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더 넓은 곳으로
103화 더 넓은 곳으로
“송자께서 만남을 허하시니 영광이외다.”
안으로 들어와 자리 한 김조경은 대뜸 이리 말했다.
얼굴에는 장난스러움이 가득하니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라 그저 아는 사람을 놀리기 위함이 가득 드러났다.
반면 말에는 진심이 느껴지니 아주 빈말은 아니라는 것 역시 알 수 있었다.
이렇듯 반농반진의 말이 인삿말로 건네지니 제아무리 송시열이라도 얼굴을 살짝 붉히며 손사래를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크흠. 자장 형님, 그런 말은 아직 듣기에 이릅니다.”
“하하, 이르다고? 그렇게 불릴 자신은 있는 모양일세.”
“그야 사대부로서 그리 불리는 것은 하나의 꿈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당장이 아니라 죽기 전에나 들으면 족합니다.”
사양하면서도 그런 일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다고 말하진 않는 게 딱 송시열답게 보였다.
김조경은 저번 늦가을 즈음에 내려가겠노라 말하던 송시열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정말 오래 걸리지 않았군. 정녕 놀라운 일이야. 이번 일로 자네는 누구나 인정하는 거유가 되었고 장차 송자라 불리는 일도 불가능은 아니겠어.”
“겸양을 담아서 말하자면 이도 제 예상보다는 훨씬 빨랐다고 해야겠군요.”
“겸양 맞나?”
“겸양이 맞습니다. 적어도 내년에나 정리가 되지 않을까 싶었으니 말입니다.”
송시열은 그렇게 말하며 옆에 자리한 윤선거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 친구, 길보가 열을 내어 올라가겠다고 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길보가?”
의외라는 물음에 윤선거는 머리를 긁적였다.
“제 아들딸이 청에 잡혀갔습니다.”
“허어.”
윤선거의 말에 김조경은 그가 어떠한 생각이며 마음고생을 품었을지 어림짐작하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외조와 세자저하께서 힘을 쓰고 계시니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걸세.”
“그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니 나중에 돌아올 때를 생각해서 이 일에 나선 겁니다.”
윤선거의 말에 김조경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윤선거에서 시선을 돌려 윤휴를 보았다.
“그래, 이제 거유와 그 이단아들은 무엇을 하실 생각인가?”
“......이단아?”
결코 달갑지 않은 호칭에 윤선거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윤휴 역시 그리 다르지 않은지 어색한 얼굴이었다.
“저번 상소야 그런 면이 없다고는 못하겠으나 이번에는 그래도 정도를 따랐다고 생각합니다만.”
윤휴의 말에 김조경은 소리 없이 웃었다.
“내가 보기에는 오십보백보네. 하물며 유학만이 진리가 아니라고 했다지? 오히려 이번에 더 나간 거 같은데?”
이 말에 윤선거는 물론이고 윤휴 역시 한대 얻어맞은 얼굴로 멍하니 김조경을 보았다.
이런 모습이 재밌게 보였는지 김조경은 즐거운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영보야 새로운 유학을 주창했으나 자네들은 오히려 더 나아간 셈이야. 그러고도 그렇게 불리는 정도로 끝났으니 오히려 다행이 아닌가?”
“그 말은 제가 아니라 이놈이 한 겁니다만.”
“아까도 말했지만 지난 상소부터 자네들은 범상치 않았네. 그리고 이번에도 함께 움직였지. 그만하면 묶여 불리더라도 억울할 일이 아니지.”
슬쩍 웃은 김조경은 느긋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유유상종이라고 하지 않는가.”
“하이고, 이놈하고 같은 취급이라니.”
“길보 형, 그렇게 말씀하시면 아우가 섭섭합니다. 이만한 일에 만사 제치고 달려오지 않았습니까.”
“그건 고맙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좀 그렇다.”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않은 윤선거는 윤휴를 보며 말을 덧붙였다.
“나는 너처럼, 그리고 사형처럼 그런 말을 감당하기에는 부족하단 말이다.”
이단이라 불리는 것은 달가운 일이 아니나 이는 달리 보면 그 사람의 재지가 뛰어나 종래와 다른 것을 보고 있다 여길 수도 있었다.
주자도 살아있을 당시에는 온갖 말을 들었던 걸 생각하면 마냥 부정적으로 볼 일은 아니었다.
또한 윤선거가 보기에 윤휴는 그리 불려도 좋을 재지와 파격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윤선거는 본인은 아니었다.
