다니, 무슨 생각인지 도통 모르겠다. 그렇다고 안 오자니 인삼이며 도기며 차에 저기 타타르 애들이 준다는 모피까지 아주 쏠쏠한 게 많아서 안 올 수도 없잖아?”
“뭐, 적당히 벌어서 은퇴하고 저 멀리 그 본국? 이베리아라는 곳으로 돌아가시면 될 거 같습니다만.”
“젠장, 거기가 지금 얼마나 혼란스러운데 가냐. 까딱하다가는 그대로 쥐새끼 취급받고 목이 달릴 거다.”
물 건너 날아온 혼란스러운 본토 소식을 들은 바스쿠는 못마땅한 얼굴로 불평을 덧붙였다.
“가져가기는 오지게 가져가면서 도움은 하나도 없고, 은퇴각 좀 보려고 하니 아주 살벌하게 되고. 이놈의 나라는 대체 주는 게 없어요, 주는 게.”
“의무는 많이 받으신 거 같습니다만.”
“내가 무슨 귀족 나으리도 아니고 그런 걸로 기뻐하겠냐? 아니, 귀족도 안 그러겠다.”
온갖 투덜거림을 늘어놓으니 좀 마음이 편해졌는지 바스쿠는 한결 가뿐한 얼굴로 시로타의 어깨를 두드렸다.
“역시 담고 있는 것보다 내는 게 더 좋다니까. 난 먼저 들어가서 잔다.”
“자다니, 선실에서 주무실 생각입니까?”
“크헤헤, 웃기게도 나도 이제 천상 뱃사람인 모양이더라. 편한 곳에서 자다보면 하루 정도는 그물 침대가 그립다니까.”
바스쿠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며 선장실을 향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시로타는 다시 고개를 돌려서 예부슈가 있던 언덕을 바라보았다.
“기색이 예전에 성이 완공 직전이던 때랑 비슷했던 거 같은데······착각이겠지.”
***
‘갖고 싶다.’
제물포에서 떠나올 때야 그저 아쉬움이 한 줄 남았을 뿐이었다.
헌데 돌아와서 있었던 일을 예부 승정 하다나라 만다르한과 이야기하고 난 후에 기이하게도 그 아쉬움은 커졌다.
이윽고 커진 아쉬움이 강렬한 열망으로 금세 모습을 바꾸었다.
‘끄응.’
하지만 아무리 부족한 것이 없는 아이신기오로이며 보국친왕이라는 고귀한 직책을 받은 이라고 하나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어려운지 정도는 알 눈치 정도는 있었다.
그리고 확실히 말해, 이 배를 가지고 싶다는 욕망은 보국친왕이라는 자리로도 이루기 어려운 사욕이었다.
“뭔가 방법이 멊을까?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배가 있다면 도움이 된다고 할까?”
턱을 괴고 앉아 중얼거렸지만 스스로 낸 첫 의견은 곧장 그 자신에게 기각되었다.
‘천우병들도 있고, 회친왕이니 하는 자들이 가진 배도 있는데 안 쓰잖아. 명나라는 땅이 넓으니 큰 도움이 안 될 거야.’
엄밀히 말하자면 배가 있고 그 배가 충분히 크고 강력하며 숫자가 갖추어졌다면 도움이 되는 정도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알기에는 아직 예부슈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았고, 그런 수준은 알아도 이루기 어려웠다.
“한 척을 얻으면 뭘 할 수 있지? 무엇이 도움이 될까?”
함대를 꾸리고 거기서 한 척을 겸사겸사 개인용으로 얻은 방안이 머리에서 사라지니 예부슈는 아예 그 발상을 바꾸었다.
여럿을 준비하고 그 가운데 하나를 슬며시 얻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면 아예 처음부터 하나를 얻는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만주족은 초원에서 살아가며 그 탈것은 배가 아니라 말이었다.
이는 아직 살아온 세월이 십수년에 불과하여 머리가 굳지 않은 예부슈라고 하여 크게 다르지 않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저 큰 ‘장난감’을 얻을 구실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습게도 이만하면 적당히 포기할 법도 하건만 제대로 품은 열망이 이것이 처음이라서 그런가, 예부슈는 좀처럼 머리에서 배에 대한 환상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밤새 끙끙거리던 그는 새벽에 이를 때가 되어 한 가지 묘책이랍시고 떠오른 것에 감탄하며 무릎을 탁하고 쳤다.
“그래, 내가 고민할 이유가 없지!”
- 작가의말
[첨언 - 이베리아 연합]
펠리페 2세로 인해 시작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공생체제 이베리아 연합은 1580년부터 1640년까지 약 60년간 유지되었습니다.
시작 당시에 반발이나 잡음이 있었으나 당시 해역이며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가진 강대국 둘의 융합은 지도층에게 상당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이 연합으로 이득을 본 것은 사실상 스페인만이었다고 해도 무방했습니다.
물론 포르투갈이라고 득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보다는 손해가 더 많았습니다.
당시 스페인은 여러 간섭이며 개입이 많아 적대 관계가 많았는데, 포르투갈은 이베리아 연합으로 탈바꿈하는 순간 스페인을 따라 그간 우호적이던 이들 여럿을 적으로 돌리며 전비 부담은 물론이고 무역 손해를 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네덜란드가 대두하며 무역 분쟁이 발발, 식민지며 교역료 다툼으로 이 손해가 점점 늘어가기 시작하자 포르투갈은 이 분쟁에 스페인이 나서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스페인은 이 문제에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불만이 커져 터지기 일보직전인데 펠리페 3세에서 4세에 걸친 무리한 중앙 집권화 시도는 결국 포르투갈의 불만을 터지게 하여 독립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kkatnip님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후원하신 기대에 응해 더욱 좋은 글을 쓰도록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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