두 사람에게 비하자면 부족하며 그렇다고 파격적인 면이 있는 것도 아니니 이런 호칭은 그에게 있어서 그저 부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가. 하지만 주변이 너무 뛰어나면 본인이 평범하게 여겨지기 마련이지. 내가 볼 때 자네는 딱 그런 거 같은데.”
“제가 말입니까?”
“옆에 군계일학이 둘이 있다고 치자. 그리고 그들을 쫓아가는 기러기가 있다고 치지. 그러면 기러기는 닭보다 못한가?”
김조경의 비유에 윤선거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죠.”
“그렇지? 그러니 아마도 당분간 두 사람은 이단아라는 말을 감내해야 할 걸세. 부러운 일이야.”
부럽다고 말한 김조경은 거짓 없는 얼굴로 그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아직도 닭이건만, 젊은 나이에 이렇게 쟁쟁한 이들이 있다니 말이야.”
이 말을 들은 윤선거는 무어라 말을 하고 싶어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없었다.
뛰어나다고 하지만 옆에 있는 두 사람과 비교하면 부족하다.
그러니 오히려 윤선거는 김조경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거 축하하러 와서 엄한 소리 하며 청승이나 떨고 민망한 모습을 보였어.”
“괜찮습니다. 저와 형님 사이가 아닙니까. 그리고 지난 남한산성 이래 저는 아직 형님만한 의기를 보이는 자를 손에 꼽을 정도로만 아니 당당하셔도 됩니다.”
“그건 고마운 말이군.”
옛일을 말하며 기운을 불어넣는 송시열의 말에 김조경은 얼굴에서 씁쓸함을 걷어내고 다시 본론을 꺼냈다.
“논쟁에 대한 이야기는 잘 들었네. 그걸 듣고 나니 축하하는 마음이 듦과 동시에 도저히 궁금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라고.”
“앞으로의 일 말입니까?”
“고작 말이나 늘어놓고 끝낼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내 잘 알고 있네.”
김조경의 확신에 찬 말에 송시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이제 시작하였으니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순서라? 전에 말한 사농공상처럼 말인가?”
“그렇습니다. 일단 정립하였으니 이제 그걸 퍼트려야죠.”
“그건 건너뛰어도 될 거 같은데.”
건너뛰어도 되겠다는 말에 송시열은 두 눈을 껌벅였다.
이미 한양 사대부에서는 거유라 칭송하길 마지 않는 이가 이런 모습을 보이니 자못 재밌는지 김조경은 유쾌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이러니 참으로 재밌군그래. 생각하는 건 홀로 할지언정 그 드러냄은 사방으로 영향을 주고 움직이게 하는 법. 이번에 자네가 한 말이나 이번 논쟁은 조보로 찍혀서 사방팔방으로 전해질 예정이네. 그러니 그건 건너뛰어도 되네.”
조보가 찍혀서 나간다는 말에 송시열은 당황했다.
“이 사람의 말을 옮겨주시는 것은 감사하나 고작 그런 일로 나라의 공력을 씀은 마땅치 않다 여깁니다.”
“본래 준비한 일에 적당하다 여겨서 행하시는 일이니 걱정하지 말게.”
“그거, 여기서 이렇게 사사로이 말을 하셔도 되는 겁니까? 사관으로서 들으신 내용 같은데요.”
걱정이 섞인 윤선거의 말에 김조경은 괜찮다는 의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당장 내일이면 드러날 일이고, 이 일을 준비함은 제법 되어서 조정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야. 아마 관심이 있는 이라면 그 위가 종9품이라도 조금 노력하면 쉬이 알 일이네.”
김조경이 이리 말하니 호기심이 생겼는지 슬쩍 윤휴가 끼어들어서 물었다.
“자장 형님, 그 준비한 일이 대체 뭡니까?”
“전에 세자저하께서 간언하신 일이지. 본디 청에 가는 사신들에게 청나라 사람들의 서신을 보내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괜찮게 보여서 전국으로 확대하기로 하였어. 이번 일을 조보로 찍어서 알리는 게 그 시범이 될 예정이네.”
전국에서 서신을 교환하게 한다.
그 말에 윤휴는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와, 그거 대단하네요. 상께서 전에 저희가 올린 상소를 어지간히 진지하게 받아들이신 모양입니다. 이거 참, 기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니 복잡한 기분입니다.”
“그게 뭔 소린가?”
윤휴가 제멋대로 생각하여 말하니 오히려 김조경이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이에 윤휴는 두 눈을 끔벅이다가 송시열과 윤선거도 말해보라는 듯이 그를 보고 있음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이고, 여기에 계신 분들이 저보다 경전을 더 읽었어도 한참은 더 읽으신 분들 아닙니까? 거기에 한 분은 이제 거유라는 분이 이걸 모르십니까?”
“재지 말고 어서 말해보거라. 거유보다는 이단아가 알기 좋은 일인듯 하니.”
“저는 모릅니다.”
송시열이 맞받아치니 윤선거가 도매금으로 묶이는 걸 막기 위해 재빨리 말을 내었다.
헌데 이 말은 따지고 보면 자신이 이단아라 윤휴와 엮여서 불리는 걸 반 정도는 인정한 셈이기도 했다.
이에 다른 이들은 그걸 짚어서 놀릴까 한순간 떠올리긴 했으나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 윤휴에게 집중했다.
“거기 저랑 같이 이단아로 불리시는 형님은 아시는 게 좋을 거 같으니 알려드리죠.”
“아, 난 아니라고.”
“예, 예. 그러시겠죠.”
윤휴의 말에 윤선거는 애써 외면하며 고개를 돌리니 그 귀는 윤휴를 향햐여 열린 게 궁금하긴 한 모양이었다.
“뭐, 대단한 건 아닙니다. 서신이 오간다고 하면 사람도 함께 오감이 아닙니까. 서신에 발이 달려서 혼자 오가지도 않을 거고요.”
“그렇겠지.”
“사람이 다니면 길이 생기고 길이 생기면 언제고 다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신을 옮긴다고 한들 자장 형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것은 조보가 될 수도 있죠. 아니면 다른 것이 될 수도 있고, 그 사람도 꼭 조정 사람들이라는 법은 없지 않겠습니까.”
윤휴의 말에 이 일이 그저 서신 옮기는 일에 그치지 않음을 알게 된 세 사람은 입을 작게 벌렸다.
“허어, 듣고 보니 틀린 말이 아니군. 나는 상께서 희중 자네가 말한 것처럼 순서대로 하신다고 여겼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니겠어.”
“순서대로요?”
“......크흠. 실언이었네. 지금 말은 잊어주게.”
말은 이리했어도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세 사람은 쉬이 곧 사 다음, 농(農)에 관한 일이 무언가 진행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함부로 말할 일이 아니라는 것도 말이다.
“흐음, 자장 형님이 하는 말을 들으니 다음에 할 일이 무엇인지 얼추 다가옵니다.”
“그래? 무엇을 할 생각인가?”
“할 일이 많다고 여겼고, 차근차근할 일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저 말고도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듯합니다.”
“그렇지.”
송시열의 말에 김조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세상사라는 게 꼭 그 사람이 필요한 일이 있는가 하면 그가 아니어도 되는 일도 있었다.
그러니 김조경이 보기에 송시열 같은 이가 그런 일을 위해 초야에 묻혀서 사는 건 낭비로 보였다.
“그러니 물으러 온 걸세. 자네가 도로 내려가서 아이들을 가르치겠다 함은 여러모로 아쉬운 일이야.”
“그 또한 중한 일임은 확실합니다. 저는 기초를 다지니 그곳에 기둥을 세울 이들을 기르는 것 역시 중한 일이죠.”
송시열의 말에 김조경은 안색을 어둡게 하며 걱정스레 물었다.
“정녕 돌아갈 생각인가? 자네의 스승님처럼?”
“그것도 좋으나 다른 길을 고를 생각입니다.”
“다른 길?”
“저는 여기서 기초를 한층 더 단단히 하기 위해 잠시 견문을 넓히러 자리를 비우는 것 역시 가하다 봅니다. 물론 아이들에게는 미안하니 대신할 사람을 구한 후의 일이 될 것입니다.”
잠시 늦춰진다고 하나 더 크게 나선다는 말에 김조경은 한층 안색이 밝아졌다.
“견문을 넓히러 간다? 나쁘지 않군그래. 어디를 갈 생각인가? 명? 청? 아니면 왜?”
김조경의 물음에 송시열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야 물론 그 모두지요. 사는 부족하나마 기틀을 세웠고 농은 이미 일이 있으며 공은 제가 밝지 못하니 누가 하여도 저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잘난 동생들과 함께 상에 대해 조금 더 심도 있게 논하고 탐구함이 옳지 않겠습니까.”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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